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럽고도 고마워라
전남 나주羅州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남도의 조용하고 이름 없는 도시쯤으로 여긴다면 역사부터 되짚어보아야 하리라. 전라의 ‘라羅’가 나주에서 비롯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나주는 호남을 호령하는 도시였다. 고려 성종 때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설치했던, 요즘으로 치면 광역 자치단체 격인 목牧이 들어섰던 곳이 아닌가. 구한말까지 1000년 넘게 나주목이란 지위를 유지하면서 ‘천년 목사 고을’ ‘천년고도’라는 별칭도 얻었다. 이러한 나주는 교과서에서 배우고 역사책에서 본 대로 기원전 1세기경부터 존재한 마한의 구심점이었고, 고려를 세운 왕건과 사이에서 2대 왕 혜종을 낳은 장화왕후의 사랑이 싹튼 곳이기도 하다.
수천 년 세월 동안 차고 넘치는 역사와 함께해온 도시엔 곳곳마다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이들 가운데 조선시대 동부면에 해당하는 동부길에 서로 이웃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문화유산은 고통스러워서 애잔하고 당당해서 자랑스러운 흔적들이다. 저마다 이름 앞에 ‘옛’ 자를 훈장처럼 붙이고 있는 나주역·금남금융 조합·나주극장·나주잠사·나주경찰서·나주역 신작로 등을 비롯해 군졸마을 고샅길·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의 주역인 이광춘 생가 등.
[역사驛舍에서 역사歷史를 만나다]
나주를 돌아보는 여정은 대개 금성관에서 출발한다. 주차 시설이 갖춰져 있고, 관광안내센터에서 안내도 받을 수 있으니 편리하고 유익하다. 또 나주의 명물 나주곰탕을 한 그릇 뚝딱 비우고 길을 나서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시간이 느긋하다면 옛 관아였던 금성관을 살펴보고, 수령이 600년쯤 되는 은행나무와 어우러진 고즈넉한 풍경을 감상해도 좋으리라.
마음이 내키는 대로 옛 나주역→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거쳐 옛 나주역 신작로→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의 주역인 이광춘생가→군졸마을 고샅길→옛 나주경찰서→금성교→옛 나주잠사蠶沙→옛 나주극장→옛 금남금융조합→금성관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정했다. 동부길 마실 가운데 일부인 코스 역시 금성관에서 시작하는 게 자연스럽다. 둘러보는 순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으니 발길 닿는 대로 거닐어본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옛나주역까지의 거리가 불과 1.5㎞ 정도인 만큼 천천히 걷기에도 가뿐하고, 그 시대를 상상하며 둘러보기에도 여유롭다.
처음 맞닥뜨린 옛 나주역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만큼이나 평화로워 보이고, 새로 단장한 역사는 세심한 관리 덕에 말끔하게 정돈돼 있다. 1925년 건립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기본 구조와 골조·목재 등은 물론이고 매표소·대합실·역장실 등을 예전 모습으로 재현해놓았다. 사무·안전 운행에 필요한 통표와 통표 폐색기, 당시에 사용했던 장부와 금고, 표를 넣었던 통지낭 등이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여기서 새어나오는 예스러운 정취가 슬며시 긴박했던 역사적인 현장으로 이끈다.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일명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가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간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나주행 통학열차에서 내려 출구로 향하던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 박준채는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등이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사촌누나 박기옥과 이광춘·이금자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곧바로 후쿠다 앞을 막아서고는 잘못을 따졌다.
“뭐? 조선인 주제에.”
후쿠다가 던진 말에 순간적으로 분노가 끓어오른 박준채가 주먹을 날렸다. 그렇게 둘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고, 순식간에 일본인 학생 대 조선인 학생 간 싸움으로 번졌다. 안 그래도 기름진 나주평야에서 수확한 쌀을 수탈해 가고 상권마저 장악해버린 탓에 더욱 팍팍하고 고단해진 삶에 불만이 쌓였던 나주 학생들.
일제의 억압과 횡포에 울분을 삭이던 조선인 학생들. 나주역 사건으로 학생들은 크게 분노했고, 급기야 폭발했다. 결국 3·1만세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펼쳐진 대중 항일투쟁으로 알려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번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렇게 역사의 무대 위에 오른 나주역은 지난 2000년 12월 전라남도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되면서 관광명소로 거듭났다. 그해 호남선 복선화 사업으로 통합 역사驛舍가 송월동에 신축돼 옮겨 가면서 과거의 기능을 잃고 새로운 ‘임무’를 맡은 것이다. 호남선이 개통되었던 1913년 7월 지금의 죽림동 역사에서 운행이 개시되고, 몇 년 후인 1925년 역사가 완공된 지 80여 년만의 변신이다.
학생독립운동 과정과 일제강점기의 상황 등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지난 2008년 옛 나주역과 나란히 올린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들러본다.
[100년 전의 삶에 젖어들다]
옛 나주역 앞은 큰 도로. 그 건너편으로는 ‘학생운동길’이라 이름 붙은 옛 나주역 신작로가 꽤 넓게 나 있다. 한때 나주역을 오가는 발걸음이 분주하고, 그들이 질러대던 소리가 왁자지껄했을 길이지만 그 시절이 까마득하다는 듯 나른하고 적막하다. 드문드문 보이는 옛 가옥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거닐다 보면 어느새 군졸마을에 다다른다.
명칭처럼 군졸들이 모여 살며 형성된 마을은 구불구불 좁다란 고샅길을 따라 이어진다. 100년 세월을 겪어온 고샅길엔 엄격한 신분제도에 의해 성 안에 살 수 없었던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 있고,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던 정情이 배어 있다. 담벼락에 수놓은 벽화는 이러한 고샅길에 밝고 화사한 기운을 덧입힌다.
시간 여행에 잠시 빠진 사이, 길이 끝난다. 방향을 살짝 돌리면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의 한 주인공이었던 이광춘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어깨를 나누고 있는 오래된 상점들 끝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생가는 자칫 지나치기 십상이다. 헤매던 발길을 붙잡은 것은 녹슨 철제 대문 옆에 고정해놓은 자그마한 안내판이다. 손질이 안 돼 빛바랜 모습이지만 고집스러움이 스며나온다.
그리고 차분한 소리로 말을 건넨다. 옛 영광이 그립다고. 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며 광주학생운동 시위 등에 앞장서다 체포돼 고문받고 수감되었던 한때의 주인이 자랑스럽다고. 화려하게 복원돼 그 시절의 얘기를 두런두런 들려줄 그날을 기대하며 걷다 보니 큰길이다.
도로 한복판에서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는 나주읍성 남문과 직선으로 연결된, 사방이 확 트인 도로변에 2층짜리 붉은색 벽돌 건물이 주위를 압도하듯 서 있다. 지난 2002년 등록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옛 나주경찰서다. 1920년 일본인들이 세운 건물은 흰색으로 처리한 돌출된 입구 기둥과 2층 일부 등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어쩌면 과감하다고 평가받을 색감이지만, 누구나 두려워했다는 일제 경찰서라 생각하니 냉혹하고 잔인하게 다가온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항일 운동가들이 수감되고, 또 얼마나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했을까. 경찰서를 보며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당시 목포나 영산포에서 나주로 들어오는 유일한 관문이면서 통행이 잦았던 곳에 세운 것도 위협을 주고 위력을 과시하려던 속셈이었으리라.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고 읽다 보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사무국장 박진우 씨는 “일본인을 위한 절인 본원사가 경찰서와 마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면서 “이는 일제 식민 지배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풀이한다. 해방 이후 1982년까지 경찰서로 쓰이던 건물은 이후 소방서, 대한민국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나주지회, 나주시 의정동우회를 거쳐 지금은 시민단체에서 사용하고 있다.
[감동을 받고 여운이 남다]
경찰서에서 읍내 방향으로 가는 길엔 일제강점기에 세운 옛 나주극장과 옛 금남금융조합, 옛 나주잠사蠶沙가 수십 미터 간격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길은 일제가 관청과 경찰서를 오가기 쉽게 낸 일등도로로, 그 사이엔 나주천이 흐른다.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나주천 위로 100년 전쯤 만들고 1980년대에 확장한 금성교가 놓여 있다. 예산이 부족해 다리를 철거하지 않고 안쪽에 남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나주천 가에는 1910년 세운, 식민지 경제 수탈의 아픔이 서려 있는 나주잠사가 있다. 광복 후에도 가동되다가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1990년대 문을 닫은 그곳은 나주시의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에 따라 머지않아 문화명소로 선보일 예정이란다.
나주천을 바라보며 금성교를 건너면 하얀 석조 건물이 이국적인 옛 나주극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고를 개조해 영화를 상영하다가 신축했다는데, 이국적인 외관이 영화 관람뿐 아니라 적당한 허영을 채워주었을 만큼 멋스럽다. 광복 후에도 꾸준히 인기를 끌었던 극장은 1970년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고 한다.
옛 금남금융조합은 가장 번화한 오일장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붉은 벽돌에 장식을 더한 유럽식 형태가 돋보이는 건물은 잠시 읍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요즘은 의원이 성업 중이다. 여느 은행?이 그러했듯 금남금융조합 또한 농사 자금을 대출해주기 위해 설립되었던 의도와 달리, 고리대금으로 조선인을 핍박하고 피고름을 짜내며 돈을 불려나갔을 터이다. 1930년 1월 27일 나주오일장날, 바로 앞에서 나주학생시위대와 군중이 토해내던 외침이 그들에게도 불편했으리라.
울분에서 터져나온 함성이 메아리치던 그곳을 빠져나오면 어느덧 출발 지점이었던 금성관이 눈앞이다. 길지 않은 여정 속에서 보고 느꼈던 슬프고도 서러웠던 현장, 꿋꿋하고 강인하게 버텨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그 흔적에 숙연해지면서 꽁꽁 얼었? 가슴이 감동으로 녹아내린다.
반나절 여정이 아쉽고 여운이 남았다면 무형문화재 나주반 전수교육관·나주읍성 동점문과 석당간·오일장·북망문 터·나주 성당·김중민 가옥과 불로주조장 등으로 이어지는 약 5㎞ 자전거 코스에 몸을 맡겨보면 어떨까.
<농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