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_大倧敎
우리 민족에는 고유의 종교가 있었고 나름대로의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유의 신관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많이 미흡한 편이다. 그나마 발표된 고유의 신관에 대한 연구는 주로 「단군신화(檀君神話)」를 통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항상 고유의사상이나 종교에 대한 연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문헌의 부족을 들고 있다. 상고사 관련 문헌들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으로 한정되어 있고 『환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은 위서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에 대한 관념은 신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신의 뜻을 중심으로 형성된 그 종교의 궁극적 가치와 지향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근대한국 민족종교의 신관을 통해 우리 고유 사상의 근원을 추정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근대한국의민족종교는 외세에 저항하면서 우리의 고유성을 찾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종교(大倧敎)는 단군에 연원을 둔 민족종교로서 더욱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근대한국 민족종교로는 대표적으로 동학(東學), 증산교(甑山敎), 대종교(大倧敎), 원불교(圓佛敎)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동학은, 유불선을 융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님 신앙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수운(水雲)은 자신의 도가 예전의 사상, 철학, 종교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완전한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우리 고유의 신관과 직접 연결하기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증산교의 경우 는, 창시자인 증산(甑山) 본인이 상제(上帝)라 칭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신관을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전통적인 건국 신화의 천신하강구조와 연결된다. 또한 원불교의 경우는, 인격적인 신을인정하지 않고 우주의 신령한 진리로서 ‘일원상(一圓相)’을 궁극적 관념으로 인정하여 인격성을 내포하고 있는 전통적 신관과는 차이가 있다.
이에 비해 홍암(弘巖)에 의하여 창도된 대종교는, 우리의 고유한 민족종교를 중광(重光)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새로운 방략을 제시하고,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고자 나선 민중종교였다고 할 수 있다. 홍암은 1909년 1월 15일(음력) 오혁(吳赫 : 오기호), 이기(李沂) 등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모여 단군교(檀君敎)라는 이름으로 고유의 민족종교를 중광하였다. 이때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하였는데, 단군교 중광의 의미를 "국조 단군이 창립했던 단군교가 몽고 침입 이후 약 700년간 단절되었던 것을 한말에 다시 계승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단군교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1910년 8월 5일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민족적인 지도자 중 상당수가 교인이었던 사실은 대종교가 민족정신의 구심점으로서 독립운동선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케 한다. 1910년대 만주지역 민족 교육은이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불굴의 저항 정신은 이를 기반으로 가능하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문사철(文史哲)을 중심으로 한 국학운동(國學運動)은 민족정신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고, 항일 무장투쟁은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대종교는 종교를 표방한 항일 민족운동 단체라고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종교의 기본 교리와 신관은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