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옮긴이의 말 l
경제 때무에 온 나라가 뒤숭숭하다. 10여년 전 환난(換難)의 재판이라는 이야기는 벌써 나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는 외환이고 금융이다. 경제의 기조가 문제라기보다는 외부 투기 세력의 침탈 때문에 생기는 일시적인 환난(患難)이다.
왜 우리가 이런 외생적 요인으로 계속 고생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는 책들이 제법 많다. 이 책은 그런 여러 책들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준다. 외환이나 금융상의 미시적인 부분을 말한다면 골치만 아플 독자들이 많을 텐데, 이 책은 사회 시스템으로서의 금융 문제를 지적하고 거기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금융이나 외환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어도 읽기에 부담이 없다.
저자가 주장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바로 달러의 태생적 사악함이다. 달러는 지금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제 1의 변수다. 구소련권의 몰락으로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독주가 공고해졌고, 미국의 통화이자 냉전 시대 비소련권의 기축통화였던 달러가 이제 명실상부한 세계의 기축통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소련권의 몰락은 이념적으로 자본주의득세를 의미한다. 이제 돈은 세계 경제의 주요 인자가 됐다. 결국 세계 경제는 달러라는 돈의 성격에 따라 공정한 경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도,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가 말하는 달러의 사악함이 더욱 폐부를 찌른다. 본래 화폐는 교환을 매개해 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내가 제공한 물건이나 노동력의 대가로 받는 것이므로 '재산'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시간'이라는 요소가 더해져 '이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유독 달러만의 특성은 아니지만, 달러는 근거 재산이 전혀 없는 자가 종이에 '100달러'라고 찍어 그것이 마치 재산 증서인 것처럼 빌려주고는 나중에 이자까지 붙여 110달러를 받아내는 돈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 100달러를 가진 사람이 발행자를 찾아가 그에 해당하는 '재산'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발행자는 애초에 재산이 없었으므로 줄 수가 없다. '사기'인 것이다.그러나 이 발행자가 국가와 같은 공적기관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국가는 국민 전체를 대표해서 국민 가자에게 필요한 교환 수단을 만들고 관리할 자격이 있다. 국가에서 '100달러'를 찍어 내주었다면 그것을 뒷받침할 '재산'은 국민 전체의 신용이다.
달러도 이런 외양을 쓰고 있긴 하다. 연방준비은행이라는 무늬만 '연방정부기구'가 달러를 발행한다. 그러나 이 기구는 연방정부 기구가 아니라 민간 은행들이 주주로 있는 민간법인이다. 본래 아무 재산이 없는(법인으로서 자산이야 있겠지만 이는 화폐 발행과 관계가 없으니 나중에 돈을 들고 재산을 찾으러 오는 사람에게 줄 재산이 없다는 의미다)이 민간법인은 그저 인쇄비 1달러(사실은 40센트 수준)만 들여 100달러를 찍어 정부에 빌려준다. 나중에 이자까지 110달러를 받는다면 이들은 아무 재산 없이 109달러를 거저먹는 것이다. 은행들은 또 이렇게 찍은 100달러를 사람들에게 몇 번씩 겹치기로 대출해 준다. 이들 역시 그 100달러를 가진 열 사람이 동시에 재산을 찾으러 오면 900달러를 줄 수 없으니 마찬가지로 사기다.
미국 은행들은 이처럼 실제로 가진 재산의 몇 배나 되는 돈을 멋대로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돈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를 크게 왜곡시킨다. 이미 거의 하나로 묶인 지구촌 외환,주식,상품시장은 이런 돈들이 휘젓고 다니는 투기의 장으로 전락했다. 유가가 한두 달 사이에 배로 올랐다가 다시 원산으로 돌아오는 현상은 수요나 공급의 문제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자금이 풍부한 세력이 유가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이다. 전 세계 경제는 이런 투기세력에 좌지우지된다. 그리고 이 투기 세력이 바로 자신이 가진 재산과 상관없이 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미국의 거대 은행들이다. 이렇게 위험한 투기에 나선 은행이 건절할 리 없다. 미국의 거대 은행들은 이미 속으로 파산한 상태여서 비밀리에 구제금융을 받고 있다고 한다. 물론 미국 정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이를 꽁꽁 숨기려 한다. 이를 위해 종종 무리수를 동원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2006년부터 통화량 지표인 M3발표를 중단한 것이다. 반세기 가까이 가장 중요한 통화량 지표로 쓰이던 것을 갑자기 발표하지 않는 이유는, 비밀 구제금융을 해주느라 몰래 찍어낸 돈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게 비밀리에 찍어내는 달러는 일차적으로 미국 내 통화량을 확대시켜 국내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야 하지만, 달러가 이미 전 세계에 퍼져있기 때문에 충격은 희석된다. 저들이 몰래 달러를 찍어낸다면 그 일과 전혀 무관한 우리나라도 달러를 보유한 만큼 '고통 분담'을 해야만 한다. 강제적으로, 그리고 미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10여 년 전에 우리가 겪은 환란은 이런 달러의 사악한 속성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투기 금융자본은 세계 각국을 두루 침략했다. 먼저 외환시장에서 엄청난 자금력으로 목표 국가의 통화를 공격해 그 가치를 폭락시키고 국가의 부도를 유도한 뒤 국제통화기금(IMF)을 내세워 구제금융을 해주는 대가로 투기세력에게 유리한 정책을 강요했다. 외환을 변동환율제로 바꾸고, 외화 교환을 자유롭게 하며, 자본시장을 개방하고 각종 규제를 없애며, 공기업을 민영화하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투기 세력은 해당국의 알짜 기업을 헐갑에 사두었다가 막대한 차익을 남기고 되팔아 실리를 챙긴다. 우리나라가 이미 겪은 그대로다. 심지어 '구조조정'같이 우리가 지긋지긋하게 들어온 용어 자체가 그들이 만들어 각국에 강요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는 우리가 뼈저리게 겪은 일들이 다른 나라의 더욱 처절한 사례에 덧붙여 '기타 등등'에 이름 하나 올린 정도로 넘어갔지만, 각국이 겪은 일들이 거의 비슷한 패턴이기에 남의 나라 이야기가 바로 우리나라 이야기다.
이렇게 달러의 사악한 속성을 기반으로 한 국제 투기 세력 때문에 각국이 파탄을 겪었고 지금도 그것이 반복되려 하고 있지만, 이것은 모든 나라가 굴복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힘은 아니다. 적절한 대응만 있다면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는 사례로 이 책에 제시된 나라가 바로 중국과 말레이시아다. 모두 금융과 외환을 풀어주지 않은 게 요체였다. 이미 한 차례 공격에 굴복해 저들의 요구를 상당히 받아들인 우리나라의 경우 어떤 방식으로 이를 되돌릴수 있을지는 전문가가 아닌 역자가 감히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달러와 현대 금융 시스템의 문제점을 알아나가는 것이 중요한 자산이 되리라 믿는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자본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자본주의란 결국 돈이 경제를 규정하는 체제인데, 그런 체제가 정당화되려면 우선 그 돈이 정다한 것이어야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지금의 세계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인자가 달러인데, 달러가 이런 엉터리 화폐라면 달러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본주의를 과연 멀쩡한 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큰돈을 주물러 제3세계 사람들 노동의 가치를 멋대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사람들이 이 책의 얘기대로라면 '사기꾼'들이니 이러고서야 자본주의가 떳떳한 이념이 될 수 없다. 미국인들 스스로 '강탈영주'라 부르는 카네기나 록펠러를 우리는 아이들을 위한 위인전 목록에 넣고 있으니 서글프기 짝이 없다.
(이하생략...)
- 2009년 정월 옮긴이 이재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