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에 마비가 온 것도 아닌데 좀처럼 입맛이 돌지 않는다. 계절 탓인지 그 맛이 그 맛이다. 입맛 살릴 무언가를 찾아보고자 애꿎은 키보드만 괴롭힌다.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 수많은 검색어로 찾아보아도 이색 음식은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파랑새는 집에 있지 않았던가. 멀리서 찾지 말자. 봄 입맛을 돌게 할 그 녀석. 보릿고개 몸소 체험하신 어르신에게는 추억의 맛이요, 젊은 층에게는 웰빙음식으로 각광받는 보리밥.
한 술 떠서 입안에 넣으면 고슬고슬 퍼지던 알갱이들. 어금니 사이로 몰아넣고 매몰차게 씹어대면 톡톡 터지던 식감. 제철에 나는 나물 넣고 고추장 한 술 퍼서 쓱쓱 비며 입에 물면 그 맛이 밥도둑. 게장만 도둑이란 법 있나.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게 어디 전어뿐이겠느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보리밥.
가난한 시절 신물 나도록 먹었던 그 녀석이 질릴 법도 한데, 쌀밥이 물릴 때쯤 그리움 때문인지 보리밥을 찾게 된다. 세월이 변하니 맛도 변한다고, 쌀이 이런 대우 받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집 좀 살아야 흰쌀밥에 숟가락 꽂아 봤다고 뻐기던 이야기는 이제 옛말. 흔해빠진 쌀밥대신 식당에 찾아가야 먹을 수 있는 별식. 이번에 소개할 음식은 보리밥이다.
물가가 워낙 비싸 외식하기 두렵다면 중앙시장으로 가라! 오천 원을 가지고 싸고 맛있고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은 곳이다. 중앙통로를 기준으로 양 옆에 빼곡하게 들어선 상점과 각 종 주전부리까지 없는 게 없다는 그곳.
험난한 인생살이 하면서 누구나 하나쯤의 사연 갖고 있듯, 중앙시장도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중앙시장은 동대문,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재래시장으로 불릴 만큼 규모가 컸다. 한때 서울시민의 전체 양곡소비량 가운데 70% 이상이 이곳에서 거래될 만큼 번성했다. 하지만 낙후된 시설과 하나 둘 생겨난 거대 할인상점 덕분에 상권이 흔들렸다. 이로 인해 2005년 리모델링을 시작해 다음 해인 2006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후 2009년 10월. 시장 지하에 공방이 들어섰다. 상권회복을 위해 야심차게 준비한 ‘신당창작아케이드’. 이 프로젝트는 예술작가들에게 공방을 대여해 주고 방문객의 발길을 유도해 상권에 이바지 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하상가에 들어가면 줄지어 늘어선 횟집과 작가들의 공방이 뒤 섞여 있어 재밌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어쨌건 시장이야기는 접고, 보리밥타령 했으니 보리밥을 봐야겠지. 중앙시장 입구에 들어서 10m 정도 걸으면 오른쪽 상단에 보리밥이라는 간판을 볼 수 있다. 그 골목으로 들어서면 대여섯 군데의 보리밥 집이 있다.
10년 이상 된 집들로 메뉴는 비슷하지만 제 각기 다른 맛을 자랑한다. 우리가 간 곳은 ‘토속보리밥’이다. 주변 상인들의 입을 통해 맛집으로 검증된 곳으로 입구에 보이는 때깔고운 나물들은 오고가는 이들을 유혹한다. 게다가 칼국수를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장님의 손길을 보니 시장에서 유명한 이유를 알겠다.
출입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꼬리꼬리한 향이 코를 찌른다. 바로 청국장 냄새. 실내는 주위 식당보다 넓다. 좌식과 입식이 모두 가능한 형태여서 편할 대로 앉으면 된다.
메뉴는 다양한 편이다. 생수대신 앙증맞은 주전자에 숭늉이 나와 꽃샘추위로 차가워진 몸을 데울 수 있었다. 대접에 따르니 그 색이 막걸리를 닮았다. 구수한 숭늉을 한 모금씩 마시다 보면 보리밥이 나온다.
미리 준비된 그릇에 보리밥을 담고 나물만 얹으면 되니 주문 후 바로 맛 볼 수 있다. 청국장은 넉넉한 두부 때문에 먹음직스럽고, 다양한 쌈 채소들은 시장에서 공수 돼 싱싱하기 그지없다. 쌈장과 이집만의 비법 장까지 한 상 가득하다.
밑반찬부터 살펴보자. “열무김치랑 겉절이에 들어간 고춧가루는 전라도에서 농사 진 고추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저희 김치에는 과일을 갈아 넣어요. 될 수 있으면 조미료를 안 쓰려고...”
이 눈치 빠른 아줌마의 설명을 듣고 맛을 보니 과일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건 빛깔한번 죽여줬던 겉절이. 쩌리짱은 정준하가 아니라 여기에 있었다.
대접에 담긴 밥의 향부터 맡으니 참기름 냄새가 진했다. 보리밥 위에는 도라지, 호박, 콩나물, 고사리, 무채 그리고 유채까지. 제주도에서나 볼법한 그 귀한 몸 유채. 줄기를 삶아 무친 것으로 냉이나 달래처럼 향이 있기보다 첨가된 참기름 맛이 강했다. 이곳 보리밥의 특징은 쌈을 싸 먹는 일이다. 상추 대신 양배추 삶은 것에 다시마 한 장 깔고 그 위에 잘 비빈 보리밥을 올려 먹어보라. 양배추의 달달함과 다미사의 쫀득함을 느낄 수 있다.
한 참을 기다린 후에 칼국수가 나왔다. “시장 인심이란 게 이런 거다.”라고 알려주기라도 하듯 대접 가득 나왔다. 그렇다면 칼국수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요즘이야 흔히 먹을 수 있지만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특별한날에만 먹었다. 귀하디귀한 식재료가 밀가루였으니 아마 궁중이나 목 빳빳하게 들던 양반들만 먹지 않았을까? 공식적으로 밀로 만든 칼국수를 먹은 때는 바로 보리와 밀 수확이 끝났을 때인 유두(음력6월15일)로 갓나온 햇밀로 칼국수와 밀가루부침을 부쳐 먹던 기록이 있다.
국물부터 시식하니 걸쭉하면서 개운하다. 칼국수에는 홍합, 바지락, 미더덕, 보리새우가 들어가 있어 감칠맛이 난다. 면발 속 까지 간이 깊숙이 배있어 맛이 좋다. 다만 조리 시간이 길었던지 면발이 쫄깃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꼬들꼬들한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비추) 칼국수는 주문이 들어 온 후 바로바로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반죽은 미리 돼 있지만 밀고 썰고 끓이는 시간이 있어 성격 급한 사람에게 명상은 필수다.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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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랑여행총본산- 노매드(www.nomad21.com) 원문보기 글쓴이: 노매드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