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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나라당집권반대국민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神市 아우라
목차
止月 山庄 에서 쓰다.
<어느 민족주의자의 시대읽기>를 종합판으로 봐서는 1부와 2부로 , 기간으로는 2008.6.30~8.15까지 걸쳐 중급 단계 로 정리했다. 그 것은 이를 테면 <친일의 재구성>이라는 일본의 의도가 어떻게 한국이란 사회 국가에, 그리고 이 시대에 들어와 있는 지를 보기 위한 오리엔테이션 자료였다. 그 내용을 모르고는 <일본기획자>가 누구이며, 왜 일본기획자에 의해 주도된 ‘사냥개 ’가 서울 땅을 활개치고 있으며, MB 정권이 촛불민심 과의 소통을 그토록 완강하게 거부하는 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에겐 뚜렷한 목표가 있다. 그것을 알리는 기초작업이 바로 전편이었다.
이제부터는 후편으로 들어간다. 앞서 ‘시대 읽기 ’라고 표현했지만 이번에는 ‘시대 경고 ’다. 빨간 불(赤信號)은 이미 켜진 상태다. 신호등의 노란 불이 아니라 파랑과 빨강의 구분법에서 빨간 상태, 즉 소통(疏通)이 아닌 단절(斷絶)이 시작되었다. 일본기획자의 의도는 점차 더 치밀해지고 있고, 그에 맞추어 사냥개들의 활동 또한 면밀해진다. 부끄럽지만 이 시대를 사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모두 외면 회피 무관심이라는 굴종(屈從)을 선택하는 경향도 높다. 촛불민심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이면에는 사회 국가와 시대 역사라는 관점 자체를 ‘사적 이익 ’의 관점에서 보게 만든 우리의 어두운 과거 그림자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누구 탓을 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가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어떤 사회 국가 속의 큰스승(GuRu)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과 그것을 일깨우는 이들이 있다 해도 스스로 방관(傍觀)의 영역에 몸을 숨긴 회색지대의 사람들이 많아진 사회현상이 스스로 ‘뿌린 씨앗 없이 ’그저 나타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앞서 <시대읽기> 자료를 가능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과 공유해서 보았다. 그들의 의견도 듣고 싶었고,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이 있는가에 대한 보충도 하고 싶었다.
반응은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대개 이런 경우들이 있었지만 보편적으로는 6하 원칙에 입각해서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초점이 맞춰지는 중이다.
전쟁은 시작되었다. 일본과는 우리와 다음 시대까지 건 전쟁을 하는 중이다. 그러나 전쟁을 위한 준비는 전혀 없다. 국가가 사실상 이 전쟁을 포기한 상태다. 사회 속에서 일부만이 이 사 실을 모른 채, 과거 역사에서 또는 MB 정권 내의 모순을 발견하면서 전쟁에 뛰어든 상태다. 일본기획자가 의도한 대로 한국 사회 내부의 갈등구조를 교묘하게 형성하였고, 정치적 집권을 기반으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그들 사냥개의 세포가 번진 상태다. 그러니까 전쟁은 매우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포진(布陣) 양상을 보인 셈이다.
과연 그런가?
나는 앞으로 많은 부분들을 이어 정리할 생각이지만 가장 먼저 일본이 추구하는 노선(路線)이 현재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밝혀볼까 한다. 어려운 일이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이지만, 이 사안 자체를 지켜본 당사자로써 내가 먼저 그 대강(大綱)을 정리한다. 기본부터 다시 하나씩 정리해볼까 한다. 한국과 일본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너무 틀린 구석이 많은 국가이고 집단이다. 그 설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늘 일본이 보이는 침략노선을 전면적으로 파헤쳐 보기로 한다. 보다 많은 후속되는 보충이 있기를 기대한다.
사회인류학적 관점에서 일본 사회를 냉철하게 분석했던 나카네 치에(中根千枝) 의 1967년 저서인 <다테(縱)사회의 인간관계-단일사회의 이론>은 일본에 대한 본격적 해부 이론서에 해당한다. 이 책은 일본의 천황제로부터 일본의 집단주의, 그리고 일본이 왜 전후 사과에 인색한가 하는 문제까지 다루는 데 언제나 기초자료로 활용 된다 .
그녀는 일본 사회를 ‘자격 ’(사회적 개인의 일정한 질, 생물학적인 것까지 포함해서)보다는 ‘틀’(場, 일정한 테제에 의해 일정한 개인이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경우)이 중시되는 것이 일본인의 집단의식임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집단이 종적(縱的) 집단으로 변저(邊底)없는 삼각관계로 형성되어 있고, 리더가 1인에 한정되어 교체가 어려운 상태에서 당중당(黨中黨)의 파벌이 형성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맨 꼭대기는 항상 ‘천황 ’이 있는 구도다. 그 사실이 변화된 적은 근현대사에 없었다.
따 라서 일본이 왜 전쟁(제2차 세계대전)과 나아가 팽창주의,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가를 들여다보면, 이 구조 속에서 발견된 원초적인 죄업이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전쟁에서 선택한 명분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패배 또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다. 드러난 이유는 간단하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게 되었고, 책임 있는 자의 처리도 불명확하게 되었던 1945년 이후 일정 기간이 있었다. 삼각형의 맨 꼭대기 즉, 종(縱)의 사회(vertical society)의 최정점에서 행위를 지시를 했던 리더가 그 결정과 과정,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던 것이다. 리더가 인정하지 않은 (실제 책임소재가 가려지지 않은) 전쟁 의 책임을 하부 단위에서 이른바 ‘충(忠)의 의무 ’를 외치는 자격을 가진 자들이 그 틀(場) 속에서 스스로 ‘정당성이 없었다 ’고 외칠 이유는 없었다.
일본 천황제와 제국주의, 팽창주의의 가장 큰 피해 경험자는 한국이다. 그렇지만 정작 가해자는 이처럼 피해를 주었다는 의식이 없다. 피해자가 가해를 외치지 않는 한, 가해자의 이런 집단의식과 구조 속에서는 한 번이라도 반성이나 사과를 해야 할 마음에서 우러나는 심사(心事)가 형성되지 않는 셈이다.
이것은 단순하지 않다.
‘패전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는 생각은 단순히 ‘제국주의, 팽창주의에 잘못이 없다 ’는 것과 동일어가 아니다. 그들 내부에서 삼각형의 꼭대기를 제외한 어느 누구라도 ‘파국과 분열 ’을 통한 이합집산이 가능하고, 또한 이 에너지를 분출하는 데 있어 일본 내부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까지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자신들의 ‘각자 알맞은 위치 찾기 ’수준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의문을 표시해봐도 사안은 동일한 답변과 결과만 주어진다. 즉, 이것은 구조적인 틀(場)이라고 본다. 리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들 내부의 집단의식이나 구조가 내부 혹은 외부의 강한 충격에 의해 바뀌지 않는 한, 이 생각(정당하다는)은 바뀔 개연성마저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기저에 둔 일본의 ‘집단 ’이 한반도를 상대로 하여 그들의 정당성을 재 입증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그들 내부에서는 ‘비정상 ’일 터이다. 당중당(黨中黨)의 구도에서 내리는 결정이 아니라 맨 위 꼭지점에서 내려지는 명령이라면 이야기는 더 달라진다.
일왕이 명령구도 속에 있는가 아닌가, 그것을 굳이 여기서 증명한다는 것도 우습다. 벌써 현실로써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있다. 친일매국의 대열(隊列)이 이어지는 현상은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증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일본을 들여다보면 해답이 거기 있다. 삼각형의 맨 위 꼭지점에서 그들을 관장하는 한 존재가 보인다. 물론 ‘그’마저도 이 집단의 지향점에 의해 그 흐름에 따라가는 존재일는지도 모른다. 집단주의가 가는 길에 어느 한 사람이 쉽게 반대를 던질 수 없으니까.
2007.12.22 어느 블로그에 올린 아래 글을 보충해서 싣는다. 관점은 분명히 다르다. 표면적으로 ‘일본 천황 ’의 존재는 제약된 것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천황제 폐지 같은 시나리오도 나온다. 그 가능성을 추론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본을 보는 여러 관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부분이 더 많이 존재하는 데는 그 이면에 이처럼 사회인류학적 분석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일본의 ‘집단 ’이 가진 그들만의 접근법이 있기 때문이다.
아래 글은 나카네 지에 교수의 이론을 바탕으로 어떤 블로거 (재봉틀, kwank99) 가 쓴 글이다. 일본사회와 천황제라는 관점에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http://blog.naver.com/kwank99
일본 사회와 천황제의 관계에 대한 고찰
한국에서는 예외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일본의 천황제를 사회학적인 측면을 분석하여 한반도문제의 앞날을 좌우할지도 모르는 일본사화의 단편을 살펴보자. 일반적인 군주제에서 말하는 임금과는 내용적으로 다르다는 의미로 일본의 왕제를 일본 국내 용어인 천황제 등을 사용하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나 카네(中根)의 세로의 사회론에 나타난 일본인 ]
이 글은 주로 나카네 치에(中根千枝)의 <세로의 사회의 구조> <세로의 사회의 역학> 등에 나오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그녀는 서양의 사회에서는 각 개인이 절대신과의 관계 속에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사회의 최소단위로의 개인이란 자아를 형성하고 각 개인은 자주적인 의지로 옆으로 연관 관계를 넓혀 나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자신을 스스로가 무차별 평등한 상태로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소속 소집단에 둘러싸여 있을 때 “소집단 속의 나”를 인식한다. 이 소집단은 마치 계단식으로 된 나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사과가 열리듯이 세로의 구조를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나무는 일본 사회가 주는 유일한 ‘서열’의 기준을 상징한다. 일본인으로써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이 서열은 어떠한 개인적인 힘도 바꿀 수 없다고 보통 일본인은 생각한다. 같은 동양권에서도 한국ㆍ중국 사회도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지만 한국ㆍ중국 사회에서는 개인을 판단하는 여러 가지 기준(가족관계, 직장에서의 지위 등)이 개인을 판단하는 데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일본사회의 서열의 기준과는 다르다. 일본에서 서열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개인의 능력이나 출생의 귀천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세로의 사회에서의 서로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며 고립된 각자의 소속 소집단 안에서의 위치와 그 소집단의 사회적인 영향력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원칙 없는 애매모호한 것이다. 그래서 회장보다 실질적 권력을 가진 전무나 부장이 회사 안에서 경영권을 쥐고 있는 경우가 있고 새 종교의 지역집회에서 교조보다 지역 책임자가 더 강한 사회적인 규제력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한국 언론에서 흔히 일본을 비판하는 주된 제목은 ㈀ 논리가 애매하고 논의의 요점이 흐리다, 혹은 속을 떨어놓지 않다는 것과 ㈁ 감정적이며 어떤 때에는 아무런 의미 없는 물의만 일으키는 정치적 발언(정치가의 망언ㆍ그 뜻의 본성이 애매한 사과 선언 등)을 한다는 두 가지 점이다. 한국인도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처럼 일본인에게 발언의 원칙이나 원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발언을 요구하고 있는 샘이다.
세로의 사회란 결코 권력이나 권위가 위에서 밑으로 아니면 밑에서 위로 한쪽 방향에 전달된다는 뜻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인에게 권력이나 권위가 어떠한 방향으로 흐르든 어떠한 역학구조를 갖든지 상관없다. 어차피 원리원칙이나 구미에서 말하는 체제가 성립될 수 없는 일본사회에서는 무의미한 것이니 말이다. 개인도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도 원칙도 없이 사회적인 원동력만으로 움직이는 사회, 그것이 바로 일본사회의 참모습이 아닐까?
[현대 일본인과 천황제 ]
애매하고도 막강한 정치ㆍ경제력을 지닌 괴물낙지와 같은 일본사회에서 천황제의 사회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일본의 천황제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2차 대전 이후의 일본헌법에는 ‘천황 ’(일왕)은 어떠한 통치행위도 하지 않는 일본의 상징’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이 지구상에 일본의 천황처럼 무력한 임금은 따로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 왕제가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입헌군주제를 채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입헌군주제국가에서 왕은 직접적인 통치행위에 대한 각 항목을 혼자 결정할 권한은 없지만 로마의 교황처럼 ‘평화에 대한 기도’와 같은 추상적인 관념의 제시라는 방법이라도 임금의 뜻은 정치에 반영할 정도의 실질적 권력, 권위 또는 발언권을 갖고 있다.
그렇게 볼 때 일본의 천황은 이 세상의 모든 권력, 권위 혹은 발언권이 전혀 없지만 일본정부라는 한 국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기묘한 존재이다. 역사적으로도 천황이 다른 나라의 왕처럼 권력, 권위 혹은 발언권을 행사하며 정치ㆍ경제적인 통치행위에 참여하여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한 것은 상고ㆍ고대를 제외하면 예외적으로 임금다운 기세를 올린 몇몇뿐이다. 15세기말의 오닌(應仁) 이후 수십 년 동안은 생계와 제사에 필요한 비용을 제대로 조달 못 할 정도 경제력을 잃은 적도 있고 에도(江戶)시대에는 에도 막부의 뜻대로 천황을 바꾸기도 했다.
일본의 제국주의시대의 천황(특히 메이지(明治)왕과 쇼와(昭和)왕은 역사적으로 봐서 예외적인 존재이다. 식민지시대에 한국인이 접했던 ‘신국 일본’은 실은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개화 당시 일본인은 오늘날 일본 열도 전체를 ‘내 나라ㆍ우리 나라’라고 생각하는 개념자체를 갖고 있지 않았다. 예컨대 19세기이전에 현재의 ‘나라(奈良)현(당시의 야먀토ㆍ大和국)’에 거주하는 주민은 제주도만도 안 되는 나라현이란 지역을 ‘내 나라ㆍ우리 나라’라고 생각하고 근접지역인 쿄토(京都) 등을 ‘남의 나라ㆍ다른 나라’라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일본열도 전체를 한 국가로 인식시키고 작디작은 ‘나라’의 주민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강압적 정치형태와 ‘일본인이란 개념을 나 타내고 대표(상징)’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 각 지역의 민간신앙의 일종인 진냐신토(神社神道)를 국가 종교화한다는 방안은 안중근에게 암살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개화를 위한 구미순방 시 에 ‘당신의 종교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라의 종교라는 착상을 얻은 것이라고도 한다. 당시 상황으로는 이토가 개화기 일본에 독재 정권을 성립할 수도 있었겠지만 결코 단독 집권 독재주의로는 흐르지 않았다는 것도 매우 일본적인 현상인 듯하다. 독재 정권이란 독재자 혼자의 생각 혹은 감정이 직설적으로 반영될 수 있지 않으면 출현하지 못하는 정치 형태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당시에 펼쳐졌던 맹렬한 국수주의 교육은 2차 대전 패전과 아울러 정부차원에선 폐지되었지만 천황제가 지니는 사회학적인 의미는 개화기 이 후에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나는 그 핵심적인 사회적인 요인이 천황제의 존재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강력한 미군 군정도 폐지하면 일본 사회에 혼란을 일으킨다고 판단하던 천황제는 과연 사회학적인 관점에서는 무엇일까?
여기서 한번 사회학적 기능면에서 천황제는 어떠한 역할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천황의 24시간의 일상적 생활양식 또는 행동 원칙 없는 일본인이 사상이나 종교를 초월해서 모방할 수 있는 모범상(Stereotype)으로 작용한다. 특히 2차 대전 패전 이후에 ‘천황의 인간선언’을 하고 천황과 그의 일족이 전국을 위문 방문한 것은 그때까지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일본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신문과 라디오는 천황의 위엄 있는 군복차림 대신 식탁 앞에서 신문을 보고 평복으로 가족과 정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민주주의국가가 된 일본에서 일본인으로서 살아가는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일본인에게 민주주의를 이해시키는 데 사상교육이 실시된 적은 거의 없다. 대신 민주 사회에서의 생황 양식의 제시, 마당에서 한 식탁을 둘러싸고 가족이 함께 식사와 단란을 즐기며 산책을 즐기며 어른ㆍ아이 가릴 것 없이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대화하여 연애결혼을 하는(거의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헤이세이(平成)왕의 결혼에도 테니스코트에서의 만남에서 청혼하는 데이트 장면이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등의 것이 ‘황국(皇國) 일본의 적자(赤子: 무심껏 어버이를 따르는 아이처럼 이상적인 인간)’이었던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필요했던 것이다.
영국의 왕실 일가는 영국인과 대영제국의 회고적인 낭만을 지니며 화려한 상류층을 상징하는 각종 행사(윈 블던 테니스 선수권 등)의 주인공이며 패션과 학문의 수호자이며 가장 매혹적인 가십의 주인 역학을 지니고 있지만 일본의 천황일가는 항상 일상생활의 가장 사소 한일 까지 하루 종일 철저히 공개된 존재인 것이다. 자녀의 교육방법, 주고받을 선물의 기준(천황일가는 집에서 만든 카스테라를 선물로 받고 싶어한다), 인사 방법이나 인간관계부터 서서 걷는 방법(유치원에서 꼼짝 말고 바르게 앉는 훈련을 시키고 겨울에 한풍 마찰을 하는 등 특색 있는 교육은 오늘날에도 비교적 널리 실시되어 있다)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으로서 모방해야 할 생활의 모든 것을 보통 일본인들이 모방할 수 있도록 공개된 존재가 천황일가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주위 사람에 맞추어서 다른 사람을 따라 하면 된다.’는 막연한 방침(?)을 가진 일본인에게 확실히 천황은 지금도 그에게 고유한 사회적인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샘이다. 실제로 그들의 공개된 완전한 일본인으로의 생활은 수많은 궁내청 직원과 경호원 등의 철통감시하에서 이루어지는 중노동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행동은 지나칠 정도로 섬세한 배려 혹은 거추장스러운 간섭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날 헌법에 의하면 천황은 이러한 생활에 부담을 느낀다 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의지로 퇴위할 수 없다. 개화기 이전에는 상황(上皇) 혹은 법황(法皇)이란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퇴위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는 엄격히 일부일처제를 지켜야 하며 그 지위는 천황의 직계의 장남이 이어받는다. 2차대전 후에 미군이 황족의 범위를 크게 축소시켰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황족은 쇼와(昭和)왕의 의 직계손과 그의 형제들뿐이다. 영국왕실이 지금도 막대한 친인척망을 자랑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현 시점에서는 헤이세이(平成)왕의 두 아들에게는 남아가 없고 기묘하게도 공식적 범위내의 황족에게도 자식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일본의 천황에게는 종교적인 기능도 있다. 우선 수많은 조상제사 등 의식을 치 뤄야 한다. 무라카미(村上重良)의 <국가신도(國家神道)>에 의하면 제국주의의 시절에는 종교이면서도 정치적 통치 도구로서 개화기 이후에 속성으로 만들어진 국가 신토(神道)는 2차 대전 패전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때문에 오늘날 천황 및 그의 일족이 지내는 크고 작은 제사 등의 행사는 일본의 민속 종교에 속하는 진쟈신토(神社神道) 양식을 따라서 사적으로 거행된다고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앞에서 논한 것처럼 일본인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적인 규정력으로선 법이 어디까지나 2차적인 존재이다. 실제로 쇼와(昭和)왕 장례는 몇 개월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서 거행된 화려한 국가행사가 되었고 헤이세이(平成)왕 즉위식 또한 그리하였다.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준수하여 일단 공식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황족을 제외하는 모든 일본국민에게 부여되어 있지만 한 나라를 상징하는 인물의 종교가 진쟈신토(神社神道)인 만큼 그 사회적인 영향력은 아직도 막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천황과 관련된 행사에 실제로 관여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공무원, 지방공무원 및 정치인은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종교의 자유에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뜻도 된다. 이러한 상황은 민주주의의 원칙마저 종이 한 장의 가치로 전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천황의 종교적인 이러한 기능에 대해서는 비판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분위기가 일본사회의 사회적 압력으로 가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쇼 와(昭和)왕 사망 시에도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던 나가사키(長崎)시장은 정치적 공격과 우익분자의 총탄을 한 몸에 맞게 되었지 않았던가?
천황제와 일본 사회의 관계를 볼 때 지금도 과연 일본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인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 내용으로 일부 과격한 우익세력의 엉성한 행세가 대다수 국민이 거리끼는 바인데도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일본인은 이미 자신을 ‘일본인’으로 인식하며 살기 때문에 천황제를 비롯한 국가신토(神道)가와 관련된 제목은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일본 사회에서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은 앞으로 눈여겨볼 만하다.
공식적인 의미로 천황제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분야의 또 하나는 외교사절로의 기능이다. 태자비가 외무성(한국의 외무부에 해당)의 공무원출신인 것을 봐도 일본 황족의 외교사절로의 기능은 현실정치상 가장 중요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외무성 의도와 달리 일본사회 안에서의 일본 국민에 대한 사회학적인 영향은 그가 일본이란 나라를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다는 정도의 인식을 주는 이를 강화시킨다는 정도이다.
외교적 기능을 지닌 천황제는 일본 사회에서 영어 혹은 외국어교육의 진흥이나 외국문화에 대한 이해와 적절한 대응에 대한 인식을 심는 데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촌 시대에 돌입하면서 사회적인 원칙 제시 없이 ‘○○의 사정을 감안하여’, ‘○○한 방향으로’, ‘○○적인 자세로’ 나아간다는 식의 빈약한 국제정치 감각을 개선하는 등 실질적인 일본 정치의 세계화에는 천황제가 별로 기여하지 않고 있듯 보인다.
그 외의 기능으로는 의식주, 음악, 예술 등에 관련된 전통문화의 수호자 역할, 상류층 사롱의 주인 역할, 자선, 자연보호운동, 체육행사의 상징적 명예직의 수행 등 어느 나라의 왕이든 다해야 할 임금으로의 의무를 일본의 천황일가는 분담하여 수행하고 있다. 천황의 개인적인 직업은 연구자이며 전문분야의 연구자를 두고 작은 개인연구소를 운영한다. 그의 연구 분야는 그 사회적인 영향이나 개인적인 차질을 고려하여 어떠한 수익성이나 학자간의 경쟁과 관련될 수 없으면서도 사회적인 공신력이 있는 분야를 전문가의 조심스럽게 선정하여 결정된다. 쇼와(昭和)왕은 해변의 소형생물에 관한 연구를 했으며 지금의 태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중세의 교통사정에 관한 논문을 썼다. 영국과 달리 황족의 별거, 이혼 등 사회적으로 ‘불미스럽다’고 판단되는 행동은 허용되지 않으며 평민에게 시집가서 평민이 된 공주에게도 이 원칙은 적용된다. 천황을 둘러싼 그러한 윤리적인 행동이 일본인에게 얼마만한 사회적인 규정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꼬집긴 어렵다. 일본인은 계층이나 직업 혹은 직업 집단마다 다른 윤리ㆍ도덕적인 기준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소집단과 합일된 사회적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천황이 제시하는 윤리ㆍ도덕적인 기준이나 행동이 사회적인 압력이 되기에는 나라는 너무 틀이 거대하지 않을까 사료된다.
[가 상 시나리오: 천황제 붕괴 ]
천황제는 앞에서 언급했듯 일족의 장남이 계승하는 제도로 되어 있지만 현재로는 아들 복이 썩 좋은 편이 아닌 모양이다. 현재 태자의 형제 혹은 사촌, 삼촌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아들이 없다. 역사적으로 여왕을 선호하는 영국과 달리 공주가 여왕이 되면 정치가 어지러워지던 일이 많아서 남아가 없는 경우 여왕이 서는 확률은 낮은 것으로 예측된다. 거기에 영국과 가장 다른 것은 일본의 여왕은 황후가 아들이나 손자대신 여왕 자리에 오른 고대의 사례를 제외하면 정치적인 억지로 공주가 여왕이 되었어도 그녀의 결혼을 허락한 일이 없다는 것도 걸림돌이 된다.
예를 들면 현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남편은 ‘ 버킹검 公’이지만 그에게는 ‘공’이란 왕자와 대등한 지위(상징적인 사회적 위치)와 친위대의 상징적인 통솔자라는 현실적인 직업(실제적인 사회적 위치)이 있으며 그의 사명은 여왕을 철저히 경호하는 ‘기사(knight)’로서 사회심리학적 역할 분당까지 확립되어 있다. 일본의 황족은 어떠한 현실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도 규정되고 여왕의 남편에게 줄만한 어떠한 사회적 위치를 역사상 고안해 낸 적이 없다.
이 두 가지 문제만 해도 2차대전 이후에 축소되어 그 기반이 약해진 천황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문제이다. 일본에서 가문의 계승자가 없는 경우에는 일족 혹은 거의 동등한 가격(家格)의 집안에서 입양하는 것이 전통이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된 현재의 황족에게도 자손은 없다.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있지 않은 친인척부터의 입양은 전통 관습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일본의 현재 체제를 흔들 정도로 물의를 일으킬 수 있으며 개화기 이후부터 지속되어 온 일본사회의 안정적 기반에 큰 타격을 줄 것은 틀림없다.
소설 <일본침몰>에 나타난 듯 일본열도가 침몰하기 전에 일본사회에서의 천황제 붕괴로 인한 ‘일본사회 침몰’은 현재 상황을 볼 때 늦어도 30∼50년 안에는 충분히 있음직한 미래도인 것이다. 만일 천황제가 일본사회에서 폐지되면? 경제ㆍ정치 양면에서 일본의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정세의 변수가 될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은 자손이 결코 생기지 않는 경우이다. 태자비와 왕비가 40세를 넘어도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우선 천황제 위기론 혹은 일본사회 위기론이 본격적으로 일본 국내에서도 논단에 등장할 것이다. 이 때 아시아 각국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막대한 군사 대국으로의 길로 극우파가 이끌어가면 어떻게 될까? 만일 일본이 이 길을 선택하는 경우 수없이 많은 일본인과 아시아 등 각 국민의 생명을 앗아가는 역사상 유례 없는 거대한 비극이 될 것이다. 고대국가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온 천황제가 붕괴하면서 일본정부가 붕괴하면 일본사회는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의 와륵의 더미가 되고 말 수도 있다.
만일 이 시나리오대로 될 것 같으면 일본이란 땅 자체는 남아날는지 모르지만 일본사회의 사회-문화적 구조는 뿌리 뽑히듯이 사라져서 무정부상태가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될 것이다. 경제적으로 극도 혼란이 들이닥쳐서 국민은 도탄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 동안에 사회질서 및 치안을 유지하느라 노력해 온 반동으로 세계 역사상의 어느 무법지대보다도 황폐한 상태에 빠질는지도 모른다.
이 경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경제ㆍ정치 양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일본과의 합작 기업, 제휴 기업 및 현재 법인의 대부분이 어느 때 갑자기 두산 혹은 부두위기를 맞이하면 국가경제가 어떻게 될지는 상상만 해도 겁날 지경이다. 그러나 갑자기 제품의 시장 자체가 몽땅 사라져버리면 어느 나라 정부라 해도 손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일본 자본 점유율이 높은 한국에서 갑자기 일본 자본이 물거품이 된다면?
물론 미리 사정 연구, 인재 육성 등의 대책을 세워두면 자국에 도움이 되는 일본인을 특별이민으로 영구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 자본 및 기술을 아울러 자국에 정착시킬 수도 있다. 이만큼 과감한 대책을 세워두면 일본이 축적해 온 그 많은 유형ㆍ무형의 재산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이 귀속시키면서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정부가 진짜 경제적으로 파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이런 가상도 우주여행이나 석유 발견의 꿈만한 현실감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계승자 문제와 아울러 일본 국민들 사이에 천황제 폐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세력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질 만큼 자라나는 경우이다. 거기에 경제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 하는 것이다. 겉보기와 달리 일본의 극우익 세력은 갈수록 힘이 약해질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망언소동도 어쩌면 일본의 우익세력의 약화와 관련시켜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가는 데가 있다. 마치 이미 술을 과음한 이가 ‘나는 취하지 않았다’고 외치듯.
완강한 전전(戰前)파 국수주의자도 이제는 늙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1944년말에 식량사정의 악화(참전용사의 집 가족은 식량배급 사정이 좋았다)로 2 차 대전에 소년병으로 참전하던 우리 아버지도 내년이면 만으로 칠순이 넘는다. 2차 대 전 패배 이전의 자신의 삶이 부당하게 손상되었다는 마음의 상처를 지닌 전전파 국수주의자가 지도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일본의 우익 세력 내부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있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도 전후파에게는 무엇을 왜 지켜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시대가 흐르면서 애매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극우파가 쇠퇴하면서 극좌파라고나 할 수 있는 세력이 기세를 올리면서 천황제 폐지와 공화제 아니면 다른 신체제로의 혁명을 외친다면? 이 경우에도 일본의 정치-경제적 기반이 얼마 동안이나마 마비상태가 될 것이다. 인근 국가로는 우선 체제 위기를 회피한다는 정치 과제를 안게 될 가능성이 있다. 아마 혁명을 외쳐도 결코 짧은 시간 내에 성과를 올리지 못할 것이다.
천황제를 계획적으로 신정부가 정치적 압력으로 폐지시킨다 해도 산사태 난 것처럼 무너져가는 일본사회ㆍ문화적 구조의 붕괴를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일이 터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사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자의 시나리오보다 물신 양면에서 희생 혹은 피해는 적어질 수 있다. 정권 자체가 다른 형태로 이행되면 경제적인 붕괴도 어느 정도까지는 막으면서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제2시나리오에 가까운 사태가 일본 사회에 일어날 경우에는 아시아 각국도 경제적인 타격은 그다지 결정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에 근사한 사태는 그만한 능력자가 일본국내에 지금 숨어있는 경우에 한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훌륭한 인재는 해외에 유출하기 쉬운 일본에 과연 그만한 인재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 중 수상 후에도 일본에 남은 이는 에사키 다이오드를 발명한 에사키(江崎)박사 1명뿐이다. 일본 사회의 분위기는 유능한 일본인이 마음껏 활약하기에는 너무도 짓눌리는 듯하여 답답한 말세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예외로 내가 있음직하다고 생각하는 스토리가 바로 다음에 소개하는 제3시나리오이다. 천황제의 존재의의나 이를 뒷받침하는 일본사회자체의 취약화에 따라 천황이 스스로 퇴위하겠다고 의사표현을 하면 어떻게 될까? 의사 표현의 기회자체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국회 개회 인사는 천황이 한다. 만일 이 도중에 불상사가 생기면 그 책임은 국회 의장이 쳐야 하는 것으로 지은이는 알고 있다. 이제까지만 해도 천황을 국회 가장 높은 자리에 인도하다가 뒤돌아서지 않고 뒷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는 습관을 고령과 육체적 쇠약으로 못하고 자리를 물러선 의장은 여럿이 있다. 국회의장이 천황의 폭탄선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승낙하면 천황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 경우에는 곳곳에서 천황제가 과연 얼마나 오늘날 일본 사회를 뒷받침하는 힘이 되어 있는가에 대해 거론하게 될 것이다. 일본의 정치인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관심 있게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경우 일본사회는 천황제 없는 일본사회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실질적인 준비작업을 할 충분한 시간을 계획적으로 가질 수 있다. 둘러싸는 귀족 혹은 특수계층(로마의 주교단이나 티벳의 라마교 상위자 들 등)도 없고 친인척 범위도 국한되어 사회학적은 집단으로서 상당히 제한되었던 데다가 계승자문제까지 있을 것 같으면 복고 사조가 고조된다 해도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물론 티벳의 달라이 라마처럼 ‘내가 달라이 라마라는 제도를 없애겠다’고 의사 표현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달라이 라마에게는 선택 받은 자로서 어떠한 결정이든 다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일본의 천황의 종교적 지위를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한 역사가 일본에는 역사적으로 명백 하지 않은 고대에는 몰라도 그 후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천황제를 기반으로 하는 독재적인 복고정치를 펴 나가겠다는 것보다는 일본사회에 주는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충분한 준비기간과 준비작업을 통해서 안보ㆍ행정ㆍ사상 등 각종 문제에 대해서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길 것이며 그만큼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도 최소화할 수 있다. 정치ㆍ경제 체제면에서도 일본에 고유한 문제로 대부분이 받아들일만한 상황이면 바다 건너의 남의 일로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일본 외교면에서도 일본 사회 상황 변화에 대응하는 방향으로 펴 나갈 계획을 세우며 진행할 수 있다.
지금의 태자는 지나가는 길마다 신호등을 세우며 각종 행사 시간에 맞추던 예전의 방법을 ‘국민과 똑같이 교통법규를 지켰으면 좋겠다.’고 발언하여 기존의 방법을 시정할 기세가 있는 인품인데다 사학 등 사회과학 분야에 강한 두뇌를 가졌으며 비는 공무원 출신의 재원이다. 위기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정도의 군자다움은 가진 인물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천황제 폐지 여부는 일본인으로의 자각심을 이미 생활과 삶 속에 지니는 일본인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붕괴직전의 징후를 보이고 있고 이를 밑받침하는 철학에도 금이 간 오늘날 상황에서 일본사회가 이번 세기말을 어떠한 슬기로움으로 극복할 것인가? 이는 이웃나라 한국에서도 충분히 살펴 볼 필요가 있는 중대사인 것이다. 이를 냉정하게 조심스러운 관점에서 세세히 지켜봄으로써 한반도가 일본식민지시대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나름의 길을 나아갈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한번 한국인에게 걸어보고 싶다.
천황 제 폐지론은 일본국내에서는 말 못할 분야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위기 분위기와 아울러 시대가 변해 가는 각가지 징후가 보이면서 세계화로의 바람이 단순한 경제ㆍ사회적인 위기로만 생각할 수 없는 오늘날에 이웃 나라인 한국에서도 일단 이웃의 동향을 깊이 알아 둘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맺음말 : 한국과의 관계 속에서 ]
일본 사회가 각 섹트가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애매한 중심 구조를 가진 사회가 된 것은 결코 근대화로 인한 변화로만 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립된 지역 사회간의 사회ㆍ경제적 교류는 주로 도시ㆍ진쟈(神社)ㆍ절 등 전통적 지역 사회 단위로 보면 주연(周緣)에 속하는 집단의 손으로 이끌려 왔다. 그러나 전통적인 지역 사회 단위가 일본의 사회-문화적 구조와 하나가 된 후인 오늘날에는 앞으로의 새로운 방향을 국민에게 제시할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
나는 이 글을 통해서 한국인은 지성인 가운데서도 오해 혹은 아예 무시당하고 있는 일본사회 속의 천황제에 대한 논리적인 이해와 일본사회에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에 대해서 주의를 상기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한반도는 지금 역사적으로 삼국통일 이후의 최대의 과제인 남북통일 문제를 안고 있다. 통일 문제의 최대의 어려움은 언어와 습관은 본래 역사적으로도 오랫동안 한반도가 ‘한 나라’로 단결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1세대 이상의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사회ㆍ경제ㆍ정치 등 각 방면에서 격리되어 온 부자연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점이다. 정치적으로 억지로 하나로 만드는 것까지는 쉽지만 그 후의 사회적 융화 문제는 전에 격리된 세월만큼 걸리는 가까운 미래의 역사적인 과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기의 역사를 맞이하기 직전인 한반도에서 만일 한반도만이 격변 상황에 있을 것이라는 현재의 관측대로만 행동할 것 같으면 또다시 날치기정책으로 땜질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회ㆍ정치적 불안정 요인을 한국인 스스로가 남기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이웃인 일본 사회의 상황에 대한 인식과 예측은 반드시 한반도와 한국인을 돕는 힘이 될 것이다. 예측이란 그대로 일이 되라고 세우는 것이 아니라 유연한 대응을 해야 할 때의 상황 판단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식민지 시대의 아픔에서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시도해야 할 한반도에서 ‘실은 일본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는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 주: 이 글 가운데 특히 ‘천황제 붕괴 시나리오 ’등은 현실적 가능성이 없는 부분들이 많다. 참조해서 보길 바란다.
일본이란 사회구조와 집단의식을 살펴본 이유는 오늘 한국 사회 국가에 침투된 일본기획자 의 의도와 실행된 현상을 살펴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전제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은 제국주의가 아니다 ’라거나 혹은 ‘일본의 과거 제국주의는 잊자 ’는 말은 그야말로 망언(妄言)에 불과하다. 일본은 반드시 한반도를 향해 발걸음을 딛게 되어 있고 이미 와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서 이 글을 보고 읽을 가치는 없다. 그런 사람은 여기에서 읽기를 멈추 길권한다.
과연 그들은 어느 수준으로 대 한국, 한반도 기획을 진행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차례다. 이것을 살펴보면 그들의 의도와 방향이 드러날 것이다. 그에 대응할 수 있는가, 어떤 방법이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지금은 밝혀보는 것이 우선될 때다.
어떤 사람 이 정치 계에 들어가서 동화되는 과정은 흡사 보호색을 사용하는 선수인 카멜레온 같다고 한다.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으면 정치를 못한다는 생각, 그리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에 합당한 사고를 한다는 식의 이른바 변화에 대한 적극적 능동적 대처를 부르짖는 다. 문제는 그러는 가운데 평생을 일관된 심사로 살지 못하는 소위 변절을 변신이라고 부르는 상황도 발생하게 된다. 훼절(毁節) 본능이 사람에게는 누구나 가진 속성이지만 유별나게 한국 정치사에서는 이런 모습이 당연하게 인식되고 있다. 과연 어느 수준까지를 ‘변화 ’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수준도 있다. 영혼을 포함한 ‘자신 ’(自身)을 누군가에게 파는 행위까지도 벌어지는 것, 그것이 안타깝지만 현실이기도 하다. 마치 대한제국을 일본에게 ‘매국 ’(賣國)해버린 자들처럼 그런 인물들이 속속 서울에 뿌리를 내린다. 보수라는 이름으로 우익이란 명분으로 다가서는 중이다. 이것은 훼절 수준이 아니라 매국행위를 하는 매국노로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들에게도 그들 식의 변명은 있겠지만, 그 손바닥으로 하늘을 덮기는 어렵다.
내가 주목한 인물은 ‘김진홍 ’이었다. 한일수교협상 반대 시위에 이명박, 김진홍이 함께 했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두레공동체 운동이라는 사회개혁가 활동을 해왔던 그의 변신은 뉴라이트전국연합이라는 희대의 친일매국집단을 형성한 당사자이면서도 그의 친일 논리가 바깥으로는 잘 알려지고 있지 않다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좌파의 어둠 ’을 없애기 위해 시작했다는 뉴라이트 활동의 진짜 배경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2007년 6월경 이후 그가 직접 쓴 두 편의 글 가운데 드러난 ‘인식 ’을 보자. 일본을 방문해서 쓴 글이니 한국-일본-한국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전체를 조망해보기 위해 일단 전제해 본다.
“어제 7시 30분에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쿄에 왔다. 오늘 동경에서 열릴 민단의 지도자 대회에 강연이 있어서다. 이번 일본 방문에는 이동복 선생, 조갑제 선생, 유석춘 교수가 일행이다.
나는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는 일본한테서 배울 것이 많은 나라임을 새삼 느끼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일본을 너무 소홀히 생각하는 감이 있다.
어느 분이 우스개 삼아 말하기를 남한은 일본을 우습게 알고 북한은 미국을 우습게 알고 있기에 통일이 되면 세계최강국이 될거라는 말을 했다. 우스개 소리이긴 하지만 뼈있는 말이라 여겨진다.
일본은 한국을 가까이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지만 한국은 일본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우리가 손해 볼 것이 많다.
한국인들 중에는 한일관계에 있어 과거사를 자꾸 이야기한다. 과거에 일본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일본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그러기에 일본을 열심히 연구하고 우리보다 앞선 것들,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을 열심히 배워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해인 1945년 가을에 귀국선을 타고 귀국했다. 그래서 5살 될 때까지 일본에서 자랐다. 일본에 오래 사셨던 어머니는 우리 4남매를 홀로 기르시면서 일본 이야기를 자주해주셨다.
어머니의 의견은 “우리가 일본 사람들한테서 배워야 할 것이 3가지가 있노라 ”고 하셨다.
물론 우리 형제들은 그런 말씀하시는 어머니께 반발하곤 하였다. “일본사람들이 그렇다지만 우리 민족을 괴롭혔잖아요? ”하고 항의하곤 했다.
그러나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주장이었다. [일본을 배워야 한다.] (2007년 6월) ”
그의 아버지는 머슴 출신으로 일본에 가서 택시운전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창씨개명을 했다. 그는 어느 조찬회 자리에서 ‘이런 아버지가 친일이냐 ’고 되물었던 적도 있다. 당시 분위기에서 일본에서 택시운전을 했을 정도라면 확실히 일본 내에서 살고자 갔던 인물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 글을 싣고 난 이후 한참 지나서 겨울에 쓴 글로 짐작되지만 다른 글 하나는 더 본격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보인다.
“필자는 지금 일본 남단 규슈섬의 샤쓰마 지방을 여행 중이다. 샤쓰마 지방은 이웃 쇼슈지방과 더불어 일본 근대화를 주도한 지방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인 사까모도 료오마, 사이고 다까모리, 이또 히로부미 등의 기라성 같은 인재들 이 이 지방 출신들이다.
중앙무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지대인 이곳 사람들이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 사람들이 남 먼저 개방의 물결을 받아들여서 해외 문물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세계화에 앞섰다. 그렇게 세계화에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열린 사고를 하였기 때문이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사회는 지난 10년간 좌파세력이 주도하던 사회에서 이제 우파 보수세력이 주도하는 사회로 바뀌어져 가고 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한국보수우파 세력의 가장 큰 약점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누릴 줄만 알고 베풀 줄을 모르고 희생할 줄을 모르는 점이다.
이제 어렵사리 잃었던 주도권을 다시 찾은 때에 이전의 보수와는 달라져야 한다. 베풀 줄을 알고 나눌 줄을 알며 희생할 줄을 아는 보수로 바뀌어져야 한다. 그리고 변화하는 세계와 변 화하는 동북아 정세에 발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킬 줄을 아는 보수가 되어야 한다. 그런 보수를 일컬어 ‘개혁보수 ’라 한다. [일본에서] ”
적당히 버무린 상태에서 이미 정치인이 된 김진홍이란 인물이 존재한다. ‘두레 공동체 운동 ’을 통해 사회사업의 최일선에 있었던 김진홍은 왜 정치인, 그것도 보수세력의 좌장(座長)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1996년에 그가 쓴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에서 그는 사회부패현상을 이렇게 진단했다.
“10월은 부끄러운 달입니다. 성수대교가 붕괴한 달이며, 친일파를 제거하고 새로운 민족사를 시작하려 했던 반민특위가 조직되었다가 실패로 끝난 달이기 때문입니다. ”
그 이후 그는 변신했다. 훼절(毁節)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그 시기가 묘하게도 1997년경이다.
그의 이런 변신을 ‘구교형 ’이란 사람은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종교인이나 사회개혁가가 아니라 지금은 완벽한 ‘정치인 ’이 되어 있다. 그것도 ‘친일매국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정치 목사일 뿐이다.
4월 한미, 한일정상회담을 위해 방미 방일 전에 김진홍은 MB에게 독도문제, 교과서 문제를 (일본에서) 꺼내지 말라 조언했다고 알려진다. 그 이후, 일본의 도발 때문에 서로 관계가 어색해졌다는 이야기가 들린 것이 지난 7월의 일이다.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내용은 또 달라진다. 독도, 역사교과서 문제가 한국 국내의 촛불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인정해본다면 말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김진홍 스스로 인정한 ‘가장 존경하는 일본인 ’이다. 그는 13만 명에게 인터넷으로 전달되는 ‘김진홍 목사의 아침 묵상 ’에서 ‘자기 자신이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변화하고 성숙하여 나가야 함 ’을 강조한 제3의 지도자형이라고 그를 극찬했다. ‘시대를 탓하기 전에 먼저 열어 나가는 지도자다운 면모 ’를 보였다고도 했다. 샤쓰 마를 여행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이야기 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 그러나 그는 ‘이또 히 로부미 ’마저도 ‘기라성(綺羅星)같은 인물 ’에 올릴 정도로 일본의 근대화에 심취되어 있다. 후꾸자와 유키치를 일본 근대화의 선각자라고 극구 칭찬하는가 하면 일본의 과자가게 ‘도야마 ’의 상인정신도 배워야 한다고 설파한다. 훼절 이후 일본찬양에 열을 올리는 기색은 확실하다. 스스로 친일(親日)이라고 부끄럽지도 않게 말하고 있다. 아마 그는 스스로 극일(克日)을 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냐고 변명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여러 차례 독도문제이건 역사교과서이건 간에 모두 ‘일본이 정당하다 ’는 논지를 보인 바 있다. 극일, 지일은 없었다.
종교인의 정치화가 눈에 띄지만, 김진홍의 종교적 행동모델은 종종 ‘김교신 ’으로 일컬어진다. 일본의 반전 반제 신학자인 우치 무라 간조 문하에서 신앙을 배우고 난 후 1927년 귀국 함석헌, 송두용, 유석동, 정상훈, 양건상 등과 <성서 조선>을 창간한 인물이다. ‘조선산 기독교, 기독신앙 ’을 형성하는 데 초점을 두고 살았던 인물로 ‘김교신의 신앙고백은 진리에 대한 충성과 함께 민족의 얼과 양심의 표현이었다 ’(한국교회사를 쓴 민경배)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런 김교신을 김진홍은 흠모했다. 한 때 그가 발간했던 <성서 한국>이 김교신이 전력을 다해 발간했던 <성서 조선>에 담긴 신앙 유산임을 밝히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개혁 보수 ’라는 이름으로 ‘친일매국의 친위 ’를 자처하고 있다.
대통령과 일본에서 태어나 귀국했다는 인연, 한일수교 반대 경험, 그리고 기독교라는 신앙의 공통점, 나아가 일본을 보는 새로운 시각까지 공유를 하고 있는 흔적 속에는 그가 말한 ‘일본으로부터 배울 점 ’이 존재한다. 이명박-김진홍 간의 발언 유사점까지도 엿보일 정도다.
비단 이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확실히 정권지킴이가 되기로 작정한 정치세력의 힘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애국기독교 ’론으로부터 ‘친북좌익 편에 섰다 ’고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을 비난했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 후보단일화에 개입하는가 하면, 아예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간다. 8월 8일자 성명에서는 1980년 전두환 정권에서 허문도 주도로 통폐합 시켜버린 TBC, DBS를 원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론장악에도 개입했다. 이 논리대로라면 삼성이나 동아일보에 지금의 KBS2를 돌려줘야 한다. 삼성은 10조대 이상 출자총액이니 해당 사항이 없다. 그렇다면 동아일보에 KBS2를 줘라고 하는 소리다. 뜬금없이 보이지만 방송언론 장악과 정권 창출 공신들에 대한 나눠먹기에 협조해라는 압박으로도 보인다. 어느 곳에서도 ‘반전 반제 ’의 사상을 배웠던 김교신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필요할 때 써먹는 ‘포장 ’으로 전락되었다.
이런 그가 지난 5월 사단법인 고구려역사문화보존회 이사장에 취임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워낙 많은 뉴스 속에 묻혀졌다. 고구려 역사에 왜 김진홍이 들어갔는가? 혹자는 뉴라이트가 반북단체와의 결합을 통해 전통적 반공 우익의 결집까지 시도하고 있다고 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역사까지 들어있다.
김진홍은 도대체 어디를 자금원으로 해서 2005년 11월 뉴라이트전국연합을 만들고 나서 가히 놀랄만한 속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법조 종교 등에 걸쳐 세포조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언뜻 보기에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것이 사실이다. 단순히 회비니 혹은 정치헌금, 보수단체의 지원 등으로 말하기는 역부족이다.
그의 일본 행을 통해 본 자금의 루트는 대체로 선명해진다. 그가 현재로써는 일본기획자가 공급한 가장 강력한 자금공급 라인이었다고 봐야 하는 셈이다.
안병직-도요다 재단에는 박건우라는 인물이 존재한다. 한국도요다자동차 회장이라는 직책으로 작년까지 일했던 인물이다. 뉴라이트 재단은 일본 자금을 받았다는 게 공개되면서 그들의 적극적 친일행각과 함께 완벽한 친일분자란 낙인이 찍혔다. 김진홍은 교묘하게 피해간다. 그가 두레공동체를 통한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안병직과는 달리 그는 사회사업가이고 일정 수준의 후원이 가능하다고 사람들은 지레 짐작해버렸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해명되지 않을 정도로 광범위한 활동영역을 어떻게 설명할까? 정치조직을 구성해본 사람이라면 여기에 대해서는 알만하다고 여긴다.
일본기획자는 어떤 루트에서 자금을 공급했는가? 그것을 김진홍이 부인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금원과 사용용도, 목적 등 모든 회계를 밝혀야 한다. 아마 밝힌다 해도 십중십이 거짓일 공산이 크다 .
일본이 일차적으로 대상을 삼았던 밑그림에 김진홍-이상득- 최시중이 있고 이 라인은 바로 MB에게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사냥개의 첫 단계에 속했다. 이게 사실상 본류라고 봐야 하는 셈이다.
안 병직-이영훈-박효종-박세일 등은 차라리 이 메인 스트림에서는 이론을 공급하거나 정치적인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안병직의 뉴라이트재단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을 믿는 이들은 없다. 이 둘 간의 관계는 일종의 쌍두마차 개념이다. 초기 바람잡이는 안병직이라는 학술적 인물이 나섰지만 집권 이후는 김진홍이 본격적으로 정치일선에 개입하는 중이다.
그런 점에서 초기 자유주의연대를 이끌었던 신지호-홍진표-최홍재 그룹은 그들 말로는 전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친일로의 훼절을 해버린 386들이 주축이 되었던 사냥개 그룹이다. 대체로 1997년경 홍진표와 최홍재 두 사람은 신지호의 영향을 받아 우익을 표방하게 된다. 그러다가 2000년 이후 신지호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자금이 공급되면서 자유주의연대라는 그들 식의 뉴라이트 제1세대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언뜻 보기에는 안병직 류나 김진홍과는 다르게 움직였지만 결국 뉴라이트라는 이름 하에서 2006.6. 뉴라이트 재단으로 모두 합쳐지게 된다. 이들 또한 김진홍-서경석 등과의 교류를 통해 일정 수준 정치적 입지를 가지려 하고, 안병직 류보다는 김진홍에게서 그 혜택을 더 볼 수 있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른다. 자금원의 파워이고 또한 정치적인 영향력 파벌로 기생(寄生)하게 된 모양새다.
이 세 가지 유형을 중심축으로 이끈 것은 김진홍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부적으로 세력 다툼 같은 분란도 벌어지지만 김진홍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최근 그들의 모임에 참가했던 사람들 가운데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꽤 되는 모양이다.
“MB가 말을 잘 안 듣는다. 우리가 하자는 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도 힘을 보여줘야 한다. ”
하나의 집단이 탄생하고 난 이후 분화되는 과정을 거쳐 이제는 세력화에 기반한 국정개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법률 등 모든 분야가 들어오게 된 상황에서 일본기획자는 이들을 사냥개로 한 다음 단계를 노리기 시작한다.
친일세력은 어떻게 친미수구들과 지내고 있는가? 이 과제는 꽤나 흥미롭게 조명될 가치가 있다. ‘친일=친미 ’라는 등식은 현재까지는 유효하지만 미일 관계가 언제까지 동맹의 극대화 상태를 유지하게 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국이 동북아시아 외교에 있어 일본을 제2의 이스라엘화하는 시도를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미국-일본 양자 관계에서는 여전히 문화적이거나 혹은 서로 간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결합된 상태라고 보기도 어려운 구석이 많다. 그러니까 친일과 친미가 공존하는 한국에서 이들 두 세력이 취하는 입장도 약간씩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셈이다.
우 선 친미숭미 주의자들의 시각을 보자. 1945~1948년 간의 신탁통치는 차치하고 1950~1953년간 한국 전쟁은 미국이 완벽하게 서울 내의 다양한 경로를 포획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해방 이후 신탁통치 기간 동안 미국이, 1948년 이후 이승만 정권이 친일분자들을 사회 시스템 유지의 일선에 배치한 이후 친일은 친미라는 배로 옮겨 타면서 그들의 기득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친일이 곧 친미는 아니었지만 미국은 나름대로 한국 내의 친미분자를 확산하는 데 열중했던 것도 사실이다.
2008.7.1 ‘한미우호의 밤 ’이 열렸다. 한미우호협회 회장인 박 근의 축사 가운데 한토막은 이랬다.
“유월은 잔인한 달입니다. 장마가 시작되고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달입니다. 금년에는 데모와 반 데모, 촛불과 깃발, 쇠파이프와 물대포들이 서울의 도심지를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감정의 고함소리는 주변언덕의 푸른 숲과 날아가는 구름 안에 메아리칩니다. 거짓되고 근거 없는 공포와 증오가 디지털 공간을 채우면서 미국소가 광우병 소가 되고 미국사람이 광우병 환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련한 미국산 쇠고기, 그렇게도 연하고 맛있는데…”
그는 외무부 본부대사를 거쳐 1991년 한국의 학계, 경제계, 사회 문화계, 국가안보분야 등 여론을 이끌어가는 지식인 및 일부 주한 미국인으로 구성된 (사)한미우호협회를 이끄는 인물이다. 그에게 서울보다는 워싱턴이 더 조국(祖國)에 가깝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가 쓴 책들 가운데는 ‘한국의 보수여 일어나라 ’(2002), ‘정과 멋의 한국보수주의 ’(2000), ‘한국 보수주의 위기 ’(1997) 같은 책이 있는 데 이들은 한결같이 ‘한국 보수주의=친미숭미 ’의 등식을 기본으로 한다. 그 가운데서 친일은 찾기가 어렵다. 즉, 한국보수주의 실현을 위해서는 미국적 관점에서 한미동맹이 발전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실제 역사가 더 오랜 곳이 ‘한미협회 ’다. 1963년 창립되어 1977년 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은 곳이다. 발기인에 이화여대 김활란이 있고, 사단법인이 되는 시점에서는 모윤숙이 이사 이름에도 등재되었다. 고문으로 고 정주영 회장의 이름도 보인다. 2003년에는 한미우호상을 백선엽에게 수상했다. 상공회의소나 무역협회장, 주한미사령관 등을 고문으로 영입하는 조직이다. 친일요소가 듬뿍 담겨있고, 친미와 친일이 합쳐져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단체다. 이들은 적극적인 정치참여보다는 조용한 한미동맹 유지의 버팀목 기능을 수행하는 듯 보인다.
흥미로운 대목이 바로 8월 5일 부시 대통령 방한이전 보수단체의 맞불집회에 이름을 올린 단체들이다. 이른바 ‘애국시민대연합 ’으로 불려진 이 집회 구성에는 한미우호협회, 뉴라이트전국연합, 한국자유총연맹, 밝고힘찬나라운동, 금란교회, 국민행동본부, 기독교사회책임 등이 있었다. 친일과 친미가 마구 짬뽕처럼 얽혀 있다.
대체로 ‘친일 ’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종종 일본식 사고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 가운데는 ‘우찌노모노 ’(內者)와 ‘요소모노 ’(外者) 라 는 나카네 지에 교수가 말한 구분법이 있다. 즉,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면 인정하지만 아니라고 생각되면 철저하게 무시하는 경향이다. 특히 동료와 함께 있을 때는 모르는 상대방에 대해 매우 차가운 태도를 취한다거나 자기가 상대보다 우세한 입장에 있는 경우에는 우월감에 근거해서 상대에게 실례도 서슴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인간관계나 친교관계가 일정한 정도가 되는 사람의 경우, 서로 소식이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그것은 실례가 되고 다시 만나서도 어색함이 쉽게 가시질 않기 때문에 연속성 있는 사교(社交)를 몹시 중시한다. 일본속담 가운데 ‘떠나는 자는 나날이 멀어진다 ’는 말의 의미가 딱 맞는 셈이다. 아예 서로 볼 일이 없는 사람은 술잔(酒杯)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물잔(水盃)를 나눠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본에 있어 미국은 현재는 술잔을 나누는 관계다. 한국에서 친일과 친미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끼리는 일단 ‘우찌노모노 ’라는 개념 속에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와 있지 않거나 혹은 열세(劣勢)에 처한 상대방에게는 차가운 대응이 생긴다. 그 일선에 바로 ‘친일분자 ’가 앞장서는 행태가 지난 60여 년 벌어졌던 것이다.
그 점에서 과거 60년 역사의 세 토막 이야기가 정리된다. 첫째, 이승만의 미국 다루기. 둘째, 박정희의 미국과의 갈등. 셋째, 노무현의 반미주의의 변질이 그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을 잘 다룬 것으로 평가된다. 경륜을 기반으로 미국과의 외교를 펼친 점이 인정된다. 미국은 이승만 이후, 박정희라는 인물이 보인 친일적 요소에 안심되었지만 그는 그 자신이 동경한 제국주의 일본의 교육 영향대로 미국과도 대립적 구도에서 극심한 갈등을 불러 일으켰 고 제거되었 다. 노무현의 경우, 초기 미국에 대한 실체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확인된다. 심지어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를 찾았을 정도다. 그러나 좌절한다. 결국 친미정부보다 더 극심할 정도의 친미기조를 보였지만 미국에 의해 지원 받지는 못했다. 미국이 따지는 자신들의 국익(國益)만으로 보자면 껄끄러웠지만 오히려 상대하기 편했다는 평가도 있다.
친일이 본격적으로 일본기획자와의 공모에 의해 한국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부터이고 드러난 것은 2002년경부터다. 정확하게 노무현 정권 시기와 맞물린다. 그들이 내건 테제가 바로 ‘반공과 보수, 우익 ’이다. 그러므로 친미수구의 입장에서도 이것을 반대할 명분도 없었지만 실제 이 둘 사이에는 일정한 공감까지도 확인될 정도가 되었다. 미국은 친일을 지원한 것이고, 일본기획자의 의도를 방관한 것이 아니라 지원해준 셈이다.
그 상태에서 정권 교체가 벌어졌고, 쇠고기 파동이 벌어졌다. 당연히 친미이건 친일이건 간에 한미동맹의 복원 강화가 곧 한일관게에 있어 일본의 우위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미국편을 드는 것이 바로 그들 식의 ‘우찌노모노 ’가 되었고, 촛불민심을 비롯한 집단지성은 바로 ‘요소모노 ’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버렸다.
쇠고기 파동의 의미는 여러 각도에서 해석된다. 그러나 친일과 친미 양측 간에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합치 시켜준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MB 정권 자체의 초기 외교정책, 국가정책의 모든 방향이 한미관계와 한일관계로 모아지게 만들었고, 이들을 그것을 통해서 두 객체 간의 현실적인 담합을 이뤄낸 것이다.
한국에서 이들 둘 간의 갈등이 고조될 가능성은 없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들 간에는 철저하게 ‘경계 ’가 존재한다. 바로 그들이 각각 상위 계급으로 인정하는 미국, 일본의 존재와 ‘오야붕(親分), 꼬붕(子分) ’의 룰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식의 고정적 신분관계라기 보다는 한국적인 개념으로 보자면, 오히려 ‘왕초와 똘마니 ’같은 비영속적이고 또한 여러 가지의 계약에 의한 결합구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친미 친일 양측 모두 이것은 오야붕 꼬붕 관계처럼 사회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관계를 동시에 내포하는 형태로 고착화되어 버린 입장이기도 하다.
이것을 지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친일매국세력이 한국 사회 국가 내에서 그들의 우세(優勢)를 장담하는 과정과 현상이 그들 내부에 있어서 각 결합요소를 자칫 뗄 수 없는, 그러니까 유동성 자체를 전혀 가질 수 없는 견고한 오야붕과 꼬붕 관계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깊어진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MB 정권 내부에서 벌어지는 집권 이전과 이후의 일련의 과정들에서는 청와대의 독주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오히려 의회정치 자체보다는 전형적인 측근정치의 모양새가 갖추어진다. 단순한 ‘코드인사 ’가 아니라 목적성을 가지고 통제되고 ‘줄을 세우는 ’형태, 이권의 배분 등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친미 친일이 배합되는 셈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보수와 진보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친미숭미와 친일 간의 사회적 정치적 관계의 재정립이란 점에서 앞으로도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강한 침탈의 전선이라고 보여진다.
친미와 친일은 당분간 대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본기획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 내의 친일 사냥개가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더 미국과의 관계, 그리고 친미수구와의 ‘우찌노모노 ’개념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 거기에 신 메카시즘 정국이 있는 것이고 새로운 형식을 띤 좌파론, 반공론, 그리고 북한 위협론까지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2008.8.19 연합뉴스에는 ‘이상한 기사 ’하나가 떴다. 한국 정부가 ‘독도 ’라는 명칭보다 ‘영유권 수호 ’에 집중하겠다는 내용이다. 8.15가 ‘건국60주년 ’으로, 그리고 독도문제와 대일관계를 분리해서 하겠다는 경축사가 나온 지 딱 나흘만의 일이다.
기사를 통해 내용을 보자.
“정부는 미국과 유럽 등에서 독도를 ‘리앙쿠르 암 ’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시정하기 보다는 독도 영유권 수호에 외교력 등을 집중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19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럽 등에서는 오래전부터 독도를 리앙쿠르 암이라고 써왔기 때문에 이를 시정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문제를 크게 만들 수 있는 소지가 있다 ’면서 독도표기 시정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이 고위당국자는 이어 ‘리앙쿠르 암 ’으로 표기하는 것은 영유권과 관련된 것이 아니지 않느냐 ’고 말해 명칭 표기를 바로잡기보다는 영유권 오류 시정에 외교력을 집중할 것임을 시사했다.
정부는 지난달 말 미국 지명위원회(BGN)에 의해 ‘미지정지역 ’으로 변경됐던 독도의 영유권 표기가 ‘한국 ’과 ‘공해 ’로 복원된 직후 독도표기를 ‘리앙쿠르 암 ’에서 ‘독도 ’로 바로잡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한달도 못돼 정책을 수정한 것이다.
이는 독도 영유권과 관련된 사항에는 단호하게 대처하겠지만 명칭 복원문제에 섣불리 나섰다가는 일본의 국제분쟁화 전략에 말려들 수 잇다는 우려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외교통상부는 이와 관련, 독도문제에 지속적이고 치밀하게 대응하기 위해 각 재외공관에 주재국의 독도 영유권 및 명칭 표기와 관련된 움직임을 모니터링하고 오류 시정에 나설 담당관을 두도록 지식했다.
외교부는 또 독도문제를 전담하고 있는 부서인 ‘해양법류기획과 ’의 인원을 보강할 계획이다. ”
독도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은 ‘명기(明記)의 문제다. 그러니까 ‘독도 ’는 한국령이고 ‘다케시마 ’는 일본령, ‘리앙쿠르 암 ’은 주권 미지정 구역이라는 영유권에 대한 입장이 담긴 것이다.
결국 이 정부당국자의 의견은 일본의 의견을 수용한 것이 된다. 7월 9일 홋카이도 도야코에서 한일 양국 정상간 대화(회담도 아니다)에서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 ’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 증빙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를 전한 요미우리 14일자 기사의 헤드라인도 ‘독도문제의 명기 ’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것이 정책이라면 MB정부는 ‘독도표기를 사실상 포기한다 ’고 선언한 셈이 된다. 굳이 외교적인 우려나 난점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한 국가가 영토주권 자체를 스스로 ‘분쟁지역화 ’하는 데 동의한다는 제스처에 해당한다.
왜 이런 사태가 거듭 발생하는가?
일단 MB정권 자체가 친일이란 두껍을 쓴 것은 명확해 보인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일만 남아있고, 그것이 정당한가 아닌가만 따져봐야 하는 입장이 된 셈이다. 그 이후는 달리 판단을 내려봐야 할 문제다.
우선 친일매국세력이란 사냥개들을 푸는 과정에서 일본기획자는 첫 단계에 독도와 역사교과서가 나와야 한다는 걸 생각해둔 것으로 보인다. 즉, 2012년에야 교과서에 게재할 계획이 작년 말 갑작스럽게 변경되어 올해 역사교과서가 나온 배경에는 새역사교과서 모임이라는 이른바 대안교과서를 주도한 세력의 전위행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때의 반응을 통해 뉴라이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한국 사회 내에 제대로 침투된 매개로 작용한다는 것을 일본기획자는 확인했다. 당연히 요구는 깊숙하게 들어올 상황이었다.
여기엔 다시 두 가지의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이른바 한일간의 역사이슈를 통해 쇠고기 정국이 가져온 파장을 없앤다는 얄팍한 야합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 문제를 정리하지 않고는 한일 간의 본격적인 ‘동맹 논의 ’가 쉽지 않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시간표가 그렇게 작성되었다고 봐야 할 부분이다.
앞서 이미 ‘우리민족끼리 ’에서 ‘민족 ’을 뺀 자리에 들어갈 주체로써 일본기획자가 어떤 기능을 생각하는가는 살펴본 바가 있다. 구체적으로 여기에는 이런 식의 테제가 자리잡는다.
이것은 꽤나 주도 면밀한 접근법을 가지고 있다. 즉, 첫 단계가 선행되지 않고는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데는 반드시 장애요인이 많은 것이 한국인의 심리구도라는 사실파악에 기인한다.
한 국과 흡사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일본의 대중국 접근을 보자. 지난 5월 후진타오 주석은 방일해서 영유권 문제가 첨예하게 걸린 배타적 경제수역(EEZ) 경계설정 문제를 아예 유보시키고 동중국해 가스전 공동개발문제까지 언급하였다. 공동의 이익 추구가 바로 상호 실리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단, 여기에는 ‘유보 ’라는 개념에는 분쟁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다시 적대적 관계가 형성됨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더군다나 중일 양국 역사학자들이 모여 ‘중일역사공동연구회 ’도 7월말 보고서를 내기로 되어 있었다. 올림픽이 이를 멈췄다. 여전히 민감한 구석은 있다. 난징(南京) 대학살 등 중국 내 반일감정을 야기할 소재도 있어 올림픽 뒤로 미뤘다. 2001년 10월 당시 중국 총리 주룽지(朱鎔基)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회견에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야스쿠니(靖國) 신사참배와 교과서 문제의 해결 없이 중일 관계 개선은 어렵다 ”고 단언했다. 장쩌민(江澤民) 당시 국가주석은 “역사의 참된 모습을 가르침으로써 비로소 우호가 세대에 걸쳐 지속된다 ”고 지원사격을 가했다.
중일 관계가 비록 ‘전략적 호혜관계 ’라는 자리를 잡았지만 두 가지 문제는 여전히 쟁점에 속한다. 한국과는 대응방법이 다르고, 또한 한국이 일본에 대응하는 방식도 뭔가 모르게 서툴게 보인다. 이것이 단순한 ‘서툴다 ’는 말로 외교정책을 공박(攻駁)할 수준의 일인가?
MB정권이 취임 초기부터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스스로 높여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명분은 이렇다. 한일간의 ‘미래 ’를 위해서, 또한 한일간에 협력관계의 재정립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일협력 강화라는 토픽이 주어졌다. 이건 한미간의 동맹복원 강화와는 차별화된 개념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이것이 더 무서운 개념이다.
공기업 민영화는 슬그머니 ‘선진화 ’라는 주제로 바뀌어져 진행되고 있다. 방만한 경영에 대한 개선을 위해서는 민영화가 대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방법론이 관건이다. 그 동안 IMF 이후 공기업 민영화는 대체로 외국인들의 배만 불려주는 형태가 많았다.
흥미로운 것은 한나라당에 ‘다케나카 헤이조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고이즈미 내각의 공공부문 개혁전도사로 불리는 다케나카를 배우기 위해 여당이 벤치마킹을 위해 선택한 사람이 ‘매우 수상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자이고, 그는 지난 6월 대통령 특별자문위원까지 된 상태다.
여기에 민영화 과정에서 외국기업 대기업의 참여 제한을 하지 않겠다는 정부 여당의 방침도 확고하다. 결국 민영화를 어떻게 하는가 문제보다는 그 ‘대상 ’과 ‘방식 ’에 초점을 두고 가는 셈이 된다. 흑자기업으로 잘나가는 인천국제공항도 대상이 되었다. 끊임없이 그 이면의 이야기가 파헤쳐지지만 ‘이현령비현령 ’으로 할 경우에는 대처방법이 없다. 저질러지고 난 다음에 판단 될 일이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방법론이 깊이 공감대를 형성한 것같이 보이지도 않는 상태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크게 세 가지의 관점에서 한국의 현 정권과의 담합을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다케사다 히데시(일본 방위연구소)의 협박-독도문제가 시끄러우면 한국의 IMF같은 상황에서 일본이 지원해주지 않을 수 있다-은 이러한 전반적인 것을 포괄한 그야말로 전문가의 목소리 이자 경고 였지만, 오히려 바꾸어 말하자면 그런 위기가 와야만 일본이 한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 고 주장하는 의미도 있었다 . MB 정권의 입장에서는 그런 위기가 오지 않으면 좋겠 다 말하 지만, 위기가 없는 상태에서 특별한 호전이 없다면 지속될 사회 내부의 비난을 감당할 길이 없다. 그래서 ‘내년 말이면 좋아질 거라 ’는 식의 실천각론이 채워지지도 않은 막연한 애드벌룬도 등장한다. 뚜 렷한 실적이 나타나기 어렵다면, 선택은 두 가지 밖에는 없게 된다. 일본을 끌어들여 경제를 활성화하는 모양새를 갖추는 것, 그리고 경제 자체가 위기상황으로 몰리면서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를 걸어가는 것이다. 여기서도 방법론이 등장한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있어 한일 양국의 위정자 간에 담합이 없다면 불가능한 진행방법이다.
독도문제가 불거지고 정리되는 전체 과정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양보 ’가 눈에 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는 조만간 밝혀질 일이지만, 그 때의 상황과 일본기획자의 의도를 연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단지 이것을 확인할 방법이 현재 그나마 있다면 정책 전반에 대한 투명한 집행 을 통해서 만이 가능할 뿐이다. MB 정권이 그렇게 할 확률 은 현 시점 제로 에 가깝 다.
광의(廣義)로 본다면, 현재의 친일매국세력은 ‘이익집단 ’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어떤 형태로 표출되건 간에 일단 그들이 가지고자 하는 것이 ‘이익 ’, 그 가운데서도 ‘사적 이익 ’이다. 이들은 그를 위해서 ‘공적 이익 ’, 즉, 사회 국가, 시대와 역사라는 기본 틀을 고려하기 보다는 기득권(旣得權)의 유지와 재 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 난 수 년에 걸쳐 사적 이익에 기반을 둔 이러한 정치활동이 국민들의 눈에 쉽게 포착되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 동안은 이러한 이익을 위한 일종의 투자시기였다는 점이다. 씨를 뿌린 상태- 여건 조성기-에서는 발톱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젠 본격적으로 사냥의 대상을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뉴라이트 집단을 보자.
이들은 초기 순수한 연구 혹은 진정한 보수의 재 결집을 내걸었지만 지금은 가장 강력한 정치집단이 되어 있다. 정치 세력은 곧 정권과 정부 내에서의 ‘자리 ’라는 배정 몫을 요구하게 되어 있고, 실제로도 정권이 배당할 수 있는 영역에 빠짐없이 그들의 이름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과거 이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줄서기 ’영역에서는 예외 없이 그들과의 결합을 강하게 시도한다.
이른바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 ’, ‘정권 재창출 ’세력들 간에도 알력은 존재한다. 이들은 지난 몇 달 동안 쇠고기 파동, 촛불민심, 집단지성의 등장 상태에서 일정 수준 서로간을 견제하는 모습도 보여왔지만, 촛불민심이 100일을 넘기고부터 마음 놓고 그들의 자리배정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그 점에서 8월 8일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전두환 정권 시기 강제 통폐합된 방송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라는 성명은 시사하는 바 크다.
여기에서 언론과의 담합구도가 나타난다. 이른바 조중동, 문화, 그리고 간접적이긴 했지만 국민일보나 몇 개의 인터넷 매체의 경우에는 정권 차원에서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 형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 단추를 뉴라이트전국연합이 ‘동아일보 ’를 상대로 공여해주자고 덤벼드는 꼴이다.
검경의 정권 감싸기에도 여지없이 이익구조가 생긴다. 언론을 향한 불매운동에 구속영장을 청구하거나 강경진압과 평화시위의 불법성 조각 등 일종의 공안정국과 신 메카시즘을 형성하는 선봉에 서 있다. 과거의 전례로 본다면 이미 법조권력 내부에도 사법부의 독립성과는 거리가 먼 정권과의 야합구도가 생겨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적 이익의 극대화는 MB 정권을 둘러싸고 있는 각자의 최대 목표에 해당한다. 공적 관념이 없다는 사실, 이것이 중요하다. 겉으로는 한국의 새로운 보수우익의 탄생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일단 집권 상태까지 오는 동안 자신들의 몫을 배정 받고, 나아가 앞으로도 영향력이나 이권을 유지할 수 있는 줄서기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이것이 단순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상태에서 이것이 ‘불의(不義)롭다 ’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행된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친일매국에 대한 의식이 있으면서도 개인주의적 이익추구에 더 열을 올리는 현상이 드러났고, 모든 다른 시대의 사안마저도 그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로 취급된다.
이 현상은 국격(國格)이 아니라 거의 도적소굴이 된 형세다.
일본기획자의 입장에서는 적절한 사회 분열의 조장을 통해서 그들의 입지를 살릴 호기를 맞은 셈이 된다. ‘흔들어야만 틈이 생긴다 ’는 이론에 매우 충실한 흔적이 나타난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이 상태를 만든다는 사실, 그리고 만들어 가면서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새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이를 위해서 사회 내의 강자(强者)로 분명 존재했지만 끊임없는 논란에 시달리던 기독교 가운데서도 대형교회의 이익을 담보로 하는 세력과의 결합도 진행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친미성향을 보인다. 그들에게는 대형교회가 존립해야 하는 이유, 그러니까 자신들의 ‘아성 ’이 그들 내부의 소수에 의해 장악되는 상태가 유지되고, 그 영향력을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 골고루 미치게 만드는 데 초점이 있다.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대가로 ‘친일의 재구성 ’이 눈감아 지는 보합을 만들어 내었다.
기 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오래 전에 민족기업이라는 형태의 시대와 역사를 기반으로 한 기업문화는 사라진 상태다. 오히려 일본기업의 경우, 여전히 그들 내부의 사회 통제 역량이 발휘되고 있고 또한 일본 자체의 국수주의적 기업관리가 보다 상급차원의 정치와 종교, 그리고 제도 속에서 용해되어 있음에 비해 한국 기업은 IMF 이후 철저하게 생존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적 관점의 기업만이 살아남아 있는 상태다. 이들에겐 공권력을 바탕으로 한 정권과의 담합이 필요하고, 정권은 이들을 통한 사적 이익이 부여되어야 한다. 이른바 ‘대기업 프렌들리 ’는 달리 표현하면, 기업이 정권 유지에 보탬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국격의 유지와는 상관없는 개념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보편 급진화 상태에서 기업이 굳이 국격까지 들여다 볼 틈도 없다. 이들은 한국의 사회 국가가 친일화 된다고 하더라도 기업의 생존가치가 더 중시된다.
사적 이익이란 개념은 협의(俠義)가 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취업을 위해 뉴라이트 집단을 사회봉사단체로 규정하고 이에 협조하는 학생, 졸업생 등 젊은 세대가 형성된다. 이것은 사회가 의기(義氣)보다는 자신의 밥그릇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변했음을 의미하지만, 그에 반발하는 세력도 만만치는 않다. 심정적으로 동조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소시민적 변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일본기획자는 활용기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권의 사적 이익은 무엇인가?
가장 의문이 드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과연 소수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친일도 마다하지 않고 수용한 상태에서 시대와 역사가 이 정권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것인가는 금방 생각해봐도 해답이 나온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정권은 이 방향을 거침없이 수용하는가?
‘친일의 재구성 ’이 단순하지 않게 영속성을 목적으로 한다는 흔적이다. 개헌 논의를 포함한 정치권의 흐름은 국민들의 외면 회피, 무관심과 같은 정치적 행태까지도 계산 속에 넣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떳떳하게 친일정권을 말할 수는 없지만, 친일을 하더라도 경제만 살려낸다면 그 순간에는 ‘평가를 받게 된다 ’는 생각이 팽배하다. 즉, 안전장치를 ‘경제 ’하나에 모두 맡기고, ‘경제지상주의 ’로 나가고자 하는 드러난 뜻이 거기에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실패할 공산이 크다. 정권은 그렇게 판단의 착오를 하더라도 친일매국세력과 일본기획자는 정권 자체의 실수 시기 동안 그들의 기득권과 입지를 구축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무서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2010년은 MB 정권의 중반기에 해당한다. 정상적으로 간다면 레임덕이 오지 않게 될 공산이 큰 시기, 즉 정권의 하이라이트와 맞닿아 있는 때이다. 그 정도 시간이면 일본기획자는 충분히 소기의 목적한 바를 ‘돌이킬 수 없는 상태 ’까지 만들 자신이 있다고 본다.
MB 가 이러한 사실을 광의로 해석하지 않고 협의로 본다는 점은 불행한 일이다. 그 또한 정치적으로 친위세력을 배제한 정책방향을 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최근에는 오히려 보수세력의 결집을 추구하면서 반대입장이거나 회색지대마저도 고려대상에서 제외하는 현상마저 보인다. 근시안적이다. 이들은 결코 MB 정권이나 MB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보다는 사적 이익에 기반한다는 사실, 그러므로 언제든지 그들의 욕망이 기득권으로 충족되는 순간, 등을 돌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지금 나타나는 현상이 묘하게도 유신정권 말기와 흡사하다는 판단은 너무 지나친 것일지는 모르나, 여하간에 정책이나 혹은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정권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것을 바라는 것보다 더 이상 실수하지 않는, 더 큰 실수가 있다면 강력한 반발로 이어질 조짐마저 보이는 상태다. 이것은 위험신호다. 국격(國格)의 손상에 대한 민심 요동도 나오지만, 정작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집권하게 된 기본적인 약속인 ‘경제살리기 ’가 빠른 시일 내 윤곽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가능하다 ’고 민심이 판별할 경우, 그 때가 가장 위험한 상황이 도래한다.
일본기획자는 이것을 원만하게 조정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 일본이 전력을 다한다면 여하한 위기상황에서도 정권의 안정성은 구축될 소지가 크다. 그러나 대가 없는 공짜는 없듯이 일본은 그를 통한 요구를 해올 것이고, 그 사실까지 밝혀질 경우는 민심은 경제살리기를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배신감에다 일본의 음흉한 의도, 그리고 나아가 이것을 방관하고 협조한 친일매국세력들에 대한 포괄적인 단죄(斷罪)의 양상으로 번질 소지도 있다.
분명한 점은 일본기획자 또한 사적 이익에 기반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점이다. 일본의 국가이익은 차치하고 그들 또한 일본 내부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사적 이익을 한국 내에서 달성코자 하는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보면, 현재 한국은 각 세력들의 사적 이익의 각축장이 되어 있다고까지 표현 가능할 정도다.
MB 정권이 이것을 현명하게 대처 가능한가 아닌가에 대한 개별적 판단은 몹시 부정적이다. 첫 방향을 잘못 잡았고-의도했건 아니건 간에-반 년이 된 지금도 그 방향에서 변화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리 완전하고 철저한 일본기획자의 의도가 반영된 진행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변수는 존재하는 법이다. 지금의 가장 큰 변수는 MB 본인에게 있고, 그 다음은 민심에 있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일본은 교활하다. 아니 철저하게 그들의 목적을 추구한다. 일본 우익이 가진 원초적 침략본성 과 의식구조는 앞서 언급한 바 있으니 생략한다. 그들에게 있어 한 번 장악한 경험이 있는 한반도를 자신들이 우세한 입장에서 다시 장악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우스운 일이다. 가장 좋은 기회가 왔고, 이 또한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에서 나름 자부심도 가지고 있을 터이다.
고심 끝에 내놓은 카드는 역시 저변을 훑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안병직을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군사정권이 무너지려는 시점에 준비한 안병직 류의 카드는 김영삼 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점차 혐일(嫌日)마저도 무디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보게 된다. IMF가 등장하기 적어도 2년 전 일본은 한국 경제의 위기를 점치고 있었다. 그 당시의 판단이 오늘날 ‘뉴라이트 ’라는 친일매국의 사냥개 집단을 완전한 정치세력화 시키는 데 기여한 셈이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설 수 있도록 협조한 대가로 얻은 창가학회의 사단법인 인정은 완벽한 한국 내의 실존적 기반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IMF로 인해 개방된 서울을 향해 투입한 벤처자금, 엔케리 자금, 그리고 사채 대부업과 부동산 PF로 투입된 자금, 그리고 금융기관과 국가로 투입된 대부자금, 주식 채권에 투입된 자금 등이 적극적인 ‘공작 ’의 자금원으로 활용 가능한 기반을 조성했다. 역시 경제였다. 그리고 학술적 성과라는 명목을 앞세운 교육 즉, 사회적 인식변화에까지 도전하게 된다.
2007년 대선이 끝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뉴라이트는 친일의 마수를 본격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안병직 류에서 잠깐씩 비친 친일적 성향은 학술을 바탕으로 또는 보수우익의 관점으로 국내의 기존 보수들에게 인식되는 수준을 맞추었을 뿐이다. 그러나 대선이 끝나고 난 이후, 이들은 적극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치 세력 바로 그 자체로 등장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조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이 오히려 뉴라이트 운동을 신 보수우익 운동으로 띄워줄 때였다. 그러니까 그 이전 수년 간 조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언론의 편향적인 장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촉수를 둔 것이다.
오늘을 기준으로 보면, 일본기획자는 한국 내부에 많은 눈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실행력도 가졌다.
우선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곳에 그들의 헤드브레인이 수시로 연락을 가동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또 집권 여당에게 강력한 자문을 해줄 수 있는 여건도 형성했다. 친일매국세력을 중심으로 언제든지 청와대 여당, 그리고 정부, 심지어는 야당에 이르기까지 정치세력으로의 조언과 압박을 병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항상 일본 내의 연락책과 소통 라인을 열어두고 있다.
조중동을 중심으로 정권감싸기에 올인했던-물론 조선의 경우는 조선 대 반(反)조선으로 불릴 만큼 그들의 사적 이익에 목숨을 거는 경향을 보인다-추종 집단들에게도 골고루 전리품의 분배가 진행 중이다.
촛불민심을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주춤했지만 이를 강력한 정권전복 음모, 나아가 야당이 배후세력이 된 정치적 반발, 그리고 친북좌파론에 입각한 좌파적 관점의 회귀본능으로 폄하하면서 공안정국과 신메카시즘의 칼을 빼들고 있다. 촛불민심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해주는 것보다 누르는 것을 선택한 셈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본기획자들의 메인 포스트가 올라올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경로로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
여 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통일교다. 지난 총선에서 평화통일가정당으로 창가학회가 공명당을 만든 것을 흉내 내었던 전례가 있고, 문선명 총재 이후를 대비하는 인적 포진을 마친 상태이기도 하다. 통일교의 실질적 기반은 일본이다. 그래서 일본을 떠난 통일교는 상상하기 어렵다. 통일교-창가학회 간에도 일정 수준의 커넥션이 유지된다. 이들이 단순한 종교적인 교류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타당하다. 생존의 존립기반 확보를 위한 정치적 활동에서 통일교도 일본 정치에 있어 일정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한일 간의 관계가 평화적 수준으로 진행되기 위한 전제는 일본의 침탈 의도 유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기본은 무너진 상태다. 한국 정치에서 과도할 정도의 친일매국세력들의 ‘일본 감싸기 ’선전 전술이 이어진다. 이는 단순히 친일 환경을 만들자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친일의 재구성 ’은 철저하게 공격적 성향을 지닌 상태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에 대비되는 서울의 모습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취약하다. 오히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대응할 준비보다는 동화를 시도하는 듯한 움직임마저 있다. 그런 사이를 뚫고 일본은 빠른 속도감을 동반하며 안착(安着)을 겨냥한다. 그런 시기다.
왜 한일FTA는 지지부진할까?
1998년 논의를 시작한 이래 2003년 1차 협상, 2004년까지 6차 협상을 거친 한일간 FTA 논의는 2008년 4월 6월부터 재개하자고 했지만 결국 7월 다시 결렬되었다. 당시는 신사참배를 둘러싼 논란이 쟁론 가운데 있었 지 만 이번에는 독도, 역사교과서 문제도 한 몫을 했다. 더군다나 협상 재개의 조건에서 한국측은 대일적자 개선을 위해 부품소재 등 산업협력의 확대와 통상 장애물인 각종 비관세 장벽 해소, 농수산물의 시장개방 확대를 내걸었지만 일본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이런 말이 나왔다.
“기본적으로 FTA는 단순한 경제관계 문제가 아니고, 경제관계를 통한 양국간의 우호와 협력을 확대하기 위한 조치다 ”.
그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으니 협의할 것이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일본은 농수산물 개방도 소극적이고, 산업, 기술협력, 기술이전 등에 있어서도 정부가 하는 일이 아니니 보장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이것이 전부인가?
앞서 나는 두 가지 관점을 지적한 바가 있다. 하나는 바로 ‘우리끼리 ’라는 대목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 한국을 보는 눈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니까 ‘경제 ’로만 한일 관계를 보는 눈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말하는 것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다시 백 년 ’은 야심 찬 기획이다. 그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1998년 시작된 한일FTA논의가 준비과정을 거쳐 2003년 1차 협상을 하기까지의 시간은 일본이 한국을 지켜보는 일종의 테스트 기간이었을 뿐이다. 일본의 관점에서 ‘경제 ’는 하나의 도구다. 그것이 전부가 되지 않는다. 혹자는 일본을 이코노믹 애니멀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일본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오늘 일본이야말로 폴리티컬 애니멀이다.
조금 각도를 넓혀 보자.
한국의 경제상황이 금년 내 한미FTA 체결이 어렵다는 건 눈에 선하다. 미국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고 재협상으로 들어가는 건 정해진 수순 같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의 여파도 상당히 오래 갈 듯하다. 쉽게 그칠 일이 아니다. 이것이 FTA의 전제처럼 되었지만 해결과정에서 한미 모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채 FTA를 논의해야 한다.
아무리 대세라고는 하지만 한미간 FTA는 쟁점이 많다. 서로가 불편한 구석이 있다. 더군다나 한국 경제의 상황이 썩 좋지 못하다. 언제 사건이 터질 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이어진다. 한미동맹을 FTA를 통해 ‘경제동맹 ’수준으로 만들자는 논의는 그래서 쟁론이 많을 수밖에는 없다.
일본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과는 여전히 ‘우호와 협력 ’을 조성할 만큼 준비가 안되었다고 본다. 이건 마치 친한파라는 단어가 제국주의 시대 강점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처럼 협력의 전제로 일본이 충분히 한국을 장악할 수 있는 구도설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이건 단순한 추론이 아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대일무역 적자폭이 날로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7월말 기준 무역수지 누적적자폭이 이미 200억불이 넘었고 금년은 300억불을 확실히 넘길 것으로 보인다. 서비스 수지도 작년 28억불 적자였다. 핵심 자본재와 부품, 소재를 일본에서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는 산업구조다 보니 한국 경제가 망하지 않으려면 일본부품을 계속 써야 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보고서(8.19)에 따르면 중간재 중심의 무역적자 품목이 섬유가죽 등 소비재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한국의 ‘경제종주국 ’이 이미 되어 있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한국은 일본에 흑자를 기록해본 적이 없다. 대일무역 적자는 중간재 생산이 특화된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고, 구조적 문제는 하루 아침에 고쳐질 일도 아니다.
이 점이 중요하다. 빠른 시간 내 한국 경제가 일본 과의 종속성 을 해소할 수 있는 기미가 없다는 사실, 그것을 지난 시간 정권이 이어져 오면서도 체질 개선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결론으로부터 이야기가 출발된다.
확실히 일본은 한국의 열세(劣勢)를 읽었다. 그 이전부터도 그랬지만 대한민국 정부수립 60년, 그리고 MB 정권의 집권에 맞추어 일본이 취할 수 있는 방식은 이제는 제2의 소속(미국)에 있던 한국을 제1의 소속(일본)으로 데려오는 작업을 전개하고자 한다. 일본 우익이 보는 한국이 지향해야 할 집단 소속은 하나다. 그것은 미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며 오로지 일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매우 심각한 논쟁을 불러 일으킬 소지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사실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미국은 그들과의 동맹을 유지하는 대상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한반도 문제 특히 한국과 관련해서는 미국에게도 분명한 양보를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것이 한미일이라는 기본적인 동맹틀을 깬다거나 혹은 한미관계를 해치는 범위만 아니라면 미국이 반대할 입장도 아니다. 오히려 더욱 손쉽게 삼각형의 맨 꼭지점만 관리하면 된다는 생각도 한다.
여기에서 일본의 다음 단계가 시작된다. 지역경제공동체나 지역경제통합의 논의가 없는 상태에서도 한일간에는 ‘경제 의 종속적 동맹 ’은 현재도 실질적으로는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무역수지 적자폭이 연간 300억불에 달하고, 구조적으로 이것을 개선할 여지가 당분간 없다면 그것은 일본이 종주국이라는 소리를 한다 해서 틀린 말도 아니다. 매몰차게 관계를 딱 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쟁이 벌어져도 일본 부품을 써야 한다는 말이 옳을 정도다.
이 상태에서는 파국(破局)이 아니면 탈취(奪取)로 간다는 일본식의 집단간 투쟁이 적용된다. 일본은 한국을 탈취해야만 할 우세(優勢)를 확인하고, 다시 그를 위해서 부족한 면을 보충하는 데 주력했던 지난 십여 년이었다고 봐야 정상이다.
당연히 한일FTA를 체결할 이유가 없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양국의 산업 협력구도가 변할 조짐도 없다. 한국이 도망칠 가능성이 없으니 서서히 포획에 들어가도 좋다. 정책통합이나 혹은 배분이나 안정화 정책 같은 복잡한 논의를 할 필요가 없이 일단 종속구도 자체를 유지 심화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상대(한국)가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장악한 상태의 완전한 포획기도와 같다.
2004년 뉴라이트 집단의 등장 이후 친일세력들의 일관된 강조점은 묘하게도 ‘일본을 배워야 한다 ’로 집중된다. ‘배울 것이 있다 ’는 말도 그 변형이다. 그런데 극복을 하기 위한 수순이 아니라 종속(從屬) 자체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장기적으로 중간재 생산을 위한 산업구도의 재편보다는 일본과의 구도 자체를 인정하고 들어간 셈이다. 그래서 2002~2004년 사이에 있었던 한일FTA 협상이 깨어지는 과정에서 고이즈미 전 총리의 신사참배라는 사건도 있었지만, 그 당시를 되돌아 볼 때, 협상은 하되 진정으로 진행 할 의사는 없다는 걸 굳이 감출 필요도 없 는 상황이 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해보나마나 한 게임이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한일 간의 오늘은 두 가지의 양태가 드러났다. 하나는 한국은 일본 없이 살기가 퍽퍽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은 한국에게 어떤 형식으로건 개입이 가능한 준비가 끝나 있다는 점이다.
‘동맹 ’(同盟)은 같은 레벨에서 손을 잡는(聯手) 형태도 있지만 사실상의 종속(從屬)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유럽연합 같은 유형이 아닌 구 소련 연방 체제 같은 형식이다. 한일 간의 동맹 논의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그 전제부터 사실상 후자에 속한다. 어떤 계기에 의해 일본의 주도로 진행된다면 고착화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식민 ’(植民)이 된다. 일본은 그러한 상태를 원하는 것이고, 한국은 어쩔 수 없으니 그 상태라도 좋다고 받아 들일 개연성인 높은 집권세력이 들어선 입장이다. 오히려 그것을 ‘배운다 ’는 단어로 포장한다.
민심을 ‘배워야 한다 ’로 이끄는 사람들은 일본의 깨끗하고 깔끔하기까지 한 환경보전이나 혹은 그들의 습관-이를 테면 김진홍 식의 근면성, 독서열, 거짓말 안하기-을 은근히 끄집어 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나름대로 각 사회 국가는 특성을 가진다. 그야말로 특질(特質)인 셈이다. 그것을 동경(憧憬)과 모방(模倣)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그들 이면에 숨겨진 정신에 지배당한다. 좋은 것은 배워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식의 시대와 역사가 만든 것을 그대로 옮겨오자는 주장은 그 자체가 바로 ‘매국 ’(賣國)이 된다. 그런 현상이 알게 모르게 서서히 다시 들어오고 있는 것이 한국의 오늘이다. 단순히 종속적 경제동맹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일단 정신부터 개조(改造)하자고 덤비고, 그 일선에 사냥개들이 먼저 나서는 나라가 되었다.
고이즈미 내각의 특징은 대북문제를 ‘풀자 ’쪽으로 갔던 정권이면서 한 편으로 더 묶어버린 점을 들 수 있다. 2002년 북일정상회담, 2004년 2차 정상회담 이후 납치자 문제는 끝이 없이 공전을 거듭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북일 간에는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못할 입장을 만들었다. 납치자 메구미의 유골 진위를 둘러싼 파장은 일본 내에서 여전히 일정한 파장을 가지지만 정작 그것을 뛰어 넘으려는 기획은 2008년에 들어서야 시작이 되었다.
8.11~12 일 베이징 올림픽이 한참 열리고 있던 시간, 중국 선양에서 열린 북일수교회담은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와 맞물리면서 묘한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이 일본을 위한 속도조절을 하고 있고, 일본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북한과의 일정 수준 대화를 진전시킨다는 프로그램이 작동된 것이다.
한반도 문제는 기본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각국의 국익이 깊숙하게 감추어진 채 겉으로 만계속해서 움직이는 기현상을 보여왔다. 그래서 예측은 하지만 각자의 속내(內心)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주요 사안의 분기(分岐) 현상 이 나타난다. 이른바 시간 끌기 같은 것이다.
북핵 실험이 벌어진 2006년 10월 9일을 기점으로 10월말 재개된 6자 회담은 2007.2.13, 2007.10.3으로 이어지면서 해결의 기미를 보였다. 북일 관계는 그 가운데 오롯이 ‘북일 양국간 관계개선 ’이라는 과제로 들어가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북핵 실험으로 그들이 다시 한반도 북부 문제에 개입할 기회가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6자 라는 다자 구도 속에서 양자 협의구도를 별도로 인정 받은 상태는 그들이 원한 바이기도 하다.
일본의 입장에서 북한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시 백 년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빠질 수 없는 테제이기도 하다. 서울에 진출하기 위해 지난 십여 년간의 작업을 해왔던 일본의 입장에서 앞으로 북한은 어떤 형식으로 다룰 존재인가를 봐야 하는 이유는 남북한 협력구도의 심화는 곧 일본의 한국진출이 방해 받는다는 원리에 입각한다. 친북과 친일, 반북과 반일은 항상 동일 선상에서 대응개념으로 자리잡아 있다. 그것이 해방 이후 63년간 서울이 걸어온 길이다.
한 국에서 친 민족적 성향이 나타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일본기획자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07년 대선 시점, 당시 한나라당 최고의원 정형근은 신 대북정책을 꺼냈다. 보수적 관점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친북정책이었다. 그는 나아가 국가예산 1&의 대북사업 활용이라는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렇지만 그의 시도 자체는 MB 정권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그 고비가 1월 17일 외신기자회견 이후였다. 인수위 시점에서 MB가 선택한 노선은 철저한 대북 강경책이었고, 그 기조는 지난 6개월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일단 서울이 평양을 멀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스스로 정착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여기에는 복선구도가 존재한다. 뉴라이트 집단이 MB 정권에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바로 ‘반북 ’, ‘좌파론 ’이다. 남북한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서는 이 논리 자체를 꺼낼 수가 없게 된다. 어렵게 만들어 둔 ‘사냥개 ’를 활용조차 못하게 되는 상황이 나타나는 셈이다. 그래서 MB와 정권의 분위기 자체를 ‘북한 길들이기 ’로 극대화 시키면서 긴장을 조성했다.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울 정도로 나타났다. 7월 금강산 관광객 피습사건은 일본기획자와 뉴라이트 집단의 입장에서는 호재(好材)였고, 그를 계기로 강하게 ‘건국 60주년 ’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에서 북한은 그대로 내버려 둘 존재는 아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올림픽 이후 어떤 형식으로 회복할 것인지를 잘 안다. 7.19 시진핑 (習 近平) 중국 국가 부주석의 평양방문은 일본에 약간의 충격을 주었던 일이다. 중공당과 조선노동당 간의 끈끈한 그들만의 교류방식이 드러났다. 후계자가 상대에게 먼저 인사하게 하는 혁명 노간부들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났기 때문이다. 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국가 시스템에서 가장 큰 적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다. 이들 간의 결합이 벌어질 경우, 일본은 한반도 북부에 강력한 적을 남겨놓고 있어야 한다.
북 핵(北核)에 대한 콤플렉스가 피폭(被爆)의 경험에서 벌어진 것이라고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일본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부에는 일본의 포스터 자체가 설정되고 있지 않는 현실에 기인한다. 조총련을 활용한 첩보활동도 한계가 뚜렷한데다 북한 자체가 일본에 대해 거의 쇄국(鎖國) 개념을 적용시켰기 때문에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일본 우익의 입장에서는 이를 뚫기 위한 방법을 오히려 서울에서 찾고자 하는 경향마저 있다. 북한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일단 일본에게는 부담이 되는 상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중립 ’(中立)이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첫째, 남한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확대하지 않게 할 것. 둘째,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하는 시점을 한국에 대한 완전한 장악을 했다고 생각하는 시점까지 유보해 나갈 것. 셋째, 북한에게 일본의 한국 장악 의도 자체를 자각하지 못하게 할 것. 넷째, 일정 수준의 대북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하는 시늉을 해 나갈 것. 다섯째, 미국의 협조를 통해서 일본이 미국의 다음이건 아니면 앞서 들어가건 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둘 것. 여섯째, 북한을 통제 가능한 범위에 둘 수 있는 기획을 조속히 완성할 것 등이다.
지난 십 년 한국에 형성된 ‘민족끼리 ’를 제거하는 것도 일본에게는 중요한 과제다. 이른바 보수와 진보 관점에서 진보 세력들이 가진 민족주의 성향을 억제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는 없다. 북한으로 하여금 남한과의 관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남한으로 하여금 북한을 당분간 멀리하게 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 이외는 사용은 가능하나 효과가 없다.
‘친일 ’이란 단어 속에는 ‘반북 ’이 있다. 즉,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 있지 않고서는 한국 내 친일이 발을 붙일 정신적 공간이 없다. 경제가 있기는 하지만 정신이 지배되지 않는 상태에서 일본기획자는 등장하기 어렵다는 판단도 있다. 그러므로 반북 분위기가 고조될 수 있는 여건의 조성은 기획의 핵심에 상당한다. ‘비핵개방3000 ’으로 대표되는 MB 정부의 대북정책은 바로 일본이 바라는 바이다. 비핵과 개방이라는 전제를 남한이 일방적으로 절대 구성할 수 없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전제를 둔 정책이 된다.
그 렇지만 일본의 입장은 다르다. 한국이 정책 구현에서 일정 수준 대북 접근이 억제된 상태에서 일본은 뒷처리를 위해서라도 북한과의 교섭활동에 들어가야 한다. 북일 간의 최근 협의는 이러한 관점에서 특히 내년을 목표로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중이다. 한국의 친일세력의 광범위한 침투를 지원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은 북한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북한이 관건이 된다. 만일 북한이 이러한 일본의 시도를 알아챈다면, 그들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당장 일본이 한국에서 벌이고 있는 ‘다시 백 년 ’과 ‘친일의 재구성 ’은 현실적으로 드러난 테제이지만 교묘하게 일본이 그 가운데 들어있지 않는 한국 내 자발적 친일세력의 준동(蠢動)으로 포장되어 있다. 일본기획자의 존재는 뒷그림에 묻혀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남한의 MB 정권이 가진 의도와 방향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섣불리 이들과의 교섭을 벌이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6자 회담이라는 다자구도의 협의를 통해 미국과의 관계를 풀어 나간다는 기본 전제에서 미국의 하수인 구실을 하는 일본은 그 곁가지라고 판단한 상태다. 그런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침탈 공작 ’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처방안을 짜내야 될 다급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일본과의 교섭 행위 자체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하면서 그들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남북한과 일본이 모두 이 각축(角逐) 속에 들어와 있다. 남한은 일본 편에서 북한과의 대결구도를 형성한다는 과거와의 차이점만 있다. MB 정권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일단 편가르기에서 남한이 북한을 향해 뿔을 들이댄 것은 사실이다. 겉으로 아무리 교언영색(巧言令色)을 해도 속내가 ‘갑의 위치 ’와 ‘길들이기 ’를 전제로 하니 진정성을 가진 대화를 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런 북한이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것도 정해져 있다. 외교의 전통성과 역사성을 중시하는 것은 중공당이나 조선노동당이 엇비슷하다. 중국이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알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가도 중요하다. 알고 있다면, 중국은 북한과의 협력 강화에 더 신경을 기울일 것이 뻔하다. 그들도 일본 제국주의의 수법에 대해서는 환히 꿰어 차고 있지만 정작 이러한 치밀한 한국 침탈 공작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알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해방 이후 지금까지 이른바 ‘친일세력의 기득권 ’은 당연 시되는 성향이 있었다는 걸 반증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도 이러한 눈치를 채기 시작하고 있다. 주한 대사로 닝푸쿠이 대신 9월 오게 될 사람은 청융화(程永華) 현 말레이시아 대사 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이 나온다. 그는 아시아 담당 부국장과 주 일본 정무공사를 거친 일본통이다. 한국에 서일본통 중국 대사를 보게 되었다.
동북아의 전체 형세에서 일본은 철저하게 북한을 중립적 위치에 놓은 상태 를 만들어 두고 한국에서의 ‘친일의 재구성 ’작업을 마무리 하려고 할 것이다. 지금도 그리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순치(順治)는 길들이기를 의미한다. 정치 집단은 대중이 정치적으로 자기 소외된 상태, 즉, 무관심을 유도하는 경향이 크다. 특히 독재를 의도하는 경우, 형식은 민주주의를 빌리지만 실제로는 대중의 눈과 귀를 정치 바깥으로 돌려놓는 수법이 즐겨 사용된다.
이른바 3S(섹스, 스포츠, 스크린)는 비단 그 영역뿐만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축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을 우민화(愚民化)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내일부터는 신문이 저걸(올림픽) 좀 하겠지. 금메달 따는 이야기를 좀 하겠지. ”
MB가 중국 방문 후 8월 9일 귀국길에 수행원들에게 이야기 했다는 말이 그대로 회자된다. 한국 국내 정치의 난맥을 외부로, 3S로 돌려보려는 시도는 꼼수 정치로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 국민들의 교육수준, 지식, 판단능력,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그렇게 낮추어볼 수는 없다. 촛불민심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공안정국이다. 신메카시즘이라 불리는 철저한 법과 제도를 내건 질서유지에 들어가고 있다. 촛불연행자의 숫자가 1,000명을 넘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사법적 처리 수순까지 밟고 있다. 30년 전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틀린 말도 아니다.
대중은 이 과정에서 각성코드를 얻게 된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마찬가지이지만 현재의 코드는 ‘저항 ’(抵抗)이 대세는 아니다. 오히려 지난 십여 년간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서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정신 ’은 외면되거나 무관심한 영역으로 바뀌었다고 봐야 한다. 국민들이 그간 중우정치에 빠졌다는 의미와 함께 그렇게 사회 국가가 흘러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일제 강점기로 돌아가보자. 그들은 우민화 수준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들어왔었다. ‘민족말살정책 ’이 시행되었다.
여기에서 황국신민서사 암송, 궁성요배, 신사참배, 창씨개명까지 쭉 이어져 갔다. 우리말 대신 일본어를 쓰길 강요하고, 식민지의 도구로 초급기술만을 가르친 행위로부터 조선의 속성보다는 일본의 국민성을 강요한 것에 이르면 일제는 우민화가 아닌 조선이란 하나의 민족 자체를 세계에서 지우려 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MB 정권에 깃든 친일매국세력은 안병직 류를 앞세워 일단 친일의 당위를 역설하는 데 주력했다. 그것이 바로 교육으로 드러났는데, 대안교과서는 일례일 뿐이고 뉴라이트전국연합이라는 조직을 통하여 구성된 각개 집단들에게 ‘과거의 일본을 잊고 미래의 일본만 보자 ’, ‘일본을 (따라) 배우자 ’는 지극히 보편적인 우민화 정책을 써왔다. 이것이 허용된 배경에는 건국60년이라는 테제가 존재했다. 역사에 대한 재평가를 ‘경제와 발전 ’이라는 잣대에서만 해결하고자 하는 행위였지만 정권과 정부는 오히려 이를 강력하게 추동(推動)했다. 친일행위를 공개적으로 한 셈이다.
여 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다. 단순하게 국민들을 우민화 시킬 요량이거나 탈정치화 시키려는 움직임이 아니라 국가 사회 내부에서 쟁론을 야기하려고 한다. 색다른 형식의 중우정치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그들이 짜낸 방법이라기 보다는 일본기획자의 의도가 숨겨진 것임을 금새 알 수 있다.
바로 ‘한일동맹론 ’이다.
이 테제는 조만간 등장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경제 ’를 무척이나 강조했던 MB 정권의 출발점이자 목표였다고 판단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전제가 필요하게 된다.
이 정도 수준이면 국민은 일본의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도 힘을 얻게 되고, ‘친일 ’그 자체가 경제적 효용도를 전제로 ‘비난만은 할 수 없는 ’위치까지 빠르게 변용(變容)을 해나간다. 이것이 일본기획자와 친일매국세력 간에 합의된 접근 방법이고, 또한 지금도 시행 중이다. 여기에서 바로 ‘한일동맹론 ’이 튀어 나온다. 본격적으로 카드를 뽑아 드는 셈이다.
우민화를 시행하는 일본기획자의 포인터가 여기에 있다. 쟁론을 만들 만큼 만들어 낸 상태에서 이를 수습하면서 전체를 포획하는 방법이 ‘다시 백 년 ’의 첫 단계다. 이를테면 ‘친일의 재구성 ’은 이 단계에서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되는 꼴이다.
MB 정권의 입장에서는 이 수준에서는 국민들에게 중우정치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된다. 명분이 축적되고, 나아가 사회문제이기 이전에 국가와 국민의 생존문제라는 경제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가능하다. 나머지는 모두 논외로 취급된다. 그것이 바로 안병직 류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민족주의를 버려야 한다 ’는 테제와 직결된다.
‘한일동맹론 ’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첫 단계인 ‘내선일체 ’와 아주 흡사한 구석이 있다. 그 다음이거나 이전 단계가 바로 2010년 일왕 방한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까지 빠른 속도로 가게 될 것이다. 완벽하게 현재 시점의 ‘황국신민화 ’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일련의 과정들에 반발하는 지식인 그룹들은 공안정국과 신메카시즘에 의해 단속된다. 촛불민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과연 법과 제도라는 관점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사회 국가의 문제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흘러가게 될까는 의문이다.
바로 여기에 그들의 고심이 있다. 그러나 IMF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 전반에 고질적으로 형성되어 버린 무관심이라는 탈정치도 아니며 거의 이기주의, 개인주의 속성에 가깝게 변해버린 세대들이 존재하고, 또한 어떤 형태로건 반공(反共)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희생이 있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부류, 뉴라이트에 의해 수혜를 입은 계층과 사람, 정권에서 사적 이익을 취득하는 사람,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이런들 저런들 어떠냐는 방임계층이 존재하기에 이들의 접근법에는 탄력이 형성된다. 오히려 ‘냄비근성 ’을 들먹이면서 시간이 지나면 망각하고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수용하는 특질이 한국인이라는 식의 자기비하적 마타도어가 광범위하게 유포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이들은 일단 어떤 지위, 직업, 연령을 불문하고 모두 일본기획자와 친일매국세력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꼴이 된다.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구분도 의미가 없다. 일본기획자는 몹시 조직적이며 집요한 편이다. 과거 직접 경험을 교묘하게 오늘의 서울에 대입시키려 하고 있고, 그에 협조하는 사냥개를 열심히 훈련시켰고 또 그 덕을 보고 있는 중이다.
일본식 괴뢰정부의 표상은 ‘만주국 ’(滿洲國) 이다. ‘괴뢰 ’의 우리말은 ‘꼭두각시 ’다. 남한은 북한을 북괴라하고 북한은 남한을 남조선괴뢰라고 부르니 사실상 한반도 역사는 서로 ‘괴뢰 ’라고 부르는데 익숙한 편이다. 대만에는 전통극 가운데 괴뢰희(傀儡戱)가 있다.
일본의 침탈 역사에서 만주국 만큼 독특한 지위에 있는 ‘정부 ’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꼭두각시 정권을 의미하는 것을 반드시 만주국의 범례를 보지 않고서는 일본의 사전 학습효과를 알기는 어렵다.
1931.9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초초해했다. 명분은 역시 국제정세에서의 생존이었다. 세계 공황 상태에서 직접적 피해를 입은 일본이 선택할 길은 ‘만주와 몽골이 생명선 ’이라는 판단이었고 그 중에서도 만주는 무주공산이니 반드시 점유할 대상이었다. 1932.3 만주국이 성립되었지만 국제연맹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이 취한 태도는 오늘에서도 꼭 봐야 할 부분에 속한다. 이른바 ‘불승인결의 ’, 그러니까 ‘무력에 의존하여 현상을 변경하는 것은 승인할 수 없다 ’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직접적 조치는 없었다. 국익을 위한 명분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오늘에서 도볼 수 있다.
1932. 1만주 군벌 장쉐량(張學良)을 제거하는 일이 조금 버거운 일이었다. 만주 일대를 장악한 장쉐량의 본거지인 진저우(錦州)를 점령한 상태에서 일본은 그들의 막강한 군대인 관동군을 투입하고 괴뢰정부 수립에나선다. 2월 신국가건설막료회의가 만주국 성립을 결의하고 바로 3.1 만주국은 설립된다. 흥미로운 것은 1919년 이후 13년만에 3 월 1일 에 만주에서 괴뢰정부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이다. 뒤이어 독일, 이태리, 교황청,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 등이 이 정부를 승인했다. 만주국의 황제로 푸이는 집정에서 1934년 제정으로 들어가 1938.8 아마테라쓰 오오카미(天照大神) 를만주국 국민의 정신적 상징으로 삼아야 한다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는 데까지 이른다. 1940년에는 만주국 왕국 내에 ‘건국신사 ’를 설치하기까지 이른다. ‘괴뢰 ’의 한계가 있어 어쩔 수 없는 ‘주인 ’의 요구를 수용한 경우 다. 그래서 중국은 만주국을 위(僞) 만주국이라고 부른다. ‘위만(僞滿) ’이니국가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 1945. 8 소련군의 참전으로 만주국은 그 존재가 사라진다. 박정희를 비롯한 숱한 한국의 해방 이후 인물들이 만주국의 일원이었다. 그들에게 만주는 관동군의 땅이었지 결코 독립된 곳은 아니었다. (만 주국사 혀성의 국가적 동향[김기훈, 2001], 만주국 건설 이야기의 새로움 낡음[임성모, 2002],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괴뢰국의 국가효과 1932-1936 [한석정, 2007], 세계사 교과서 바로 잡기[이옥순, 2007] 등 자료가 참조 가능하다.)
‘괴뢰정부 ’를 통한 일본의 제국주의 침탈방식은 1937년 루이꼬우차오(蘆溝橋)사건을 일으키면서 중일전쟁으로 바로 확산되었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목표를 위해 조선을 병탄한 이후에도 한 걸음씩 확산을 해가는 방식이 전형적인 침략노선에 해당한다. 주목할 점은 중국 내 새롭게 형성된 ‘난징(南京) 국민당정부 ’다 국민당의 좌파지도자였던 왕초밍(王兆銘)은 항일 전쟁 중에 일본과의 화평을 주장하면서 장카이쓰와 결별하고 1940년 친일 괴뢰정부인 난징 정부를 수립한다. 이 역시 만주국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 이런 식의 접근법에서 일본은 뛰어난 전파력과 기법을 보유하고 있다. 그 코드는 ‘평화 ’지만 실제로는 적절하게 조종하는 ‘꼭두각시줄 ’(傀儡絲)을 쓰는 데 탁월하다. 중국은 왕초밍을 ‘한간 ’(漢奸)이라 부른다.
서울의 현실에서도 이 점은 간과될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하게 적용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60년 동안 이러한 시도는 미국이란 장벽에 의해 가려져 있었지만 2000년 이후 일본은 그 장벽마저도 가볍게 뛰어 넘고자 하는 중이다.
우선 ‘뉴라이트 집단 ’으로 대표되는 세력은 전형적인 ‘간세 ’(奸細)에 해당한다. ‘간세 ’라는 단어는 해방 이후 잘 사용되지 않았지만 지금 적절한 표현은 이 단어 이외는 없는 듯하다. 즉, 적(일본)의 간첩이다. 이들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회 내부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대세를 만들어가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저항 가능한 인물 세력을 포섭하거나 아니면 강압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범위한 조직이 필요하고, 그 조직에게는 일정한 수준의 참여에 대한 대가를 부여한다. 이들에게 국격(國格)은 의미가 없다. 애당초 이들이 정신적 지주로 삼는 곳은 ‘일본 ’이고, 그 일본이 협력관계인 미국이 상부 혹은 연합세력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국 ’이 가진 국가의미보다는 그들의 ‘목적 의의 ’를 더 높게 가치매김을 한다.
당연히 이들의 행동 패턴에서도 일정한 격식이 보인다.
대 한제국의 말기, 일본을 끌어들인 사람들의 주장과 흡사하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한일 간은 불가분의 입장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간세의 침투가 용이하고, 그들을 조정하는 논리가 항상 일본기획자로부터 나와서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포장되어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일본의 ‘꼭두각시 ’다.
MB 정권이 이들을 ‘친위 ’(親衛)로 사용한다면, 정권 자체가 바로 ‘괴뢰정부 ’가 되는 셈이다.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만주국도 일본에 항거할 수 있는 정신을 가지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애당초 간세의 구성으로부터 행정, 경찰력, 군대까지 모두 일본에 의해 점유된 상태에서 이는 불가능했다. 당시 인구 3,000만의 대국이었지만 그들의 상층부가 장악된 상태에서 푸이는 꼭두각시 정권의 ‘허수아비 ’였을 뿐이었다.
하나의 정권을 통해서 사회 국가 전반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데는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하게 된다. 그 중 한가지가 바로 ‘경제 ’다. 근대화 단계를 거친 이후, 현대 사회는 철저한 자본주의 시장경제, 그 가운데서도 국제간의 경쟁환경을 가지고 있다. 즉, 경제의 주도권에 의해 국가생존이 사실상 결정된다. 경제적 종속(從屬)이 국격(國格)의 훼손을 의미할 수 있다. 일본이 의도하는 것, 그리고 서울의 ‘괴뢰 ’가 시도하고 있는 구상 가운데서 바로 경제적 종속구도의 재정립이라는 과제는 점점 현실화 되는 중이다.
관건은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이른바 ‘반일 ’(反日)의 감정이 격화되지 않게 만드는 수법이다. 만 주국을 설립한 일본은 중국 전역에 퍼지는 반 제국주의 운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무력을 선택했지만 결국 민심 자체가 반일로 돌아선 상태에서 중국 정복 자체는 어려웠다. 이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 내부에서 한일 간의 경제협력이 단순한 협력의 수준이 아니라 불가피하며 불가역(不可逆)한 상태라는 인식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작업은 거의 동시에 벌어지는 상태다. 간세는 간세대로 또한 정권은 정권대로, 일반 국민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들의 입장에서는 ‘계몽 ’(啓蒙) 해야 할 대상이지, 이들과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부분적으로 촛불민심과의 전선은 형성되었지만 그들 또한 ‘반공 ’(反共)이란 개념에서 촛불민심 자체를 좌파 혹은 친북세력으로 몰아보려는 몇 차례의 기도가 있었지만 이는 실패했다. 촛불민심으로 친일매국세력의 전위가 드러난 것을 그들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할 수 있을 대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권이 시작된 지 반 년 수준에서 이들이 자신들이 목표한 대세를 유지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을 리는 만무하다.
공안정국이 등장한다. 장악된 세포들을 통한 강력한 민심의 강압이 벌어진다. 한편으로는 이른바 ‘경제위기 책임론 ’을 유포한다. 촛불민심이 국가경제, 정책을 훼손하는 주범이라고 몬다. 그리고 다양한 정책을 그들의 원래 의도대로 집행해 나간다. 이른바 ‘밀어붙이기 ’다.
이를 단순한 ‘민간독재 ’라 고 부르는 것은 개념상 완전하지 않다. 즉, 이렇게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따져봐야 할 시기가 되었다. 왜 친일을 부르짖는 뉴라이트 집단이 이 독재형 정권에서 정신적 지주이자 친위세력이 되어 있는가부터 따지지 않고서는 작금 서울에서 벌어지는 사태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또한 그들이 일본기획자의 ‘괴뢰 ’이면서도 동시에 MB 정권을 괴뢰사(傀儡絲)로 부리는 역할도 동시에 한다. ‘조중동 괴리정부 ’라고 불리지만 이는 훨씬 더 깊은 조망(眺望)이 필요하다. 자주성이 없이 다른 나라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정부가 ‘괴뢰정부 ’라고 본다면 그 초입(初入)보다 훨씬 깊숙하게 들어온 형국이다. 오늘의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바 로 ‘괴뢰정부 ’에 그 해답이 있다.
IMF가 서울사무실을 폐쇄하고 9월 떠난다고 한다. 1964년 사무실 개설을 했다가 1987년 철수, 다시 1998년 개설, 그리고 2008년 철수를 반복한다. 금년만 1억4500만불 적자에다 보유금도 내다 팔고, 75개국 상주 사무소 중 30~40%의 인원감축까지 들어간다고 한다.
외환 위기 당시 IMF는 ‘구세주 ’였다. 그러나 국민들에게는 ‘재앙 ’이었고, 가만히 따져보면 ‘저주 받은 구세주 ’, ‘점령군 ’이란 표현도 가능하다. 그들과의 절연(絶緣)을 희망했던 목소리가 그득했던 때가 있었다.
실제로 경제프로그램 이행각서와 이면각서에 잉크가 적셔진 상태에서는 한국이란 국가, 국민들이 보듬고 있던 ‘곡간 열쇠 ’가 그들 손에 넘어갔던 셈이고, 1998년에는 매 3개월, 그 이후에는 매 6개월마다 ‘정책협의 ’라는 구실로 이행과제에 대한 점검이 있었다. 숙제검사였다. 물가, 성장율, 금리, 재정의 목표치 설정과 집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들의 ‘서명 ’을 필요로 했다. 한국은 당시 ‘국가 ’가 아니었다.
그 시절, 달러를 들고 오는 어떤 외국인도 모두 구세주로 환대를 받았다. 돈의 ‘성격 ’도 묻지 않았다. 외자 유치는 국가 제1번 과제였고, 빈 곡간에 돈을 채우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엄청난 희생은 국민들의 몫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 중의 상당수가 ‘먹튀 ’였고, 투자가 아닌 ‘투기 ’였다는 것도 밝혀졌다. 외환위기 상태에서 ‘외자유치 실적만이 최고선 ’이라는 도그마가 묵인되었던 것이다.
한국 경제의 오늘을 보면, 그 때와 흡사한 징조를 보인다. 스태그 플레이션 국면에다 외환 보유고도 심상치 않다. 9월 경제위기설이니 9월을 넘기고 11월에야 위기상황이 드러나느니 하는 예측들이 나오지만 MB 정권 정부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보다는 왠지 ‘헛다리 짚기 ’를 연속해서 하고 있다. 정권이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그랬다. 강만수라는 선장이 잘못된 경제수장을 바꾸라는 목소리가 높은 데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단순히 정권 초기의 집권자의 ‘고집 ’이라면 모르겠으나 상황이 열악해진다는 건 어지간한 경제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측하고 있는 상태다. 이렇게 가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1997 년 외환위기는 대체로 다음 네 가지의 원인을 꼽는다. 첫째, 금융기관의 부실. 둘째, 차입위주의 방만한 기업경영으로 인한 대기업 연쇄 부도. 셋째, 대외 신뢰도 하락. 넷째, 단기 외채의 급증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이기도 하다.
IMF 사태의 ‘정치적 희생양 ’이라 주장하는 김영삼 정권 당시 대통령경제수석 비서관 김인호의 몇 가지 의견을 톺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2002년 중앙일보에 IMF환란 스토리를 연재하다가 중지했다. 그 중 일부다.
“외환위기는 제대로 기록되어 역사에 남아야 한다. 외환위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우리 사회의 그 ‘망각 ’을 되살리려 한다. 외환위기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그 ‘왜곡 ’을 바로 잡으려 한다. (중 략) IMF지원을 받으면서 우리의 계획과 이지에 의하여 구조조정이 가능한 기회였다. 당초 합의 때 이루어졌던 IMF와의 신뢰를 깨지 않았다면, 우리 협상팀이 거시정책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갖고 있었다면, 우리가 구조조정을 스스로 해나가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면 긴축정책은 얼마든지 협상에 의해 거부할 수 있었다고 본다. ”
당시 한국은 엄낙용 재경원 차관보 , 한국은행, 임창열 부총리까지 나서서 일본에 자금을 구하러 갔었지만 거절 당했다. ABS(자산유동화증권) 발행도 시기적으로 불가능했다. 모든 경로가 막히는 데까지 경제팀이 손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본다면, 입에 열 개라도 할 말은 없는 상태였지만 김인호는 그래도 당시에 정부나 구성원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보기에는 IMF 결정 과정이나 협상, 발표 자체가 석연치 않았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고 여겨진다.
다 시 현재로 돌아와보자. 한국 경제의 1997년 악몽은 재현될 가능성이 없는가? 정부는 경제위기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경제가 위기 상황에 처할수록 국민들이 단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위기임을 스스로 인정한다. 세계 경제도 위기상황이다. 호전될 기미보다는 위기가 향후 3~5년간 이어질 거라는 예상이 대체적인 견해다. 이에 대한 해법이 제대로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은 그래서 의미를 가진다. 공기업 민영화(선진화)를 포함한 MB 정권이 내놓은 정책들이 정부와 여당 사이에서도 갈등을 만들어낼 정도다. 이런 엇박자가 단순하게 정책능력의 부진이라고 만봐야 하는가?
경제위기 상황을 상정해 보자. 1997년 환란의 수준이건 아니건 간에 일단 한국경제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어떤 경로에서건 드러나게 된다는 전제를 해보는 셈이다. 누가 한국경제의 ‘구세주 ’가 될 것인가?
IMF가 9월 철수한다. 그들도 내부 사정은 엉망이 되었다. 미국경제도 서브프라임 사태의 여진이 여전하다. 중국 경제도 성장을 내걸었지만 올림픽 이후 대규모의 구조조정에 들어갈 공산이다. 중국 경제 의 성장율 하락은 한국경제에 최소 두 배의 충격파를 던진다. 무역수지 적자폭이 확대되고 순채권국에서 순채무국으로 재정상황이 바뀌고 있다. 단기외채도 적정 수치를 벗어난 상태다. 9월말에만 만기가 되는 것이 약 190조 수준이다. 국제유가 파동에 의해 원자재, 물가 등은 모두 상승국면이다. 원화가치는 하락하고 원화 대 달러환율을 포함해서 모두 강세가 유지된다.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도 외환보유고의 삭감만 불러왔을 뿐 효과도 없다. 개입할 여지와 여력조차 많지 않아 보인다. 2008.3 2,642억불이었던 외환보유고는 6월말 2,581억불, 7월말에는 106억불이나 감소한 2,475억불로 뚝 떨어졌다.
한국 경제의 단면 한 부분만을 살펴보자. 외국인들의 한국 내 자산 매각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주식 채권 매각규모도 지속 확대 추세다. 달러 부족현상이 심화되고 시장금리도 대폭 상승 가능한 상태다. 9월 외국인 보유 채권 만기가 8조 6천억이 집중된 상태에서 이들이 채권을 팔고 달러로 돌려주려면 국내 금융회사의 달러 조달이 원활해야 한다. 외환유동성을 들여다보게 되는 시점이다. 채권매도가 이어지면 채권값이 폭락할 우려가 있다. 당연히 시중금리는 상승국면에 들어간다. 유동성이 급감으로 돌아서는 계기가 형성되고 국내 금융기관의 외환차입 여건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일본을 비롯한 홍콩, 제3국 은행 들의 반기 분기 결산으로 달러를 회수하려는 시도가 이어지면 외환위기 상황은 도래하게 된다. 무리한 환율정책으로 시장개입까지 정부가 했지만 성과가 없었던 전례도 시장의 신뢰도를 저하시켰다. 이제 개입하지 못하는 외환시장이 된 상태에서 환율상승은 눈에 보듯 뻔하다. 관건은 유동성으로 다시 압축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8월 초 종합거래기준으로 외환보유고가 500억불~2,000억불 부족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즉, 원유가 상승에 따른 수입금액 상승과 유동외채 증가로 적정 외화보유고가 약 568억불 부족하고, 외국자본의 잠재적 도피(capital flight)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약 1,952억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상장사의 시가총액 830조원 가운데 약 30%인 250조가 외국인 투자지분이고 이들이 지속투매 기조임을 감안하면 부족분은 더 선명해진다.
이런 상태에서도 외자유치에 대한 정부의 대책 없는 조급증은 여전하다. 과시적 성과주의도 한 몫을 할 조짐이다. 그러나 중소기업 대출 400조 가운데서 금리인상으로 부도위기에 몰린 금액까지 고려하면 국내 경제사정도 쉽지가 않다. 1997년 가계대출규모가 130조였던 것이 2008.6 현재 약 550조 수준이다. 부동산도 연쇄부도 기미가 보인다.
2008.8.21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이한구 전 한나라당 정책위의장(국회예산결산위원장 내정)이 내놓은 쓴소리가 확 와 닿는다.
“목표도 불분명한 채 막 섞여서 나오고 있고, 정책수단도 굉장히 비체계적으로 나오고 있다. 설마 정부가 이렇게 마구잡이로 하겠는지 믿어지지 않는다. (중략) 이게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
‘무슨 사연 ’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어떤 형태로 한국 경제의 위기상황에 등장할 것인가? 그들의 순 역할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이러한 상황은 이제 굳이 ‘절대 오지 않는다 ’고 말할 입장도 못 되는 것이 한국경제의 실정이다. 중국이 1조6천억 불에 달하는 외환보유고로 한국의 국체 및 회사채, 주식투자 등 자본시장 진출을 시도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 이 변수를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에 대비하여 일본이 뿌려둔 씨앗도 만만치가 않다. 일본은 그들 식으로 ‘잘 포장된 구세주 ’로, IMF가 보인 ‘저주 받은 구세주 ’가 아닌 ‘진정한 친구 ’를 흉내내면서 등장할 공산이 크다. 과연 오늘의 일본은 한국의 진실된 친구인가?
2008.4.21 일왕을 만난 MB는 그에게 방한 초청의사를 밝혔다. 일왕의 답변이다.
“자신의 외국방문은 정부가 검토해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초청에는 감사합니다. ”
1998년에 김대중도 일왕을 초청했지만 거절당했고, 2003.6.6 노무현도 “김대중 전대통령의 초청은 살아있습니다 ”라고 의사를 전했지만 일왕은 “감사합니다. 이 문제는 정부가 검토할 사안입니다 ”라고 답했다. 그런데 왜 한일관계에 뜬금없이 2010년 일왕의 방한이 잣대가 될 거라는 의견들이 나오는 것일까?
궁내청(宮內廳, 쿠나이쵸)을 보자. 위키백과에 실린 내용을 옮겨본다.
‘궁내청은 황실에 관계된 사무나 천황의 국사행위 중 외국대사의 접수나 의례에 관한 사무 및 옥새와 국새의 보관을 관장하는 내각부 소속의 일본행정기관이다. 1869년 궁내성이 설치 되었다가 2차 대전 종료후 1947년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며 궁내부로 되었다. 다시 1949년 궁내청으로 바뀌었다. 장관은 인증직이며 내각총리 대신이 임명하고 천황이 인증한다. ”
조직은 3직(시종직 동궁직, 식부직), 2부(서중부, 관리부), 2시설(정창원 사무소, 어료목장)과 1지방지분부국이 있다.
궁내청이 속해있는 내각부는 궁내청과 공정취인위원회, 국가공안위원회 경찰청, 금융청이 있는 조직이다.
일본의 극우에 있어 일왕은 그들의 존재이유라고도 불릴 정도로 삼각형의 꼭지점에 존재한다. 그 권위를 훼손하려는 사람들에 물리적인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가 일본 극우 뿐만 아니라 일반에게도 여전히 ‘천황 ’이란 일본을 통치하는 가장 높은 레벨에 있다는 인식을 불러 일으킨다.
실제로 궁내청과 관련한 이야기들은 그냥 흘려 듣지 못할 수준이다. 이를테면 ‘궁내청의 정보요원이 (사실상) 총리보다 지위가 높다 ’거나 ‘궁내청의 친위대가 일본 내 정치인과 언론인들을 감시한다 ’, ‘궁내청은 내각이나 국회보다 무섭다. 그림자처럼 천황과 일본을 움직이고 있다 ’는 이야기는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궁내청이 속한 내각부와 내각정보조사실이 있는 내각관방 간의 협력관계도 단순히 정보교류 차원이 아니라 더 ‘속 깊은 행위 ’로 존재한다고도 한다. 결국 일왕을 꼭지점에 올려둔 상태에서 일본의 우익은 그들 식으로 역사인식과 접근을 한다고 봐야 된다. 1947년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었지만 그 이전의 일본황실을 기본으로 두는 세력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바로 일본의 상징성에 속한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기획자는 일왕의 서울 방문에 어떤 형식을 꿈꾸고 있는가? 여기에 포인터가 있다.
일본이란 코드를 상징하고 포획하는 인물은 내각총리가 아니다. 단순하게 봐도 일왕이 한반도 땅을 다시 밟는 행위는 코드의 연속이란 관점에서 판단된다. 즉, 일왕이 가는 길에는 반드시 그에 맞는 여건과 환대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2010년은 1910년 경술국치, 일본식의 ‘일한합병 ’백 주년이 되는 해다. 이 시간 동안 한반도와 일본은 서로 화해되어 있지 않다. 한국이 일본과의 수교를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역사인식으로부터 실질적인 영토분쟁까지 사사건건 일이 벌어진다. 협력의 기초가 부실하다.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사과를 수 차례 했다고는 하지만 일본 극우는 일제 강점과 한반도에 대한 우세 본능을 숨겨본 적이 없다. 일본의 대북 관점은 더 심각하다. 수교협상이 진행되고 있고, 그 또한 목표는 2010년에 맞추어가는 형국이 역력하다. 한반도 전체와의 표면상은 화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 방식의 한반도 침탈시도가 벌어지는 중이다.
앞서 한국에 대한 ‘동맹론 ’즉, 한일 간의 ‘우리끼리 ’를 만들어 내기 위한 일본의 ‘공작 ’을 보았지만, 이는 구체화 되어 가고 있다. 그 단계는 일차적으로 ‘경제동맹 ’으로 시작하고, 점차 그 영역을 확대할 것이다. 북한에 대해서도 수교협상과 배상금을 통한 ‘경제협력 ’상태를 구축하는 것이 일차 목표다. 이 두 가지 노선은 일관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서울에 대한 접근법은 단순한 경제동맹 수준을 넘어서 사회국가 내부에서 ‘반일 ’을 죽이고, ‘친일 ’을 드높이는 심리전의 양상까지도 확연하게 전개된다. 그를 위한 경제역량의 집중과 조절이 실행각론에 해당한다. 한국은 정권 자체를 친일 ‘괴뢰정부 ’로 만들면서 단기 내 이런 분위기와 형식 자체를 고착화하고자 한다. 빠른 행보이고, 한국 사회 내부에서 이를 반대하거나 혹은 대응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면서 ‘몰이 ’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단계로 보면 남한에 대한 장악과 북한에 대한 첫 걸음 엮기가 공존한다. 이러한 시도에서 일본 극우, 우익, 내각과 일본왕실(궁내청)은 한 몸처럼 움직인다. 매우 집요하고 조직적인 대응이기에 겉으로는 쉽게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일왕의 초청에 대한 거부는 매우 의례적이지만 거기에는 본심이 담겨있다. 바로 ‘정부가 검토한다 ’는 대목이다. 이것은 ‘정부가 자신의 방한을 준비하고 있다 ’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다. ‘정부가 자신의 방한을 위해 열심히 애쓰고 있고, 그에 당신도 협조해 달라 ’는 의미까지 내포되었다고 판단해도 무방할 부분이다.
앞서 정리해본 바처럼 ‘한일동맹론 ’이 언제 부각될 것인가, 그 시기는 대충 정해져 있다고 본다. 경제동맹이라는 형식이 가장 무난하다는 평가는 정치, 사회, 문화 등에 있어 동맹적 요소가 나타나기 어려운 한일 양국간의 현실사정을 취합한 결과다. MB 정권이 들어선 이후 사실상의 정치동맹은 가동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뉴라이트 집단의 정치 참여와 정치계에 대거 진출한 상황에서 굳이 이것을 사냥꾼과 사냥개 정도의 관계로만 정의하는 것도 우습다.
일본 내에서 흔히 벌어지는 현상이 한국에서도 엇비슷하게 생긴다. 일왕의 존재감이나 그의 상징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불순한 좌익 ’으로 몰아붙이는 풍토다. 한국에서도 뉴라이트 집단을 부정하는 행위는 그들에게 있어 모두 ‘불온한 좌파 ’로 정의된다. 좌파라는 관점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압박도 있다. 한국은 전쟁 이후 잔류된 반공(反共) 알레르기에 극히 민감하고, 그것을 통해 쉽게 좌파론을 꺼낼 수 있는 환경이다.
‘구세주 ’로 등장한 일본이 일왕을 앞세워 한반도 재 합병을 선언하는 단계까지 걸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 2010년이다. 그들에겐 상징성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것을 오히려 ‘기념 ’할 날이 아닌 ‘망각을 꺼내어 볼 ’날이지만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기획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건국절 ’시도에서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 1919년 임시정부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제국주의의 대한제국 병탄은 그보다 더 앞선 사건이 된다. 그 약점을 치고 들어오는 수법이다. 근대 역사의 모호성을 강조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2010년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나아가 북한까지 방문하게 되는 상황은 일본이 가장 베스트로 여길 그림이 된다. 선언적인 효과에다 일본 극우, 우익집단의 우월감, 그리고 일본 국내정치에 있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게 된다. 일거에 다득(多得)의 효과를 위한 기획이다.
이것을 단순히 하나의 시나리오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은 앞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재삼 강조해야 될 부분이 있다. 이것은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일본기획자의 의도대로 가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선택은 한국에 달려 있다. 그런데 MB 정권은 오히려 이런 것을 희망하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국격(國格)을 거론한다. 한 사회 국가가 역사성, 시대성을 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라는 단 하나의 잣대만으로 움직일 때, 서울은 도쿄의 의도를 분쇄할 자격이 없고, 또한 그 틀 속으로 빠져들게 되어 있다.
진정성을 가진 파트너에 의한 ‘동맹론 ’이 아니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의 위기상황에서 일본의 등장은 예정된 수순으로 보인다. 물론 그냥 오지 않는다. 준비된 ‘이면각서 ’가 함께 따라올 것이다. 그에 동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을사늑약의 재판이 될 것이다. 일본은 마침내 한반도에 재 진입에 성공 마침표를 찍게 된다. 그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남한과 북한을 동시에 일정 수준까지 ‘포획하고 장악할 ’이유는 많다. 과거 ‘만주와 몽골이 최후의 안전판 ’이라고 믿고 침탈을 시작했듯이 지금은 ‘남한과 북한 ’을 모두 그들 생존의 안전망으로 삼을 공산이 크다.
이 자료는 일본기획자가 지난 십여 년에 걸쳐 한국,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과 함께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이는가를 분석한 글이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경고 ’(警告)다. 확실한 각성코드가 이 시대를 사는 개인과 사회, 집단, 국가에서 형성되지 않고서는 아마도 일본의 이 기획망에 빠져들기 십상일 것이다.
‘틀’(場) 은 일본이 구성했다. 한국은 자발적으로 그 틀 속으로 들어가려고 기를 쓰는 중이다. 그것이 MB 정권의 움직임이고, 그래서 시대가 암울하게 보인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왜 MB는 이러한 흐름을 방기(放棄)하고 있고, 오히려 더 조급하게 밀어붙이는 도그마를 보여주는가? 진행과정에 상관없이 이러한 일본기획자의 의도가 완성된다면 MB는 친일매국의 수괴(首魁)라는 시대와 역사의 비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게 자리매김이 될 것이다. 한반도의 역사가 있는 한, 이 정의(定義)는 변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일본의 역사관은 일본 극우로 우익으로, 다시 일왕을 꼭지점으로 하는 ‘다테(縱) 사회구조 ’속에서 선연히 그 ‘근성 ’(根性)이 남아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한반도를 제 1의 공격대상으로 해서 그들 식의 확산 포획을 꾀하는 중이다.
이러한 침탈 과정에 대한 대비(對備)가 쉽지 않은 것이 바로 한국의 취약점이다. 거기에 MB 정권 자체가 일본이란 요소를 쉽게 한국 정치사의 앞마당에 국제화라는 명분으로, 미래를 지향한다는 기치를 내걸며 ‘친일 ’을 수용하는 상태가 되었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그러나 행동의 본질은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사냥개 ’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앞서 <어느 민족주의자의 시대읽기> 제1부와 제2부로 정리된 자료는 일본기획자가 왜 이와 같은 ‘다시 백 년 ’프로그램을 구상하 게 되었는지, 그리고 한국이 어떻게 이에 공조하거나 무지한 상태에서 일본요소를 수용하고 있는 지에 대해 알아본 오리엔테이션이었다.
그 러나 이 자료는 <시대 경고>다. 일본기획자의 공격루트를 열 한 가지로 정리해서 하나씩 현황과 그 진전(進展)의 기획까지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다. 이 자료는 여기에서 그쳐지는 것이 아니라 매 사안마다 변화가 생기는 상태에서 계속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수정이 생기는 부분도 있을 터이다. 그것은 일본기획자의 애초 의도와는 달리 상황 전개가 다른 형식을 취하거나 아니면 급진적인 몰이가 벌어질 공산도 있기 때문이다. 본디 기획이란 병법과 같아서 경직된 것이 아니라 매우 유동적인 적용이 가능하다.
관건은 이 기획의 판 자체가 일본식이라는 사실에 있다.
‘틀’(場)을 만들고 몰아가는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그 틀 자체가 바로 그들의 게임룰에 있다 보니 한국 사회의 관점에서 이것이 잘 분해되고 포획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골방의 지식, 지식인 ’으로는 대응방안을 종합해서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 정권이 이들의 동조세력화 된 상태다. 기댈 곳도 마땅치가 않다.
그 래서 자료를 정리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면서 대적(對敵)이란 관점에서 보고 행동해야 할 문제로 판단했다. 서둘러 자료를 취합하고자 한 의도이기도 하다. 업그레이드가 되는 상태에서 보다 정밀한 내용들이 삽입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실 ’(事實)이다. 일본은 결코 한국의 ‘진정한 친구 ’가 아니며, 그들은 ‘긴밀하게 모의된 방식 ’을 무기로 삼고 있다. 섣불리 감상적이거나 상식적인 판단으로 이들을 상대할 수도 없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시대의 ‘국가 ’다.
MB 정권은 시대와 국민을 ‘친일 ’이라는 침탈 요소에 빠트릴 궁리를 하고 있다는 자각을 해야 한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MB 정권 자체가 일본기획자와 똑같은 우리 시대의 ‘적’(敵) 이다. 아무리 직접민주주의에 의해 선택된 정권이라고 하더라도 시대와 역사를 다른 침략자에게 고스란히 내어주라고 허용한 것은 아니다. 최소한 한 사회 국가의 국격(國格)을 정통성 있게 지키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법과 제도라는 관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사회 국가가 처한 시대를 뛰어 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더 이상 일본기획자가 짜 둔 ‘틀’로 빠져드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 경고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차원이 아 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개가 될 것인가, 사람으로 살 것인가를 묻는다. 일본기획자, 일본은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평화 ’라고 부른다. 과거 ‘대동아공영 ’이라는 기치를 내건 이른바 제국주의 깃발 아래 일본이 주도하는 ‘공영 ’(共榮)에 참가하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중이다. 한국은 그 목소리에 침식(浸蝕)당하는 입장이다. 중독(中毒)을 부추기는 사냥개들의 목소리도 높아진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소시민임을 자처했다. 그냥 내가 하는 일만 잘하는 것이 애국인가? 시대는 그런 사람들도 방관자(傍觀者)라고 부르게 한다.
살아도 죽은 목숨이 될 것인가, 죽어서 사는 목숨이 될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의기(義氣)를 생각해본다. 우리 시대에 사라진 것을 내가 말한 것 에 불과하다 면, 우리 시대는 벌써 죽었다. (2008.8.21 止月 山庄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