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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서성(山西省)답사(踏査)를 마치며.
< 운강석굴, 오대산, 면산, 평요고도를 중심으로 >
김종찬
중국 4대석굴의 하나인 운강석굴(雲岡石窟), 불교의 성지인 오대산(五臺山)등 불교 유적지가 산재해 있는 산서성(山西省)은 중국 서북부에 있는 성이다. 성 이름은 타이항(太恒)산맥 서쪽에 있다고 하여 유래된 것이다. 인구 약 3400만의 중간급성으로 성도는 타이위안(太原)이다. 주민의 99.7%가 한족인 산서성은 춘추시대 강력한 진(秦;BC349)나라의 판도에 속한다. BC403년 한. 조. 위 세 나라로 분열된 전국시대는 BC221년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게 되면서 막을 내린다. 오호십육국의 혼란기 동안 후조, 전연, 후연(後燕) 같은 여러 유목민족이 차례로 통치를 한다. <후연의 모용수 황제시대는 우리나라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시대와 거의 일치 한다; KBSTV드라마 광개토대왕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들이다>. 이러한 통치도 선비족인 북위(386-534)에 의해 통일되며 훗날 북중국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된다. 건국초기 북위의 수도는 다퉁(大同)으로 지금 산서성의 제2도시이며 석탄산업도시다. 당나라 때는 황하의 동쪽이라는 의미에서 하동(河東)이라고 불렀다. ........ 만주의 금나라(1115-1234)가 거란의 요나라를 멸하면서 산서성은 금나라의 판도로 들어갔고 산서성의 현재 경계가 거의 확정된 것은 명나라(1368-1644)때이다. 중. 일(中.日) 전쟁 기간 중에는 일본군의 승리로 일본의 점령지가 되기도 했다. 산서성은 팔로군의 대일본군에 대한 게릴라 공격의 주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일본 패망 후 국공내전 동안 산서성은 인민해방군의 중요한 군사 기지가 된다.
황토고원에 위치한 산서성의 중요산업은 석탄사업이다. 기후는 겨울이 길고 다소 건조한 편이며 여름은 덥고 봄에는 황사가 빈번하다. 연평균 강수량은 350mm-700mm 정도이고 60%가 7월과 8월에 집중된다.
◈ 중국 불교성지(佛敎聖地)로 떠나는 길
중국 불교성지 순례길, 불교유적지 답사길, 필자로써는 명칭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는다.
정확히 배우고 알고 나름대로 깨우칠 수 있으면 된다. 성지 순례길의 설렘, 기다림, 긴장감 그리고 여름 옷가지 몇 개 챙기는 일도 60대 중반의 자칭(?) 노신사는 즐겁다. 북경에서 산서성(山西省) 제2의 도시 대동(大同), 운강석굴을 거쳐 황토고원(?). 해발 2000m가 넘는 산맥을 5시간을 달려야 하는 오대산, 오랜 시간 짝사랑해 온 석가모니 부처님, 문수보살님 그자체인 오대산. 길 위에서, 산속에서, 절간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해발 3000m의 산속 골짜기에는 천년 세월이 숨쉬고, 그 길 위에 오체투지의 순례자들이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입안에서, 길거리 불교용품 판매점 엠프에서 흘러나오는 “옴 마니 반 메 흠” “옴 마니 반 메 흠” 육 자 대 명 왕 진 언. 중국의 ‘그랜드캐년’ 면산(綿山), <세계유산명록>에 수록된 평요고도(平遙古都) 등 상상의 날개를 펴 본다. 필자는 혼자 소유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경험과 기억들을 소중한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서툴게 서툴게라도.
영남불교연구원이 짜놓은 탐사일정은 8월18일부터 4박5일이다. 대구국제공항을 출발 중국북경을 경유해 산서성 제2의 도시 대동시 운강석굴, 오대산, 면산, 평요 그리고 성도 태원(城都)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대구공항에서 예정시간보다 30분정도 늦게 출발한 중국항공기 탓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현지시간 오후 2시20분에 북경공항 도착, 조선족 3세 가이드 36살 박모씨의 말은 한마디로 속사포다. 얼굴에 피곤함이 역력하다. 우리 일행은 조선족이라는데 후한 점수를 주고 그를 따라 나섰다.
◈ 옹화궁(擁和宮)
옹화궁은 중국의 대표적 라마교 사원이다.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벽하게 보존된 라마묘(喇麻廟)다. 옹화궁은 명나라 때 태감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인데 청나라 광서33년(1694)에 옹친왕부, 옹정3년(1725)에는 옹화궁으로 그리고 건륭 9년(1744)에 라마묘로 고처 라마교의 사무를 보는 곳이 되었다. 옹화궁내 가장 큰 건물인 만복각(萬福閣)에는 지름 3m의 백단목을 통째로 조각해 만든 높이 26m의 세계 최대 목불상(木佛像)이 안치되어 있다. 이 목불상은 달라이라마 7세가 건륭제에게 바친 것이라고 한다. 티베트에서 가져 오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한다. 현대적인 운반 장비도 기술도 없던 그 시절 눈 덮인 설산을 어떻게 넘어 왔을까? 관람객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처다 보고 있건만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티베트불교에 대한 의해를 돕기 위해 라마교에 대해 언급 하고자 한다. 라마교라고도 불리나 이는 정확하지 않은 명칭이다. 김재원 원장의 기록을 빌리면 티베트 불교의 특징은 4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적극적으로 종교적인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때 티베트 사람들의 1/4이 종교적인 일에 종사했다고 한다. 둘째, 티베트 불교에서는 라마(생명의 근원을 주는 자) 즉 스승이 죽으면 다시 어린아이로 환생(還生)한다고 믿는다. 셋째, 종교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세속적 통치권을 함께 지니는 전통이 있다. 넷째, 각자 가족과 배우자를 거느리고 온화한 측면과 사나운 측면들이 많아서 전문적인 종교인들은 그 신격들을 심리적 과정에서 상징적 표상으로 간주 하지만 일반 신자들은 실재하는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다.
◈ 북경의 성당들
해질 무렵 미리 섭외를 해둔 북경성당을 방문했다. 나이든 수녀님으로부터 중국 천주교 역사를 간단하게 들었다.1601년 마테오릿치의 북경 선교 이후 100년이 지난 1701년 시작해 1703년에 완공한 북당이 건립되었다. 이보다 앞서 가장먼저 마테오리치가 1601년에 건립한 남당은 1644년에 아담 샬에 의해 개축되었다.1702년에 서당이 건립되는데 이들 성당은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특히 남 동당은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이 가까이 있어 사신들과 서양 신부들과의 접촉이 많았고 결국 조선에 서학(西學)이 전래되는 통로 역할을 한다. 특히 1664년 아담 샬과 만난 소현세자는 조선 귀국 후 친청파(親淸派)로 오해를 받아 운명이 바뀌는 안타까운 역사를 기록한다. 북당은 1784년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고 귀국 후 교회 창설을 주도한다.
여기서 잠깐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소현세자에 대해 살펴보자. 소위 반정으로 16대 임금에 오른 인조는 사회적 불안과 혼란을 극복하지 못한 채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군신(君臣)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으로 이어진다.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세자(소현)와 함께 한강 동편 삼전도에 나가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다한 뒤 한성으로 돌아온다. (이 君臣 관계의 치욕의 역사는 1895년 淸.日 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청군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후일 효종),인평대군 그리고 척화론자 들을 심양으로 데리고 간다.
소현세자는 8년 동안 심양에 머무르면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역할을 한다. 소현세자는 서양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신부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천문학 수학 등 서학을 배웠다. 명나라가 망하자 청은 소현세자를 조선으로 보낸다. 9년 동안의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소현세자는 아버지인 인조임금으로부터 친(親)청(淸)주의자로 몰려 박해를 받는다. 소현세자가 가져온 서양문물조차 수용하지 않는다. 귀국 두 달 후 소현세자는 병으로 드러눕고 와병한지 3일 만에 죽는다. 34살의 세자가 죽은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부터 사약을 받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인조의 손자)도 제주도로 귀양 가 둘은 죽는다. 소현세자의 죽음이 인조에 의해 독살 되었다는 추론은 이밖에도 소현세자의 시신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적고 있다. 임금도 세자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인조는 세자의 장례기간도 단축하고 세자가 죽은 지 3개월 만에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지금도 역사학자들 간에는 논쟁 꺼리가 되고 있다.
다시 성당 안으로 돌아간다. 수녀님의 설명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되자 필자는 호기심이 발동해 모택동 말엽 문화 혁명기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해 老 수녀님에게 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다. 문화혁명 때도 외교관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미사를 볼 수 있도록 옆문을 열어 두었다는 것이다.(공식적으로는 폐쇄(閉鎖) 조치됨) 문혁이 다분히 정치적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그 많은 사찰과 교회가 문을 닫고 관료와 정치인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엄청난 변혁기에도 중국은 미래의 국익을 생각한 것 같다. 중국의 대국다운 면모를 보는 것 같다.
◈ 구룡벽(九龍壁)
북경에서 하루를 보낸 일행은 비행기로 350Km를 날아 산서성 2대 도시인 대동시로 날았다. 가이드가 바뀐다. 역시 조선족이다. 대동시의 고도가 1100m이니 대구에 있는 팔공산과 비슷하다. 석탄광산이 많은 곳인지라 땅도 하늘도 회색빛이다. 첫 방문지 구룡(九龍)벽은 명(明)태조의 13대손인 주계(朱桂)의 저택 일부분이다. 이벽은 조벽(照壁;밖에서 집안이 보이지 않도록 가린 벽)으로 길이 45.4m,높이8m 두께2m의 도제(陶製) 벽이다. 5가지 색깔의 청기와로 9마리의 용(龍)이 부조되어 있다. 북경의 고궁, 북해공원에 있는 구룡벽과 대동의 3개 구룡벽 가운데 최대 규모라는 설명이다.
◈ 대동 화엄사(華嚴寺)
요(遼)나라 때의 고찰로 명(明) 나라 때 상(上). 하(下)화엄사로 나눠졌다. 상 화엄사는 요나라 때 (1062) 창건되어 금나라(1140)때 재건되었다. 사찰 내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목조불전으로서는 중국최대이다. 하 화엄사는 요나라(1038)때 건립되었는데 천궁루각(天宮樓閣)은 요나라 목조건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설명이다. 운강석굴과 함께 대동지역의 관광자원인 화엄사를 복원하는 불사가 대단했는데 시멘트기둥과 기와가 고전미를 해치는 것 같아서 외지인을 안타깝고 슬프게 했다.
◈ 운강석굴(雲岡石窟)
중국에는 4대 석굴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점심때까지 답사를 끝내야 하는 오대산 지역의 운강석굴이다. 정주(鄭州) 가까운 곳에 있는 용문석굴. 돈황의 막고굴 또 하나가 맥적산의 석굴이다.
돈황막고굴은 규모와 시대성에서 앞서며 특히 벽화(壁畵)가 유명하다(길이14km). 운강석굴은 색채(色彩), 용문석굴은 조각(彫刻)으로 유명하다. 운강석굴의 원래 이름은 무주산석굴 혹은 무주석이라 불렀다.
운강석굴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국가가 주관하고 경영한 대규모의 조영공사로 개착된 최초의 국가적 석굴이다. <운강석굴의 설명은 가이드 보다 김재원 원장의 설명이 돋보였다.> 김원장의 설명을 중심으로 기록해 본다. 운강석굴은 보통 동, 중, 서 세 구역으로 나눈다. 동부에 4개굴 중붕 9개굴 서부에 32개 굴이 있고, 이외에도 11000여개의 작은 석굴과 감실을 비롯해 조각 51,000여 위가 있다.<*석굴사원을 구분하는 기준은 3m이상 되는 굴은 대굴,1m-3m의 굴은 소굴 ,1m미만의 굴은 감실이라고 한다.> 서부의 동쪽 구역을 담요오굴이라 하는데 운강석굴에서 가장 먼저 개착되었다, 동부와 중부는 2기에, 서부에서 담요굴을 제외한 대부분은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492년 이후인 3기에 조성된 것이다.
◈ 1기 석굴; 담요오석굴(曇曜五石堀) (460-465)
460년 담요가 사문통으로 교단 총수의 지위에 오르자 본격적인 불상 조영사업이 시작되었다. 16굴의 주존상인 석가상은 현재불로서 당시 황제였던 문성제 자신을 상징한다. 1굴의 주존상은 교각상의 미래불로 재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경목제를 상징하는 것이고, 18굴의 주존은 노사나불 입상으로 절대군주 태무제의 초상 조각이다. 19굴 시무외불 좌상은 명원제, 20굴의 선정불 좌상은 도무제의 초상, 석불로 조성한 것이다. 대 석굴사업을 위해 담요는 승기호와 불도호를 설치해서 경비와 노비를 충당했다. 담요오석굴의 불상 특징은 장대한 체구와 준수한 얼굴에서 제왕(帝王)의 퐁모가 넘쳐흐른다. 이러한 건장하고 수려한 용모는 황제(皇帝)들만 가졌던 특징이 이민족으로 알려진 선비족들의 체질적 특징이었던 같다. 얕게 파낸 파임선, 넓은 이마와 매력적은 얼굴 윤곽 등은 탁발 유목민족의 특징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 2기 석굴(石窟)(666-494)
용강석굴에서 중요한 석굴은 문성제 사후부터 요문제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기 이전까지(466-496)로 20년간이다. 2기로 구분된다. 문성제 시기인 1기와 비교하여 2기인 효문제 시기는 석굴의 구조와 조각 형태에서 많은 변화를 보인다. 조각상은 아름답고, 온화하고, 점잖고, 미려하다. 조각상의 내용도 풍부하고 장식도 화려하다. 2기로 편년되는 석굴로는 중앙부의 동쪽에 위치한 7번 굴에서 13굴과 동구의 1,2,3,굴이 포함된다. 1기 석굴의 평면이 마제형이나 타원형에 천장이 궁륭형인데 비해 2기 석굴은 평면은 대부분 네모지고 전, 후실을 가지고 있다. 천정도 평평한데다 바둑판 모양으로 바뀌고 있다. 석굴 내부의 존상들도 형상과 소재가 다양화 되고 있다. 이러한 중국 전통형식의 조각요소가 석굴에 출현한 효문제 시기의 특징과 원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효문제가 실시한 일련의 한화 개혁정책과 관련이 있다. 둘째 효문제 시기의 불교 상은 의리가 중요시되었다. 이런 이유로 유마힐경, 열반경, 법화경이 이 지역에 유행했다. 셋째 효문제 시기는 북위와 서역과의 관계가 이전처럼 밀접하지 않게 되었다. 넷째 불사가 흥성하여 많은 사원이 건립되었다
◈ 3기 석굴(石窟)과 감(龕)( 494-524)
3기는 효문제의 낙양천도 이후로 규모가 큰 석굴은 감소되고 중, 소형석굴과 불감(佛龕)이 암벽 면을 가득 채운다. 이시기 불보살 상들의 특징은 얼굴이 수척하고 목이 길고 어깨가 좁다. 이러한 특징은 후에 수골청상으로 발전하게 되고 북위 후기 상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보살상은 상체에 짧은 내의를 걸치고 천의를 배 부분에서 X자 형으로 교차시키고 있다. 비천상에 있어서도 1기와 2기 상에서는 발이 노출되어 있는데 3기에 오면 발을 감추고 있다. 용문석굴의 최대 석굴은 빈양동으로 모두 3개의 굴로 되어 있다. 3개 동굴 중 북위 시기에는 유일하게 중동(中洞)만이 완성되었다. “석로지”에는 빈양동의 개착에 대해 “평성의 영엄사를 대신한다.”하고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영엄사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좁은 의미로는 운강 3석굴을 가리키고 넓은 의미로는 운강석굴 전체를 뜻한다.‘영엄사를 대신한다.’는 말은 용문석굴은 운강석굴을 근거로 해서 만들었다는 말로 이해해야 맞을 것이다.
◈ 오대산(五臺山)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현공사(懸空寺)
운강석굴답사를 마친 일행은 여행의 하이라이트요 문수성지인 오대산을 향해 떠난다. 오대산 가는 길은 한마디로 멀다. 350km, 우리나라 고속도로를 달리면 3시간이면 족하지만 개마고원의 산맥을 따라 가는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고 가는 길에 중국유일의 불교, 유교, 도교 3교의 합일의 독특한 사찰인 현공사(懸空寺)를 들려야 한다. 6시간은 족히 걸린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다. 떠난 지 한 시간 쯤 지나면서 해발 2000m의 산맥을 달린다.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광경이다. 백두대간을 하면서 경험한 강원도에서 가장 높다는 해발 1000m-1200m의 우리나라 산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도로에다 별로인 광광버스. 그런데 운전기사의 운전솜씨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필자의 시야에는 우리나라 산과 비교해서 나무가 너무 없다. 없다기보다 이미 사막화가 시작 된지 오래인 것 같다. 사막화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이 시작된다. 이 지역은 1년 평균 강수량이 400mm정도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늦가을이면 집집마다 방마다 테이프로 칠갑(?)을 해야 한단다. 그래도 먼지는 집안으로 방안으로 공격해와 생활이 엉망이란다. 황사에 익숙한 이곳 주민들이지만 호흡기병에 시달린다. 가이드의 황사와 관련된 거짓말(?) 같은 설명은 계속된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다. 전체민족의 85%가 넘는 한족을 중심으로 소수의 소수민족이 수 천 년을 이어 왔는데 최근에 식수족(植樹族)이 생겨났다고 한다. 식수족의 생활근거지는 이곳 산서성, 섬서성, 감숙성 등 주로 사막화가 심한지역이다. 30만 명의 식수족은 죽을 때까지 나무만 심으면 된다. 의식주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 준다고 한다. 중국정부는 고속도로는 도로인접 10m, 일반도로(지방도)는 인접5m까지 나무를 심어 놓았다. 필자가 보기에는 속성수인 플라다나스 같았다. 중국에서 도로를 달리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황사와 관련된 가이드의 설명을 듣다보니 그 이름도 유명한 현공사에 도착했다.
◈ 현공사(懸空寺)
491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현공사, 절벽에 세워진 현공사를 보고 놀라지 않는다면 신경이 무딘 사람으로 밖에 평가 할 수 없다. 600여 년 전 명(明)나라 때 재건축 된 것이 지금 현재의 모습이다. 산서성 북부의 대동시 부근에 있는 현공사는 중국에서 유일한 불교(佛敎), 도교(道敎), 유교(儒敎) 합일의 독특한 사찰(寺刹)이다. 현공사는 중국의 많은 건축물 중 매우 기묘한 건축이다. 현공사는 깊은 골짜기의 분지에 위치해 있으며 양쪽이 100m정도의 절벽으로 되어 있다. 건축물 자체가 마치 벼랑 위 공중에 걸려 있는 것 같이 보이며 지면과 50m정도 떨어져 있다. 절벽위에 세워진 21개의 기둥이 전체 건축물의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절벽에 단단하게 꽂혀 있는 들보들이 제 값을 한단다. 이 사찰 위의 암석(巖石)은 앞으로 기울어진 모양을 하고 있다. 암석 이 곧 떨어져 절을 삼킬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양 덕분에 절벽위에서 떨어지는 빗물 세례를 피 할 수 있고 산 밑에 홍수가 나도 물에 잠기지 않는다. 절(寺院)주위의 산봉우리는 뜨거운 햇볕을 막는 역할을 한다. 매일 하루 3시간 정도의 햇빛을 받을 수 있단다. 따라서 현공사는 비록 나무로 만든 건축물이지만 천년 세월에도 비와 바람을 피해 완벽하게 보존되어 왔다. 지형학적 건축이론과 기후 등 당시로서는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지혜가 다모아진 걸작 이다. 唐대의 시인 두보(杜甫;712-770)와 함께 중국최고의 시인 이태백(太白;701-762)은 현공사를 두 번째 찾은 뒤 훌륭한 경관에 대한 감탄의 표시로 높이 2m가 넘는 바위에다 장관(壯觀)이라는 글씨를 흔적으로 남겼다. 필자의 상상력으로는 천하의 주(酒)(?) 태백이 시(時) 한수도 남겼을 덴데 후세 사람들의 지혜 부족으로 못 찾는 건 아닌지(?).... 여행자들의 한결 같은 질문은? “왜 이런 절벽에다 사원을 지었을까?”이다. 건축기술의 발달이 전무한 상태에서 오직 노동력에만 의존하던 시대에 말이다. 그 해답은 이렇다. 1400년 전 현공사 아래쪽은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여기를 오고 가는 신자들에게 절에 들러 향불을 피우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산 밑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 폭우로 재해가 많았고 강물이 범람하면 사람들은 금룡이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탑을 세우면 금룡을 제압 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절벽 공중에 떠있는 사원을 세웠다고 한다. 필자는 물론 여행자들의 의문이 다소 풀리는 듯 했다.
현공사를 뒤로 하고 오대산을 향한다. 종종 나타나는 비포장 길에다 교통표지판 하나 제대로 없는 시골 산길, 6-70년대 우리나라 산길을 가는 느낌이다. 오대산까지 가는 멀고도 험한 길 , 목이 마르면 노상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수박, 복숭아, 사과로 배를 채운다. 필자는 비구니 스님이신 백 혜은 스님이 스폰서 한 수박이 제일 맛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중국말을 아주 잘하는 최계량 선생님이 동행을 했는데 과일장사 농부들과 입씨름이라도 해서 과일값 좀 싸게 했는지? 아무튼 든든하게 채운만큼 몸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화장실이 따로 없다. 적당한 곳에 버스가 서면 각자들 알아서 잘들 처리 한다. 조선족 가이드, 인동 장씨의 말로는 저녁식사는 한 밤중이 될 것 같으니 배를 든든하게 채워 두는 게 좋을 거라나. 속도가 없는 관광버스의 산길 곡예(曲藝)는 계속되고 지루 하다는 소리가 버스 안 여기저기서 나온다. 드디어 대안(代案)이 나온다. 관광버스에서 자주 등장하는 한국특유의 노래자랑이 멀리 중국의 산서성 어느 산골 해발 2000m 산길에서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임시총무로 지정된 김용모님의 사회로 진행 된다. 노래 부르는 순서는 따로 없다. 앞에서부터다. 노래 실력을 보니 여행께나 해본 사람들이다. 위기는 필자에게도 온다. 음치클럽의 총무(?)인 필자에게 마이크가 넘어왔다. 위기다, 어쩌나 저의 가족력을 소개했다. “저의 어머님은 일제 때(日帝 강점기) 음악대학을 나왔고, 아버님은 치과대학을 나왔습니더. 그래서 저는 태생이 음치입니더”하고는 머뭇거리는 순간 여기 저기 웃음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것으로 필자는 위기를 면하고 마이크를 사회자에게 넘겼다. 아이 고 살았다. 일행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다 들었는데도 우리가 가야할 오대산은 멀리 남아있다. 피로한 여행인지라 어느새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잠을 청한다. 가다 가다보니 밤 10시(한국시간11시)가 지나서나 오대산에 도착했다. 늦었지만 먹을 것 다 챙겨 먹고 내일 준비물 좀 챙기고 12시 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저승사자가 잡아가도 모를 정도다.
◈ 오대산(五臺山)
관세음보살을 모신 절강성의 보타산, 보현보살을 모신 사천성의 아미산, 지장보살을 모신 안휘성의 구화산과 함께 중국불교 4대성지로 불리는 오대산(五臺山)은 중국 산서성 오대현 동북부에 있다. 오대산은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3차 회의에서 우리 조선왕릉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해발3000m이상인 이 산은 5개의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는데 정상이 평평하고 나무가 없는 게 특징이다. 오대산의 5대는 북대의 엽두봉(葉頭峰), 동대의 망해봉(望海峰), 서대의 쾌월봉(쾌月峰), 남대의 금수봉(錦수峰),그리고 중대의 취암봉(噿岩峰)이다. 오대산의 다른 이름은 낙양이나 장안보다 기후가 서늘하고 살기가 좋아 청량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대산 지역은 동한(東漢)시대(서기58-75)에 한나라의 명제가 사신을 천축국에 파견하여 불경을 구해오게 한 후부터 사원을 조성하기 시작한 곳으로 문수도량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당나라 때인 6-7세기에는 360여개의 사찰과 1만 여명의 스님들이 있었지만 문화혁명이후 급격히 사라지고 지금은 47개의 사찰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 문수신앙을 소개한 신라의 자장율사는 이곳에서 문수보살의 화현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 발우 등을 가지고 돌아와 강원도 월정사를 창건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는 자장율사가 당(唐)나라에서 돌아온 643년(신라 선덕왕 12)에 오대산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절터에 초암(草庵)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 하였다고 함. 자장은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7년 동안의 당나라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면서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여 대장경(大藏經) 한질과 번당(幡幢), 화개(華蓋) 등을 가지고 왔다. 자장은 또 신라에 화엄사상(華嚴思想)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이다.
수상사는 대표적인 문수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문수보살이 권속 1만 명을 데리고 수상사 뒷산 토굴에서 수행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 1500년 전에 창건됐다가 소실된 것을 600년 전에 복원했다. 수상사 대문수전에는 청사자에 올라탄 높이 12m의 문수보살이 모셔져있다.
현통사(顯通寺)는 오대산 최고 사찰로 68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명(明)나라 때 요봉스님이 구리 10만근으로 조성한 동전(銅殿)과 1000개의 손마다 부처님 상을 새겨놓은 대천신문수전 등이 있다. 이외에도 문수보살이 청량석을 가져와 건축했다는 청량사와 자장율사가 오대산에 머물며 수행했다는 죽림선사가 있다. 티벳 밀교의와 중국의 승종이 합쳐 있는 탑원사, 금각사, 용천사, 대라정등 47개의 크고 작은 사찰이 오대산에 자리 잡고 있다.
◈ 오대산(五臺山)을 멀리 하면서
오대산을 찾는 이는 대충 두 분류로 나눈다. 중국 국내 여행객 가운데 불교에 관심이 많은 분들과 우리 일행처럼 외국에서 마음먹고 참배를 위해 찾는 여행객이 주류다. 다른 한 분류는 여행사의 단순한 프로그램에 따라 그저 휙 둘러보는 정도다. 무엇을 보았는가. 참배는 왜 하는가. 무엇을 얻는가. 오대산에는 라마종에 속하는 사원이 많은 탓인지 그 험한 계단을 온 몸을 던져 수행하는 오체투지의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웅전 앞 비좁은 공간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극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모습이 필자의 가슴을 짠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누구를 위한 기도인지? 중국 향 특유의 고약한 냄새도 아랑곳 하지 않고 오직 기도 하나만을 위해 험난한 길을 걸어온 것같이 보인다. 우리 일행은 오대산도 식후경이라 발걸음을 버스가 있는 광장 쪽으로 재촉한다.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점포에 설친 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염불(念佛)소리 “옴 마 니 반 메 흠 ” “옴 마 니 반 메 흠 ”반복 또 반복된다. 관세음 보살(觀世音菩薩)에 익숙한 필자에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게 들린다. 지난 수 천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이름 모를 중생들이 이곳을 스쳐 갔을까? 필자도 그 중 한 나그네로 기억 되겠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대웅전 부처님은 내게 무엇인가를 말할 듯 말 듯 신비로운 모습으로 다가 와 자비를 구하라고 했을까, 침묵하라고 했을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배고픔도 잊는 구나. 산허리에서 하늘을 향해 오르고 있는 저 운무(雲霧)도, 허공 가운데 떠 있는 저 구름도 해가 나면 다른 모습으로 변하겠지? 누구나 한번 왔다가 가는 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眞理)일진데 왜 우리는 이렇게 허우적거릴까? 우리는 왜 돌이 킬 수 없는 일에 집착(執着)할까?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주 만물도 인간사도 변천무상 (變遷無常)이 아닌가. 부처님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파하지 않았는가. 우리 속에 나는 무엇을 얻고 가는가? 누구를 위한 기도를 하는가? 모두의 여행길이 순탄하길 간절히 또 간절히 기도한다.
◈ 중국의 ‘그랜드캐년’ 면산(綿山)
제법 중국 여행에 익숙해진 일행은 오대산에서 늦은 점심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동고동락(同苦同樂) 3일째 오전 일정을 무사히 소화한 일행은 공중도시(空中)로 소문난 면산을 향해 달린다. 가야할 길 450km, 버스길로 6시간은 꼬박 가야한다.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太原)을 거쳐 2700년의 역사를 간직한 평요고성(平遙固城)도 비켜 지나간다. 지나면서 들려야 할 곳은 없다. 여행자들의 생리적 현상을 처리하고 운전기사의 안전을 위해 휴게소에 들릴 정도다. 해질 무렵 면산(綿山) 매표소에 도착했다. 정말 공중도시가 맞다. 해발 2,555m의 면산을 향해 달리는 버스는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고공공포증이 있는 일행은 왼쪽 아래쪽 풍광을 내려다보지도 못한다. 그래도 남들 따라 함성은 지른다. 면산을 멀리서보면 거대한 나사를 거꾸로 세우고 규칙적인 홈을 파놓은 듯 깎아지른 절벽에 길을 내고 차가 다닌다. 물론 비포장도로다. 그러나 경관은 정말 멋지다. 안개가 휘감은 협곡은 마치 무협지의 무대 같다. 중국의 ‘그랜드 캐년이’ 맞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람은 물론 동물조차도 접근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를 석탄으로 돈을 모은 산서성의 어느 부호가 40년 후에 국가에 기부채납하기로 하고 개발에 착수 하면서 특급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년간 130만 명의 중국인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25km나 되는 협곡을 따라 즐비한 암벽을 깎아 도로를 내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대국(大國)에 대인(大人)다운 생각이다.
숙소인 면산 최고의 호텔인 10층짜리 운봉서원(雲峰墅苑)에 도착했다. 호텔의 위치가 장관이다. 해발 2000m의 호텔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더더욱 장관이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필자는 평생에 가장 높은 호텔에서 잠을 청하는 것 같다. 혼자 잠들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마누라 생각이 나는데 옆 침대에는 김재원원장이 큰 대자로 누워있다. 비만인데도 코를 골지 않고 새색시같이 얌전하게도 잔다. 여행 중에 큰 복이다. 부처님의 공덕일까?
◈ 운봉사(雲峰寺)
운봉사는 당태종(唐 太宗) 이세민과 지초스님의 일화로 유명하다. 당태종 14년에 큰 가뭄이 들어 고승인 지초스님이 계시는 면산을 향해 비를 구한다. 지초스님이 제자들을 시켜 쌀뜨물을 서남 방향으로 뿜으니 이때 장안 일대에 단비가 내렸다고 한다. 얼마 지난 뒤 당태종이 신하들을 이끌고 지초스님을 만나러 면산을 찾았다. 스님의 제자들이 지초스님의 원적(입적)을 알리자 당태종은 탄식 후 “이번 행차는 공염불(空念佛)이다”했고 이때 하늘에는 ‘공왕고불(空王古佛)이라는 글자와 함께 지초스님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한다. 당태종은 이를 보고 지초스님을 공왕불(空王佛)에 봉하고 조서를 내려 운봉사를 짓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현재 운봉사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다양한 방법으로 소원을 빌고 있다.
◈ 정과사(正果寺)
김원장과 나는 새벽6시에 일어나 호텔 바로 위에 있는 운봉사를 지나 정과사와 영응탑을 향해 나섰다. 절벽을 갈지자(之)로 깎아 만든 400여개의 크고 작은 계단을 걸어서 간다. 30분쯤 올라갔을 때 내려오는 일행을 만났다. 존경하는 눈초리로 인사를 했다. 그러나 도중에 회군(回軍)했다는 대답이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절벽 위를 향해 재촉했다. 가다보니 정과사에 도착했다. 정과사에는 정토(淨土)에 왕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중국 정토종의 제 1조가 되는 담란스님을 추모하는 영응탑이 있다. 원래 담란스님의 제자들이 3층탑을 만들었는데 일본군의 포격으로 무너진 것을 운봉사와 함께 복원하면서 7층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탑으로 가는 문이 굳게 잠겨있어 50m전방에서 카메라로 인증 샷 한-컷 찰깍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12존(尊) 등신불(等身佛)이 봉안된 정과사 법당 내부도 한-컷 했다. 운봉사에서 정과사로 가는 방법을 소개한다. 첫째 쇠밧줄을 타고 30m 정도의 절벽을 오르는 길이다. 원나라 때 처음 만들어졌으며 지금은 연인들이 이 밧줄에 자물쇠를 걸어 놓으면 헤어지지 않는다는 소문 때문에 수많은 자물쇠가 매달려 있다. 둘째 절벽에 선반처럼 매달려 있는 400여개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간다. 세 번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순식간에 오르는 방법도 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2.3번을 택한다.
◈ 면산과 한식(寒食)의 유래
우리 속담에 ‘청명(淸明)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동지(冬至) 후 105일째가 한식(寒食)이고 106일째가 청명이기에 나온 말이다. 다시 말해서 청명이나 한식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면산에는 진나라(晉國)의 충신 개자추(介子推)에 관련된 고사(古事)가 있으며 우리나라 한식(寒食)의 유래가 된 곳이기도 하다. 면산 해발 2,072m의 정상에는 개자추 모자를 기리는 사당 (祠堂)과 불교 및 도교사원이 있다. 한식은 불을 금하는 금화일(禁火日)로서 찬밥을 먹는데 여러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진세가(晉世家)>에는 진 문공(晉 文公)과 함께 19년간 망명생활의 고초(枯草)를 겪은 개자추가 문공 즉위 후 소외되자 면산(綿山)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뒤 늦게 문공이 개자추를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질렀지만 거부하고 타 죽었기 때문에 이날에는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진(晉)의 육홰(陸翽)가 편찬한 <업중기(鄴中記>에는 “병주(倂州) 풍속에 불에 타 죽은 개자추를 애도해 3일동 불 때기를 금 한다”고 적고 있다. <형초세시기>는 ‘한식에는 바람이 급하기 때문에 3일 동안 불을 금했다’며 화재방지의 목적도 있다고 전하는데, 세종(世宗) 13년(1431) 이날도 불이 났다는 보고를 듣고 아침에 저녁밥까지 짓고 오후에는 불을 쓰지 말라고 명했다고 한다 한식 성묘 때가 1년 중 가장 산불이 많다고 한다.<이덕일의 古今通義 인용>
◈ 협곡(峽谷)에서 만난 도교(道敎)사원 대라궁(大羅宮), 서현곡(栖懸谷)
답사팀은 아침밥을 먹기가 무섭게 길을 떠난다. 안개 낀 협곡(峽谷)을 돌아 내려오는 길목에 버스가 선 곳은 도교사원 대라궁(大羅宮)앞이다. 어제는 밤이라 보지 못한 풍경들, 대자연 협곡에 가미된 인공풍경들이 조화를 이룬다. 중국의 지하문화재는 섬서성(陝西)에 지상문화재는 산서성(山西)에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지상문화재의 보고인 면산, 절벽에 독립된 건물을 나열식으로 깎아 붙여 놓은 뜻한 거대한 건물이 대라궁이다. 6층까지는 엘리베이터 올라 갈수 있다. 우리 일행은 13층까지 걸으면서 보기로 했다. 주전인 삼청전이 일행을 맞는다. 대라궁은 도교의 최고신 3신을 모신 곳이다. 삼청은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천공(天空), 상청(上淸), 태청(太淸)을 말한다. 도교의 창시자요 최고의 신으로 추앙받는 노자는 공자, 맹자와 동시대의 위인으로 도덕경(道德經;노자의 말씀)이 유명하다. 8층까지는 도교의 각종 신들을 모셨고 9층과 10층은 박물관이다. 그리고 11,12,13층은 체험과 기념품 등을 파는 곳이다. 9층 계단을 올라서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신라의 대문장가(大文章家)인 고운(孤雲) 최 치원(崔致遠)선생의 초상화(肖像畵)가 걸려있다. 대라궁 관계자의 설명으로는 신라 때 최치원선생이 면산을 방문한 일을 기념하여 초상화를 모신다고 한다. 멀리 이국땅에서 접하는 석학이신 고운의 초상화는 친근감을 더 해 준다. 대라궁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펴본 우리는 다시 버스에 몸을 싣고 평요고성(平遙固城)을 향해 달린다. 화장실도 갈 겸 해서 내린 곳은 운봉산 절경 중 최고라는 서현곡(栖懸谷)이다.
면산 계곡관광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서현곡, 마치 금강산 상팔담의 축소판 같은 여러 개의 담이 계곡아래에 있다. 계곡물을 건너는 나무다리에서부터 서현곡 트래킹이 시작된다. 협곡 사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담과 폭포가 장관이다. 말이 트래킹이지 암벽과 협곡사이 매달아 놓은 철판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한다. 2시간 30분 정도 오르면 운봉산에 도착한다. 갈 길이 먼 답사(踏査)팀은 좋다는 풍광(風光) 감상을 포기하고 버스에 오른다. 중국의 3대 고성 중의 하나인 평요고성(平遙固城)을 향해 떠난다.
◈ 평요고성(平遙固城)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는 <평요고도(平遙古都)는 중국내 제일 완벽하게 보존된 고대 현성으로 이는 중국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다른 문화, 사회, 경제, 및 종교발전의 완벽한 한 폭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평요고도는 1997년 <세계유산명록)에 수록됐다. 중국의 3대고성은 운남성(雲南省)의 여강고성, 대리고성, 그리고 명.청대 거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산 서성(山西省)의 평요고성이다. 기원전 9세기 전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평요고성은 정방형으로 면적이 2.25K㎡에 달한다. 평요고도의 주요 건축과 주조는 600년 전에 완성된 것으로 성벽, 거리, 민가, 점포, 사당 등 명.청대(明淸; 1368-1911)의 건축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평요고도는 2800년 전에 흙벽으로 성을 만들었는데 1370년에 이르러 토성을 벽돌구조로 바꾸었다. 성벽의 총 길이는 6Km이다. 성벽은 거북모양으로 6개의 성문이 있다. 중국의 전통문화에서 거북은 장생(長生)의 상징으로 성벽의 형태가 이를 잘 반영해 준다. 평요에 현존하고 있는 4000여 채의 민가는 명.청 시기에 건설된 것으로 이중 400여 채는 오늘날 한족지역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고대 민가 건축군(建築群)에 속한다. 고색 짙은 건축물들은 명 .청시대의 번화했던 거리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평요고도에는 지금도 5000여개의 점포와 2만 5000여명의 시민이 상주 하고 있다고 한다. 고도 동북쪽에 있는 진국사(鎭國寺)의 만불전(萬佛殿)은 중국에서 3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1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평요고도는 중국 근대 금융사의 특수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824년 중국에서 첫 환어음이 <일승창(日升昌; 청나라 때 생긴 중국 최초의 은행; 개인이 설립함)>을 통해 거래 되었다. <일승창>은 주식회사 형태를 갖추었는데 “돈을 투자한 자는 경영에 참여하지 못 한다”는 규제 조항까지 정관에 삽입 했다고 한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금 생각해도 엄청 선진화 된 경영방식이다. 그 후로부터 <일승창>의 업무는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 싱가포르, 러시아, 등 에 전해져 <천하 제1어음>으로 불리었다. 평요의 어음거래는 신속히 발전해 한때는 평요에만 22개 어음운영소가 있을 정도였다. 오늘날 평요고도 서대가(街)는 100년전의 <금융거리>다. 답사팀은 명. 청(明淸)대로 돌아가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중국 토속음식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런데 거리와 집 모습 그리고 내부 장식도 어느 정도는 옛 것을 살려서 좋았는데 메뉴판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했다. 건물 밖 상호간판과 매-뉴 판이 중국어와 영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중국의 상술은 예나 지금이 마찬가지다.
일행은 점심 식사 후 1시간 정도 여유를 가졌다. 필자는 민속품을 파는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다 ‘시루거리’에서 반가운 간판하나를 발견한다. <주점 벚꽃마을>이라는 이름에 영어로는<SAKURA cafe bar>라고 쓰여 져 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한글 간판이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식으로 술만 파는 게 아니라 식사, 음료수에다 노래까지 할 수 있단다. 굳이 “SAKURA=사쿠라”라는 글자를 넣은 것은 일본관광객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전동차로 성(城) 입구까지 이동한다. 잠시 성벽(城壁)을 둘러보고 성도인 태원(太原)으로 가야 한다. 이동거리 2시간. 여행에 지친 터라 짧지 않는 시간이다. 필자는 가이드가 틈틈이 지루하지 않게 이 소리 저 소리 한 것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허비한다. 중국 사람이 생전에 못하는 3가지가 있단다. 첫 번째는 음식이 다양하고 많아서 다 못 먹어보고 죽는다. 두 번째는 땅이 너무 커서 평생에 다 못 가보고 죽는다. 세 번째는 한자(漢字)가 너무 어려워서 다 못 배우고 죽는다. 중국의 57번째 소수민족은 평생 나무만 심는 식수족(植樹族)이다. 그럴 듯한 말이다.
인구 350만 명의 산서성 성도(城都)인 태원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밤 비행기로 북경까지 간다. 저녁 늦게 도착한 숙소 분위기, 여행에 다소 지친 탓도 있으나 내일 아침 일찍 대구로 떠나야 하기에 쫑파티(終) 없는 북경의 밤을 보낸다. 딜레이를 밥 먹듯 하는 중국 항공기답지 않게 아침 8시 20분 정시에 북경을 출발한 비행기는 대구 공항에도 정시에 도착한다. 북경 가던 날 CA146편이 30분 늦게 출발해 기분을 잡치게 했는데, 돌아오는 중국항공 CA145 기장님 고맙소. 대구공항에 마중 나온 가족과 지인들의 환대 속에 2차 답사가 마무리 되었다.
◈ 마무리하면서..... 고마운 분들.
필자는 이번 중국여행을 통해 고마움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국내외 불교유적지 답사 행사 참여가 처음인 필자는 대구공항에 도착했을 때 조금은 답답한 느낌도 받았다. 얼굴을 아는 분이라야 김 재원 원장과 문화투어 송 종옥 이사님뿐이다. 그러나 좋은 분들과의 여행인지라 금방 익숙해졌다. 공자님은 모든 사람을 선생으로 맞이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선생이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누구나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쳐 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 이번 여행 참가자가 25명이니, 얼마나 많은 선생님을 모시고 4박 5일 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하지 않았던가? 힘들게 준비해온 반찬을 끼니때마다 나누어준 80고령의 백 혜운, 정 재운 두 비구니 스님 정말 고마웠습니다. 힘들어 배운 중국어 실력을 마음껏 발휘해 준 최계량 생님, 노래자랑 사회를 맡아 준 김 용모님도 고맙고요. 북경에서 산서성 2대도시 대동으로 가던 날 북경공항에서 증발된 60대 노인(?)을 찾아 동분서주(東奔西走)했던 기억들. 남편을 잃어버린 부인의 침착함, 남편을 찾은 뒤 미안 해 하는 부인의 얼굴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태원(山西城 城都)대학에서 한국학(어)을 전공한 가이드 인동 장(張)씨의 꿈인 한국 유학의 꿈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답사 일정과 준비 유인물 그리고 중국현장에서의 안내에다 답사팀의 안전까지 신경 써준 김재원원장님 너무 고맙습니다. 3차 답사계획도 알차게 추진 해 주시길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