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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2:1-30
찬송가 424장 ‘아버지여 나의 맘을’
이유와 근거 없이 제멋대로 추측하는 것을 억측이라고 합니다. 억측은 한자로 ‘臆(가슴 억)’자에, ‘測(헤아릴 측)’자를 쓰는데, 표현하자면 가슴으로 헤아린다는 의미입니다. 가슴으로 헤아린다는 것이 언뜻 좋은 뜻처럼 보이지만, 고대 한자가 생성되던 당시에 인간의 생각은 머리에서 가슴을 거쳐 일어나는 작용으로 보았기 때문에, 억측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오직 가슴에서 이루어진 생각으로 불완전한 생각이 됩니다. 즉 이성적인 작업을 거치지 않고, 감정적으로만 만들어 낸 것이 억측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욥의 친구였던 엘리바스의 억측이 난무하는 장면입니다. 인과응보의 논리를 가지고 두 번에 걸쳐 욥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강요하던 친구들과의 논쟁이 의미 없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욥과 세 친구의 새로운 논쟁이 시작되는데, 그 발의자는 엘리바스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친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서인지, 그동안은 절제되고 근엄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마도 욥이 자신을 비롯한 친구들의 충고를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느껴졌기 때문일 겁니다. 더 이상 좋은 말로 욥을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엘리바스의 태도는 이제 과격해졌습니다. 심지어 근거 없는 억측을 쏟아내며, 욥을 억지로 굴복시키려는 폭력적인 태도마저 보입니다.
유죄 추정의 억측(1-11)
(2-3)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엘리바스는 하나님이 완전하시므로 인간이 그 어떤 의로움을 갖추었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린 말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처럼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스스로 충만하시며 인간의 도움을 필요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움을 갖추고자 애쓰는 당신의 피조물과 소통하시는 분이십니다. 뿐아니라 그런 인간과 교류하시며 교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필요에 따라서 피조물을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통과 교제를 위해 피조물의 불완전함을 용납하기도 하고, 온전해지려 하는 피조물의 노력과 수고를 칭찬하시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하나님께 전혀 의미 없다고 말한 엘리바스의 주장은 억측입니다.
엘리바스는 계속해서 욥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자 했던 노력을 무시하거나 비꼬았고, 심지어 욥이 행하지 않은 죄까지 만들어 내었습니다.
(6-9)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엘리바스의 말은 욥이 매우 가렴주구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백성의 고혈을 짜서 자기 뱃속을 채우는 사람처럼 가난하고 목마른 사람들을 문전박대하고, 고아와 과부와 굶주린 사람에게 함부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부유한 사람들은 비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들고, 권세를 잡은 사람들이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런 근거를 가지고 엘리바스는 욥도 부자였고,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반드시 그와 동일하게 행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명백한 억측입니다.
욥기 1장에 근거할 때, 욥은 엘리바스가 말하는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여러모로 의인이었습니다. 욥기 1장 1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욥기 1:1)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살고자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자기 상황 때문에 과거 욥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자 했던 노력이 엘리바스에 의해서 곡해 되어 버렸습니다. 엘리바스는 오직 결과를 가지고 과정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의 눈에는 욥의 현재 상황이 마치 죄인의 모습과 같아 보였습니다.
(10-11) 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
올무들이 둘러있다는 말은 욥이 포박을 당하여 있는 죄인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는 말도, 죄를 지은 후 죄책감에 두려워하는 모습인 것을 뜻합니다. 또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는 엘리바스의 표현도 노아 홍수를 상기시키며, 당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사람들이 물속에 수장된 것을 떠올리게 하며, 욥이 현재 그런 형벌 앞에 놓인 죄수임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바스는 앞선 두 차례의 논쟁과 다를바 없이 계속해서 기계적인 인과응보의 법칙을 적용하여 사람의 인생을 판가름하고 있습니다. 현재 결과가 나쁘면 이는 무조건 잘못 살아온 탓이고, 현재의 결과만 좋으면 그는 과거에 무조건 좋은 사람이었으리라는 추측입니다. 너무 섣부르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명백한 오류요, 섣부른 억측입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을 줄여서 ‘졌잘싸’라고 말하곤 합니다. 비록 결과는 실패했지만, 과정은 좋았고 그래서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말을 합니다. 결과가 나쁘면, 과정도 나쁜 것이라는 식입니다. 결과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과정을 잘했다고 격려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승리’이거나 자기 위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교우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책임의식이 결여된 채, 최선을 다하지 않은 과정을 지났다면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의 최선을 다했으나, 단지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라면 이는 결과에 상관없이 분명 박수받아야 마땅합니다. 오늘날 지나친 경쟁의식과 결과주의가 사회를 비정상적으로 작동시킵니다. 동물의 세계에나 적용될 적자생존의 논리나, 힘없고 약한 것은 사회를 좀먹는 죄악이라고 규정하는 생각 사이에 ‘죽어야 산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나,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자.’라는 성경의 요청은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지 않습니까?
내일은 특별히 2025학년도 수능시험을 치릅니다. 전 세계 이례적으로 우리나라는 ‘수능시험’이 지대한 국민적 관심이 되는 나라입니다. 자라나는 미래세대의 앞날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이날이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이면에는 과연 이번 수능에서 누가 살아남을지, 누가 좋은 결과를 내었을지, 과연 내 자녀들과 나와 관련한 이웃은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지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면 반성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라는 세대에게 결과가 과정을 매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시적 결과를 위하는 삶보다 인생의 궁극적인 결과를 위하여 차곡차곡 하루하루를 준비해 나아가는 ‘과정의 인생’을 가르쳐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모습일 것입니다.
신성모독의 억측(12-20)
욥이 현재 당한 고통을 죄를 지은 과정 때문이라고 억측을 편 엘리바스는 이제 한술 더 떠서 욥에게 하나님을 속이고 무시했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12-14)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 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엘리바스의 이 말을 쉽게 풀이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데 네가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느냐, 차라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라.’라는 의미입니다. 욥은 친구들과 논쟁 중에 하나님이 작다거나, 잘잘못을 가리지 못하는 분이라고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주 정확하시고, 무오한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만 욥이 말한 것은 그렇게 정확하신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 고통 속에 내버려두는지 자신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그런 욥의 자기변호를 마치 ‘하나님은 잘 모르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돌보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판결에는 오류가 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부정했다며 그의 의도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 왜곡된 사실을 가지고 엘리바스는 욥을 악인으로 낙인찍어 버립니다.
(15-18) 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
엘리바스의 말이 점점 더 노골적입니다. 이전에는 우회적으로 욥에게 죄와 악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3차 논쟁에서는 그 발언의 수위가 높습니다. 욥을 향하여 ‘너는 가난한 사람을 박대한 죄인이다. 너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정했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모독한 악인이다.’라고 직설적이고 감정적인 언어를 내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말은 모두 욥이 한 적도 없는 억측입니다.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일이지, 실제로 그렇게 한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엘리바스가 이 같은 억측을 강하게 주장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의 엘리바스는 자신은 무조건 옳고, 욥은 무조건 틀렸다는 엄청난 착각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가 보기에 욥은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 명의 친구가 충정으로 욥에게 와서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고통의 원인이 죄인 것을 알려준 후 욥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스스로 그런 잘못을 한 적이 없다고 우긴다는 것입니다. 두 차례는 좋은 말로 타일렀는데, 도무지 욥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자 근엄했던 엘리바스도 숨기고 있던 본성을 드러내어 욥에게 막말을 쏟아냅니다. 이 논쟁에서 자신은 무조건 옳고, 욥은 무조건 틀렸다는 전제가 엘리바스의 가슴 밑바닥에 이미 진하게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바스에게 욥의 말은 전혀 들리지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욥과 친구들 사이에 소통이 단절되는 지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인간관계를 살펴보십시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그리고 동료와 친구들과 이웃 사이에 스파크가 튀듯 불통이 일어나는 지점을 잘 살피면 결국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라는 아주 작은 공식에서부터 시작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관계의 원활한 소통을 원한다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나를 향하여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용기임을 기억하며, 남을 부정하기보다 나를 부인할 수 있는 ‘자기 부인’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불화하다는 억측(21-30)
엘리바스는 지금까지 욥에 대해 진술한 자기 논리를 바탕으로 이제 한가지 결론적인 억측에 도달합니다.
(22-23)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엘리바스의 논리가 결국 도착한 곳은 욥은 그런 죄인이며, 악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불화하다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22절에 “청하건대”라며 마치 욥에게 호소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라고 타이릅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것이 ‘그러면 하나님께서 욥의 상황을 나아지게 해 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엘리바스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제한하는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두말하지 않고 그에게 물질적인 복을 동반한 삶의 평안함을 주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다음 행동을 제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뿐 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엘리바스의 생각이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음은 27절과 28절에서도 드러납니다.
(27-28)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읽은 말씀에 따르면 엘리바스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어야 하는 분이며 곧 그에 합당한 응답을 내려야 하는 분으로 오해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인간의 부름에 따라 반응해야 하는 기계와 다름없습니다. 이런 왜곡된 신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9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구원관을 갖게 만듭니다.
(29-30)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
엘리바스의 생각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이 기계적으로 겸손한 말과 행동을 하면 하나님은 이를 높여주시며 구원하시는 분으로 오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겸손이란 그 자체로 미덕이 아닙니다. 단지 높이 오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의 생각 속에 하나님은 죽은 이방신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가 말한 하나님은 행위로만 판단하고, 기계적으로 축복하며, 높이 오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하나님일 뿐이지 않습니까? 이는 죽은 목석과 다르지 않습니다. 엘리바스의 오해는 사람이 고난 받으면 이는 무조건 하나님과 불화하기 때문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고난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고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매일 하나님을 향해 창문을 열고, 그 분께 나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분임에도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하나님, 엄위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마주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엘리바스처럼 하나님을 한 가지 면으로 국한 시킨 채 그저 왜곡된 신앙으로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는 자세를 더욱 낮추십시다. 그저 하나님에 대해 몇 마디 들은 것으로 그분을 제한하지 마십시다. 부디 우리의 신앙이 한 곳에 고여 썩어가는 어떤 것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향해 날마다 창문을 열고, 주님과 더욱 소통하는 주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돌아보면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성찰하기보다 남의 행동을 억측하기 바빴던 저희는 아니었는지 반성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왜곡된 생각을 갖고서도 마치 참 신앙인인 것처럼 위장하며 세상을 정죄하기만 했던 저희를 이 시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 고인 생각과 불통의 저주를 끊기 위하여 이제는 매일 주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시는 주님께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용납하시고, 안아주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나아갈 바를 정확히 보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걸음 위에 이 하루도 저희의 걸음을 옮겨 놓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2차에 걸친 논쟁에도 수그러지지 않는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태도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2. 엘리바스는 죄가 없다고 변호한 욥이 어떤 죄를 범했으리라고 억측하였습니까?
3. 엘리바스가 욥을 노골적으로 단정하며 표현한 것은 무엇입니까?
4.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어떻게 오해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작성: 황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