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만들어지는 여성’
구성; "지팡이를 짚고 나는 낮이나 밤이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문인 대지를 두드리며 말한다.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문인 대지를 두드리며 말한다. 오, 어머니여,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소서."
남자는 자기의 개별적인 실존을 확립하고, 자기의 "본질적인 차이"에 자랑스럽게 안주하기를 바라지만, 또한 자아의 경계를 타파하여 물과 대지와 밤에 "허무"에, "전체" 에 융합 하고 싶어 한다. 여자는 남자를 유한성에 가두고 있지만, 여자에 의해 남자는 자기 본래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 여기서 여자에게 주어진 애매한 마력이 생기게 된다.
나의 의견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 는 보부아르의 말이 핵심을 잘 드러낸다. 보부아르는 남성들이 여성을 타자로 만들기 위한 전략으로 여성다움을 신화화하였으며, 여성들이 자신의 타자성을 비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신비" 임을 지적한다.
"여성다움", "남성다움"이란 그 사회가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 신체상의 차이는 존재한다. 하지만 육체적인 차이가 아닌 여성은 수동적인 존재, 남성은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존재라 규정짓는 것은 남성, 여성이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아닌 "길러지는 것"이다. 예전에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책을 읽었었다. 이갈리아는 현재와 정 반대의 상황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한없이 보호받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남자들은 가정에서 일하고, 여자들은 밖에서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다. 책을 읽을 때는 이런 상황이 된다면? 상상하며 재밌게 읽었지만 책을 덮고 나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에 비하면 지금의 여성들은 자기의 목소리도 낼 수 있고 사회에서도 적극적으로 일하는 여성들도 늘어났지만 여전히 "여자"라는 이름과 상황 속에서 키워지고 있다. 여성들이 사회에 나와 일하는 동안에도 "여자"라는 꼬리표가 언제나 따라 다닌다.
여성이 타자이기를 그만두고 싶다면 상황을 극복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고, "길러지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변형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야 타자가 아닌 주체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