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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복강에서 야곱이 겪은 하나님과의 씨름은 무엇으로 있었던 것인가?
창세기 32장 13-32절 / 13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16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21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창세기 32장은 야곱이 팥죽으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사고 형으로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장자가 받을 축복을 대신 받은 사건으로 형 에서의 분노를 사 생명의 위협을 느껴 그의 조상 아브라함이 살던 땅이요 현재 부친 이삭이 살고 있는 정든 고향인 가나안을 떠나 아브라함의 고향이며 또한 어머니 리브가의 고향이기도 한 곳으로 리브가의 아버지요 야곱의 외할아버지인 브두엘, 그리고 리브가의 오라비이며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가 그곳에서 라반의 딸인 레아와 라헬, 그리고 그들의 시종인 빌하와 실바를 통해서 낳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요셉 열 한 아들과 디나라고 불리는 딸 하나를 낳으며 살다가 20년 만에 다시 밧단아람을 떠나 아브라함이 묻혀 있으며 부친 이삭이 있는 고향으로 향하여 길을 떠난 중에 얍복강가에 이르러서 겪은 일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밧단아람을 떠나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며 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아브라함이 누워 있는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실 것이며 그의 후손을 번성케 하실 것인데 땅의 먼지만큼 많게 하실 것으로서 야곱 또한 동서남북 어디로 가든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것에서 야곱의 후손을 크게 번성시키는 것으로 있는 열 두 족속을 이룰 아들을 얻고 많은 재산을 거느리고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야곱은 비록 만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지만 그의 어깨는 무거웠으며 마음은 몹시 착잡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제 곧 형 에서를 대면하게 될 때 자신과에 있은 악감정으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해가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를 불안함으로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야곱은 자기가 가진 것들 가운데서 형 에서에게 줄 선물로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젖먹이는 암낙타 30마리와 그 새끼들 30마리, 암소 40마리와 황소 열 마리, 암나귀 20마리와 숫나귀 10마리에 이르는 많은 가축을 따로 떼어 놓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야곱은 그것들을 여러 떼로 나눠 각각 자기 종들에게 맡기고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습니다. “너희는 나보다 앞서서 먼저 가라. 너희는 갈 때 가축 떼와 떼 사이에 각각 거리를 두고 가라.” 그리고는 야곱은 가장 앞서 가는 떼를 맡은 종들에게 말했습니다.“너희가 내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소식을 듣고 나를 맞이하러 나온 내 형님 에서 어른을 만날 때 그분으로부터‘너희들은 어느 집 사람들이며 또 어디로 가는 길이냐? 너희 앞에 가는 이 짐승들은 누구 것이냐?’라고 물으시면 너희는‘이것들은 주인어르신의 종 야곱께서 주인어르신께 보내는 선물입니다. 주인어른의 종 야곱은 저희 뒤에 오고 계십니다’라고 말씀드려라.”그리고 야곱은 또한 두 번째 떼와 세 번째 떼와 그 나머지 떼들을 따라가는 모든 종들에게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도 내 형님 에서 어른을 만나게 되면 지금 내가 일러준 대로 말씀드려라.”그리고는‘보십시오. 주인 어르신의 종 야곱이 저희 뒤에 오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라.” 야곱이 이처럼 가축 떼를 여럿으로 나누고 각각의 종들에게 신신당부하며 지시한 것은‘혹시 내가 내 앞서 보내는 이 선물들을 보고 형님의 마음이 누그러져서 나를 만날 때 형님이 나를 용서해 주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 에서에게 줄 많은 선물을 자신 앞에 먼저 보내 얍복강을 건네고 야곱은 그날 밤을 지낸 후 떠나고자 장막을 쳤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여 그날 밤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밤중에 일어나 두 아내와 소실인 두 여종과 이들에게서 낳은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얍복강을 건너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소유인 모든 가축 떼도 건너보냈습니다. 그런 뒤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밧단아람을 떠난 후 얍복강가에 이르렀을 때 이곳에서 더 이상 진행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떤 한 분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분을 붙잡고 밤을 지새우며 동이 틀 때까지 그분을 놓아 보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은 야곱이 이처럼 얍복강가에서 그에게 나타난 한 분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을 붙잡고 밤이 샐 때까지 놓아주지 않고 있었던 것을 우리 한글 성경은“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더니”,“(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라고 각각‘씨름’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마치 야곱이 어떤 사람이라고 불리는 야곱의 하나님과 야곱 둘이 마치 씨름장사들이 씨름하기 위하여 서로 샅바를 붙들고 서로 이기기 위하여 고군부투하여 싸움을 하는 것으로 연상을 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씨름’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말은‘씨름하다’란 뜻 외에도‘붙들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앞에 나타난 한 분인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는데, 야곱은 그분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그분을 붙잡고“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야곱은 그분을 자신의 주님이신 하나님이 보낸 사자<천사>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나타나신 분은 야곱의 주님이신 하나님이셨습니다(참조. 28, 30절). 야곱은 이렇게 자신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붙들고 다음날 아침 동이 틀 때까지 보내드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러함은 마치 씨름장사가 씨름하는 장사인 상대방의 허리에 굳게 매여 있는 샅바를 양쪽에서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을 연상할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 한글성경은‘씨름’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본래 의미하고 있는 것은‘붙들다’는 꽉 붙잡고 놓지 않고 있는 상태에 있는 것에서인데, 이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30절에서 보는“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나님을 대면에 있게 하시는 것에서 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비록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성경이‘씨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싸운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면하여 함께 하고 있는 것에서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야곱과 하나님 간에 있은 이 씨름에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24-25절에서“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야곱과 하나님 간에 있은 이 씨름을 해 나가고 있는 주체가 누구인가 하면 야곱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얍복강가에 홀로 남아 있는 야곱에게 나타나 그에게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으로 있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얍복강가에 이 일이 있기 전에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갈 때, 야곱을 보내는 이삭은 야곱을 불러서 그에게 복을 빌어 주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러주었었습니다.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아라. 이제 너는 밧단아람으로 가 그곳에 계시는 너의 외할아버지 댁으로 가서 거기에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들 가운데서 네 아내가 될 사람을 찾아서 결혼하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며 복을 주셔서 너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실 것이어서 네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너의 조부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너와 네 자손에게도 주셔서 네가 지금 나그네살이를 하고 있는 이 땅, 곧 하나님이 너의 조부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땅을 네가 유산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다.”이삭은 이렇게 복을 빌어 준 뒤에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냈습니다(창 28:1-5).
그리고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는 중에 벧엘이라고 불리게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었으므로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자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누워서 자다가 꿈에서 땅에서부터 하늘에 닿아 있는 큰 사다리를 보았는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사다리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는 주, 너의 조부 아브라함이 섬긴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이 섬긴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이 받은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야곱은 잠에서 깨어서는 "주께서는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계시는 땅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떠나 있는 이곳에도 계시는데 내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구나. 내가 이제야 깨달았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은 또한 나의 하나님으로서 내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누워있는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이 계신 여기가 바로 하늘로 어가는 문이다.” 이 사실을 깨달아 안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베었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자신이 누워있던 땅인 그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으나, 그 곳 이름을‘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야곱은 이렇게 하나님께 서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실 것이니 여호와께서는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이제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반드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창 28:10-22)
야곱은 말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복을 빌어준 것에서, 그리고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에 의해서 아브라함과 그리고 이삭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야곱과도 함께 하시면서 그에게 하실 일을 약속으로 받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에게 주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에서 이제 또한 야곱에게 주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한 땅을 야곱과 그의 자손에게 주실 것이며 그의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여 동서남북 온 땅으로 퍼져나가게 함으로 땅 위의 모든 백성이 야곱과 그의 자손이 받은 복을 받게 할 것에서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시며 그를 떠나지 않고 그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또한 이삭에게 주셨던 땅으로 반드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약속에 있는 야곱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야곱은 비록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망하였고 그곳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낸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으면서 형 에서의 노여움으로 자신과 가족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태이지만(11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실 것에서 야곱의 생명은 하나님의 보호에 의하여 안전할 것임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거듭 된 하나님의 약속과 이를 확인시켜 주신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마음과 고백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형 에서를 대면하게 될 때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함에 있지를 못하고 형 에서를 만나는 것을 무서워하고 그 두려움에 있으며 발걸음을 떼어 옮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듣고, 벧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약속과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겠는지요. 아닙니다. 야곱은 결코 잊고 있지 않았었습니다.
형 에서에게 줄 선물로 가축 떼를 여럿으로 나누고 각각의 종들에게 맡겨 자신에 앞서 보내면서 종들을 시켜 형 에서를 만날 때 하라고 지시하여 시킨 말이 무엇인가요.“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9, 12절)입니다.
그러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홀로 남아 있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하신 일이 무엇이었겠는지요. 하나님께서 밤이 맞도록, 그래서 다음날 아침 동이 틀 때까지 하나님께서 홀로 있는 야곱에게 남아 있으면서 그에게 무엇을 하였겠는지요. 야곱은 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이죠. 그런 자신과 가족이 형 에서에게 해를 입을 상황에 처해 있는데, 하나님께서 하신 이 약속을 잊지 말고 행하여 주실 것을 구하면서도 형 에서에 갖는 마음 깊이 본성에 자리하고 있는 두려움으로 발이 떼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서 밤이 맞도록 얍복강을 건너 진행하지 못하는 그를 붙들고 계셨다는 것에서“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표현을 하는 것은 야곱이 알고 있으며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그 의존에 의해서 마음을 놓고 형 에서에게로 나아가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에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에서입니다. 그래서 밤새 야곱의 마음이 꺾이지 않고 그 몸이 따르지 않는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며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시고 그가 하나님의 보호와 살핌 속에 있음을 야곱으로 알게 하며 얍복강을 건너 약속으로 주신 땅 고향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에 대하여 야곱은 형 에서에게 갖는 두려운 마음을 쉽게 접지 못함으로 주저앉고 있는 얍복강에서 일어나 떠나는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밤새도록 있음으로 인해서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5절에서“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고집이 워낙 세서 비록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야곱의 고집을 도무지 이기지 못하여 꺾을 수가 없었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야곱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형 에서에게 갖는 두려움이 동이 트기까지 밤새도록 갈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그 의존에 있게 하십니다.“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5절)라고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 곧 야곱의 허벅지 관절(엉덩이 뼈, 엉치 뼈, 대퇴뼈, 고관절)을 치신 것은 그러한 일로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야곱이 하도 고집이 세서 하나님이 도무지 이길 수 없으니까 치밀어 오르는 화에 못 이겨 징벌<징계>로 야곱을 때리시는 것으로 그의 환도뼈를 쳤다는 것에서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환도뼈를 쳐 그 뼈를 위골시켜 다리를 절게 하는 일을 하셨는지요. 신체에는 여러 부분이 있는데 왜 환도뼈를 위골시켰는지요. 이는 말입니다. 징벌의 목적으로서가 아닌 야곱에게 있은 이 일로 야곱의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존되고 있음에 야곱과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기억에 있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해 나가신 은혜로운 일들을 잊지 않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32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날이 새려 할 때에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것에서 떠나실 의사를 나타내 보이시고“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붙드는 그에게“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며“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그에게“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그에게 새롭게 주어진‘이스라엘’이란 이름에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실 것인지를 나타내 알게 해 주셨습니다.‘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지닌 뜻은‘하나님과 겨루다’, 또는‘하나님께서 겨루시다’입니다. 이것은 이 이름을 해석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고, 또한 사람들과도 더불어서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란 의미에서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주어진 것은 말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야곱이 끝까지 자기 고집을 내세워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불순종을 하였는데도 그 떼씀을 인하여 마침내 하나님을 이겼다는, 그래서 야곱에게 하나님이 지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불순종하였는데,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니요. 아닙니다.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을 거스리는 불순종을 하면서도 떼를 쓰면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축복을 마침내는 받아냄으로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것으로 이해하고서 하나님에게 응답을 받아낼 때까지 떼를 써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형편입니다. 소위 땡강기도를 해야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새롭게 부르게 하는 것을 통해서 야곱이 밤이 새기까지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무서움으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삭에게 주셔서 들어가 거주하게 하셨으며,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자손들에게 주신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야곱을 떠나지 않으시고 그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란 하나님의 전적인 신실하심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한 것에서 야곱이 확인한 것은“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한 땅의 이름을‘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브니엘’은‘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에서 나타내시고 있는“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싸워 이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하나님을 밤이 새기까지 대면하여 언약의 하나님께 갖는 믿음의 신실함은 야곱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지켜 가실 것이라는,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 가실 것이란 것입니다. 야곱은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믈으시고는, “네 이름을 이제부터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라”고 하며 그 이름에 담아 늘 기억하고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이름을 부름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찾아 대면하여 주신 뜻을 앎으로써 지금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또한 무엇으로 말미암아서 존재하는지를 떠올려 하나님을 의존하게 해주심을 알았습니다. 그런 야곱은 말입니다. 자신이 형 에서에 대한 큰 두려움에 있어 그 앞에 나아가지 못함으로 약속으로 주신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그런 자신을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보존하여 주시고 있으며, 이렇게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생명이 보존되고 있는 것에서 그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성취 될 것이기에 그는 또한 형 에서와 그리고 사람들을 대면하는 것에서도 그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보호와 살핌을 받아 보존될 것에 대한 믿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불러“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이 약속을 받은 야곱이“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내용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었다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것에서이며, 그런 야곱이 이겼다는 것은 야곱의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것에서 입니다.
헌데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잘못 해석하여 설명하고 적용하는 잘못을 교회가 해 왔습니다. 즉, 창세기 32장에서의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더불어 가진 씨름이 지닌 본문의 의도와 관련 없는 엉뚱한 말을 하는 설교를 해온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곳의 내용에서 그러한 내용을 다루는 기사가 있는지요.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이곳의 내용을 야곱이 하나님에게 떼를 써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침내 받아내는 식으로 다룬다면, 그렇다면 이전에 야곱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은 약속을 재차 말씀하시며 그를 아브라함과 이삭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야곱이 이에 대하여 신앙에 있는 고백에 있어온 것은 무엇인지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 야곱이 있어오지 않은 것인지요.
혹자는 얍복강가에서 야곱에게 있은 사건을 야곱의 기도와 함께 야곱의 회심 문제로 다루기도 합니다. 그래서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셔서 그의 환도뼈를 위골되게 함으로 이에 놀란 야곱이 즉시 회개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대개 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의 씨름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런 야곱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그 야곱은 하나님께 회심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억지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설교가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에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교는 하나님의 본의를 좇은 설교가 아닌, 지극히 자의적인 설교에 불과하며, 설교자가 자기 마음, 자기 멋대로, 자기 생각으로 지어서 만들어낸 설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설교에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설교에 매료를 느끼고 있는 실정입니다. 참으로 주의하며 조심해야겠습니다.
얍복강가에서 있은 하나님과 야곱 간에 있은 대면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보여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하셨기에, 우리와 맺을 것으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신데 따라 그 언약을 온전히 이루어 가시는 것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에 따라서 우리에게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믿음이 있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며 놀랍지 않은지요. 우리는“놀라워라!”,“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워라, 참으로 놀라워라!”를 매주일 그리스도와 하나 된 생명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룸에서 겪습니다. 이것은 말이죠.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믿음이 오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여 원수 됨에 있는 것이 우리 육입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배척합니다. 그러한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은 우리를 자기 부정에 있게 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이적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겪은“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였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함에서 이 땅에서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실현됩니다. 그러한 우리의 생명은 사악한 마귀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의 세력으로부터도 영원히 보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영영히 타는 불못에 던짐으로 그들과 영원히 차단하여 해를 입음에 있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 은혜로운 믿음에 있는 우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