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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심 / 국립국어연구원 원장, 연세대학교 교수
I. 언어가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어는 인류의 언어 보편적인 요소에 의한 구조적인 측면과, 어느 한 언어권의 오랜 생활 전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신 활동의 소산으로서의 문화적인 측면, 이렇게 양면성을 가진 존재다. 사람이 언어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사람의 사람됨의 한 징표이며, 언어마다 다른 어휘 체계, 다른 표현 방식을 가졌다는 것은 각 언어가 여러 사회의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사고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점에서 언어는 그 사회의 고유한 문화적 유산일 수밖에 없다. 문자가 문화유산이라는 데 대해서는 쉽게 수긍을 하면서도 말이 문화적 유산이라는 데 대해서는 아무도 주의를 하지 않는다. 새로운 문물 제도가 생겨나면 그에 따라서 그것을 표현하는 말도 생겨나고, 그러한 문물 제도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하면 그것들을 표현하던 말도 변화를 입거나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려 더는 쓰이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 이들은 지난날의 다양한 생활 풍습, 삶의 모습 등 과거의 문화적 양상을 넓게 그 속에 담아 가지고 그때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인들이 쓰던, 또는 그들로부터 물려받아 쓰고 있는 말은 그대로 문화유산이요, 무형의 문화재라 할 수 있다. 문화유산이나 문화재를 건축, 공예, 미술, 예능 등과 더불어 언어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 사회의 지난날의 언어는 그 민족의 역사적 자료의 일부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여 문헌으로 남긴 기록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우리 문화를 담은 그릇으로서 우리 생활의 흔적이요, 자취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우리 역사, 우리의 생활과 문화를 보여 주는 역사적 유물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언어는 고고학적 유물과 더불어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Ⅱ. 근래 우리말이 겪고 있는 변화는 전례 없이 그 폭이 크다. 장단음의 구분이 없어지고, 억양이 크게 달라지고 있으며, 존대법이 과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하는 등 일반적으로 변화의 속도가 느린 말소리, 문법 분야의 변화도 예외가 아니다. 어휘 체계의 변화는 이루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젊은이들이 개화기의 인쇄물을 읽지 못할 정도로 어휘가 소실되기도 하고, 늘어만 가는 외래어의 유입,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새말로 인해 세대간의 대화가 어려워질 만큼 그 변화의 양과 폭이 어느 때보다도 크다. 그러면 이렇게 소실되어 가는 말들을 그냥 버려둘 것이며, 말소리가 달라져 가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어도 좋은가? 표준어의 보급과 함께 지역 방언이 소멸해 가는 속도도 대단히 빠르다. 오늘과 같은 표준어의 고른 보급은 광복 후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의 힘든 노력의 결실로서 환영할 만한 일이거니와, 그에 비례하여 후대에 전수되지 않고 빠르게 사라져 가기만 하는 많은 양의 방언은 그대로 방치해 버려도 좋은가? 언어가 과연 귀중한 문화유산이고, 소중한 문화재라면 소실된 말들을 수집 보존하고, 더는 잃지 않도록 보호할 방책을 시급히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말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막아지지도 않고 반드시 막아야 할 까닭도 없다. 다만, 급격한 언어의 변화는 언어 규범의 파괴를 가져와 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어 완급을 조절하는 등 어느 정도의 제약을 가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언어 변화의 궤도는 끊임없이 추적하고 그 자료들을 보존해야 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거의 언어는 우리의 옛 모습을 보여 주는 역사적 유물이기 때문이다.
옛날처럼 인쇄와 배포에 절대적 제약이 있던 때와 달리 오늘날의 말은 오히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쇄물을 통해 온전한 흔적을 남길 수 있지마는, 그렇지 못한 지난날의 국어는 대부분 그 모습을 알 수가 없다. 훈민정음 이전의 언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후의 언어도 현재 여러 문헌으로 전해오는 옛말이 있지마는 그 전모는 알 길이 없고, 또 이들이 모두 동일 방언의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억양을 포함한 그 말소리는 다시 들어볼 수 없어 오직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실은 이런 사정이 옛말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최근에 빠른 속도로 소실되고 있는 각 지역의 토박이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기록도, 조직적 보존 장치도 없이, 표준어의 성공적인 보급에 밀려서, 그리고 생활 방식의 변화와 외래 문화의 다량 유입과 더불어 흔적 없이 사라져 가고 있어 후대에 그것을 재구성해 볼 자료를 남기지 않고 있다.
Ⅲ. 그렇다면 우리가 수집 보존해야 할 국어 자료는 어떠한 것들인가?
모든 언어 자료는 글말(문어) 아니면 입말(구어)일 수밖에 없다. 현재 쓰이지 않는 옛말은 문헌(작은 문서 조각 같은 것을 포함하여)을 통해서 글말로밖에는 접할 수가 없고, 현재 쓰고 있는 말은 글말로도 입말로도 접할 수 있으나 오늘날의 말은 이차 자료인 글말보다는 일차 자료인 입말의 형태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글말로 된 국어 자료는 이른바 차자 표기된 국어 자료와 훈민정음 창제 이후의 한글로 된 모든 문헌, 고소설, 고시가 등의 문학 자료, 언간이라 일컫는 서간 자료, 계약서 따위의 문서 등 인쇄 문헌 또는 필사 문헌을 불문하고 국어 자료를 통틀어 일컫는다.
입말 자료는 말할 것도 없이 현대 국어 자료로서, 이른바 각 지역의 토박이말이 중요한 대상이다. 얼마 전까지도 자기 고향을 멀리 떠나 본 적이 없는 토박이들이 지방에 꽤 많이 있었지마는 지금은 사방으로 길이 뚫리고, 쉽게 차를 이용할 수가 있어서 외부와의 접촉 기회가 많은 까닭에 토박이말이 오염되어 있거나, 주거 환경이 바뀌고, 농사가 기계화하는 등 의식주 생활 방식의 변화로 인하여 많은 어휘가 큰 폭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토박이말들을 잃기 전에 이들을 수집 보존해야 할 것이라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 입말 자료는 당연히 녹취하여 일차 자료의 형태로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Ⅳ. 우리말에 한국의 장구한 역사적 경험이 담겨 있고, 우리 민족의 얼이 스며 있는 것이라면 국어 자료의 수집 보존은 단순한 언어 자료로서가 아니라 문화재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작업은 몇 사람의 힘으로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다. 많은 사람들, 가능하면 전 국민이 참여하여 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수행해야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문헌 자료는 오래된 것일수록 깊숙한 곳에 있어서 쉽게 접근이 되지 않는다. 내간이나 일기 같은 것이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자료들은 자발적인 제보가 없이는 그 존재를 알 수가 없다. 조사자의 손이 다 미치기 어려운 여러 지방의 토박이말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의 능동적인 제보와 작업에 의하지 않고는 완전한 채집이 불가능하다. 전 국민의 참여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며, 이제 이러한 국어 운동을 문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전국적으로 벌일 필요가 있다. 학교 건물이면 으레 걸려 있는 '나라사랑, 국어사랑'의 구호가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지 이미 오래다. 여기에 구체적인 실행 계획, 실천적인 강령만을 더하면 전 국민적인 국어 운동을 전개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전 국민이 근래에 잊혀진, 혹은 지금 차차로 잊혀지고 있는 토박이말들을 그 용례와 함께 제보해 준다면, 그리고 어딘가 깊숙이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옛 문헌을 함께 발굴해 내 줄 수 있다면, 국어 자료의 수집 정리 작업이 쉬워질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능동적인 참여는 국민들의 국어에 대한 자각, 국어에 대한 반성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국어에 대한 사랑은 국어에 대한 자각이 먼저 있어야 한다. 대중적 국어 운동의 필요성은 이런 점에서도 요망된다.
지금 우리는 문화적 위기에 처해 있다. 필요에 의한 외래 문화의 유입은 어느 때나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 필요와 자기 문화에 맞추어 재창조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반대로 직수입된 외래 문화에 오히려 자신을 맞춘다. 요즘 세계는 문화적으로 급속히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노래를 듣고, 똑같은 옷을 입으며, 똑같은 자동차 문화를 가지고 있다. 서양의 어느 한 도시에서 시작된 유행이 잠시간에 전 세계로 퍼진다. 그래서 영어의 국내 공용어화 주장이 제기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인터넷의 세계적인 보급은 문화적 획일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사라져 가는 우리 문화적 유산, 우리의 언어를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일이 이래서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며,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국어 운동이 우리 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 운동으로 크게 번져 나가야 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Ⅴ. 한편, 여러 지방의 향토 문화, 지역 문화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각 지역의 토박이말을 이 이상 위축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운동도 병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표준어를 전국적으로 고르게 보급하여 공식 언어로서의 기능을 옳게 발휘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은 당연히 계속되어야 하고, 따라서 표준어 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대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확고한 국가 정책으로서 강력히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역 문화, 향토 문화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 밑바탕, 그 그릇이 되는 지역 방언을 천시하거나 위축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말을 잃는다는 것이 곧 생활 정서를 잃는 것이며, 자기 정체성을 잃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해당 향토 방언을, 적어도 그 지역 안에서는 더 쇠퇴하거나 소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것은 마땅히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쉬지 않고 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언어는 생존의 기본적 수단으로서 정보 전달, 정보 교환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정서적 표현의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지역적 생활 환경 속에서, 일상적 생활 감정이 몽땅 배어 있는 언어를 잃는 것은 정서적 생활을 잃는 것이며, 박제된 인간이 되고 마는 것과 같다. 위에서 제안한 것과 같은 국어 운동은 곧 자기 언어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것이고, 그러한 자각은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개화기 이후로 지금까지 서양의 선진 문화의 도입과 저쪽 문화의 학습에 몰두하면서 우리 것은 대부분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비하해 왔고 그것은 영어의 공용어화 주장의 또 하나의 동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일상적이어서 의식하지 못했던 우리말, 나의 지역어에 대한 자각은 우리 것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하고 내 것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어 더 큰 문화 운동으로 승화하고 발전할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역 방언의 보존을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방송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지방 방송의 언어도 당연히 표준말이어야 하지마는, 방송 계획 중 일부 그 지역과 관련된 내용을 매일 몇 시간씩 그 곳 방언으로 하는 것이 그러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외국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이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방언에 능통한 아나운서를 확보해야 하고, 그 목적에 맞는 방송 계획을 짜야 하며, 그 지방 토박이말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학습해야 할 것이다. 방언으로 이야기하기 경연 대회 같은 행사를 가질 수도 있다. 이것은 이미 지방 자치단체의 행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방언의 수집은 조사 목록에 의한 어휘 차원의 수집뿐만 아니라 문장 차원의 수집도 병행이 되어야 하고, 음운론적 자료의 집적을 위한 충분한 양의 녹취 수집이 이루어져야 한다.
Ⅵ. 국어는 오랜 역사의 문화유산이요, 무형 문화재라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옛 우리말, 오늘의 지역 방언을 잃는다는 것은 옛 사람들의 생활의 지혜를 잃는 것이요, 문화적 다양성을 외면하는 것이다. 풍요로운 언어는 삶의 내용을 풍성하게 해 준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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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기심 선생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특히 토박이말이나 문헌 자료의 수집이 필요하고 여기에는 모든 국민의 협조가 있어야한다는 말에 공감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이런 글에 쉽게 다가오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심지어 국어국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마저도 '언어'와 '국어'란 단어가 나오면 슬며시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는 척 합니다. 남녀노소 누구든지 이런 글에 다가서기 쉽게 할 수 있는 비책(?)이 없을까요? 마치 10원짜리 동전 모으기 운동을 하듯,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토박이말 수집 운동을 벌이면 어떨까요?
국어가 오랜 역사의 문화유산인건 아는데..이 글 읽고 뭔가 빠졌다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몇 줄 썼다 지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