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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6. 05 성주지역답사(선비문화 아카데미)
1. 언 제 : 2013년 6월 5일(수요일) 맑음. 09:00 - 18:30
2. 어디로 : 성주군(한개마을 - 성주향교 - 회현서원 - 세종대왕자 태실
3. 누구와 : 포항시 문화원 선비아카데미
성주 한개마을(大浦村) (중요민속자료 제255호)
소재지 :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가 1450년 경 처음 자리잡은 후 대를 이으며 살아왔으며, 지금도 그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성산이씨의 집성촌이다.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이곳에 큰 나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하는 말이니 ‘한개’란 곧 ‘큰 개울’ 또는 ‘큰 나루’를 의미하는 우리말이다.
마을의 지형은 뒤쪽에 영취산(해발 322m) 줄기가 좌청룡, 우백호의 형세로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낙동강 지류인 백천이 흐르고 있어서 풍수 지리적으로 볼 때 영남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이곳에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지은 75채의 가옥이 있다. 마을 입구 쪽을 중심으로 더러는 변형이 되거나 새로 지은 양옥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집들은 보존이나 관리가 잘 된 집들도 있지만 군데군데 허물어졌거나 퇴락한 집들도 있고,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도 보인다.
마을의 입구에는 빈곤층이 살았었는지 초가집들이 눈에 띄며 규모가 큰 가옥 마을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모두 9명의 대과급제자와 24명의 소과 급제자가 나왔는데, 이렇다 보니 이런저런 인물들이 여럿 나오기도 하였다.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은 사도세자가 들어가 있는 뒤주에 돌을 올려놓으라는 어명을 거절하여 곤장을 맞고 파직된 후 낙향한 뒤 죽은 사도세자를 사모하는 마음에 북쪽을 향해 사립문을 내고 평생토록 절의를 지켰다. 후에 정조가 왕이 되자 그는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세에 대과에 급제한 후 한성판윤, 대사간,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와 조카인 조선말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아들인 독립 운동가 이승희 등이 그들이다.
한개마을에는 첨경재(瞻敬齋), 월봉정(月峯亭: 한천서당寒川書堂), 서륜재(敍倫齋), 일관정(一貫亭), 귀락정(歸洛亭: 여동서당餘洞書堂) 등 다섯 동의 재실이 있습니다
교리댁(校理宅)
동계(東溪) 이석구(李碩九)가 세웠습니다. 교리댁이라 한 것은 그가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석구는 1751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뒤에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執義)를 역임했습니다. 사헌부 집의라면 지금의 감사원이나 검찰청의 2인자 정도에 해당하는 벼슬이라 합니다.
교리댁은 조선 영조 때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등을 지낸 이석구李碩九 선생이 1760년에 지은 집이다. 교리댁이라 한 것은 이석구의 현손玄孫인 이귀상이 정5품 벼슬인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기 때문이다.
• 신다'(神茶)는 '신다울루'(神茶鬱壘)
'신다'와 '울루' 형제는 먼 상고시대 사람인데, 힘이 세고 눈빛이 형형하여 악귀를 잘 잡았다고 합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 두 형제가 능히 요사스러운 잡귀를 물리칠 영적인 효험이 있다고 믿어 문신(門神)으로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실학사상이 꽃피우던 시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에 벽사(僻邪)를 위해 입춘이면 '立春大吉', 단옷날에는 '神茶鬱壘'를 써서 벽이나 문설주, 기둥 등에 붙였다고 합니다. 또한 '한국민속대전'에는 조선시대 관청인 관상감에서 입춘과 단오에 붉은 글씨로 귀신을 쫓는 글 '신다울루'를 써서 궁중의 문설주에 붙여두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입니다. 앞면 5칸·옆면 2칸 집으로, 왼쪽 대청 2칸은 문을 달아서 자유롭게 열고 닫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동쪽에 반 칸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으며, 뒷간, 다락 등이 있어 구성이 특이합니다. 중문간은 중문과 사랑채 사이 공간에 담을 쌓아 내·외담을 만든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교리댁 사랑채 마당에는 그리 넓지 않으나 기후가 맞지 않아 탱자나무로 변했다는 수령 150년의 제주도산 감귤나무 한 그루와 말을 탈 때 딛고 일어서는 상마석(上馬石)을 볼 수 있습니다.
하회댁(河回宅)
이 가옥은 한개마을 중심부에서 남서향으로 위치한 조선 후기 양반주택으로 163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호는 소유자의 모친이 안동 하회에서 시집온 데서 연유한다.
가옥배치는 입구에 독립된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고, 쪽문을 통하여 안채로 출입할 수 있도록 흙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마을에는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조물과 민속자료 등이 많이 있는데 월봉정, 첨경재, 서륜재, 일관정, 여동서당 등 다섯 동의 재실과 서당이 있다.
극와고택(極窩古宅)
이 건물은 사랑채 묵서명(墨書銘)의 상량문을 통해 보면 조선 철종3년(1852)에 건립된 가옥임을 알 수 있다. 가옥의 이름을 극와고택이라고 한 것은, 국권상실에 직면하여 소복을 입고 거실에 거적을 깔고 살며 두문불출한 극와(極窩) 이주희(李澍熙)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송병선에게 학문을 전수받았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묘소를 지킨 효자이다.
건립당시 가옥배치는 안마당의 동쪽에 광채가 있어 ㄷ자형이었는데, 지금은 광채가 철거되고 一자형의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二자형의 개방적인 배치로 되어 있다. 극와고택은 사랑채가 초가임에도 평면구성이 양반가옥과 같은 형태이다.
한주종택(寒洲宗宅)
이 가옥은 한개마을의 가장 위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조43년(1767)에 건립하고 1866년 이진상(李震相)이 중수한 건물로 지금의 집은 그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안주인이 상주의 동곽(東廓)에서 시집왔다하여 동곽댁이라고도 부르며, 집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고 골목과 담장 주위의 노송 등이 이루는 경관도 빼어나다.
건물배치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구역과 한주정사(寒洲精舍)라는 정사가 있는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은 동향이고 한주정사로 들어가는 문은 남향이며, 안채와 정사는 사잇담을 두어 작은 협문과 일각문을 두어 출입하게 하였다. 한주종택을 중수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은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였으며, 그의 아들인 이승희와 손자인 이기원, 이기인 등은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여 삼부자가 모두 건국훈장을 수훈하였다.
북비고택(北扉古宅)
이 가옥은 조선 영조 50년(1774)에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훈련원 주부 이석문이 터전을 잡은 곳.
이석문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참혹하게 죽은 후 그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북쪽을 향하여 사립문((北扉)을 내고 평생을 은거한 충정이 깃든 곳이다.
이 가옥은 현재 정면 6칸인 안채를 비롯하여 사랑채, 안사랑채, 사당, 북비댁 등 5채로 구성되어 있고 순조 21년(1821)에 이석문의 손자인 사헌부 장령 이규진이 정침과 사랑채를 새로 짓고 북비문 안의 맞배집을 서재로 고쳤다고 한다. 사랑채는 그 후 증손 이원조가 고종 3년(1866)에 고쳐지어 오늘에 이른다.
진사댁(進士宅)
한개마을 초입에 있는 진사댁(進士宅)은 확실한 건립연대를 알 수 없으나, 1798년 성산이씨 정언공파(正言公派) 27세손 이주진(李柱鎭)이 또는 1858년에 29세손 이문상(李文相)이 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문상의 부인이 예안출신이므로 예안댁이라 불렸다. 그 후 30세손 이국희(1868~1939)가 조선왕조가 마지막으로 실시한 진사에 합격하여 진사댁이라 불리게 되었다.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새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월곡댁(月谷宅)
이 가옥은 1911년에 이전희(李銓熙)가 처음 건립하고 1930년에 사당을, 1940년에 별당채를 추가로 증축하였다.
가옥은 안채, 사랑채, 별채, 사당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랑채에서는 중문을 거치지 않고 안채에 들어갈 수 있으나 별채에서는 중문을 거쳐야 안채로 출입할 수 있다. 별채는 사방이 담으로 막혀 있어 폐쇄적이며 중문채 앞의 작은 협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회연서원(檜淵書院)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인 한강정구(1543-1620)선생이 선조16년(1583)에 회연초당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여 많은 국가동량의 인물을 배출하였던 곳이며, 한강의 문도들이 인조5년(1627) 회연초당 자리에 회연서원을 건립하여 한강선생을 주향으로 모셨으며, 숙종 16년(1690) 사액을 받았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사원철폐 때 폐원되었다가 1984년에 다시 사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서원 앞뜰 백매원에는 신도비가 서 있으며, 유물전시관에는 선생의 저서 및 문집의 각종 판각 등 유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정구(鄭逑 1543 - 1620) : 조선 문신 • 학자
경학(經學)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 통달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배출되어 영남 남인학파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아버지는 사중(思中)이다.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했다. 7세 때 〈논어〉·〈대학〉을 배워 뜻을 통했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밑에서 공부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64년 상경하여 과거장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돌아와 그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1573년(선조 6) 예빈시참봉에 이어 1578년 사포서주부, 그뒤 삼가·의흥·지례 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에 부임했고, 이때 베푼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이듬해 지평이 되고 동복현감을 거쳐 1585년 교정청(校正廳)의 교정랑(校正郞)으로서 〈경서훈해 經書訓解〉를 교정했다. 1591년 통천군수가 되었는데,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 군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뒤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목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했다. 고향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성주향교(星州鄕校) : 보물 제 1575호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1398년(태조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 동무(東廡) • 서무(西廡)·명륜당 • 입덕문(入德門) • 수복청(守僕廳) • 고사(庫舍)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원래 있던 만화루(萬化樓)와 양사재(養士齋)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6·25 때 전소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의 명륜당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5호로, 대성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두어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세종대왕자 태실(世宗大王子 胎室) : 사적 제444호
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세조인 수양대군을 비롯해 세종의 18왕자와 손자인 단종의 태 등 19기의 태실이 안장돼 있어 전국 최대 규모 로 꼽힌다. 각각 태비(胎碑)를 하나씩 앞세운 태 무덤이 앞줄에 11기, 뒷줄에 8기가 늘어서 있다. 그 중 뒷줄의 첫 번째에 자리잡은 수양대군의 태무덤 앞에는 귀부와 이수까지 갖춘 태비가 하나 더 세워져 있다. 훗날 임금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봉 근처에는 신라 때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선석사가 있는데, 태실이 조성된 뒤로는 태실을 지키는 절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자 태실은 조선 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 시 분청인화문대접·뚜껑, 평저호 및 지석(誌石)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법수사지(法水寺趾)
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금당사(金塘寺)라 불렸던 법수사지(法水寺趾)이다.
애장왕 3년(서기 802년)에 세워진 금당사의 이름이 법수사로 바뀐 것은 고려 중엽인데, 한때 구금당(九金堂), 팔종각(八鍾閣) 등 1,000칸이 넘는 건물과 도은암(道恩庵), 보현암(普賢庵), 백운암(白雲庵) 등 100여개의 암자를 거느렸다고 한다. 지금은 이 절터를 중심으로 백운리 골짜기 여기저기에 석탑, 돌기둥, 주춧돌, 암자터 등만 흩어져 남기고 있을 뿐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막내아들 범공(梵空)이 나라가 망하자 중이 되어 여생을 보낸다고 전한다.
• 법수사지 3층석탑은 통일신라 후기 애장왕(802年)때 대사찰인 법수사가 건립될 당시에 세워진 탑으로서 2개의 기단(基壇)과 3층 탑신(塔身)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6m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신라식 일반 석탑이다. 하대중석(下臺中石)에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고, 우석(隅石)이 있는데 하대갑석(下臺甲石)은 4장으로 되었으며, 중석 받침 몰딩이 있다. 갑석부연(甲石副椽)이 조각된 상대갑석(上臺甲石)이 있으며 탑신부 옥신(屋身)은 우주가 양각(陽刻)되어 있고, 옥개(屋蓋) 받침은 각층 5단으로 되어 있으며, 전각(轉角)은 반전(反轉)되었다. 낙수면(落水面)은 비교적 완만하지만 3층 옥개석(屋蓋石) 한쪽 모퉁이와 상륜부(相輪部) 노반(露盤)은 깨어져 있다.
2013년 7월 16일 산나그네(박춘덕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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