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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먹을 불끈 쥐고 ! |
1997. 3. 27
직원 여러분, 홍콩입니다.
1990년인가 우리나라의 노사 분규가 극에 달했을 때에 당시 某 외국 증권사 지점장과 내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외국인의 시각에서는 당시 도저히 해법이 보이지 않고 결국 나라 전체의 파국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심한 우려를 했던 모양입니다.
극한적인 위기 상황이 연출되면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다시 똘똘 뭉치는 한국인의 기질을 당신이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라는 저의 반박에 그 사람은 결국 저에게 점심 내기를 제안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얼마 있지 않아서 결국 나라안을 뒤흔들던 노사 분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잠잠해졌으며,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는 外生 변수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다시 성장 궤도를 질주해왔고, 저는 거하게 점심까지 얻어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다시 심각한 위기 국면을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다시 한번 1990년 초의 위기를 극복했던 슬기와 용기를 발휘한다면 이번 난국도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런 뜻에서 며칠 전 3월 21일에서 23일까지 이 곳 홍콩에서 개최되었던 “World Cup Rugby 7”에서의 한국팀의 활약상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잠시 잊게 해주는 자그마한 청량제가 되지 않을까 해서 소개해 드립니다. 초반전에는 성적이 형편없었던 한국팀이 뒤늦게 분전하여 강자의 대열에 합류했기에 시국과 관련하여 더욱 값진 의미를 시사해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결과부터 말씀 드리면 전세계에서 참가한 24개 팀 중 한국팀이 최강자들이 겨루는 8강전에 진출하여 이 곳 언론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홍콩의 대표적인 영자지인 South China Morning Post지는 “Korea joins Big Seven for pitched battle finale” 라는 제하의 1면 톱기사로 이를 다루었습니다. 이어지는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前略).... The order of battle boasts only one surprise. Korea, increasingly a force as a footballing nation, join the big boys from Fiji, New Zealand, England, South Africa, Australia, France and Western Samoa in the knock-out round. .....”
럭비는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 종목 중의 하나이지만, 영국을 비롯하여 홍콩 등 과거 영국 식민지를 거친 나라들과 유럽에서는 매우 대중적인 구기 종목 중의 하나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컵을 차지한 Fiji가 선수단의 귀국에 맞추어 임시 공휴일로 지정할 정도입니다.
원래 럭비는 1팀이 15명으로 구성되는 15인제 경기입니다만, 1883년경 Scotland에서 시작된 7인제 경기가 훨씬 박진감 넘치는 스피드, 묘기와 팀웍을 선보이면서, 최근 들어 새로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1976년 이후 7인제 럭비 경기대회를 주최해오고 있는 홍콩에서는, 매년 이맘때 쯤 이면 호텔 예약이 1개월 전부터 완전히 동나는 등 그 열기가 대단합니다. 40,000석에 이르는 Hong Kong Stadium의 입장권 역시 진작에 동이 나서 당일에는 불과 300여장씩 밖에 남지 않았고, 이 표를 사기 위해 새벽 4시부터 Stadium 입구에 진을 쳤다니 말입니다.
1994년부터는 럭비의 종주국인 영국이 정식 대표팀을 보내기 시작하는 등 국제사회에서도 완전히 자리 매김을 한 Hong Kong Rugby 7은, 금년의 경우 제 21회 Hong Kong Rugby 7과 4년마다 열리는 World Cup Rugby대회를 겸하는 동시에, 홍콩의 중국 반환 이전에 열리는 마지막 대회이기 때문인지 그 열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경기장인 홍콩섬 Happy Valley의 Hong Kong Stadium 인근은 하루종일 교통체증으로 시달렸고, Stadium으로 가는 길에는 홍콩의 외국인들이란 외국인들은 모두 모인 것 같은 끊임없는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Star TV은 물론 홍콩의 정규TV방송인 ATV World에서도 생중계를 한 이번 경기에서는 연례행사(?)인 Streaking이 등장하여 관중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작년에는 아리따운 금발 아가씨가 全裸로 운동장을 가로지르더니, 금년에는 2명의 남자가 벌거벗고 운동장을 누비다가 즉심에 회부되어 60만원씩의 벌금을 물었습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팀은 명실공히 세계 24개국의 국가대표팀이었습니다. 첫째 날에는 예선 조를 편성하기 위한 예비 게임이 벌어졌는데, 한국 대표팀은 미국에 33-7, 프랑스에 38-5로 참패하여 거의 희망이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한국팀은 첫날 성적을 토대로 편성된 둘째 날 예선 경기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던 짐바브웨를 21-10으로 꺾고, 스페인과 12-12로 비김으로써 조 1위로 8강이 오르는 결승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 것입니다.
비록 세째 날 결승 Tournament 첫 경기에서 이번 대회 우승팀인 막강 Fiji에 56-0으로 대패하기는 했습니다만, 사상 첫 8강에, 그것도 초반의 절대 열세를 딛고 재기한 것이기에 그 의미가 매우 값지다고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동아일보를 제외한 한국의 언론에는 거의 소개가 되지않았던 이번 대회에서의 한국팀의 분전 소식을 전해 들으시면서, 웬지 주먹이 불끈 쥐어지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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