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금인데 손님 두 명 받아놓고 열받아서 돈 쓰러 나왔어요. 전통 시장 건너편에 고깃집을 오픈했는데 한우 100g에 10,000원 해서 그런지 기본 1시간은 기다려야 합니다. 염병, 20분을 기다렸고 만 키오스크 오류랍니다. 이깟 고기 한 점 먹겠다고 줄 서서 뭐 하는 짓입니까? 내가 하이에나도 아니고. 내 다시는 이 집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단골집 '장미 한우'로 택시를 탔고 단백질이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의무와 배반, 책임과 욕망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며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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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하나가 말끔히 해결되면 곧 다른 고민이 닥쳐오죠. 삶이 한동안 평온하다가도 상황이 뒤바뀌면, 언제 어떤 재난이 우리를 흔들어 놓을지 모릅니다. 물론 돈이 있으면 훨씬 다양한 선택지를 갖게 되지만,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있죠. 이런 상황에서는 돈보다 다른 게 훨씬 더 중요해집니다. 바로 자신의 실존을 떠안을 수 있는 능력이죠. 어떤 일이 닥치든, 무엇을 얻고 잃든, 그런 일들로 스스로를 판가름하지 않고 그저 내 존재를 감당해 내는 겁니다. 그러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하면 삶은 송두리째 쓸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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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으며, 내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자들을 통해 이뤄진다는 걸 인정하면, 주기와 받기를 계산하느라 골머리 앓는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보는 것 같더라도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지요. 손해의 의미가 내 자아의 경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아니까요. 남에게 눈치를 주는 사람이 되는 건 나쁜 사람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과도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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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일방적으로 객체 취급하지 못하도록 주체적으로 타인에게 에너지를 발산하자는 겁니다. 이는 내 영역과 삶을 지키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이 당신에게 무슨 아픔을 주었든, 주변 사람이 당신을 얼마나 혹독하게 대했든, 그 과거는 지금의 당신과 무관합니다. 그 과거가 당신 존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을지언정, 당신의 정체성 전체를 확정 짓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잡아먹히도록 자신을 놔두지 마세요. 과거에 맞설 수 있는, 자신이 마주한 지금의 힘을 느끼세요. 그게 곧 자신감의 발판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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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기도 했던 카뮈는 사람들에게 희망이나 의미를 주는 소설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칫 사람들이 소설에서 영원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걸 삶의 희망으로 받아들일까 우려했거든요. 무시기? 사람들이 희망에 의존하고, 그걸 계속 붙잡으려 전전긍긍하다 보면 무거운 마음을 갖게 될 테니까요. 그는 삶에 희망을 주는 의미를 발견하기보다, 그런 게 없이도 그저 살아갈 수 있는 가벼운 마음을 갖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소설은 그런 희망 없는 삶의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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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없이도 살아지는 삶을요. 우리는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며” 살아갑니다. 내 존재의 책임과 중압감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건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 불편한 느낌을 피하려면, 나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분산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세계 속으로 도망쳐 여러 대상에 관심을 쏟습니다. 물건에 집착하고, 사람 만나는 데 에너지를 쓰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내 존재를 잊습니다. 나를 망각하는 순간만큼은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지만 그런다고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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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실패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때만 비로소 실패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실패를 마주 보며 찬찬히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졌는지 알려고 하기보다, 확실한 앎 없이도 삶을 만끽하고 상황을 헤쳐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의 기준에 뿌리내리는 것보다 두둥실 떠다니며 삶을 이끌어나가는 자세가 더 중요해지는 시대입니다. 많은 청년이 직업으로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 막연한 선망을 갖습니다. 선망에는 환상과 미화가 포함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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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입니다. 성취가 적은 상황이 지속되면, 세계의 의미가 움츠러들고, 결국 자아도 움츠러들게 됩니다. 정말로 자기다움을 경험하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내 존재에 변화가 일고, 그 변화를 통해 비로소 자기다움을 발견하거나 창조할 수 있습니다. 나다움을 찾으려면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오직 자신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때만 가능하며, 이 겸손함은 종교심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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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신을 믿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내 존재에 대한 오만과 자기중심적 관점을 내려놔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자신의 여러 면모를 균형 있게 바라보며 나다운 게 뭔지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평범해지기 위해서 무한한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마라"
Some people consume infinite energy just to be normal, but no one knows it. To be happy, do not be overly conscious of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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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22회 차입니다. 내전 어의 ‘길평’은 조조에게 잡혀서 처형당하기 직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왜 손가락이 하나만 남았지? (조조)" "역적을 죽이기 위해 매일 손가락을 씹으며 기다렸다(길평)"길평의 목숨 하나로 매듭질 조조가 아니지요. 조조는 천자 장인(동승)의 집에서 천자의 밀서를 발견한 후 피의 숙청을 시작합니다. "페하! 동승의 모반을 아십니까?(조조)"천자와 귀비가 조조 앞에 무릎을 꿇지만 인정사정 봐줄 조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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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무슨 내란이냐며 길기리 뛰었었는데 천자의 혈서가 조조 손에 넘어갔고 가담자들이 피의 숙청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니 열 받고 속상합니다. 탄핵 과정의 정당성은 차치하고라도 헌재 8명이 투표로 뽑은 대통령을 탄핵시켜버린다는 현실이 기가 차고 놀랍습니다. 카뮤가 간파한대로 불공정한 세상입니다. 쨩개들은 사람 죽이는 기술이 아주 탁월합니다. 귀비를 죽이는 씬은 살벌 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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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비를 대청에서 죽이더니 곧바로 자신의 딸(조귀인)을 황후자리에 앉힙니다. 이윽고 조조는 유비와 원소를 한 번에 치러 출병을 합니다. "당장 서주로 가서 유비를 처단하고 연이어 원술을 친다 나를 따르라! (조조)" 조조가 마차 수레를 타고 오는데 포스 작렬입니다. 위기를 느낀 유비는 '미방'에게 먼저 허유를 만나 우리 뜻을 전하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면 원소에게 뒤를 치라는 밀서를 보냅니다. "유비! 내 연못에서 놀던 물고기 주제에 감히 서주를 삼켜?(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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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거요.(유비)" "뭘 믿고 까불지?(조조)" 유비는 원소가 후방에서 지원할 것으로 알고 큰소릴 쳤는데 웬걸, 원소는 늦둥이 아들이 아파서 도저히 출병을 못하겠답니다. "아둔하다. 아둔한 군주여!" 하늘이 준 기회를 놓쳤으니 위기가 올 수 밖에요. 보스가 이럴 때 참모는 갑갑합니다. 허유는 크게 낙심하지만 별수 없질 않은가. 천하의 싸움꾼 조조가 서주 성을 급하게 공격 하지 않고 멀찌감치 물러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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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조조 몰래 야간에 기습작전을 벌이지만 이것은 조조의 함정이었습니다. 한편 하비성에 있는 관우는 유비가 걱정이 돼 2천 병사로 조조를 기습 하겠다는데 손건이 극구 말리니 발만 동동구르고 있습니다. "아우야(조비)! 넌 언제 지휘관이 될래? 노병5000을 시체로 쌓은 것은 유비에게 선물을 주고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이야. 서주 성은 워낙에 견고해서 유인책을 쓰지 않으면 승산이 없거든(조조)" "빌어먹을 조조놈 우리가 철수 한다(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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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넌 독 안에 든 쥐야. 당장 목을 내놓아라(조비)" 간계에 속아 군사도 말도 모두 잃고 36계 줄행랑을 치던 유비가 망연자실 해 있는데 때마침 서주 성으로 진군하던 허유가 일단 자신의 주공인 원소에게 투항해서 후일을 도모하자고 합니다.
225.4.12.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