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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2)
성인은 정해진 마음이 없으니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착한 이는 나도 착하다 하고 착하지 않은 이도 또한 착하게 여기니,결국 모두 착함을 얻고, 미더운 이는 나도 믿고 미덥지 않은 이도 나 또한 믿으니 결국 믿음을 얻는다. 성인이 천하에 있으면서 온 천 하와 그 마음을 함께 하나니,백성들은 다 귀와 눈을 써서 잘 보고 구별하고자 하지만 성 인은 모두 어린아이처럼 (어린아이의 무심한 마 음으로) 대한다.
성(聖)人無常心, 以백(百)姓心爲心. 善자(者)오(吾)선(善)之; 不신(信)자(者),오(吾)역(亦)善之, (是위(謂))德선(善) 信者, 오(吾)신(信)之; 불(不)신(信),자(者) 오(吾)역(亦)신(信)之, 德信. 聖人在天下, 옹(擁)爲위(爲)天下휘(揮) 기(基)心. (백(百)姓계(界)注其耳U),聖人背核之.
덕선(德普), 덕신(德信)을 ‘착함을 얻다’ 혹은 ‘믿음을 얻는다’ 즉 모 두 착해지고 미더운 사람이 된다는 뜻으로 보아도 심리학적으로 이해 가 된다. ‘천성이 착하므로’ ‘천성이 진실되므로’라는 해석도 앞의 해석과 모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뒷받침해준다. 즉 사람은 천성이 착하고 진실되므로 착하지 않고 미덥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다 포용하면 결국 착하고 미더운 사람이 된다. 혹은 두 사람에게 다 좋다 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정신치료에서도 치료자의 그러한 포용적 태도가 효과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실존분석학파의 프랭클(Viktor E. Frankl)은 정신분석의 인과론적 인간관에 대해 목적론적 관점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 환자의 인간적 가치와 그 가능성에 주목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러면서 괴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소개했다. “우리가 인간을 그들이 현재 있는 그대로 다룬다면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그들이 그렇게 있어야 했던 것처럼 다룬다면 우리는 그들을 그 가야 할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 말은 융의 입장과 거의 일치된다. 과거의 상처와 한에 얼룩진 삶에 매달리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변화해갈 그, 또는 그녀의 창조적 가능성을 보게 하는 삶의 목적지향성 을 강조하는 것으로 융의 기본입장과 통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좋다, 나쁘다, 미덥다, 미덥지 않다는 것들은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치료적 전략 때문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옴이 착하고 미덥다는 확신 때문이며 세상을 위해 깨달은 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는 사물을 분별하고 시시비비. 의식의 눈과 귀로 천착하기보다 무심, 무욕의 어린이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데 있다는 사실을 노자는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혼기심 (혼(渾)其心)의 혼(혼(渾))은 섞이고 흐리고 전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흐리멍덩한 전체는 곧 어린이의 마음이다. 융은 인간 무의식 속에 분열된 정신을 통일케 하는 원동력이 숨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상대적 선과 악의 대극을 통합하는 통일체, 융이 자기원형이라 부른 것 인데 이것은 이른바 선이니 악이니 구분하지 않는 근원적인 전일성과그런 전일성을 이루게 하는 잠재적인 힘이다. 어린이가 분석심리학에서 전일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바로 그가 대극의 분별 이전, 있는 그대로의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 본성의 창조성을 확신하기에 노자는 『도덕경』제62장에서 성인이 의지하는 도는 만물을 감싸주는 깊숙한 곳이니 ‘착한 사람의 보배요 착하지 않은 이도 보호되는 곳이다 (道 자(者)萬物之오(奧), 善人之實, 不 善人之所保)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훌륭한 말은 값있게 여겨지고
존귀한 행실은 사람에게 보탬이 될 수 있으나
착하지.않은사람이라해도 버리지 않나니 !
美언(言)可以市, 尊行可以加인(人). 人之不善, 何棄之有!
도는 불선인이라고 해서 도의 실천에 방해가 되거나 쓸모가 없다고 그를 버리지 않는다.
(도가 이렇게 귀중한 작용을 하기 때문에 도를 실천하기 위해)
천자(天子)를 세우고 삼공(삼(三)公: 가장 존귀한 세 개의 관직.
태사 〔太師〕• 태박〔太博〕• 태보〔太保〕)을 두고
큰 수레에 그득한 보배를 바치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이 도(道)를 올리는 것보다 못하다.
故立天子, 置三公. 난(難)有공(拱)벽(壁)以先륜馬, 不如坐進此道.
그리하여 도가 왜 존귀한지 그 권능을 명시하는 것으로 마감한다.
옛날에 이 도를 귀하게 여긴 까닭은 무엇인가?
구하면 얻을수 있고 죄가 있어도 면죄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도는) 천하의 가장 귀함이 된다.
占之所以貴此道者不H以求得,有罪以免邪. 故爲天下貴世.
도는 이렇게 불선인을 포용하여 선인으로 변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지만
하늘이 품은 도의 뜻을 해아리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제73장에서 과감하게 남의 죄를 단죄하는 어리석음을 경계 한다.
과감한데 용맹스러우면 죽고
과감하지 않은 데 용맹스러우면(즉 신중하면) 살게 되니,
이 두 가지는 어떤 것은 이롭고 어떤 것은 해로우나,
하늘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도 그것을 어려워한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고도 잘 이기고,
말 없이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않아도 저 절로 찾아오며,
느슨하면서도 잘 꾀하나니 ,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
성긴 듯하나 놓치는 것이 없다.
혓於敢則殺, 혔於f敢則活. 此雨香, 成利成害. 大之所惡,執知其故? 是以할人齡難之. 天之道, 不爭而善勝, 不爲而善應, 不的而 E1 來, 禪然 而善謀. 天網吹恨, 疏而不夫.
융은 동시성 관념의 선구자로서 노자사상을 제시하는 가운데『도덕 경』의 다른 장구와 함께 하늘의 그물이 성긴 듯하나 놓치는 것이 없다 는 제73장의 마지막 몇 줄을 빌헬름의 번역으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융은 말한다.
“뜻이 있는 곳에 질서가 있다.”
빌헬름이 도를 뜻(Sinn)이라 번역한 것은 앞장에서 말했듯이
‘목적’과 ‘의도’를 지닌 우주의 중심이라는 관념에서 출발한 것이고
융은 그런 의미에서 도에 관한 빌헬름의 번역을 환영하였다.
도가 ‘뜻’이라 할 때 그것은 융이 발견한 전체정신의 핵심이며 조절자인 ‘자기’의 의도와 일치한다.
내적인 정신적인 사건과 외적인 물리적 사건의 동시적 출현의 배경에는
바로 자기의 커다란 의도와 시간 공간을 상대화할 수 있는 무의식의 절대 지가 있다.
이에 대하여는 뒤에 다시 논의될 것이다.
제73장의 하늘의 도로 대변되는 것의 여러 속성은
심리학적으로 무의식의 중심에 존재하는 자기원형상의 시공을 넘어선 자율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말을 노자는 제74장에서도 계속한다.
선악은 말없이 하늘이 심판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죽임을 맡은 이는 따로 있는 것인데 누가 나서서 그를 대신하겠다 고 한다면,
이것을 일러 도목수를 대신하여 나무를 깎는 것이라 한다.
목수 대신 나무 깎는다고 나서는 사람치고 손을 다치지 않는 이 가드문법이다.
常有司殺者殺, 夫代버殺者殺, 是請代치민I 夫代大匠郵i者, -命有不傷 其手笑.
노자의 사형폐지론이라고도 하는 이 대목은 제73장의 만용을 경계하는 내용과 함께 비단 사형에 국한한 말이라기보다 잘잘못을 심판하는 자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자아의식과 페르조나에 따르는 단죄가 아니라 자기, 즉 대극을 포괄하는 전체정신, 노자의 표현에 따라도, 또는 천명(天命)에 의거하여 신중히 내려져야 한다는 말이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긴 듯하나 놓치는 것이 없다는 말은 선악 상대론이 자칫 도덕적으로 모호하다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구절이다. 높은 윤리적 가치, 우리가 절대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함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그 것은 다만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하늘에 있다. 그러니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을 분석심리학적 언어로 번역하면 최고의 윤리적 가치는 인간의식이나 집단의식의 합리적 혜량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하늘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을 분석심적 언어로 번역하면 최고의 윤리적 가치는 인간의식이나 집단의식의 합리적 gP량으로 판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아의식을 초월하는 누미노제를 수반한 전체정신, 즉 ‘자기’를 통한 판단이라는 뜻이 된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우리 마음속의 ‘신의 소리’(Vox Dei), 또는 에토스에서 나온 판단이다.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나 중국 중세 손사막의 의료윤리는 매우 간단했다. 그런데 오늘날 의사협회의 윤리규정은 아주 복잡하고 분량이 많다. 사람이 인간의 윤리의식을 더욱 많이 깨우치게 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마음의 중심과 하늘의 도폴 망각하여 지엽말단의 행동 규범에 매달리다보니 지략이 늘어났고 큰 거짓이 생겨 그것을 또 지략으로 막다보니 많아진 것인가?『도덕경』제19장은 바로 이 악순환에 대한 처방을내리고 있다.
성 (聖)을 끊고 지 (智)를 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이 백 배가되고
인 (仁)을 끊고 의 (義)를 버리면
백성들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워지며 ,
교묘한 재주플 끊고 이로운 재물을 버리면
도적이 없어지나니.
이 세 가지는 예법으로 삼기에는 매우 부족하므로(부족한 것을 꾸 미는 것이므로)
소박함을 간직하고 사욕을 줄이는 데 매어놓게 하라.
絶聖棄智,民利컁倍;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此三
者, 以爲文不足,故令有所屬, 見素推模, 少私寡歡.
이 경우의 성(성(成)), 지(지(智)), 인(인(仁)), 의(義)는 전덕(전(全)德)의 이름으로서, 혹은 진정한 지혜와 인의(仁義)가 아니고 그 당시 사람들이 내세운 성과 지, 인의로서 사사로운 지략과 도덕규범을 말한다.
문(文)을 문구(文句)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대개 문식 (文飾)으로 보고 있다. 이는 질(質)의 반대로 세상 살아가는 예법, 에티켓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남만성은 이를 ‘문화의 꽃’이라 하였다. 세 가지를 아주 끊어버리면 문식이 없어 세상이 무미건조해져서 백성들이 마음 붙일 곳이 없어지므로 백성들에게 귀소하게 하는 바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그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임희일 (林희(希)逸) • 소자유(蘇子由) • 여길보 등 주석자는 이 세 가지를 문(文)에 치우쳤기에 부족하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문은 이 경우 분석 심리학에서 말하는 페르조나(Persona, 집단정신)에 해당되는 듯하다.
견소포박(見素포(抱)模)은 사실 성지 (성(聖)智)와 인의 (仁義)가 정 (精')한 것 이니 끊는 것은 밖으로 내세우는 재주와 지략을 끊는 것이라 하면서 노자의 논(論)이 법답지 않고 황당하다는 말은 잘못이라는『초씨필승』(초(焦) 氏筆乘)에 언급된 주석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
제19장은 글자와 법문(法文), 외형에 매달리는 형식주의적인 도덕론자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기술문명의 편리함과 재화(재(財)貨)에 대한 집착 을 비판하는 밀이기도 하다. 마치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처럼 들린다. 나날이 발달하는 최첨단기계는 인류의 생활을 매우 편리하게 만들고 있지만 감정적으로 체험해야 할 인간사회에서 개인을 격리하고 사색하고 고민하는 능력,깊이 보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인내심을 빼앗고 있다.
도덕주의가 강조되고 집단이 요구하는 규범에 개인이 맞추다 보면 성, 지, 인,의에 어긋나는 요소가 모두 무의식에 억압되어 불선(不선(善)) 의 콤플렉스를 형성하는 나머지 뒤에는 무의식에 형성된 ‘부도덕한 충동이 의식을 지배하여 정신적인 해리 일으키는 현상을 우리는 정신 병리현상에서 흔히 목격한다. 프로이트가 19세기 빈 중상류사회의 ‘히스테리’ 부인 환자에게서 발견한 것이 바로 정신적 해리를 일으킨 무의식의 콤플렉스였다. ‘어질고 좋은 사람을 모범으로 삼아 이를 지나치게 흉내 내면 위선자,이중인격자라는 말을 듣게 되고 여러 가지 정신적 해리의 증후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지나치다 함은 그 사람의 본성에 맞지 않을 정도로 과도하게 흉내 냄을 말한다.
청소년기에 무엇을 성취하고자 욕심내고 위인전 등을 읽거나 이상적인 인물을 닮으려 하는 것은 성격발전에 필요하다. 그러나 중년이 되고도 완전무결한 ‘이상적 인격’이라는 페르조나에 동일시하는 것은 언제나 정신적 해리의 위험을 마련하게 된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노자는 ‘욕심을 줄이고 소박할 것’을 권하고 있다. 소박함이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원만한 것이다. 욕심을 줄인다 함은 의식의 일방적 욕구름 줄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식은 무의식과 발걸음을 맞추어 전체가 될 수 있다.
분석심리학에서 자기실현이란 완전해지는 것 (Vollkommenheit Perfection) 이 아니고 원만해지는 것 (Vollständigkeit, completion)을 실현하는 것이다. 중년 이후에는 밖의 모범상이 아니고 각 개인은 자기자신에 맞추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해서 도에 입각한 삶 이다.
도에 따르면 따로 법을 만듈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그 속에 자연스 럽게 포괄되기 때문이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을 ‘우리나라에서는 높이 평가해 왔다. 문제는 지협적인 문자에 달리느냐 근본에 입각해서 인간의 윤리성을 통찰하느냐에 달렸다. * 밑줄 그은 부분의 한자에는 오기가 많으므로 바로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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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자군요?
이번 글은 어렵네요. 소박하다는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주위의 온갖 비교대상들은 제가 저를 괴롭히도록 합니다. 한 예로, 레베카님도 옛 정관팀들도 운영위도 저와 다른데 다름을 다름으로 좋게 인정하고 더불어 사는 것도 힘든 일입니다. 내 모습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남 흉내내는 위선자, 이중인격자가 되지 않으려하지만. 그들의 개별성과 다름을 존중하면서 예수님 닮은 길을 찾는 건 불가능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 쉬운 <비난>을 먼저 하고싶고 어려운 <사랑>은 안 하고 싶으니까요. 저를 포함해 이 교회를 나간 사람 및 교회에 남은 모두 그런 선한 소박함을 지닌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레베카 바로 이런 겁니다. 이번 사건 이후로 저를 대하는 분들 대부분이 호전적입니다. 옛 정관팀, 운영위, 레베카님 모두 그렇습니다. 저는 제 생각을 얘기한 건데 제 다름을 존중해주시는 분을 만나기 어렵고 자기편이 아니라며 조롱하거나, 레베카님처럼 글을 지우라거나 분위기 안 좋다는 말 그만하라며 분노하시지요. 가만히 있지않고 말하는 제 탓도 있겠지만, 저를 포함해 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모두 갖고 있는 문제, 교회다움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인 듯 합니다. 힘들고 어렵다는 말을 댓글로 달았는데 그 결과로 제가 혼나게 될 것으로 여겨지는 그런 상태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보다 사랑보다 비난이 먼저라는 안타까움입니다
" ‘어질고 좋은 사람을 모범으로 삼아 이를 지나치게 흉내 내면 위선자,이중인격자라는 말을 듣게 되고 여러 가지 정신적 해리의 증후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지나치다 함은 그 사람의 본성에 맞지 않을 정도로 과도하게 흉내 냄을 말한다."
인용글이지만 너무나 우리교회의 현실이 생각나는 글을 올리셨기에 댓글을 단 것입니다.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위의 위선자, 이중인격자는 레베카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그러니까 저 역시 그렇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함께 우리 교회의 아픔을 보자고 하는 것이 못된 짓일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저도 그런 회개가 필요한, 비난만하는 누더기 교인 상태임을 고백한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