천천히 더 천천히-- 영주를 다녀와서
33년 그리고 반년!
참 긴 세월이다 싶은데 돌아보면 그 긴 세월동안 우리 부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아니 돌아볼 틈도 없이 살아온 것 같다. 아이들 낳고 키우고, 장가보내고, 시집보내고, 손자들 돌보고 하는 날들이 뒤돌아 볼 틈은 커녕 짬이 없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닌 성 싶다.
“이래 바쁘게 살아서 뭐 하노?”하는 생각과 앞으로는 좀 더 천천히, 돌아보면서 가리라 마음먹고 둘이서 경상북도 영주로 여행을 떠난 건 지난 6월 중순이었다. 영주하면 대부분 소백산, 부석사, 풍기인삼과 소수서원 정도를 생각하겠지만 이곳들은 이미 한번쯤 가본 데라 이번엔 이곳이 아닌 다른 데를 가볼 작정을 하고서.
G20 총재단 회의, 지방선거 등을 치르면서 동원된 노고를 위로한다며 준 포상휴가를 핑계로 갈 수 있었던 이번여행은 이미 장마가 시작된, 그러나 비는 오지 않던 날 아침에 떠났다.
내차로 가면 경비는 좀 더 들지만 효율적이고 편하다는 걸 알지만 이번 에는 기차도 타보고 걸으면서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또 버스나 택시 아니면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볼 생각도 했다. 부전역에서 영주 가는 기차는 하루에 네 번, 첫차 타고 영주역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반.
자랑광고가 대단한 영주한우로 버무린 일품 비빔밥으로 점심 요기를 하고 시내 가흥동에 있는 마애삼존불과 청동기 시대 각석(刻石)을 둘러본 뒤에 버스를 타고 순흥안씨 본향인 순흥읍으로 갔다. 여기가 원삼국시대 고구려의 세력권이었음을 보여주는 - 고구려시대 백화가 있는 읍내리고분을 답사하고, 단종 복위를 꾀했다는 이유로 세조에게 척살당한 세조의 배다른 동생 금성대군 추모단에 들러 그날의 역사를 되돌아 새겨보기도 했다. 해그름에는 양반과 선비문화의 표본으로 잘 보존하고 있는 영주 선비촌 답사를 했는데 입장료(6000원)만큼 볼 것은 별로 없었으나 난간에 걸터앉아 ‘에헴’하고 기침 한번 할 수 있는 정자는 여러 군데 있었다.
저녁에는 일찍 한잔 먹고 모텔에서 잤지만 새벽에 대한민국 대 우루과이 월드컵축구 16강전을 본다고 잠을 설쳤다. 그래도 다음날 아침에 버스를 타고 30분 만에 문수면 수도리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수도리 전통마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음으로써 신비롭고, 보고 느낄 것도 많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둘러보았는데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으슥한 기분은 들지 않아 좋았다.
이 마을은 원래 반남박씨(潘南朴氏) 박수(朴檖,1641∼1729)라는 이가 1666년 처음 터를 잡은 후, 증손녀 사위인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대(金臺,1733∼1809)의 후손들이 사는 두 성씨의 집성촌인데 무섬(물섬) 또는 섬계(剡溪, 중국 절강성에 있는 명승지 이름)라고 불리다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수도리(水島里)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소백산에서 발원한 서천과 봉화에서 내려온 내성천이 합류하여 마을 전체를 태극모양으로 한 바퀴 휘돌아 흐르는 모양이 마치 마을을 섬처럼 보이게 한다하여 무섬이라 한 것인데 안동 하회마을과 닮았다. 풍수지리적으로 연화부수(蓮花浮水) 또는 매화낙지(梅花落地)로 불리는 명당으로 의식(衣食)이 풍족할 형국이라 한다.
이 마을에서 여러 명의 애국 애족한 선비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하여 그들의 행적을 “무섬민속자료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었으나 건성으로 보고 처가가 여기여서 이곳과 인연이 깊은 조지훈이 처가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며 지었다는『별리』라는 시는 민속자료관 앞에 시비로 세워져 있어서 곱씹듯 읽어보고 또 사진도 찍었다.
『별리(別離)』
푸른 기와이끼 낀 지붕너머로
나즉히 흰 구름은 피었다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
방울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가지
꺾어서 채찍삼고 가옵신 님아 ----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고 하는 ‘외나무다리 축제’ 현장인 외나무다리를 건너가서 부를환(喚), 새학(鶴)자를 쓴 ‘환학정’에서 강물 위를 노니는 황새, 두루미를 쫓아도 보고, 신발을 벗어 들고 강을 건너와 봐도 1시간 반이면 충분했는데 아침 9시 반에 왔다간 버스는 오후 3시에야 다시 온다니 그저 난감하기만 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어제 다 배우지 못한 천천히를 다시 배우고자 했다. 한참을 걸으면서 길가에 주인 없이 익은 오디와 앵두를 따 먹기도 하고, 이런데서 살면 좋을까, 살기 힘들겠지, 이런 이야기 나누기도 했으나 결론은 도시에 살던 사람은 도시에서 살다 죽는 것이다 싶었다. 그러나 이런 시골생활에 대한 동경이 영 사라진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시골길이이긴 해도 포장이 잘 된 길을 걷는 것은 영 마땅치 않았는데 젊고 예쁜 아가씨라면 몰라도 처음부터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 지나가는 승용차를 좀 태워달라고 손짓해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다행이 수더분한 그 동네 아저씨가 화물차 짐칸에나마 태워주어 얼마간은 차를 얻어 타기도 했다.
술 먹고 잠 설친 뒷날 포장길을 걸어 나오니 내 차 생각이 간절했다. 그렇지만 천천히 가자고 하는 한 사람, 다리아파 죽겠다고 하는 한사람, 두 사람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고 끝이 났다. (2010.7.16)
여행기 쓸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카페에서 사진 보았다며 동창회보에 올릴 글 하나 부탁한다는 편집국장의 요구가 있어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