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오늘 시편 38편을 읽으며
‘존재’와 ‘죄악’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다윗은 지금 몹시 괴로워합니다.
주님의 회초리와 질책, 책망 아래 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상태를
악행, 죄책감, 상처, 악취와 같은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분명 지금 다윗 안에는
하나님께서 엄중히 다루시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징계의 본질을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징계의 가장 밑바닥 목적이
단순한 응징이라면,
세상은 숨 막히는 지옥이 될 것입니다.
“잘못했으니 고통당해라.”
그것이 끝이라면
십자가의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엄격함 속에서도
사랑의 본질은 결코 훼손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달래고 부드럽게 말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상태이기에,
더 깊은 무너짐으로 가기 전에
아픈 자극으로라도 다시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징계는
존재를 버리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회복시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너무나 아프실 것 같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바로잡아야 하거나,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징계와 벌을 적용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피해자의 고통과 무너짐은
철저히 공감되고 보호받아야 합니다.
악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 안에 안타까움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는 다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회복을 위한 마음인지,
아니면 응징과 복수,
자기감정 해소에 가까운 것인지 말입니다.
공동체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그 어둠에서 벗어나
다시 정상으로 회복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모든 것보다 더 무서운 죄가 있다고 느낍니다.
바로 ‘존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얼룩진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엄한 인격체로서의 존재 자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꾸
그 영역을 침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의 친척과 이웃들은
다윗의 죄만 본 것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존재 자체를 밀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화조차 하지 않고,
헐뜯고,
누명을 씌우고,
비웃고,
파멸을 기다립니다.
회복시키려는 사랑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고 싶어 하는
어두운 본능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저는
이 존재에 대한 경멸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악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편견으로 시작됩니다.
그 편견은 혐오와 차별이 되고,
차별은 폭력이 되며,
폭력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마침내 존재 제거와 말살로 이어집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바라보던 시선,
식민 정복 전쟁 속에서
원주민을 반쯤 동물처럼 취급하던 시선,
그 모든 참혹함의 뿌리에는
‘존재를 경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두려운 것은
그것이 세속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신앙 안에도
그 어두움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특정 죄를 지은 사람에게
아예 말을 섞기 싫어하고,
그 어떤 항변에도 귀 기울이지 않으며,
존재 자체를 밀어내 버리는 태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되,
존재를 완전히 버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깊은 버림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소서.”(38:21)
얼마나 사람들에게 버려졌으면
저 말이 저토록 절박하게 나왔을까요.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 인간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깊은 사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로 얼룩졌는가 이전에,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창조하신 존재로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네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슬퍼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보아라.
나, 이제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를 웃음 짓게 하시는 분,
그분은 나의 하나님.” (4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