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로마서 12장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로마서는 1장-11장까지가 교리 부분이고, 12장-16장까지는 윤리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장 구조(構造)는 로마서뿐만 아니라,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교리, 즉 원리(原理)를 먼저 말씀하고 난 후에, 그 원리에 입각해서 실천윤리(實踐倫理)를 말씀하기 위한 올바른 순서인 것입니다. 기독교윤리가
타종교의 윤리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그것은 그렇게 행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원리(原理)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윤리가 목표하는 바는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택하시고, 구속하시고,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삼위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는데 있습니다.
실천윤리는 “그러므로”(1상) 하고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接續詞)는 1-11장까지의 전체 교리와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 “그러므로”에
확고하지 못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한 대로,
기독교윤리를 실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는 이 “그러므로”에 확고하게 서 있습니까?
①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1상) 합니다.
㉠ 사도는 “그러므로” 하고 시작을 합니다. 앞부분(1장-11장)의 교리(敎理)와, 뒤 부분(12장-16장)의 윤리(倫理)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接續詞)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차에 비한다면 “교리”라는 기관차가, “윤리”라는
객차를 “그러므로”로 연결하여 끌고 달리는 격입니다.
㉡ 첫 절은 실천윤리의 대 강령(綱領)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나머지 16장까지의 말씀은, 이 한 절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라” 하고 직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다른 종교의
윤리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왜 그러한 삶을 살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당위성을 먼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② “왜냐하면, 그러므로”, 이러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 이것이 기독교윤리입니다.
㉠ 우리는 앞으로 실천윤리를 상고해 나가면서 끊임없이 “그러므로”를 상기하면서 붙잡고 있어야만 합니다. 교리와 윤리가
연결되어 있지 못하면, 교리 따로 윤리 따로 움직이는 이중생활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만일 “그러므로”를 놓치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데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 교회에서와 가정에서가 삶이 다르고, 예배드릴 때와 직장에서의 행동이 다르고, 주일과 월-토요일까지의 삶이 다른
이중생활(二重生活)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므로”를 모르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제는 “그러므로”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분명합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로마서 1장으로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③ “그러므로 형제들아”(1상) 하고 말씀합니다.
㉠ 사도는 교리를 시작할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1:1) 하고, “사도”라는 권위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실천윤리를 말씀하는 부분에서는, “형제들아” 하고, 자신과 로마 성도들을 수평적인 위치에서 말씀합니다.
㉡ 또한 교리를 증거할 때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1) 하고, “택하셨다”는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앞에 내세웠으나, 윤리를 말할 때에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고, 자비(慈悲)에 의해 권(勸)한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점이 무엇인가? “복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로써
선포적입니다. 그러나 “윤리”는 우리가 실천하여야 할 사항이기 때문에 “권면”하는 것입니다.
④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고 말씀합니다.
㉠ 어찌하여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하는가?
㉮ 첫째로 1-11장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우리들에게,
진노대신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시다니,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입니다. 이 “자비, 긍휼, 은혜, 사랑”에 입각해서 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안 이상 이렇게 권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 둘째로 이렇게 권면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권면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은 이러한 권함을 받을 만한 신분(身分)과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못됩니다. “권함”을 받을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8:9)을 모신 하나님의 자녀들뿐이라는
말씀입니다.
㉰ 셋째로 그것은 우리를 믿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강압적으로 아니하고, “권하노니” 하는 것입니다. 그렇고
말구요.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끝까지 믿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실수(失手)도 많았지만, 끝내는 주님의 기대에 보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형제여, 주님께서는
형제를 믿고 계십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를 걸듯,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기대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⑤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시어 하나님의 영을 모시게 한 후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하고 권하심은, 그 보다 더한 것이 없는 하나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하시는 권면을 받는다는
것은 더 없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며, 영광인 것입니다. 형제여,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또 다른
율법적인 멍에나 속박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합시다.
⑥ “율법”이라는 남편을 섬기며 두려움에 떨던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고, “주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룬 신혼살림인 것입니다. 그것은
기쁘고 즐거움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마지못해서 억지로 복종하는 종의 삶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순종의 삶인
것입니다.
㉡ 그래서 “명(命)하노니가 아니라,
권하노니” 합니다. 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연히 명령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디모데후서 4:1절을 보십시오. 사도는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노니”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지금 우리에게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합니다.
⑦ 이제 점검하게 되는 것은 현대교회가 “그러므로”를 망각하거나, 이점에 부실(不實)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할 것입니다.
㉠ 교리 부분은 기초(基礎)와 같고,
윤리는 그 위에 건축(建築)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리라는
기초가 부실하게 되면 건물이 붕괴(崩壞)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려가 아니라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조그만 풍파에도 건물이 금이 가고 무너지듯이 자주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불변의 진리가 받쳐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석으로 변하는 감정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기복(起伏)이 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기초공사는 부실한 채
세우는 데만 급급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