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입맞춤 (1355)
바르나 다 시에나
바르나 다 시에나(Barna da Siena, 1330-1360)는 이탈리아 시에나파의 화가다.
경력은 거의 알려 있지 않지만, 1340년 처음으로 기록이 나타났으며,
그의 화풍은 시모네 마르티니의 영향이 강하다.
1350년경에 성 지미냐노 대성당에 프레스코로 그린 『신약성경 이야기』가
대표작이고, <유다의 입맞춤>은 그중 한 작품이다.
그는 비계 위에서 작업하다 떨어지는 사고로 단명했기에 아쉬움이 남는 작가이다.
시에나에서 주로 활동한 그는 지금 남긴 작품만으로도 그의 기량을 알 수 있다.
그는 성주간의 핵심이 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로 가는
주님 생애의 극적인 시기인 최후의 만찬,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그리스도의 체포와 유다의 배반을 그렸다.
이 작품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바쳐 가르치고 사랑했던 제자로부터
배신당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수난 복음에서 이 장면은 숨 막히는 긴장감을 주는데,
작가는 이것을 극적이고 박진감 있게 표현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수난사 부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바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으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그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나서 그분께 입을 맞추었다.
예수님께서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에 그들이 다가와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그러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47-52)
작가는 너무도 슬프면서도 경악스러운 이 장면을 담대하게 표현하고 있다.
얼핏 보면 이 장면은 선과 악의 대결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작가는 이 장면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지고함과
악마의 유혹에 빠져 배신이라는 죄를 저지르는 인간에게도 볼 수 있는
인간적인 회한과 아픔을 담고 있다.
오직 자기를 체포하기 위해 무장한 군사들 한가운데 포위된 예수님께
그분이 사랑했던 제자이자, 스승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유다가
친밀한 표시로 입맞춤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입맞춤은 순수한 우정과 사랑이나 위험에서 구하겠다는 표시가 아니라
배신과 고통의 시작을 알리는 어두운 종말의 음흉함을 담고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선과 악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이 아닌
하느님 사랑의 강함과 인간의 약함 속에도 들어 있는
슬프면서도 아련한 인간의 선성(善性)을 표현하고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이나
아니면 극단의 분노를 통해 자기를 방어할 것이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도 숭고하고 초연한 표정으로
자기에게 배신의 입맞춤을 하는 제자를 바라보고 있다.
이 상황에서 통념적으로 보일 수 있는 분노나 경악과는 전혀 거리가 먼 모습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음의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인간적으로 가장 친밀과 존경의 표시를 보이는
위선적이며 가증스러운 유다를 연민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예수님의 눈빛엔 어떤 분노나 실망도 없이 연민의 눈빛으로 유다를 바라본다.
스승을 팔아먹기 위해 배반하는 유다야말로 악인의 상징이다.
우리에게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익숙해 있기에
유다를 너무도 쉽게 악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오죽하면 성경에서조차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르 14,21)
하고 표현했을까?
그러나 스승을 팔아넘기기 위해 입맞춤하는 유다의 표정은
예수님의 표정과 또 다르게 관객을 하느님의 자비로 초대하고 있다.
그는 스승을 팔아넘기기로 약속하고 그 대가로 은전 서른 닢을 챙긴 처지이나,
스승을 팔아넘기기에 그의 마음은 너무도 정리되지 않고
착잡한 처지임을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이런 유다의 얼굴에서 약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심리적 갈등,
아무리 악한 인간이라도 그 깊은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신성의 씨앗을 제시함으로써
관객에게 단죄의 결단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로 관심을 돌리게 하고 있다.
비록 유다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스승을 배신한 인간이지만
하느님의 자비에서 제외된 인간이 아니라는 구원의 희망을 보여준다.
작가는 우리에게 구원과 멸망,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배반당하는 예수님과 배반하는 유다 안에서도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신성을 보도록 초대하고 있다.
스승이 체포되는 충격적인 현장에서 베드로는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대사제 종 말코스의 귀를 자르게 된다.
흔히 있을 수 있는 너무도 당연한 정당 방위적 처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나무라셨다.
교회는 이런 순간에 용서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사용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이보다 더 넓고 심오하다.
폭력의 악순환으로서는 결코 참된 복수도, 승리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기를 죽이기 위해 체포하는 교회의 어두운 세력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극진히 믿고 사랑했던 제자의 배신을 바라봐야 하는 긴장의 순간에도
십자가에서 팔을 벌려 모든 사람을 다 자기 품에 안으시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모습을 관객들에게 제시하면서
신앙이 주는 평화와 위로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