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의 성공과 좌절
다행히 1년 반의 연구 끝에 광섬유를 이용한 데이터통신 시스템인 파이버먹스 제품 개발에 성공했고 미국 해군성과 NASA, FBI 등에 납품할 정도로 제품의 성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나스닥 상장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이라크-쿠웨이트간에 전쟁이 터지면서 매각을 하게 됐다. 매각대금은 5천4백만달러(약 6백48억원). 투자자들에게 20배 이상의 이익을 돌려줄 수 있는 돈이었다.
93년 이들 부부는 자일랜사를 설립, 제2의 창업을 했다. 그리고 2년간의 기술개발 끝에 인터넷 네트워크 교환장비 시스템을 구축했다. 95년 영업을 시작한 첫해에 2천8백만달러(3백36억원)의 매출을 기록해 이듬해 <타임>지 선정 초고속 성장기업 1위를 차지했다. 한국에서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96년 3월 나스닥에 주식을 상장한 결과 첫날 58달러를 기록해 그해 최고기록이자 나스닥 사상 네번째 상승기록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자일랜 성공신화’다.
자일랜의 성공신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김정실씨의 내조다. 스티브가 아시아의 빌 게이츠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는 동안 남편의 사업을 뒷바라지했던 것이다.
“남편을 따끔하게 조언하는 역할부터 마케팅, 주간사 선정, 자금 모집 등을 맡았어요. 직원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고 3개월에 한 번씩 회사의 모든 것을 공개해 미국 회사에서 한국적 공동체 의식을 심게 한 것도 저의 아이디어였죠.”
그러나 나스닥 상장 1년 만에 이들 부부는 이혼의 아픔을 겪게 된다. 스티브가 회사 법률 사무 보조로 들어온 여직원과 ‘부적절한 관계’에 빠져 결국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김씨는 참을 수 없는 배신감과 뭉개진 자존심 때문에 괴로워했다.
김씨는 스티브의 차가 그 여자의 집 앞에 세워진 것을 봤다는 제보자가 나타나면서 그 여자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동안 남편의 행동을 되짚어보면서 언제부턴가 남편이 거짓말을 일삼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많았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들의 불화설은 순식간에 LA 한인 타운에 퍼졌고 이혼에 대해서는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나스닥에 상장하고 얼마 되지 않은 최고점에서 이혼을 하니까 위장이혼을 하는 게 아니냐는 둥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등 말도 많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김씨도 그동안 사업 파트너로, 인생의 반려자로 아무 문제가 없었던 남편이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남편은 나의 모든 게 자랑이었던 사람이에요. 집에 손님이 오면 피아노를 잘 치니까 쳐볼래, 하고 말했죠. 주위 사람들도 저렇게 완벽하게 사는 부부도 없다는 말을 했었죠. 평일에는 회사일을 같이 하고 금요일 저녁부터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가거나 골프 치고 여행 다녔어요. 모든 걸 다 갖춘 삶이라고 다들 부러워했어요.”
이들 부부의 이혼은 한인 신문에 ‘미국에서 성공한 재미교포의 영광과 상처’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될 만큼 파장이 컸다. 똑같이 이민 신화를 일으킨 로버트 김(김창준씨)과 그녀의 남편이었던 스티브 김 모두 이혼했다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무엇보다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고3이었던 딸 에이미에게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원래 조용한 성격인 데다 자신의 상황과 심경을 솔직히 털어놓을 데가 없었던 김씨는 너무 괴로운 나머지 수면제를 사모으고 자살할 생각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한보청문회로 시끄러웠는데 청문회에 증인으로 섰던 한 은행 간부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통해 그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이혼에 대해서 어디서든 입밖에 꺼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세월도 흘렀고 그동안 무수히 돌았던 억측들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사실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이혼 후 원치 않게 미국에서 공동으로 자주 언론에 노출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에요.”
김씨는 한국에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봉사활동과 벤처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엄마 곁에 있던 아들 앨버트는 이번에 미시간 대학(경제학과)을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와 같이 일하고 있고, 딸 에이미는 컬럼비아 대학 3학년에 다니고 있다. 올바르게 자라준 아이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동안 그토록 하고 싶었던 사회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녀는 빨리 이혼의 상처를 지울 수 있었다고 한다.
장애아의 엄마로 새 삶을 살다
매경 IBI 김정실 대표의 방에는 연말연시에 배달된 연하장이 줄지어 있다. 그중 대다수가 후원하고 있는 아이들이 보내온 카드. ‘아줌마’ 덕분에 컴퓨터도 사용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얼굴을 한 번 뵈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선배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등 카드 내용도 다양했다.
김씨가 한국의 복지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일랜사가 한창 성장을 하고 있던 96년 2월 무렵이었다. 우연히 TV로 15세 소년이 동생 4명을 키우는 고국의 ‘소년가장’ 이야기를 보고 가슴이 저려왔다고 한다. 미국에서 LA 민족교육관 건립기금으로 100만 달러를 기증하는 등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고국의 현실은 그곳과 비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소년소녀가장을 돕기로 작정하고 한국복지재단을 통해 월 5만달러(약 6천만원)씩 기부해 지금까지 총 2백50만달러 이상을 기증했다. 귀국 후에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 중증 장애 요양원인 한사랑 마을을 돕기 시작했고, 이듬해부터는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금요일에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사업 때문에 시간을 쪼개기가 쉽지 않지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 시간이 기다려진다는 김씨. 이곳에서 아이들의 기저귀를 갈고, 밥을 떠먹여주고, 아이들 팔다리를 주물러주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후딱 지나간다고 한다.
“뇌성마비와 시각·언어장애를 갖고 있는 두 아이를 돌보고 있어요. 둘 다 예쁘고 잘생겼죠. 정상적으로 태어났더라면 부모한테 버림받지도 않고 잘 자랐을 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플 때가 많아요. 입구에서 ‘진이야, 안녕’ 하면 기어나와요. 하루종일 안아주고 먹여주다가 헤어져야 할 때면 막 울어요. 정에 굶주린 아이들이라….”
김씨는 이 아이들이 한 달에 물리치료를 네 번밖에 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얼마 전에는 물리치료사를 한 명 더 구했다. 이제 아이들은 여섯 번씩 치료를 받는다. 그 덕분인지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진이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밥을 먹을 수 있게 됐을 때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보통 ‘가진 자’들의 사회사업이 때 되면 라면 박스나 봉투를 들고 장애시설을 방문하거나 복지시설을 짓는 데에 그치는 것을 비교해볼 때 김씨의 ‘행보’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의사여서 어릴 적부터 어려운 사람들은 무료로 진료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어요. 어머니는 이들에게 고추장, 된장을 싸주었는데 어느 날 이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자 어머니는 생활이 좋아져서 안 오는 건지, 사고가 난 건지 걱정하셨어요. 그때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게 뭔가 많이 느꼈었나 봐요.”
김씨는 현재 연세대 대학원에서 사회사업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싶은 마음에 학문적인 이론을 쌓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앞으로 장애복지, 노인복지, 그리고 매맞는 아내를 위한 쉼터도 만들고 싶은 게 김씨의 계획이다. 물론 1주일에 이틀은 장애아들을 위해 비워둘 것이다.
몸이 여러 개였으면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김정실씨. 한국에서 그녀의 ‘신화’는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다.
■ 글·김민선<자유기고가>
■ 사진·이성은<프리랜서>
■ 기사 입력시간 : 2001.2.12
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_donga/200102/people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