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복수극이다. 조금 물리는 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공식 초청작이며, 데뷔감독의 작품 중 최고를 가리는 황금카메라상에 최종 후보로 지목됐고,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 소개되어 3관왕을 휩쓴 '상복' 많은 영화라는 건 부차적인 이유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 뿜어내는 뜨거운 에너지, 특히 남성중심 복수극에서 대부분 (이미 죽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 피해자의 손에 무기를 쥐어 줌으로써 발생하는 카타르시스의 에너지는 독보적이다.
물론 여성 복수극이 처음은 아니다. 2005년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를 통해 아름다운 여성의 우아한 복수극을 세련되게 그린 바 있다. 할리우드를 살펴보면 메어 자르치 감독의 B급 호러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와 아벨 페라라의 <복수의 립스틱>도 '여인이 한을 품으면 스크린에 피의 폭우가 쏟아진다'는 사실을 각인시킨 바 있다.
하지만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선배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걷는다. 앞서 말한 '여성 복수극'들은 여성을 복수 주체로 내세우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섹슈얼리티 이미지를 과시하는 감이 있다. 예를 들면 나신을 드러낸 주인공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캣워크를 한다거나, 수녀복을 입고 총을 든다거나, 복수를 앞두고 "무조건 예뻐야 돼"라며 읊조리는 식이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주인공 복남(서영희)은 여성 복수극 선배들의 치장에 "팔자 좋은 소리 한다"고 면박을 줄 기세다. 그녀는 잘 차려 입고, 복수 대상을 이리저리 요리할 정신이 없다. 때문에 그녀는 감자 캐던 몸빼 차림으로 곁에 놓인 낫을 든다.
복남의 행위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차분한 뒷정리가 아니라, 앞으로 남은 삶을 위한 생존의 발악이다. 복남의 '미친 삶'을 오래도록 목격한 관객으로선 그녀의 잔혹한 낫질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특별한 점 중 하나는 '피해자의 복수에 대한 수동적 동의'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폭력은 침묵을 낳고, 침묵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이 폭력의 증식법칙이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이 악순환을 끊어버리기 위해선 '참지 말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각성한 복남은 낫을 들고 중얼거린다. "참으면 병 생긴다네." 절묘한 출사표다.
영화는 서울의 평범한 직장인 해원(지성원)으로부터 출발한다. 제2금융권에서 일하는 그녀는 폭력적인 세상의 룰에 익숙하다. 괜히 착한 척 했다가는 밥줄이 위태롭고, 불의를 보고 욱했다가는 화를 자초한다. 그녀가 가난한 할머니의 대출을 가차 없이 거절하고, 거리에서 목격한 여성 폭력에 침묵하는 건 그녀가 터득한 생존방식이다. 서울의 폭력성에 진절머리를 내던 해원은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용한 섬 무도로 휴가를 결심한다.
하지만 무도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어린 시절을 함께 지냈던 친구 복남의 삶은 더 끔찍하다. 복남이 잠시 손 놓고 있는 꼴을 못 보는 시고모는 복남을 종처럼 부리고, 남편이란 작자는 "개돼지도 맞으면 알아듣는데, 너는 왜 만날 맞아도 모르냐"며 사흘이 멀다 하고 두들겨 팬다. 그것도 모자라 복남을 보라는 듯 뭍에서 매춘녀를 안방으로 불러들인다. 젊은 여자라곤 복남 밖에 없는 섬에서 그녀는 짐승 같은 시동생의 강간도 참아야 한다. 복남이 이 지옥에서 숨을 붙이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딸 연희 때문이다.
서울의 해원은 무도의 복남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해줄 수 있는 일도 없다. "대체 왜 이렇게 사느냐"고 면박을 주지만, "그럼 연희만이라도 서울로 데리고 가달라"는 복남의 부탁을 거절한다. 어느 날, 복남은 남편이 의붓딸 연희와 성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뭍으로 도망갈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복남은 붙잡히고, 남편의 폭력에 어린 딸마저 잃는다. 믿었던 친구 해원마저 "나는 모른다"고 발뺌하자, 복남의 실낱 같던 인내력이 끊어진다. 이제 복남을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전처럼 침묵하고 살 이유도 사라졌다. 복남은 답을 구하기 위해 태양을 바라본다. 태양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답을 얻었다.
복남은 악마가 아니다. 보통 피해자가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가해자의 위상을 얻지만, 이 영화에서 복남은 끝내 피해자로 남는다. 물론 복남의 낫질은 가차 없다. 목을 서걱서걱 베어내고, 단박에 숨통을 찍어 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복수의 통쾌함 따위는 없다. 복남은 그저 '되돌려 줄' 뿐이다.
머리가 박살 나 죽은 딸에게 "된장 바르면 괜찮다"는 남편을 난도질한 뒤 된장 한 무더기를 던져주는 그녀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복남은 기어코 뭍으로 올라와 도망친 해원의 뒤를 좇는다. 제 몸무게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거대한 망치고 해원의 '침묵의 죄'를 갚아주고자 하지만, 결국 이루지 못한다. 김복남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전말을 모두 목격한 해원은 서울로 올라가고, 복남의 전언을 실천한다. 그것은 폭력에 침묵하지 않는 것이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엔딩에 이르러 복수극을 표방한 최근의 한국 영화들과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걷는다. <아저씨>나 <악마를 보았다>가 복수로 특정 사건에 대한 종결을 선언했다면,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은 앞으로 분명히 벌어질 불특정 사건에 대한 발언을 촉구한다. 이처럼 능동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복수극은 처음이다.
신선하고 강렬한 영화를 완성한 신인감독 장철수의 이름만큼이나, 복남 역의 오랜 '기대주' 서영희의 이름을 단단히 새겨둬야 할 것 같다. 운 좋은 배우들에겐 한번쯤 지금껏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얼굴'을 드러내는 영화가 찾아온다고 한다. 서영희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에 이르러, 그 동안 조연으로 억눌려 온 모든 에너지를 분출한다. 이 영화가 그녀의 대표작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 영화계는 빼어난 신인감독과 빼어난 여배우를 동시에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