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간월암
100리 물길에 스스로를 가뒀던 선사들의 수행터.
무학대사 달보고 깨달아
사찰 이름 ‘간월’로 전해
낙조 ‘서산3경’으로 꼽혀
1941년 만공 스님이 중창, 성철· 원담 스님 등 수행처
선방· 기도처·요사 짓고, 자연석으로 도량 주변 장엄
암자 품에 사는 생명들에게 자유 찾아주는 것도 불사
‘최고 명승지’ 속명 대신 ‘최고 기도도량’ 거듭나길
▲간월암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이다. 해가 지면 달빛은 앞 바다 도량에 고인다.
천수만 북쪽에 붙어있는 간월도, 그 앞에 조그만 섬 하나가 있다.
밀물 때는 섬이었다가 썰물 때는 뭍이 되는 작은 섬에 부처를 모셨다.
섬 전체가 절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암자, 간월암에 갔다.
‘달을 본다(看月)’는 이름의 간월암에서 달 뜨기를 기다렸다. 마침 보름달이었다.
달은 작은 섬을 바다 한 가운데로 끌고 갔다. 달빛이 떨어진 바다가 곧 경내였다.
작은 섬 암자였지만 이내 거대한 사찰이고 세상의 중심이었다.
간월암은 피안사(彼岸寺), 물 위에 떠 있는 연꽃과 비슷하다 해서 연화대(蓮花臺)로 불렸다.
또 낙가산(落伽山) 원통대(圓通臺)라고도 했다.
간월암이란 이름은 무학대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말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정진하던 중
달을 보고 문득 도를 깨쳐 간월암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학대사가 활동하던 시기 이전부터 절이 있었을 것이다.
간월암에는 해탈문, 대웅전, 요사채, 산신각, 용왕단 등이 어깨가 닿을 듯 붙어있다.
법당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목조 관세음보살좌상을 모셔놓았다.
마당에는 수백 년 된 고목이 멀리 바다를 보고 있다.
섬 위를 지나가는 천수만 철새들의 날개짓이 한가롭다.
바닷바람이 찬데도 군데군데 피어있는 꽃들의 얼굴이 맑았다.
작은 텃밭도 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작은 섬에 있을 것은 모두 있었다.
작다고 무시당할까봐 더 꼼꼼히 챙겼을 지도 모른다.
스승인 나옹선사는 무학대사에게 ‘더 배울 게 없다’며 무학(無學)이라는 법호를 내렸지만
정작 자신은 ‘배운 것이 없다’며 무학(無學)이라 했다.
스승의 무학과 제자의 무학 사이는 엄청난 간극이지만 결국 똑 같다.
무학대사의 ‘달빛 깨달음’도 그랬을 것이다.
육지에서 보는 달과 간월암에서 보는 달은 너무도 다르지만 결국은 같았을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간월암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가 바다를 보면 다르다.
간월암에 노을이 깃든 모습을 멀리서 보면 황홀할 정도이다.
서산시는 간월암 낙조를 서산3경으로 꼽았다.
그러나 정작 간월암 속에 들어가 노을을 보면 그 속에는 생성과 소멸이 들어있다.
그래서 간월암에 깃드는 햇빛과 달빛은 예사롭지 않다.
간월암은 스스로를 가두고 정진했던 치열한 구도의 현장이었다.
간월암과 간월도는 가야산 정기가 맨 끝에 모여 있는 곳이란다.
가야산(678m)은 서산시 해미· 운산면, 예산군 덕산· 봉산면,
홍성군 갈산면, 당진군 면천면에 걸쳐있다.
가야사, 개심사, 수덕사, 보원사가 각각 동서남북의 중심 사찰로 자리 잡고 있으며
옛날에는 100여개의 사찰이 있었던 불국토였다.
그 마지막이 간월암이었다니 의미심장하다. 가야산은 내포의 진산이다.
내포(內浦)라는 지명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이렇게 설명해놓고 있다,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큰 바다, 북쪽은 큰 만(灣),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은 그 지맥이 이어지는바 가야산 둘레의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한다.
내포는 지세가 한쪽으로 막히어 끊기었고 큰 길목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임진, 병자 두 난리 때에도 이곳에는 화가 미치지 않았다.
물고기, 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고, 또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
가야산 일대에는 ‘백제의 미소’가 스며 있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은 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리고 가야산의 절들은 내포의 연꽃이었다.
그렇다면 간월암은 가야산의 불심이 흘러내려 고인 곳이었다.
그래서 바다에 핀 연꽃이었을 것이다.
간월암을 연화대라 부른 것은 그런 연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또 간월도 일대에서 3성(聖)이 태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하지만 거대한 방조제를 쌓아 지형이 바뀐 오늘날에는 그런 이야기를 선뜻 꺼낼 수 없다.
지금 한창 벌어지고 있는 내포 가야산 성역화 불사가 대중들의 공명을 얻으면
간월암의 흥망성쇠도 나름 규명될 것이다.
왕사 무학대사가 득도했다지만 그 빛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간월암은 무너졌다. 어느 때 어떤 연유로 폐사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조선왕조의 억불정책 앞에 스러졌을 것이다.
고승들의 안광이 빛났던 자리에는 명당이라며 무덤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만공 스님이 수덕사를 나와 수십 리를 걷고,
30리 뱃길을 헤쳐 간월암에 들었다. 섬을 찾아간 것은 전설 때문이었다.
“무학대사가 득도한 후에 간월암을 떠나면서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말했다.
지팡이에 잎이 피어 자라다 말라죽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고,
또 죽었던 나무에 다시 잎이 피면 국운이 왕성할 것이다.”
만공이 이를 확인하러 갔지만 간월암은 황량하기만 했다.
만공은 ‘절 짓는 스님’ 명성대로 간월암을 다시 세웠다.
중창불사는 1941년에 매듭지었다. 만공 스님은 제자들과 간월암에 자주 갔다.
수덕사를 나와 예산, 홍성을 거쳐 배를 타는 포구까지 무려 50리 길이었다.
만공 스님은 진성 스님(훗날 원담 방장 스님)을 시켜 간월암에서 1000일 기도를 시켰다.
제자는 간월암에서 큰스님을 그리며 천 번의 낮과 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스님이 물었다.
“간월도 바람소리가 어떻던고?”
“한 치 한 푼도 달라짐이 없었습니다.”
“그럼 파도소리는 어떠하더냐?”
“한 치 한 푼도 달라짐이 없었습니다.”
만공 스님이 껄껄 웃었다.
“바람소리, 파도소리에 도를 깨쳤구나.”
▲간월암은 작은 섬 암자지만 각 전각과 수 백년 된 고목나무까지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이 갖추어진 도량이다.
구름이 지나감에 달이 가는 것처럼 보이고,
배가 지나감에 강가 언덕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은 환(幻)일 뿐이며 결국 허공이 있을 뿐이라는
‘원각경’의 가르침을 제자가 깨달았던 것이다.
스님은 또 간월암에 머물며 중창불사를 도와주었던
당시 서산군수 박영준에게 휘호를 써 주었다.
‘만우당이고불심 목조석호상쟁전(晩愚堂裏古佛心 木鳥石虎相爭轉)’
(만우당 속의 옛 부처님 마음이여, 나무새와 돌호랑이가 엉키어 서로 다투는구나.)
2차 세계대전의 혼란한 상황을 비유하여 쓴 것이었다.
나무새와 돌호랑이는 다름 아닌 이념이나 사상 같은 헛된 것들을 가리킨 것이며
스님은 그것들에 예속되어 싸우는 인간들을 안타까이 여겼던 것이다.
성철 스님도 갓 30대에 접어든 나이로 간월암을 찾았다.
수덕사 겨울 안거에 들어 지혜를 다듬었지만 자꾸 목이 말랐다.
그해 봄에 간월암에 들었다. 그것은 자신을 더욱 큰 고독 속에 가두는 것이었다.
스님은 작은 암자를 세상으로 알고 2년 동안 참선을 했다.
낮에는 경전을 보고 밤에는 하늘을 봤다. 하늘에는 달이 있었다.
스님의 달에 관한 법어는 어쩌면 간월도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바다에 가면 옷을 벗을 수 있다. 바다는 또 허무를 가르친다.
혼자가 되도록 도와준다. 육지의 깨달음도 파도에 씻겨봐야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섬은 ‘절대고독’의 상징이다. 그래서 자신을 가둘 곳으로 섬을 선택한다.
간월암은 그래서 진리를 찾는 섬이다.
정암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고 간월암에도 새 봄이 왔다.
스님은 간월암을 가장 간월암답게 만들고 싶어 한다.
선방과 기도도량 세우기, 주차장에 요사채 짓기,
자연석을 활용해 불가의 상징물 만들기, 암자가 품고 있는
모든 생명붙이에게 ‘자유’ 찾아주기 등이 스님의 구상이다.
최고의 명승지가 아닌 최고의 기도도량으로 서해안을 지키고 싶어 한다.
스님은 지나친 세속화를 경계했다.
요즘은 관광객들이 넘쳐나기에 수행 풍토를 지키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 옛날 100리 물길에 스스로를 가뒀던 큰 스님들의 수행 터전을 다시 만들고 싶다.
그래서 우선 암자를 수시로 드나드는 쪽배를 없앴다.
이제 물이 차면 아무도 간월암에 갈 수 없다.
잠시나마 세속과의 절연을 선택한 셈이다.
정암 스님 또한 ‘마음 속 화 없애기’ 수행을 하고 있다.
큰 스님들은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화를 쌓아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간월암은 밤이 되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밤이 깊으면 마당에 달빛만 쌓일 뿐이다. 그때가 마음을 꺼내 보기에 적당하다.
그 달빛으로 마음을 비춰보고 그 속의 책을 지우고 있다.
스님은 찾는 이들이 마음의 편안을 얻어가고,
또 경이로운 감정을 품고 가는 간월암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면 결국 그 편안함은 발심으로, 경이로움은 경외감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해가 지면 달이 뜬다. 해와 달 사이에 간월암이 있다.
2013. 04. 02
김택근 기자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