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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양조씨원주목사공파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죠우
우리종회에서는 2013년 8월10일 2013년장학금후기 지급과 수련회를 원주목사공파종회 회의실에서 장학금수혜학생득과 고문단,임원진, 학부모님들이 참석하여 장학금지급및 수련회 행사를 마치고, 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의 시조단소를 방문하여 시조이하 6세조 묘소에 헌화하고 조상의 얼을 기리었습니다.
시조단소에 대종회 중행회장님, 시형 수석부회장님, 동원 양절공회장님들이 참석하시어 시조이하 양절공할아버지의 묘소유래 및 업적들을 묘전에서 후손학생들에게 설명을 하여 주시었습니다.
수련회 자료 올리며 장학금 지급 및 행사사진은 2013년 장학금 후기지급 및 수련회 행사 결과 알림(2)편에 올림니다
친애하는 원주목사공 후손 학생여러분!
기후변동으로 인하여 지루하게 긴 장마와 유난히도 폭염으로 모든 분들이 더위에 힘들어 하는 시기에 원주목사공 후손 수련회를 개최하게 된 점에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2010년도에 장학사업 준비 위원회를 발족하고 장학사업 위원회를 구성하여 장학기금을 조성하고, 내실 있는 장학 사업을 운영하기 위하여 타 종중들의 장학사업의 사례 등을 수집하여 2010.3.20.일 운영규정을 제정하여 2013년부터 장학사업을 시행하여,
금년도 2월00일 대학입학생 및 대학재학생 전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미복학자를 위한 후기 장학금을 지급하고 금일(8월10일) 지급하면서 수련회를 함께 시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개최하는 원주목사공 장학생수련회는
성장해가는 원주공 후손들에게 공의 얼과 후손으로서 알아야할 한양조씨의 뿌리에 대한 이해, 조상님들에 대한 숭조사상과, 나 자신이 알아야할 예의범절들을 알려주어 예의바른 후손으로서 학업에 열중하고, 또 종친간의 만남으로 인하여 친목을 도모하고, 나아가 원주목사공 가문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원주목사공 종회의 장학사업의 목적으로, 시행하는 장학 사업입니다
금년 수련회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참석치 못한 장학후손들에게 이해를 바라며, 2014년 수련회 행사부터는 이런 점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행사일정을 수립 할 것이니 이점 널리 양해를 부탁드리며, 오늘 개최되는 수련회에서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2013.8.10.
원주목사공파종회 회장 조 용 희
한양조씨의 유래와 내력
관적(貫籍)은 대략한 종족(宗族)이 한 지역에 누대를 살면서 걸출(傑出)한 인물이 배출될 때 비로서 득관(得貫)을 하는 국성(國姓-土姓)이 있고 나라에 큰 공이 있을 때 왕이 내리는 사성(賜姓)이 있는가 하면 외국에서 들어온 귀화민이 정착하면서 지명을 따서 관(貫)을 삼는 외래성(外來姓)으로 분류가 된다. 우리 한양조씨는 고려 고종(高宗45-1258) 때 동북면 쌍성 총관부 총관(摠管) 조휘(趙暉)가 한양에서 나왔다하여(고려사 130권 열전43-고종 45 戊午 = 趙(조)暉(휘) 本(본)漢(한)陽(양)府(부)人(인)後(후)徙(사)龍(룡)鎭(진)縣(현)高(고)宗(종)45年)한양조씨가 되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개적(改籍)하여 본관을 한양으로 사용하는 종족(宗族)이 생기었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사실적 관계로 살펴보면 조휘(趙暉)와 그 후손이 고 려 고종(1258년)이전부터 사용한 原(正統) 한양조씨가 있고 조선이 개국하여 개경에서 한양부로 천도(遷都)함에 조정(朝廷)을 따라와 정착 하면서 개적한 조씨가 있으니 조영무의 후손이고 별도로 개적한 조논걸(趙論傑). 조방보(趙邦輔) 조방좌(趙邦佐) 형제 후손들이 있다.
살피면 ◉조영무의 장자 조서(趙敍)는 국조방목(1399년)에 본관이 영흥(永興)으로 되어 있으나 졸기에 都(도)總(총)制(제)趙(조)敍(서)卒(졸)(1429년) 漢(한)陽(양)人(인) 忠(충)武(무)公(공)英(영)茂(무) 之(지)子(자)建(건)文(문)元(원)年(년)登(등)第(제) 朝(조)奉(봉)常(상)博(박)士(사)라 하였으니 영흥조씨에서 한양조씨로 개적한 것이고 조서의 父公인 趙英茂의 졸기를 보면 漢(한)山(산)府(부)院(원)君(군) 趙(조)英(영)茂(무)卒(졸)(1414년)上(상)欲(욕)辛(신)基(기)第(제)視(시)疾(질)仗(장)衛(위)巳(사)備(비)聞(문)氣(기)絶(절)而(이)止(지)悼(도)甚(심)素(소)膳(선)輟(철)朝(조)三(삼)日(일)賻(부)米(미)斗(두)一(일)百(백)石(석) 紙(지)二(이)百(백)券(권)賜(사)諡(시)忠(충)武(무)英(영)茂(무)之(지)卒(졸)也(야)라 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조영무의 父公과 본관이 명시되지 않고 있다. 조영무의 선대에서 아들 5형제에 이르기 까지 세거지가 영흥 정병진(세종 지리지)으로 추정되고 판도공파(조인재)족보 서문에 14대손 원국공이 이르기를 조서. 조질 형제는 개적 영흥이라 하였으나 이 두 형제는 모두 무후(無后) 되었고 아우들 삼형제도 이 시기에 한양조씨로 개적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註 - 조영무의 후손들이 趙仁才가 趙暉의 兄이라고 주장한다면 동 시대의 실존인물로 사록(史錄)에 자주 등장한 趙英茂와 趙仁璧. 趙仁沃은 三從 간이고 趙 溫과는 三從叔姪 관계이므로 혈연관계가 史錄에 나타나야 하나 전혀 없다고하고 나자신도 혹 우(愚)를 범하지 않나 하여 조선시대 인물사 연구학자 이모 박사 에게 질의 하였으나 혈연관계를 찾지 못 한다고 하니 조영무의 후손은 혈연관계를 사실 증명을 하고난 후 조인재가 조휘의 형이라고 주장 하여야 한다.
(조영무 는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25년 1530년]에도 본관 기록이 없고 동국 문헌비고-1782년부터 본관기록이 있다)
◉ 趙論傑의 족보상 입록 흐름을 먼저 살펴보면 1651년 제2회 족보 신묘보를 편수 할 때 첨지공 의(儀)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수단 제출한 것이 관(灌)옹(澭)형제와 사위로 정잠(鄭簪-변조). 황한우(黃旱雨-변조)이름만 있어 갑신 단권보와 완전히 다르므로 별록에 둔다하는 단서와 함께 족보에 등재된 후 1798년 무오보에 논걸이 처음 자손들과 등장 하면서 역시 배와 묘소 위치만 기록하고 있다. 1959년 기해보 까지 몇 번 별록에 있다가 1961년 논걸의 상석(床石) 비문 중 논걸의 출생 가정경인(嘉靖庚寅-明 世宗년호1530년)의 가정과 졸년 만력경술(萬曆庚戌-明 神宗년호1610년)의 만력을 정으로 마멸(磨滅)하고 1962년 양경공파 성하씨를 초빙하여 첨지공 임인 파보를 편찬 하면서 논걸의 生卒이 1470년 ~ 1550으로 60년을 상향하고 후손과 함께 관직과 생졸을 기록하여 비로서 족보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신묘보 후 352년만인 2003년 계미 대동세보 원보에 입록된 종족(宗族)으로 세거지는 철원 마전리(今-경기 연천군 신서면 마전리(現 民統線內))로 추정된다.
※ 註 = 양절공 趙溫 사패지(賜牌地)중 麻田土地 月字-今盈字筆地五結八負五束 - 철원 마전리는 한양에서 수백리 떨어진 오지(奧地) 산간 지역인 관계로 양절공 사패로 보기가 어렵고 한편 양절공 사패지 십군이 한양 백여리 내외 근교에 산재되어 있음으로 今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근교로 추정 되고 있으나 고증자료 를 통하여 밝혀내야 할 부분이다.
반면 史料를 보면 1396년 趙儀 가 적장손(嫡長孫-공신 장손을 말하며 충훈부에서 관리하고 벼슬이 從二品에 오르도록 도와주는 은전이 부여됨)에 책봉되어 벼슬이 첨지(僉知)에 이르고 1412년 졸하자 趙儀의 子 관(灌)이 아닌 아우 趙琓이 습봉(襲封)하여 지중추원사에 이르고 한풍군에 봉(封)하여 지고 1440년 졸하자 장자 趙璔이 습봉하여 대호군에 올라 五功臣會盟祭(1456년)에 참석한 기록과 가사(家史)기록물인 양열공. 양절공 비문 손록(高孫까지 기록함)에 論傑까지 기록이 있어야 하나 전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관(灌)과 옹(澭)은 趙儀의 子가 될 수 없다.
◉ 趙邦輔. 趙邦佐 兄弟 = 1988년 제주도 선현지에 의하면 한양조씨 11세손 조방보. 조방좌 형제가 입도(入島) 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으나 실체는 선계(先系)를 모르고 남원에서 왔다하여 후손들이 남원 조씨로 있다가 1960 년초 한양조씨로 개적한 조씨로 세거지가 제주도인 종족이다.
현재 일부 소수가 한양조씨 대동세보 조영무의 후손으로 계자되고 일부 소수는 참판공파 정랑공 파보(2004년 돈계공파 후손)에 부사공(부사공파) 秀武의 子 무후(無后)가 된 千同 손으로 임의 계자 되어 있다.(수찬-조주형. 조용구.) ※ 천동(9세)과 系代가 맞지 않는다.)
◈ 정리하면 原 한양조씨 기준(1258년 趙暉 孫-세거지 한양→용진→한양). 약 180년후(1400년 중반)에 개적한 한양조씨(趙英茂 孫-세거지 영흥→한양). 약 390년후(1651)에 개적한 한양조씨( 趙論傑 孫- 세거지 철원). 약700년후(1960년대) 개적한 한양조씨(趙邦輔. 趙邦佐 兄弟 孫- 세거지 제주도)하여 4 종족(宗族)으로 307,746명 95,206가구(2000년 통계청)로 구성되어 있으나 두(2) 종족은 선계가 분명 하지 않아 趙英茂의 후손은 원(原) 한양조씨(정통 한양조씨) 시조인 조지수(趙之壽)의 장자라고 하고 趙論傑의 후손은 정통 한양조씨 6세조인 趙溫의 長子라고 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족보는 종족간 혈통(血統)을 고증하는 중요한 자료로서 구분 하는것이니 趙暉의 후손들만 기록하는 보서(譜書)는 족보(族譜)라 하고 趙英茂의 후손들만 기록하는 보서도 족보라 하겠으나 시조에 趙之壽를 넣게되면 도용(盜用하는 것으로 옳치 못하고 상계(上系)에 趙暉와 그 후손이 들어가면 派譜를 면(免)치 못하며 종족간 의기투합하여 함께 보서를 하면 대동보(大同譜)가 되는데 그 사례로 漢陽趙氏 大同世譜(2003년 계미보)가 있다. 참고삼아 계미 대동세보를 살펴보면 趙暉 후손 일부와 趙英茂의 후손과 趙論傑의 후손이 의기투합한 보서로서 시조는 조휘 후손이 있어 하자가 없으나 손록에 문제가 있다.
족보 편수에 있어 상계는 구보(舊譜)에 의하고 손록은 전보(前譜)에 기대 여 계속 이어가는 연속성의 원칙이 있는데 반하여 계미 대동세보는 족보 단자(族譜單字)가 없는 종인가(宗人家)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20세 이하 (재세시기-대략 1700년대 중반 ~ 1800년 중반대) 손록을 일률적으로 삭제하여 후손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있어 후손록의 연속성 기능을 훼손하여 훗날 족보편찬 할 때에는 일부 종족은 계미 대동세보를 근거하여 후손록을 연계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대다수 종인들은 족보 상식이 적어 족보 개념과 중요성을 잘 모르고 나만 족보에 기록하여 나만 보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앞으로 종족(宗族) 역사 개념에 심히 우려되고 단적으로 말 하면 나만 보는 족보는 가승보(家乘譜)요 종족이 다 함께 참여 하여 종족간 원근(遠近)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족보라는 것을 유념하여야 한다.
일부 종인들이 대동보를 함께 하여 종족이 다른 조상이 족보에 등재되어있다 하여 내 조상으로 생각하고 참배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서 자기 조상도 잘 모르는 우매(愚昧)한 사람으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조상이 없는 사람 없듯이 가문(종족)의 역사는 나라의 역사와 함께 중요한 것으로 조상을 바로 알아야 품행이방정하고 숭조사상과 효심이 발생하며 무릇 훌륭한 현조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몸가짐을 바로하며 말을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우리 후손들은 오늘을 더불어 살면서 족보가 다르고 종족이 다르다하여 서로 반목하여서는 안 되고 같은 종족이거나 같은 한양인의 인연이 있음으로 더욱더 돈목 하여야 할 것이
정통 한양조씨 대종회 인터넷족보 편찬위원회 謹 書
※참고 : ① 1922년5월31일 경성지방법원판결 조인재는 한양조씨가 아니다 판결.
1979년피고 궐석 서차판결 조인재는 조지수의장자다.
(총관공 후손 대응하지 않음)
정통대종회에서 통합대종회의 족보발행 및 배포금지 소 제기
2004년(2003년 대동세보 발행 배포한 후) 원고 기각.
② 1921년 조논걸이 양절공의 장자다 소 제기- 원고 스스로 소 취하
2010년 서울지방법원 - 논걸의 후손은 양절공 후손으로 볼수 없다.
시조설단 단소 전경
設壇 의 顚末
1945년 세계 2차 大戰 의 종식과 함께 우리 민족에 또 다른 시련을 맞게 되니 美 ․ 蘇 양 대국의 힘의 논리와 사상 대결로 전대미문(前代未聞) 의 38선을 그어 북은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소련이 통치하고 남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이 통치하게 되니 약소국 한민족이 둘로 나뉘어 부모 형제간 왕래도 하지 못하고 소식마저 전할 길이 없게 되니 그 억울하고 분함을 하소연 할 곳도 없고 다만 땅을 치고 울며 탄식하는 소리 하늘에 메아리 되어 산산이 부서 질 뿐이다. 양 대국에 의한 사상적 이념 대결이 극에 달하니 급기야 공산주의 이념 통일의 명분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쪽을 기습하니 같은 민족 형제 들이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으며 생활터전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고 밀고 밀리는 처절한 3년 동안의 전쟁에 한국군과 유엔군77만여 전사자와 인민군과 중공군 전사자 200여만 명 및 민간 피해자 249만 여명의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도 천인공노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상처는 깊어만 가고 남북 분단은 고착화 되어 반세기(半世紀)가 흐르도록 북에 계신 조상님을 봉심할 길도 없고 제향마저 올리지 못하게 되어 양경공파에서 궁여지책으로 중시조인 양경공 묘역에 시조공만 설단하여 향사를 올리고 있는 실정이 되었고 시조 이하 4위는 궐사하는 실정이며 대종회 차원의 향사도 아니고 하여 남한에 거주하는 효성스런 후손들이 북에 계신 조상님의 향사라도 올리기를 오매불망(寤寐不忘)하나 여의치 못하고 뜻을 모으지 못하고 있던 중 전 대법관이자 제12대 대종회 회장인 승형 회장님께서 뜻을 한데 모으고 한풍군파 가산공 후손 일형 형제가 광주에 살면서 대학교를 설립하여 운영 하던 중 이소식을 듣고 효성심이 지극한 나머지 설단 비용 전액을 쾌척하여 2004년 갑신 4월 17일 각파의 효종(孝宗) 200여명이 참석하여 장황하게 설단을 하여 향일사를 하게 된 것이다.
■ 始祖 諱 趙 之 壽 本貫 - 漢陽 ( 1200년경? ~ 1263년)
제향 음 3월 1일
문중 최초 족보인 갑신보에 문절공 원기공의 서문에 이르기를 우리 한양 조씨는 한양의 (今-서울)의 명망있는 종족(宗族)으로 8세조에 지수라는 이가 있어 그가 용진(今 원산시 용진동)으로 이사(移徙)하시었다 하시었고 사록(史錄)에 본관 기록 은 2세조이신 조휘 공이 1258년 쌍성총관(元의 從二品)이 되시면서 려사절요 (麗史切要)에 나타나기 시작 하였고 첨의중서사 벼슬도 최초 족보인 갑신보 (1524년)에는 기록이 없던 것을 1533년? 괴서(조영무의 후손「추정」이 위증으로 작성한 가계보)를 갑신보 후편에 붙여 유포한 후 부터 검증 없이 사용하기 시작 한 관명으로 관명 사용이 적절한가 하는 검토가 필요하다.
- 묘소 : 영흥 서면 운곡동(寺洞)이나 실전하다.
※ 중서 - 고려 문종19(1065년) ~ 충렬왕1(1275)까지 문하성의 從四品부터 從二品에 이르는 官階로 서무를 총괄하고 간쟁(諫諍)을 담당하는 부서로 고려에서 총 42명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이중에 조지수란 이름은 없다고 한다. ※ 중서령-문하성 從二品 ※ 지금의 행정 안전부-내무부에 해당함.
■ 二世祖 雙城摠管府 初代 摠管(元의 從二品) 諱 휘(暉) ( ? ~ 1271)
제향 음 3월 1일
고려사(高麗史) 130권 열전(烈傳) 43 고종45-戊午(1258년)에 조휘(趙暉)는 한양부
(漢陽府) 사람으로 후에 덕원부 용진현(德源府 龍津縣-今 원산시 용진동)에 옮겨와 살았다 하는 기록이 있어 최초로 한양조씨로 득관(得貫) 하시었다.
총관공 전(傳)에 조휘는 본래 한양부 사람으로 후에 용진현에 옮겨 살았다. 고종45년에 몽고 병이 크게 쳐오므로 고주. 화주. 정주. 장주. 의주. 문주 등 15주 사람들이 저도(猪島)로 들어가 보전 하고 있는데 동북면 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이 저도는 성이 크고 사람은 적으므로 지키기 어렵다하여 15주 사람들을 죽도(竹島) 로 옮기려 하였으나 죽도는 좁게 막혔고 우물도 없으므로 사람들이 싫어 하니 집평이 강제로 사람들을 몰아넣었으나 모두 도망하고 들어간 자 10. 2 ․ 3이고 쌓아 놓은 식량이 거의 떨어지게 되자 집평이 조정에 식량을 청하여 운반하는 동안 경비가 허술 하여지자 暉는 정주사람 卓靑과 등주. 문주 제성의 사람들과 더불어 합의하여 몽고병 을 끌어 들여 틈을 타서 신집평과 등주부사 박인기(朴仁起). 화주부사 김선보(金宣甫). 경별초(京別抄) 등을 죽이고 고성을 쳐서 화주 이북을 몽고에 붙였다. 몽고는 이에 쌍성총관부를 화주에 두고 趙暉로서 총관을 삼고 卓靑으로 천호를 삼았다.( 절요 고종 무오년 12월조)
이듬해(1259년) 휘 등은 궁인(宮人)을 거느리고 몽고병을 끌어들여 한계성 (寒溪城)을 치니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밤에 별초를 이끌고 와서 쳤다. 고려왕은 랑장 김기성(金器城) 별장 곽정유(郭貞有)를 시켜 나라의 예물을 가지고 Ⓑ몽고병 주둔지에 가서 위문케 하였는데 기성 등이 문주에 이르 렀을 때 휘 등이 보성역에 있다가 몽고병 30여명과 더불어 기성 등 따라간 종들 13명을 죽이고 나라의 예물을 빼앗아 갔다.
얼마 안되어 동진국(東眞國)군을 끌어 들여 춘주 천곡촌(今-춘천)에 주둔하고 있는데 신의군(神義軍)이라는 5명이 몽고장군 라 대사(羅 大使-車羅大를말함)라고 자칭하면서 그대의 활과 칼을 끌러놓고 원수(元帥)의 계(啓)를 들으라 「고려 태자 에 명하여 장차 입조(入朝)하려 하였는데 그대가 어찌 고려 사신을 죽이고 나라 의 예물을 빼앗아 갔는가?」 하였으나 휘 등은 듣지 않았다.
원종 12년 양주 백성 장세(張世) 김세(金世)등이 장차 몽고에서 국문(鞠問)을 당할 것이라고 속여 수령과 아전. 선비를 죽이고 먼 곳으로 도망 하려다 발각 되어 그 남은 무리들은 복주(伏誅) 되었는데 천서(天瑞)등 8명이 숨어 들어와 휘 에게 투항 하면서 군사를 청하여 휘는 400여명을 주어 갑자기 양주로 처 들어가 주지사(州知事) 양반들을 묶어 놓고 「인민을 꾀어서 거느리고 섬으로 이사해서 살려고 한다.」 하고 협박해서 화주로 옮기려 하므로 고려왕이 달로화적[達魯花赤- 穆祖(李安社-이성계5대조)]에게 청하여 사람을 보내어 천서를 효유 하였으나 천서는 듣지 않고 지사. 아전. 백성 1천여명을 거느리고 돌아갔으므로 고려왕은 몽고에 아뢰어 천서 등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황제는 서경(今 평양)에 와 있는 지필가(只必哥) 에게 사실을 물어 보게 하였으나 이때 휘는 몽고로부터 돌아와서 「내가 양주사람이 실로 상국(上國)을 좋아하여 들어온 것이지 내가 그 백성을 마구 몰아 온 것이 아니라 하였더니 Ⓒ황제는 곧 조서(詔書)를 내게 주면 서 묻지 말게 하였다.」 하였으므로 Ⓓ지필가는 드디어 묻지 않고 돌아갔다. 라고 총관공 열전은 기록 하고 있으나 고려사절요와 몇 군데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어 참고적으로 제시 한다.
※ 참고 :
○ 복주(伏誅) - 토벌하여 죄를 묻고 죽인다는 뜻
○ 유민(流民) - 도민(逃民)이나 망호가(亡戶家)가 생활 근거지인 본적지를 떠나 타향으로 방랑이산(放浪離散)하는 무리로 유민의 발생은 그 지역 농촌의 자원고갈로 이어져 농촌 경제가 피폐되어 파탄에 이르는 심각한 문제로 야기된다.
○ 총관공 열전과 고려사와 비교하여 지적하면?
Ⓐ 방호별감 안홍민이 밤에 별초를 끌고 와 쳤다,- 고려는 삼별초를 파견 하여 적을 물리 쳤다.
Ⓑ 몽고병 주둔지에 가서 위문케 하였는데.... - 휘 등이 침입을 막은 안홍민 에게 보낼 예물을 문주에서 노략질하여 갔다. 하였으니 몽고병 주둔지가 아닌 안홍민의 주둔지 이다.
Ⓒ 황제는 곧 조서를 내게 주면서 묻지 말게 하였다. - 조휘가 지필가에게 양주인이 실은 스스로 상조(上朝-元)에 납관(納款)한 것이고 내가 그 백성을 구박한 것이 아니다. 하여 지필가는 묻지 않고 돌아갔다.
Ⓓ 지필가는 드디어 묻지 않고 돌아갔다.
- 필자(筆者-蒼海)는 史學者는 아니고 학자들이 써놓은 것을 인용하는데 불과하나 이 대목에 의구심을 가져본다.「 고려 24대 원종 12년(1271년) 고려에서 원나라에 天瑞등 유민 발생 책임을 강력히 요구한 해가 총관공이 졸하신 해와 공교롭게 일치하고 당시 정치 상황으로 보아 동북면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홍복원에 버금가는 막강한 총관공의 세력 은 고려의 눈엣 가시이고 고려로서는 총관공을 제거하여 기세를 꺾어 놓고 쌍성총관부를 길들일 충분한 명분이 되었으며 홍복원의 사례가 있고 몽고로서는 지나친 세력 확장은 원치 않았을 것이고 다만 포섭책 으로 어느 한편을 옹호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고 연경이 아닌 고려에서 미리 와 있던 지필가가 문죄 한 것은 의미를 달리 하므로 지필가의 암시적 묵인 하에 고려에서 암살하였을 가능성을 배제 하지 못한다고 본다.」
○ 쌍성은 본래 금나라 때 요동 함주로 부근 심주(瀋州)에 있었으나 고려의 화주(영흥)에 소성(小城이) 두개가 있다하여 그곳에 조휘. 탁청이 있어 쌍성총관부로하고 쌍성총관부가 소멸하자 다시 길림성 쌍성보(雙城堡)에 두었다고 史家들은 말하고 있다.
註 : 논문이나 사서(史書) 를 통한 쌍성총관부 설치 와 배경.
동북면은 몽고의 침입으로 유민이 발생하고 몽고의 지나친 공물의 요구로 착취가 심한 고려의 지배와 몽고의 지배로 이중적 간섭과 이중 과세로 백성의 고통은 심화되고 농촌 경제가 피폐되어 굶주림에 시달 리니 민심이 흉흉하여진 상황에서 몽고가 재 침공계획을 하니 동북면 절도사 신집평이 淸野戰術로 죽도에 강제로 入島하게 하니 15개주에서 다시 유민이 발생하고 살아남기 위한 민심은 완전히 몽고 쪽으로 기울 어져 민심에 따라 총관공께서 탁청과 함께 유민을 구제하고 동북면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관원을 도륙하고 몽고에 붙인 것이다.
고려를 배반하였는가는 史觀에 따라 다르니 정도전(태조:고려사 편찬) 김종서(세종:고려사 보완으로 고려사 절요 서술)는 열전에 붙이고 정인지(세조:고려사 찬술)는 역적(차종손 성면공) 으로 몰으니 오늘날 모든 서적에 만고의 역적이 되었다.
■ 三世祖 雙城摠管 兼 東征軍 副元帥 諱 良琪(1258 ~ )
제향 음 3월 1일
13세(1271년)에 습작(襲爵)으로 쌍성총관이 되시고 23세(1281년) 때 원세조가 흔도・다구를 도원수(都元帥)로 고려 김방경을 원수로 삼아 일본을 정벌함에 고려 충열왕이 공에게 따라가게 명하니 고려 조정에서 나이 어리다고 막으므로 공이 분개하여 「양기가 비록 나이 어리나 이미 작을 물려받아 부하고 귀 하였으니 어찌 어렵다고 사양 하겠습니까? 그러면 군문에서 무예를 시험해 보기를 청합 니다.」 하였더니 왕은 원수와 더불어 크게 기특히 여겼다.
마침내 원수는 패하였어도 공은 홀로 군사를 보전하여 이기고 돌아왔으니 그때 나이 21세다. 세조가 금포와 옥대를 내리면서 「그대가 아직 장가들지 않았으니 이것을 입고 동쪽으로 돌아가서 어진 배필을 얻고 아름다운 자손을 낳아 대대로 나의 자손에게 정성을 다하기를 그대가 지금 내게 하듯이 하라」하였다.
혹은 이듬해(1282년) 반원군 잔당인 합단군(哈丹軍-哈赤溫의 후손)이 철령으로 넘어 온것을 합단만 물리치고 30명의 포로를 잡아 바치어 그 공이라고도 하는데 이 모두가 비기(碑記)에 흩어져 나온 말이다. 하며 문중 문헌은 기록 하고 있으나 필자가 史記를 보아 21세에 부원수가 되셨다함을 23세(1281년) 로 고치고 또한 21세 때 元帝로부터 금포와 옥대를 하사 받았다 하고 있으나 문절공 서문대로 27세(1285년)가 맞으며 합단군 운운은 잘못 되었다.
<高麗史記 요약 - 2차 동벌(1281년)로 몽한군(蒙古軍. 汗國軍) 약 4만. 고려군 약 2만7천명으로 6월10일 대마도를 거쳐 일기도를 공략하면서 후원군인 번자군 (남송이 망하여 항복한 군)10만여 명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번자군이 풍랑으로 전멸하고 일기도도 풍랑이 심하여 익사자가 속출하며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창궐하여 부득이 철군 하였고 10월 보고에 따르면 고려군 생환자가 19,397명 이니 약 7,600여명이 전사 하거나 익사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부원수도 고려군 부원수만 기록하고 쌍성총관군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장재성의 논문에 의하면 麗史나 元史에 1287년 내안(乃顔)이 반란하고 그 잔당인 합단군(哈丹軍)이 1290년 5월에 해양(길주)에 침입 하였으나 麗元 합동군 이 곧 물리 쳤고 1292년 마지막으로 합단은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등주(안변). 화주(영흥) 까지 침입 했으나 곧 물리쳤다> 하니 년대가 맜지 않는다.
공의 나이 21세는 1279년에 해당되므로 동정(東征) 과 포상과는 무관하고 문절공 서문에 27세에 元帝로부터 포상 받으셨다 하였으니 27세는 곧1285년이다 기록은 아직 찾지 못하였으나 2차 동벌이 있은 후 4년이 되었음으로 事例에 부합하다.
玉帶 는 한양조씨 보물이 되다.(요약함)
1281년 23세 때 원세조의 동벌(東伐-日本)정책으로 부원수로 쌍성군을 이끌고 고려 상락공 김방경을 따라가 전공을 세우고 돌아와 27세 때 그 공으로 원세조 로부터 금포(錦袍)와 옥대(玉帶)를 하사 받아 전해오면서 후손들이 돌려가면서 관혼에 사용하여 금포는 낡아 없어지고 옥대만 728년간이나 전하여지고 있는데 옥대에는 옥 덩이가 무려 스무 개가 있어 둥글고 모가 나서 복숭아 같은 것이 여섯 개인데 각각 앞의 좌우편에 배열하고 반듯하게 네모난 홀(笏)모양을 한것이 열개인데 그 한 개는 끼우는 어구에 있고 9개는 연해서 후면 좌우에 붙였다. 네모나고 길면서 작은 것도 네 개로서 두개는 끼우는 좌우에 있고 두개는 세원서 허리 양쪽에 붙였다.
그 무늬는 얕은 붉은 색으로 안에 빨간 좁살 같은 모양을 품고 있어 낱낱이 똑같았으니 비록 단청을 잘 하는 자 일지라도 이런 형상으로 그릴 수는 없어 참으로 천하의 보배인데 후세에 전해 가면서 지키는 자는 늘 귀하고 드러난 자에 따라 보관 하여 주인이 따로 없더니 용인 열원지방에 있을 때 집에 화재가 나서 가재가 모두 불타 버렸는데 옥대만은 뜻밖에 동산(정원이라고도 함)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으나 다만 복숭아 같은 옥 한덩이에 세군데가 깨어져 없어진 흔적이 있고 홀 같은 덩이 한 개가 반이 깨어져 없어 졌다.
교리공 휘 수인(秀仁) 때 박물장수 노파의 광우리 속에 반 조각 옥이 있어 깨어진 홀에 맞추어 보니 딱 맞아 사서 붙이니 옥 덩이는 완전 하여 졌다.
이후로부터 제종은 잃어버릴 것을 염려하여 한강을 건너보내지 않기로 약속 하고 있던 중
1864년 고종 원년에 흥선 대원군이 보기를 청하여 대궐로 가지고 가서 주상과 조대비가 애완하였으며 대원군이 이것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보배라하고 공장(工匠)에 명하여 낡은곳을 고치게 하고 비단으로 싸고 금으로 보충하여 환하게하고 손수 어람옥대(御覽玉帶)라 쓰고 예조 판서 성교(性敎-고사공파)에게 주면서 고가(古家)의 보배를 본 손에 주는 것은 주상의 명령이니 독(櫝-함)을 만들어 잘 보관하고 후손에 전하라 하였으니 1867년이다.
1882년 한경원 판서를 시켜 홍문관 종필(鍾弼-초대약장-성교 자)에게 다시 보기를 청하여 그 왕복한 글에 「홍 옥대는 두 번째 보는 것 인데 아직 여기 두는 것이 어떠한가?」하고는 돌려주지 않고 있다가 1897년 흥선대원군이 죽자 공덕리 (孔德里) 묘원의 명기(明器-부장품)되어 있던 중 1907년 에 「왕의 예로 개장(改葬) 하라」는 명이 있었다.
이에 참서 종만씨가 흥선군의 임오년(1882년) 답서(答書)를 가지고 완흥군(載冕) 을 보고 말 하였더니 유교(遺敎)에 「이 띄는 조정승 성유(聖惟-문헌공 성교 자)가 내게 준 것이니 죽은 후에 예물 페백으로 쓸 것이다」하여 관속에 넣은 것이니 줄 수가 없다 하므로 참서공이 깜짝 놀라 근 천년동안 대대로 내려온 문중 보배이고 수십만 공동의 물건을 개인이 줄 권리가 없으며 나의 종숙(성유)이 죽은 것은 1876년이고 옥대를 빌려 간 것은 1882년이니 어찌 엉뚱하게 틀리는가? 이것은 마땅히 돌려줘야 한다 하였다.
다시 그(완흥군) 누이의 아들 참판 조한국을 시켜 돌려 줄 것을 간곡히 권하였 으나 오히려 아까워하여 다시 검찰 당상으로서 천원소(遷園所-개장하는 사무를 맡은 관청)를 맡고 있는 승지 김각현을 시켜 완흥군에게 부탁하게 하여 완흥군 아들 영선군(埈鎔)을 보고 임오년 답서 가운데 여기 둔다는 말은 준 것이 아니고 빌린 것 이라고 증거를 밝히니 개장 할때 영선군이 완전한 형태도 돌려주니 1907년 10월 23일이다. (26년만에 돌아옴)
1908년 봄 판서공이 참서 및 부경 종서(鍾緖)와 더불어 서울서 가까운 제종에게 통고하여 30원을 모아 옛 제도에 따라 띄의 가죽을 장식 하는데 배면에 비단 으로 싸고 옥 덩이가 에 도금(鍍金)한 것을 물리고 금으로 매화 한쌍을 새겨 좌우에 붙이고 한양조씨세보(漢陽趙氏世寶)라고 내부에 수를 놓아 보라색 비단에 솜을 넣어 보자기를 만들어 옥대를 싸고 판서공 집에 감춰 두었더니 1913년가을 종호(鍾灝)가 종서와 더불어 세상이 변해가니지 손의 집에 보호하고 감춰두는 것보다 세전지물(世傳之物)은 조상의 사당에 간수 한다는 뜻에 따라 양절공의 사당에 옮기는 것이 옳다하여 판서공에게 문의 하니 판서공도 옳다하여 종손 필원(弼元)의 집으로 봉안하고 혹 보수하는데 소루한 페단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종호를 시켜 종약을 쓰니
1, 옥대는 철궤에 넣어 부조묘(不祧廟)에 보관하고 대대로 전하되 반드시 종손 이 보관하고 이전하는 일이 없을 것.
2, 혹 닳아 흠이 생기거나 수를 놓은 것이 벌레 먹었을 때는 별도로 계획하여 수리 할 것.
3, 원래에 종족가운데 혼례가 있을 때는 옮겨다가 쓰던 예(例)가 있었으나 지금부터는 5리 밖에는 빌려주지 못 할 것.
이라고 쓰고 이 사항을 모든 종족에 통고하여 전하여 오니 돌이켜 생각할 때 700여년 전해지면서 세번씩이나 이상한 일을 겪으면서 온전한 것은 신물(神物)이 아니고서는 이와 같지 않을 것이고 더욱이 참서 종만(叅書 鍾萬)공의 노고가 없었으면 영원히 땅속에 묻혔을 것이고 판서공의 옳은 판단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나 세상이 다변화 되고 종손의 잦은 이사로 아파트에 거주하게 되니 보관 하기도 어렵고 분실 염려가 있어 제종들과 논의 끝에 2001년 서울 시립 박물관 에 기탁 보관하니 등록 나-1계 제 13525호 이다.
■ 四世祖 龍城府院君 諱 暾(돈) ( 1308년~1380년)
제향 음3월 1일
초명은 祐이니 20전에 고려 충숙왕 때 입조하여 벼슬하고 1356년 공민왕 때 쌍성 이북 九州十鎭을 수복하고 건너뛰어 예빈경에 제수되고 개경에 저택을 하사 받았다.
1359년 서경(今 平壤)을 점령한 홍건적을 격파하여 쫓아버리고 1360년 판사농시사에 제 수되고 1361년 공부상서에 전보되고 1362년 해주 목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예의판서 검교 밀직부사로 들어와 1363년에 홍건적을 격파하여 일등공신에 기록되고 1372년 우봉현(今 금천군 우봉면)으로 퇴로 하였는데 1375년 우왕 원년에 삼중대광 용성군에 봉작되고 1379년 용진으로 돌아와서 치력황실(致力皇室)이라는 네 글자를 써 놓고 자제들을 훈계하 였다.
1380년 10월 1일 졸하니 증 추충익대보리찬화좌명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용성부원군 문 하좌시중 판예의사사상호군( 贈 推忠翊戴輔理贊化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龍城府院君
門下左侍中判禮儀司事上護軍)에 봉작 되었으니 고려사나 윤소종(동지춘추관사)이 지은 조 돈 열전에 나타나 있으니 간략하게 대충을 기록하면 1356년 공민왕이 옛 땅을 수복하려 고 유인우(柳仁雨) 를 동북면 병마사로 삼고 공천보(貢天甫). 김원봉(金元鳳).과 강원도 존 무사 이인임(李仁任)을 보내니 이들이 철령을 지나 등주에 이르니 이백여리 밖 쌍성에 있 던 총관 소생이 놀라 탁도경과 함께 숙부(暾)를 불으니 돈이 도착하자 항거할 계획을 세우 고 위협하기를<숙부는 고려에 벼슬하여 여러대 임금의 사랑과 대우를 받았으니 오늘날 숙 부가 남으로 고려를 향해 가면 쌍성땅 12성에는 누가 나를 즐겨 따르리오> 하면서 연금 하였다.
인임과 인우는 돈을 믿고 납서를 보내니 돈은 이내 납서를 읽고서 감추어 버리고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협객 조도적(趙都赤)이 백호가 되어 소생의 참모로 있어 도적을 효유하니 도적이 깨우치고 눈물을 글성 거리며 숙부는 나를 살렸다. 공이 먼저가면 나도 쫒아가겠다 하므로 아우 천주(天柱)를 데리고 몸만으로 삼기강에 이르러 배를 타고 용진으로 와 부인 은 바다로 배를타고 등주에서 만나게 하라 하고는 하루 밤에 네 아들 인벽. 인경. 인규. 인옥을 데리고 말로 200여리 달려 등주의 유인우 진영에 도착 하였다.
돈은 쌍성수복의 계획을 세우며 두 철부지(소생. 도경)는 장차 북으로 달아나려 하고 쌍성 사람들은 모두 산골에 숨어 있어 지금 대군을 몰고 가면 놀라 도망 할 것이니 아들 인벽 을 보내서 깨우치는 것이 낫겠다 하니 인우도 그럴듯이 여겨 인벽과 지통주사 장천핵(張 天翮)을 보내니 쌍성 사람들이 조별장이 왔으니 우리는 살았다 하면서 서로 이끌고 와서 항복하고 관군을 환영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밀고 하기를 기철(奇轍)이 배반한 쌍성백성과 연락하여 총관을 원조 한 다 하니 쌍성등지 천호 이자춘(李子春-桓祖-吾魯思不花)과 병마판관 정신계(丁臣桂)의 내 응과 인우의 공격으로 쌍성총관부를 함락하니 소생과 도경은 처자를 버리고 이판령(伊板 嶺) 북쪽 입석(立石) 땅으로 도망하였으니 화주. 정주. 장주. 예주. 고주. 문주. 의주와 선 덕. 원흥. 녕인. 휘득. 정변진등 제성과 합란. 홍헌. 삼살 수복하였으니 원에 항부한지 99 년만에 수복 된 것이다.
신계가 군사를 거느리고 이판령(今 磨天嶺)을 넘어 여진을 격파하고 괴수 첩목아(帖木兒) 를 베어 머리를 베어 서울로 보내오고 인우는 단주(端州) 이북에서 재물을 탐내어 사람을 마구 죽였는데 도적이 인우 진영에 있으면서 왕을 뵈니 왕은 호군(護軍)을 제수하고 금부 (金符)를 내려 동북면 천호를 삼고 여진을 어루만지게 하였는데 인우가 이를 시기하여 죽 여 버렸다.
소생과 도경은 여진 접경에 숨어 있다가 형세가 궁하여 항복 하고자 하다가 도적이 피살 되는 것을 보고 옥새(玉璽)를 찍은 글을 보아야 항복 하겠다하여 1359년 왕이 새서(璽書) 를 가지고 돈을 보냈는데 돈이 등주에 이르러 배로 반달만에 해양에 이르러 새서를 내렸 더니 소생이 항복하고 돈을 따라 입조하려다가 다시 다른 뜻을 품고 무기를 감추고 기다 리고 있으므로 돈은 곧 등주로 향하여 돌아왔다.
※ 참고 : 쌍성인 조도적(趙都赤)- 백씨통보나 어느 사가는 천주의 아들이라고 하나 조돈 열전에서 밝히듯 우리 조상과 도적의 조상은 모두 한양에서 왔다.
■ 五世祖 漢山伯 諱 仁璧(인벽) (1328~1393)
제향일 음 3월 1일
호는 우계(愚溪) 또는 해월정이니 용진에서 태어나시고 고려 공민왕이 1356년 5월 동북면 수복을 단행 하니 아버지 용성군을 따라 유인 우진영서 공을 세우니 숨어 있던 쌍성 백성을 초유하여 따르게 하고 오노사 불화 이자춘 부자(이성계) 내응과 더불어 쌍성 수복에 공을 세워 호 군이 되고 1359년 안우. 이방실과 더불어 서경을 수복하고 1362년 2월 김용(金鏞)의 난을 토벌하여 이등 공신이 되고 1372년월가주 지방의 민란에 판사로 임명되어 완전히 평정하니 만호(萬戶)로 승급되고 그해 안주. 변주. 함주. 북청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술로 격 파하고 적 70구를 참살하여 봉익대부가 되고 1375년 승려 석기(釋器-충혜왕의 庶동생)의 역모사건을 지혜로 평정하여 밀직부사로 승차하고 1377년 동북면 원가 되어 신주. 옹진. 화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화포를 사용하여 격파시키고 수군에 화포 제조기술과 화포사용법 훈련으로 수군력을 향상시키고 1379년 도적이 계림부에 침입한 것을 강능도 도원수 겸 부윤이 되어 평정하고 1380년 강능 도 상원수가 되어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고 1382년 강능도 부원수 권현용과 더불어 적병30여구를 참살하고 1385년 도적이 교주도에 침입하니 四道 道指揮가 되고 이때 벼슬은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 삼중대광용원부원군 삼사좌사 겸 판소부시사 (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三重大匡龍院府院君 三司左使 兼 小府侍事)가 되시고 1388년 明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 하려하자 명공(明攻) 정책이 실시되고 이때 사도도지휘사 겸 교주도 원수로 개경을 수비하고 있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때 말안장과 무기를 회수하여 이성계를 돕고 삼사좌사를 거쳐 1389년 판의덕부사가 되고 1390년 회군 이등공신에 책록되고 이성계의 혁명 조짐에 고려의 天命이 다함을 알고 不事二君의 절개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대포진 수자리 군관거주지 로 낙향하여 유림은 물론 과거를 준비하는 학유들을 문덕으로 계도하여 무수한 인재들을 배출하였으며 해변에 해월정을 짓고 詩友 정만이. 장년. 도승 혜선 등과 시흥과 풍류로 소일 하였으니 시로는 해월정시가 전하여져 조산리 동명서원에 편액 되었으며 1393년 졸하시니 朝鮮朝에서 증 추성양절익위보리좌명공신 보국숭록대부 문하좌정승 판도평의사영사경연사 한산백(贈 推誠亮節翊衛輔 理佐命功臣 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判都平議司領事經筵事 漢山伯)에 봉작되시고 시호를 양열(襄烈)이라 하고 1393년 7월 조선개국2등 공신에 추증 되었으며 「동사찬요」에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三徵七辟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켜 應하지 않으니 양양사람 들이 공의 충절과 덕망과 풍습을 德和로 순화시킨 고귀한 정신을 기리며 崇慕賢人으로 모시어야 한다는 儒賢들의 염원어린 글이 있다.
공의 유작으로 동명서원에 편액된 五言律詩인 해월정(海月亭) 시를 소개하면.
蝶趐勳名薄 (접혈훈명박) 龍腦富貴輕 (용뇌부귀경)
공훈과 명예는 나비날개와 같이 얇기만 하고 용뇌같이 여기는 부귀는 가볍기만 하여라.
萬事驚秋夢 (만사경추몽) 東窓海月明 (동창해월명)
모든 일은 가을밤 싸늘한 꿈에 놀라 깨는 것이니 다 잊고 동창에 비친 바다의 달이나 처다 보자.
淡淡西山月(담담서산월) 靄靄空中雲 (애애공중운)
서산에 걸친 달은 희끄므래하고 공중에는 구름이 길게 뻗쳤네.
山人不畏虎 (산인불외호) 永夜不掩門 (영야불엄문)
산 사람이 범도 두려울 것 없이 밤새도록 문도 닫지 않네.
註- 공께서는 고려 시대 武將으로 오로지 충절로 평생을 戰場 을 누비시고 려사 에 20차례나 등장하고 正二品에 오르시는 등 조상님 중에 제일 독보적인 조상님이시나 말미의 졸년이 명확하지 않고 모순이 있어 현 족보대로 기재 하였으며 공에 대한 자료는 족보. 2001년 양양 문화원 발간 조인벽. 2010년 가천재공파 발간 조인벽 선생과 동명서원외 자료를 인용하여 확인한 것이다.
■ 六世祖 漢川府院君 諡號 良節 諱 溫 (온) (1347~1417)
시제 : 음 10월 2일 부조묘 제향 : 음 5월 19일
전, 조준 등 대소 신료들과 함께 수창궁에 있는 이성계를 설득 하고 추대하여 1392년 7월 조선을 개국하고 9월에 개국2등공신에 책록되고 록권으로 경기토지 100결. 노비 10명. 과 공신 적장은 세습을 하고 록(祿) 은 끊이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받으니 이때 공은 평양 윤이고 1393년 서북면 도 순무사로 수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여 절제사를 하시고 다시 친군위 진무사로 1399년 8월 왕자의 난에 태종을 도와 공을 세우고 9월 중추원사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를 제수받고 다시 상의문화부사가 되고 定 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공훈전으로 양주. 교하토지 등에서 151결 38부와 노비15명. 내구마 1필. 금은대 1개와 부모 처 봉증과 직자 음직. 적장손세습 不失其錄은전을 받으시니 왕지문이 유물로 남아 1992년 7월 18일 정부에서 보물 제1135호로 지정하고 정신 문화원 장서각에 소장되고 있으며1400년 2월에 지중군 절제사가 되고 4월에 私兵革罷에 불복하여 파직되었으나 한달만에 참찬 문화부사에 복관되고 7월에는 1차 왕자의 난의 책임을 물어 완주에 유배 되었으나 9월 삼사좌사로 복관 되고 1401년 1월 2차 왕자의 난에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 3등에 책록되고 큰 비석에 공을 기록하고 누각 에 초상화를 그렸으니 왕지문이 전하여지고 그 공으로 경기토지 60결 노비 6명 백은 25량을 받는가 하면 1402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明帝로부터 문헌통고(文獻通考)를 받아 오시고 의정부 찬성사를 제수 받고 11월에 동북면 찰리사가 되시는가 하면 1402년 3훈신 회맹제(會盟祭) 축문을 지으 시고 1406년 병조판서가 되고 7월에 겸직하여 의정부 좌찬성사를 하시고 1412년 응양위 좌일번 절제사를 받고 12월에 보국숭록 한천부원군 (輔國崇錄漢川府院君 - 正 一品)을 받으시고 우성(今 개풍군 우성면)으로 퇴로 하여서는 공훈전을 곤궁한 일가에 나누어 주고 초가집 두어 칸에 말을 돌릴 곳이 없으며 식탁에는 색다른 음식이 없었으며 깔방석 없이 나이 80이 가깝도록 시종 일관 하시다가 1417년 윤5월 19일 향수 71세로 졸하시니 시호는 양절(良節) 이시고 예장의 은전을 받으셨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