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고향 삼도리에서 찍은 금성산 전경
○일 시 : 2010. 09. 24 (금)
○산 행 지 : 전남 나주시 경현동,대호동 금성산(450.3m)
○산행코스 : 한수제~장원봉~낙타봉~약수터~오두재~두꺼비봉~떡재~월정봉~한수제
○산행시간 : 2시간31분(쉬는 시간 없이) (산행시간 06:38~09:09)
○산행거리 : 약8.7km




↑금성산 산행후 하산할 마지막 봉인 월정봉

↑산책로 같은 등산로


↑이른 아침 나주시내 전경과 내가 태어나서 뛰어 놀고 자랐던 나의 동네가 멀리 보인다.

↑희망문 입구 저 길로 내려가면 산림욕장이라는 데 아직 가보지 못했다 다음 기회가 있으면 저 길로 걸어보자


↑금성산 정상과 장원봉에 세워진 정자 금영정

↑초등학교 소풍으로 많이 갔던 다보사

↑산행 후반부인 두꺼비봉과 떡재 그리고 월정봉으로 하산해야 할 코스

↑두꺼비봉과 오두재 그리고 진동마을 경현리 학창시절에 놀려 많이 다녔는데....

↑이른 아침 안개가 자욱한 영산강과 광주 무등산

↑담양의 명산인 불태산 병풍산 삼인산 그리고 추월산이 가깝게 시야에 들어온다

↑엘지화학 나주공장

↑어렸을때 저 영산강변 모레밭에서 놀았던 추억들이 뇌리속에 하나 둘 스쳐간다.
지금은 저 둑길로 4차선 도로가 뚫려 나주시내를 거치지지 않고 바로 영산포 방면으로 가게 되어있다






↑오두재 다보사 갈림길 .....약수터에 얼마전까지만 해도 물이 많이 흘렀는데 지금은 아예 물이 나오지
않은 약수터로 변해 버렸다

↑오두재로 가다가 본 금영정

↑오두재

↑두꺼비봉

↑멀리 영산포 가야산도 조망이 되고....

↑떡재

↑월정봉

↑월정봉에서 하산하다가 본 모교


↑하산지점인 주차장




↑한수제



↑주차장에 세워진 나월환장군동상

●금성산이란 ?
나주의 진산(鎭山)입니다. 금성산의 높이는 451m이며, 4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쪽 봉우리는 노적봉(露積峰), 서쪽 봉우리는 오도봉(悟道峰), 남쪽은 다복봉(多福峰), 북쪽은 정녕봉(定寧峰)이라 불리웁니다. 또한 금성산에는 금성산성이 있어 군사요새 기능도 하였던 곳인데 지금은 공군 방공포대가 있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습니다. 매년 1월 1일에는 정상에서 해맞이 행사와 페어데이 행사를 개최하여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기도 합니다. 금성산은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산신제를 지냈던 영산(靈山)으로서 매년 봄 가을이면 나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 해의 풍년과 태평함을 기원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금성산에는 5개의 사당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비록 현재는 없어졌지만 산 정상에는 상실사(上室祠), 중턱에는 중실사(中室祠),산 기슭에는 하실사(下室祠)와 국제사(國際祠)가 있었으며, 성 안에도 이조당(爾朝堂)이 있어 금성산이 신령스러웠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금성산의 산신은 '금성대왕(錦城大王)'이라 불리는데, 현재에도 이 신을 모시는 무당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기도터로도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금성산의 형성과 정맥
금성산은 나주의 진산으로 옛부터 영산강과 함께 나주의 상징이였으며, 담양 추월산에서 빗재로 내려오다가 장성삼계면 고성산, 깃재, 태청산을 거쳐 함평군 월야면 월악산으로 내려와 광산구 대산동대봉, 망산, 옥산을 거쳐 온 힘을 다해 금성산으로 쳐든 용맥은 남쪽으로 내려와 영산강 물을 마시기 위해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나주는 금성산을 등지고 영산강을 두루고 있어 읍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기 때문에 옛부터 이름난 인물이 많다고 기록해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작은 한양, 즉, 소경(小京)이라 했고 인근고을 주민들이 서울대신 구경을 했다고 한다.
나주서북쪽 능선을 구성하고 있는 금성산은 일찍부터 우리나라 최고 명당이 있다고 소문난 산으로 그 품안에 호남의 3대 명촌의 하나인 금안동(金鞍洞)을 안고 있다.
●금성산의 역사적 사실
금성산은 군사적 요충지로써 금성산성이 있었으며, 호남의 3대 명촌인 금안동을 품고 있는 금성산은 역사적으로 큰 사건들과 관계가 있는 산이며 많은 인물들을 낳은 산이다.
고려시대 이후로 전국의 8명산, 혹은 11명산에 속하는 금성산은 산 정상에 금성산성이 있었다.
금성산은 호남평야의 생산되는 식량으로 군량미를 공급코자 견훤과 왕건의 싸움의 격전지였다.
고려현종이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서기 1011년 나주로 몽진, 10일간 머문 곳이다.
1237년에 김경손이 전라도 지휘사가 되어 이연년형제가 난을 일으켜서 나주를 공략할 때 김경손이 금성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적을 토벌하였다.
1270년(고려원종11년) 진도에 진을 치고 있던 삼별초가 호남을 장악하기 위해 나주를 공격(원종11년1270년)했으나 나주의 관민이 금성산성에 들어가 저항하자 7일 동안 공격에도 불구하고 나주를 빼앗지 못하고 물러났다.
또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나주에 와서 김 방경이 나주금성산신에게 승리를 위한 기원제를 올리고 삼별초를 진압했다.
동학농민전쟁 때 동학군은 호남 53개 고을을 점령 집강소를 설치하고 나주를 접수하려고 금성산 기슭에 진을 치고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금성산성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관민에게 실패했다. 전봉준은 잡혀 한양으로 압송하고, 동학군은 나주(나주초교)에서 처형되었다
이와 같이 금성산은 나주를 지키는 진산이며, 역사적으로 나주를 공략하여 접수하지 못하면 언제나 뜻을 이루지 못고 실패했다.
● 금성산은 나주를 빛낸 큰 인물들의 탯자리였다.
금성산이 낳은 역사의 인물로는 고려 태조 왕건의 둘째 부인인 장화왕후를 낳았으며, 그의 소생으로 흥룡동에서 고려2대 혜종을 낳았고, 조선초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신숙주는 노안면 금안리에서, 임란 의병장 김천일 선생은 흥룡동에서, 호방한 풍류시인 백호선생은 다시면 회진에서 출생했으며 이들은 금성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 금성산을 오르내리며 호연지기를 키웠다.
●금성산은 민족의 성산이자 민간신앙의 중심지였다.
고려 충렬왕이후 조선시대까지 금성산은 전국 8대명산, 또는 11대 명산 중 하나로 왕실에서 제수용품을 내려 나라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던 곳이다.
또한 민간신앙의 중심지이기도해 산신을 모시는 사당이 5(상실사. 중실사. 하실사. 이조당. 국제사)곳이나 되었다. 태조왕건이 고려건국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던 나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금성산신을 호국백(護國白)으로 봉한 바 있고, 거란의 2차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이 몽진(1011년)하여 금성산신에 의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별초까지 물리치게 되자 고려왕실은 금성산신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신동국여지승람"에서는 충렬왕 3년(1277년)금성산사의 산신이에 무녀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진도와 탐라에 있던 삼별초군을 토벌할 때 신통력으로 크게 도움을 주었는데 장병들만 상을 주고 나(금성산신)을 빼놓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내게도 정녕공(定寧公)의 봉작을 주어야 한다. 만일 내 말을 거역하면 큰 재앙을 내릴 것이다."라고 주장을 했다.
그리하여 나주사람 보문각 대제 정 가신이 "충렬왕에게 건의하여 정녕공의 작호를 내리고 나주 녹미(祿米)중에서 5석을 사당에 주었고 또 봄과 가을에 왕이 향과 축문과 돈, 비단을 내려 제사 지내게 했다. 조선왕조에서도 전례에 따라 봄과 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리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금성산 산신은 왕건이 견훤과 나주에서 격전하다가 한때 패하여 영산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강에 물이 가득 차서 건널 수가 없어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는데 금성산산신이 현몽하여 "무엇하고 있느냐?. 물이 빠졌으니 빨리 강을 건너라"하여 잠에서 깨어나 강을 바라보니 강물이 빠져있었으므로 진군을 수습하여 강을 건너니 견훤의 부대가 공격했으나 강물이 다시 가득하여 견훤부대는 바라만 볼뿐 공격하지 못했다 한다. 그래서 이곳을 후세사람들은 몽탄(夢灘)강이라 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