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날 이야기 -77-
(1967년 독립을하고 -5-)
첫 번째 일본방문은 45일간이나 일본에 있었다. 목적이 새로운 품목을 찾기 위함
이였기에 참으로 많은 곳을 방문하고 견학을 하였다.
도~꾜(東京), 요꼬하마(橫港), 오~사까(大板), 고~배(神戶), 나고야(名古屋)
그리고 교~또(京都)등.
요꼬하마(橫港)는 나의 수입파트나가 있었기에 첫 번째로 방문하여 앞으로의 한국
에서 새로운 수출 가능한 제품에 대하여 상담을 하였다. 우선 30만개의 푸라스틱
으로 만든 일회용 투명 컵을 주문받아 생산해보기로 하였다. 이것을 생산하려면 사
출기가 있어야했다.
푸라스틱제품 생산 공장의 견학 및 사출기 생산 공장을 찾아다녔다. 한국은 그 무
렵 사출기 생산 공장이 없어 주로 일본서 기계를 수입하였었다. 그리고 거의 수동
이었으나 일본을 벌서 자동기계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비싼 자동기계를 살 형편이 안 되어 중고 사출
기 5대를 주문하였다. 말이 중고지 거의 새 것 같았다. 이 중고기계는 새 기계를 팔
기위하여 자기들이 판값보다 싸게 돈 주고 인수 한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수입허가 수속을 밟고자 상공부에 갔더니 중고기계는 수입금지 란다.
할 수 없이 5년 동안 빌려 쓰는 방식으로 하여 수입을 하였다. 5년 후는 폐기처분
하는 것으로 하면 된단다. 窮卽通이라 했던가.
오~사까에서는 나의 수출용 원자재의 이쑤시개 공장을 견학하였다. 미루나무를 일
정한 길이로 자르고 일정한 두께로 두루마리같이 깎은 후 절단하는 기계에 넣으니
까 한쪽에 이쑤시개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후에 한국에서 이 기계를 개발하여
자급자족을 하였으나 몇 년 후에는 중국에서 수입을 하게 된다.
나는 그때 취급하는 품목이 거의 한번 쓰고 버리는 제품 이였기에 오~사까에서 일
회용 옷? 을 파는 어마어마하게 큰 백화점을 가보았다.어린이 일회용 옷 코너에 갔
더니 갓태여 날때의 것, 일주일째, 한 달째, 석 달째 등의 옷부터 벼개 기저귀까지
한타식 묶어서 매달아놓고 팔고 있었다.
성인용 코너에 갔더니 여성의 일회용 생리팬티가 7개식 묶어서 팔고 있었다. 나와
같이 동행했던 재일교포가 어린이 귀저귀보다 이생리대의 생산을 해보라고 권하였
다. 즉 값도 귀저귀보다 비싸게 받을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여성이 사라지지 않는한
이사업을 번성 할 거라면서 생산 하는 곳을 안내해 주겠단다.
그가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고 (한국은 자가용이 거의 없을때다) 나고야를 갔다. 생
산공장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집에서 원단을 재단 한 후 아침에 자가용에 싣고 각 가
정을 방문하여 전날 나누어준 것을 회수하고 새로운 재료를 주는 방식 이였다. 즉
재봉들이 있는 각 가정에 나누어서 생산하고 있었다.
재단한 것과 완제품의 견본을(부피가 많았으나) 한 보따리 얻어서 한국에 가져왔었
으나 푸라스틱제품을 하느라 이 품목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때 이 품목을 취
급 할걸 하고 가끔 후회도 해본다. 왜냐하면 이세상에 여자가 존재하는한 여자에게
있어서는는 필수품이기에 말이다.
주물공장을 가보았다. 그 무렵 용산일대에 작은 주물공장이 많았을 때다. 그런데
이공장도 그리 크지 않았으나 공장의 공원들이 다 힌 가운을 입고 자동으로 주물일
을 하고 있었다. 한국의 주물공장은 얼굴까지 새까맣게 하고 일 할 때였기에 충격을
받았다.
도~꾜에서 일본친구가 한턱낸다며 맛이 아주 좋은 이름난 불고기집을 가잔다.그런
데 가보니 간판이 [모란봉]이였다. 즉 조총련이 운영하는 식당이 아닌가. 안기부에
서 이런데 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한곳이다.일본친구가 나의 눈치를 보면서 손가락
을 입에다 데고 쉿 안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말을 절대 하지 말란다. 그분도 나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한번은 재일교포친구가 교~또에 있는 중소기업 사장인 자기 삼촌 공장을 가보잔다
같이 가서 인사하고 공장구경하고 저녁식사를 같이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런데 이분은 조총련이란다. 자기는 민단이고.
해방되고 북쪽에서는 일본에 학교를 세우고 교과서를 보네주고 조총련을 조직하였
단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는 그때까지 학교는커녕 책하나 보내주지 안하고 있었다.
재일교포들은 그때 조총련에 가입하라니까 그저 아무생각없이 해방된 조국이 그리
워 가입을하였단다. 그러니 일본에서는 조총련이나 민단이나 구별 없이 서로 왕래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매일같이 새로운 공장과 회사를 방문하다보니 45일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들척지근하고 고춧가루 하나 없는 싱거운 일본요리만 먹으니 김치생각이 간절하였
다. 오~사까에서 길가는 아가씨에게 한국요리집이 어데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국말
로 “저기 도똔보리에가면 덕수궁이라는 음식점이 있어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오~사까(大板)에는 교포가 참으로 많이 살고 있었다.
덕수궁이라는 음식점에 가서 우선 매운 것이 먹고 싶어 매운탕을 시키고 밥을 먹으
며 그렇게 먹고 싶던 김치와 깍두기를 더 달레서 세 접시 식을 후딱 먹었다. 모처럼
기분 좋게 포식 을하고 계산대에 갔더니 김치와 깍두기 세 접시 값을 더 내란다. 한
국서는 반찬은 무료인데.....…….
오사까성(大板城)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