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 사건 자료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C%97%AC%EC%88%98%C2%B7%EC%88%9C%EC%B2%9C_%EC%82%AC%EA%B1%B4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줄여서 여순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중위 김지회, 상사 지창수를 비롯한 일련의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고 2,000여 명의 군인이 전라남도 여수에서 봉기함으로 인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좌·우익세력으로부터 전남동부지역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 우익인사 16명을 포함해 약 15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정부 진압군경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소 439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1]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은 반공주의 노선을 강화하였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여수·순천 주둔군 반란 사건, 여순반란사건, 여순봉기, 여순군란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여순반란사건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역 주민들이 반란하였다고 오인될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아들여서 1995년부터 여수·순천 사건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사건은 당시 여수에 주둔중이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서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1개 대대 규모의 군인들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14연대의 반란과 진압
여순 사건 직후, 이승만 정부는 극우 세력 일부가 이 반란에 동조했다는 주장을 유포하고, 내무부는 경찰국에 수사를 지시하였다.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먼 몰락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했다.[2]
-서울신문 1948. 10. 22일자 기사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하고,[3][4]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라고 지목했다.[4] 10월 22일, 이범석은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면서 '극우정객'을 재차 언급하였다.[3] 같은 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장단을 맞추었다. 같은 해 10월 1일 발생했던 '혁명의용군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범석, 김태선 등이 자기를 여순사건의 배후에 있는 극우파로 지목하자 김구는 분개하였다.
10월 27일, 김구는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반박하였고, 그의 반박문이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2]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민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계속 주장했다.[6]
김구는 여순 사건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다. 10월 28일의 공개 담화에서 김구는 '순진한 청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며', '반도(叛徒,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규정했다.[5] 10월 30일 담화에서는 '여수, 순천 등지의 반란을 '집단 테러 활동'으로 규정하고, '부녀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쳐지지 않을수 없다'고 발표하였다.[7]
여러분의 기대와 託付와 애국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는 나로서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께 왈가왈부를 말하랴마는 금번 반란이 너무도 중대하므로 인하여 국가 민족에 미치는 손해가 또한 중대한 까닭에 그대로 함구만 할 수 없어서 피눈물로써 이와 같이 하소연하는 바이다. 동지 동포는 우리의 고충을 깊이 양해하고 동족상잔에서 동족상애의 길로 공동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7]
이 사건은 남로당의 지령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난 군인반란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남로당은 사건이 일어나자 적잖이 당황하였으나 결국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반공체제를 구축하였다. 군 내부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숙군작업'을 벌이는 한편,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사회 전반에 걸쳐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처벌에 나섰다.[8] 여순사건 이후 서수(序數) '4'는 대한민국 국군의 독립 부대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없어졌고,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되었다.
영화 태벽산맥 (1994) http://www.youtube.com/watch?v=pAXBFl03saY&feature=player_detailpage#t=107 (유튜브로그인필요)
해방 후 좌, 우익의 대결이 심화되는 파란의 역사 속에서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터진다. 염상진을 중심으로 한 좌익들은 벌교를 장악, 반동을 숙청해 나가다가 반란군의 패퇴와 함께 조계산으로 후퇴한다. 돌아온 경찰 등 우익세력은 좌익 연루자와 가족들을 조사하고, 대동청년단 감찰부장 염상구는 형 염상진에의 증오심으로 이 일에 앞장서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를 겁탈하는 등 못된 짓을 일삼는다. 한편 도당 직속 정하섭은 무당 소화의 집에 잠입하고, 소화는 심부름을 해 주면서 둘 사이에는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 싹튼다. 순천 중학 교사이며 민족주의자인 김범우는 좌, 우익 양쪽 모두 비판하지만 오히려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겪는다. 율어를 해방구로 장악한 염상진 일행에 대해 토벌대 대장 심재모와 김범우는 민족의 문제를 자각, 합리적이고 온건한 정책을 펴나가나 지주들의 반발에 부딪힌다. 결국 심재모는 율어탈환에 성공하지만 전출당하고 만다. 김범우는 이데올로기의 광기에 희생되는 사람들의 모습에 아파하면서 전쟁을 예감하는데, 염상진의 빨치산은 1949년 겨울부터 군경의 동계대토벌작전으로 혹독한 굶주림과 절망 속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인민공화국 초기 각종 정책에 나름대로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은 현물세 징수와 인민재판 등에 점차 실망하게 되고, 숨어있던 염상구와 염상진이 숙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여순반란당시의 벌교 홍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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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촛불방송 원문보기 글쓴이: 부산촛불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