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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단원(7-12) 하늘의 전쟁
①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 새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7-8) 합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7상) 한 이 전쟁의 무대는 “하늘”입니다. 그리고 진영은 “미가엘과 그의 사자” 대, “용과그의 사자”(7하)의 두 진영 간의 싸움입니다.
② “이기지 못하여(8),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쫓기니라”(9) 합니다. 이는 통찰력이 요구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다가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 이 전쟁이 언제 일어난 전쟁인가?
㉡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 전쟁의 결과로 사탄이 하늘에서 내어 쫓기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③ 먼저 생각할 것은 사탄이 하늘에서 내쫓기게 된 원인이 미가엘에게 패했기 때문인가 하는 점입니다. 문자만을 보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주신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10절에서 “우리 형제를 참소 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고”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소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사탄이 하나님께 송사(롬 8:33)를 했다는 말입니다. 뭐라고 송사를 했을까요? “하나님, 죄 값은 사망이라고 선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법대로 하십시오” 라고 송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죄의 권능(힘)은 율법이라”(고전 15:56)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송사하는 장면을 스가랴 3장에서도 볼 수가 있는데,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참소)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슥 3:1) 합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있는가?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슥 3:3)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러운 옷”이란 “행위”를 나타내는 말인데, 대제사장 여호수아라 할지라도 자신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탄에게 송사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다”는 것은 참소할 법적 근거(根據)를 상실했음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해서 상실하게 되었는가? 미기엘에게 패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 값을 대신 담당(대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5)는 말씀이 뒷받침해 줍니다. 만일 이를 부정한다면 미가엘이 어찌하여 이때에 와서 싸웠는가 하는 점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인용한 스가랴서에서도,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3:4)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적하던 사탄은 쫓겨나고,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수아) 곁에 섰더라”(슥 3:5)합니다. 어떻게 해서 여호수아의 죄과를 제하여 버리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여호수아의 자력(自力)으로입니까? 하나님의 임의(任意)로 하신 것입니까? 짐승의 피로 되어졌습니까? 아닙니다. “내 종 순(旬)을 나게 해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슥 3:8-9) 하신 어린 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서 뿐입니다.
참소할 근거를 상실함
⑤ 그렇다면 본문에서 사탄이 미가엘에게 패했기 때문에 쫓겨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 전쟁이 언제 일어난 전쟁인가” 하는 물음에서 분명해집니다. 붉은 용이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4하) 한 전쟁, 다시 말하면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 감으로”(5하) 사탄이 패배하게 된 전쟁과,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한 그 전쟁이 별개(別個)의 전쟁이 아니라 하늘과 땅에서 동시(同時)적으로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입니다.
하늘에서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때에, 이 땅에서는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사탄의 사자들과 동일한 싸움을 싸우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사탄의 사자들은 충성을 다하고 있었는데, 주님의 사자들은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0-41) 하신, 잠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제자들은 이 싸움에 동참하지 못하고 주님 홀로 고군분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고 말씀하고,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눅 22:43)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속사에 있어서 겟세마네에서 벌어진 전쟁은,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는 묘사가 말해주듯이 최고 최대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불변의 진리는 사탄이 하늘에서 있을 곳을 얻지 못하고 내쫓기게 된 것은 단순히 미가엘에게 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과 승천하심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던 사탄이 참소 할 법적 근거를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진리입니다.
⑥ 그렇다면 하늘을 열어서 미가엘과 용의 전쟁광경을 보여주시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싸우고 있는 영적 전쟁이 우주적인 전쟁임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깨닫게 되는것은 형제가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어느 집 대문을 두드리고 있을 때, 하늘에서는 형제의 천사(마 18:10)가 동시에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엄청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또한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경이로운 일입니까?
⑦ 그러므로 “올려가더라”(5하)는 말과 “땅으로 내쫓기니”((9)의 대조를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이 올리어 가시고, 사탄은 내쫓긴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에 있어서 최대의 전쟁이었으며, 최고의 승리였음이 다음 찬양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10상)합니다. “구원과 능력”이 이루어졌다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고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고 찬양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으로 가능하여진 것이지 미가엘의 승리로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승리는 대표자(代表者)간의 싸움에서 이룩하신 승리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⑧ 그러므로 이 승리를 힘입어 그리스도의 증인들도,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들을 이기었으니” 라고 이기는 것이 가능하여졌다고 말씀하는 점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7-8절에서는 마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을 이기는 것으로 말씀했습니다만, 11절에서는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 즉 주님께서 승리해놓으신 십자가 복음을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들을 이기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이기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2-3장에서 일곱 교회를 향하여 “이겨라, 이겨라, 이겨야한다” 라고 격려하신, 성도들이 이기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승리의 세 가지 비결
① 계시록의 전체적인 구조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드리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주님은 1장에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나타나셔서, 일곱 번이나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2-3장) 하고 격려하십니다. 그리고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되리라”(21:7) 하시는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간의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 누구하고 싸워서,
㉡ 어떻게 이길 것인가? 를 말씀하는 내용인 셈입니다.
② 그런데 12:11절에서,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들을 이기었다”고 말씀하고 있으니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로 다가옵니까? 성도들의 승리가 세 가지로 나타나 있는데, 승리의 첫째 비결과 원동력은 “어린양의 피”(11상)에 있습니다. 계시록은 증언의 핵심을 “어린 양의 피”(1:5, 5:9, 7:14, 12:11)에 두고 있습니다. 이점은 복음 전도자라면 누구나 인정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린 양의 피가 어떻게 이기게 해주는가? 여기까지 나아가야만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대적하고 정죄합니다. 그리하여 서 있는 믿음이 아니라 주저앉고 넘어지게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탄의 승리입니다. 에덴에서 사탄은 인류의 시조를 하나님 앞에서 추방을 당하게 하므로 승리를 거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로 이겼다는 말씀 속에는 정죄를 당치 않는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대속해주시기 전에는 끊임 없는 참소와 정죄를 당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갈 3:23)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은,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라고 선언합니다.
③ 그렇다면 사탄은 어떤 방도로 성도를 송사하고 정죄하는가? 성경은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고 말씀합니다. 가장 혹심한 것은 양심을 통한 정죄입니다. “율법과 양심”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간악한 사탄은 이를 근거로 하여 송사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고 비탄을 빠지게 합니다. 이런 신앙상태로는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롬 8:1-2)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롬 5:9)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7:14)는 의미입니다.
④ 좀 더 말씀을 드려야만 안전할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았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면 당신은 승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또 실수하고 넘어져서 정죄를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여,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까지 나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칭의(稱義) 만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하나님 앞)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하신 대로 의로우신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 그 앞에 설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을 가능케 함은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그 의를 힘입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 1:17)는 소식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힘입음이 없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설”(7:9하) 자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어린 양의 피”로 이겼다는 뜻입니다.
넘어뜨리는 정죄, 세워주는 칭의
⑤ 승리하는 두 번째 비결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들을 이겼다”(11중)라고 말씀합니다. 영적 싸움은 진리와 비 진리의 “증언”의 싸움입니다. 어린 양이 죽으심으로 흘려주신 대속의 피를 증언해야 하는 것은 증인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벧전 1:2)이라고 말씀하는데, 그러면 “어린 양의 피”는 어떤 방도로 뿌려지는가? 증언을 통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유월절 양이 피를 흘려 놓았다 해도 그 피를 대문에 뿌리지 않는다면 효험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들이 증언하는말씀으로써 그들을 이겼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영적 전쟁은 “성령과 악령”의 영적 전쟁입니다. 뒤에 가서(16:13)보게 될 것입니다만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더러운 영, 귀신의 영”이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입에서 나온다는 말은 그 영이 그들의 〈말〉과 결부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진리의 말씀과 함께 성령께서 역사하심과 같이, 비 진리와 함께 귀신의 영은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이겼다”는 뜻입니다.
⑥ 승리의 세 번째 비결은,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11하) 하십니다. 먼저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었고, 그를 따르는 자들의 승리도 죽도록 충성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정신이요 신학입니다.
주님은 환난 중에 있는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2:10)고 격려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죽기까지 충성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즉 잡아당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인가?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15) 한 대신 죽어주신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중심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은 더욱 아닙니다. 기도를 요술 방망이 같이 여기는 만사형통(萬事亨通)의 신앙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계시록의 정신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 정신”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정신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않는 신앙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 싸움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에도 있을” 전투인 것입니다.
⑦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 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12) 합니다.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과, 땅과 바다”가 대조되어 있는데 이는 문자적인 뜻이기보다는,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점이 적그리스도를 가리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13:1)으로, 거짓선지자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13:11)이라는 묘사에 나타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도들을 가리켜,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비방하더라”(13:6) 합니다. 성도들은 땅에 살고 있을지라도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14절에서는 증인들을, “하늘에 있는 군대”라 합니다. 반면 불시자들은 그 이름이 땅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화가 있다는 것은 사탄은,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들”은 해할 수가 없고, “오직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게”(9:4)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전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