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두 번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깊어가는 가을에 학창시절 국사책에서 접했던
율곡 선생, 윤관 장군, 황희 정승 등 역사 속 인물을 만나러 파주시로 갑니다.
위인전에서 읽었던 생애나 일화를 뒤로하고 정석 풍수로 만나는
그분들의 사후는 어떨지 궁금합니다.
푸르던 나뭇잎은 붉게 또는 노랗게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물들고
올해도 제 소임을 다한 양, 땅 위로 스스로 떨구어 일 년을 갈무리하듯
우리도 두 달여의 시간 동안 자신에게 떳떳한 일들로 가득 채우시면 좋겠습니다.
일년동안 동행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정석풍수동문회 운영진 올림*
1. 답사일 : 2026년 11월 8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9시 정각 출발
3. 답사지
1) 율곡 이이 선생 묘역과 자운서원 (파주시 법원읍 자운서원로 204)
이곳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선생의 유적지이다. 선생의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출생했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모두 아홉 차례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으며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형조·병조·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선생은 조선 유학계에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당쟁의 조정, 10만 대군의 양성, 대동법, 사창 실시 등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유적지 내에는 율곡 선생을 비롯한 가족묘역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이 자운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가족묘역에는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노씨묘를 비롯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선생의 형 이선 묘, 아들 이경림 묘 등이 중심 묘역을 이루며 그 외의 가족묘 등 모두 14기가 조성되어 있다.
자운서원은 조선 광해군 7년(1615)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어 효종 원년(1650) ‘자운(紫雲)’이란 현액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으로 숙종 39년(1713)에 선생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 선생을 추가로 모셨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다.
이외에도 숙종 9년(1683)에 건립된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와 ‘이이 선생 신도비’ 유적 등이 있으며 율곡 선생의 유품 및 일대기를 전시한 율곡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1973년 자운서원, 율곡이이 묘, 신사임당 묘가 각각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2월 율곡이이 관련 유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장소성이 인정되어 국가사적 “파주 이이 유적”으로 승격되었다.
(출처 : 파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2) 윤관 장군 묘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
고려 중기의 문신인 윤관(1040~1111)의 무덤이다. 윤관은 고려 예종 때 여진정벌의 공이 컸던 명장·문신이다.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문과에 합격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입한 여진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후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해 예종 2년(1107)에 여진을 정벌한 후 9성을 쌓았다.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1764)에 공인되었다.
윤관 장군묘 주변에는 후대에 세워진 비석과 석등이 있다.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되었다. 1988년 2월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0일과 10월 5일 여충사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주 윤관 장군 묘 (대한민국 구석구석)
英祖도 풀지못한 가문의 묘지다툼, 400년만의 화해
업데이트 2009-09-30 05:332009년 9월 30일 05시 33분
영의정 심지원의 묘에서는 윤관 장군 묘역에 둘러쳐진 담장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분묘 배치 때문에 청송 심씨와 파평 윤씨 양 문중의 갈등이 400년간 지속됐으나 양측이 극적으로 타협안을 이끌어 내 화제가 되고 있다. 파주=이동영 기자
400년 가까이 끌어 온 조선시대 명문 집안의 ‘산송(山訟·묘지에 관한 다툼)’이 두 문중 후손들의 극적인 타협으로 막을 내렸다.
10일 파평 윤씨 대종회와 청송 심씨 대종회에 따르면 두 문중은 2005년 8월 4일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윤관(尹瓘·?∼1111) 장군 묘(사적 제323호) 위쪽에 조성돼 있는 영의정 심지원(沈之源·1593∼1662)의 묘(경기도 기념물 137호) 등 청송 심씨 종중 묘 19기, 신도비 등을 파평 윤씨 문중이 제공하는 2500여 평으로 이장하기로 합의했다.
고려시대 이후 한국의 대표적 명문가로 상징되는 두 문중의 산송은 16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심지원이 그해 부친의 묘를 윤관 장군 묘역 바로 위에 조성했으며 44년 뒤인 1658년 영의정에 올라 국가에서 이 일대 땅을 하사받아 문중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파평 윤씨 후손들은 반발하기 시작했다. 심지원은 윤관 장군 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부친을 안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763년 청송 심씨 문중은 파평 윤씨 문중이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는 이유로 심지원의 묘를 훼손했다며 윤씨 가문을 처벌해 달라고 당시 고양군수에게 요구하면서 분쟁이 본격화됐다.
난처해진 고양군수는 이 문제를 중앙정부에 넘겼고, 영조까지 나서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가 “윤관 장군 묘 위에 모셔진 심지원 묘를 그대로 받들고 윤 장군 묘도 그대로 받들라”는 절충안을 제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파평 윤씨 문중의 일부 인사가 “산소 뒷부분을 누르고 있는 심지원 묘는 반드시 이장해야 한다”며 왕명에 반발하다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하는 참사가 빚어지면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윤관 장군 묘와 심지원의 묘는 3m 남짓 떨어져 있고 조선 말기에는 윤관 장군 묘역에 2m 높이의 돌담이 설치되면서 심씨 문중 묘역은 앞이 보이지 않게 돼 얼마 전까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파평 윤씨 대종회 윤부현(77) 종보주간은 “조상을 잘 모시려는 후손의 마음이 오히려 조상들께 누가 된다고 판단해 양 집안이 한발씩 양보해 좋은 결실을 거두었다”고 말했다.
양 문중이 작성한 합의서에도 “오직 조상을 바로 섬기려는 신념에 의한 것이었으나 세상에는 자칫 곡해될 우려가 있어 대승적인 결정으로 400년간의 갈등을 해소하기로 한다”며 “두 종중은 서로 존중하고 서로 선대 분묘도 공경하며 영구적으로 관리하도록 협조한다”고 명시됐다.
이장 대상지는 현 위치와 맞닿은 파평 윤씨 소유 땅으로 5월 중 이장이 마무리될 예정이다.
파주=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
(출처 : 동아일보)
3) 황희 정승 묘 (파주시 탄현면 정승로88번길 23-73)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망명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방촌 황희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공민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학록을 지냈으며, 고려가 멸망하자 한 때 시골에 은거하였으나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었고,
이후 여러 직책을 두루 맡았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6조의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초기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태종 대의 관직생활을 통해 얻은 국정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경험을 토대로, 세종 대에는 20여 년간 나라살림을 총괄하던 의정부에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문예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에 크게 공헌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희 선생 묘 (대한민국 구석구석)
4) 박중손 묘와 장명등 (파주시 탄현면 방촌로879번길 172-34)
조선초기의 문신인 공효공(恭孝公) 박중손(1412~1466) 묘역 안에 세워진 2개 의 장명등(長明燈)으로 이 곳 묘역에는 박중손 묘와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남평문씨(南平文氏)의 묘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박중손의 본관은 밀양, 자는 경윤(慶胤), 호는 묵재(默齋)로 세종 17년(1435)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에 들어갔다. 그 뒤 부수찬·지제교를 거쳐 사인·집의·지병조사·동부 승지·도승지 등 여러 요직을 지냈으며, 특히 천문(天文)을 관찰함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로 시호는 공효(恭孝)이다.
묘역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각 있으며, 우측 아래쪽으로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장명등은 신도비 건립연대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중손 묘 앞의 장명등 하부는 대좌(臺座)와 화사(火舍)로 이루어져있고 상부는 옥개석으로 되어있다. 등부(燈趺)인 대좌는 하 대·중대·상대 등 세부분으로 구성되었고, 그 위에 화사부분이 조식되었다. 그리고 옥개석은 옥개 (屋蓋)와 연주대(蓮珠帶) 및 연봉형(蓮峯形)의 보주(寶珠)로 구성 되어 있다.
부인묘 앞의 장명등은 부인이 남편보다 먼저 사망한 관계로 약간의 시기 차이가 있을 것 으로 추정된다. 두 개의 장명등 높이는 서로 비슷하나 박중손 묘 앞의 것이 조금 더 둔중해 보이고 부인 묘 앞의 것은 세장한 모습을 하고 있어 마치 남녀 를 구분하는 듯하다.
묘제(墓制)와 장명등 등의 석물(石物) 은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온전하게 잘 보존되어 초기의 우수한 조성수법을 보여준다. 특히, 박중손 묘 앞에 있는 장명등은 전·후면과 달리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해와 달 을 상징하는 둥근 모양과 초승달 모양의 화창을 두어 일명 일월등(日月燈)이라 불리고 있다.
그 옆의 것은 보다 세장(細長)하고 화창을 모두 방형으로 만들어 박중손묘 앞의 장명등과 서로 비교된다. 이러한 특수한 수법과 형태의 장명 등은 매우 희귀한 예로써 역사적·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된다.
(출처 : 파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4. 회비 : 5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회장 이 영기 (010 - 9001 - 4561)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