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다면 유대인의 특권은 무엇이고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물음에 대해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특권이고 이로움인데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율법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이어서 23~25절을 보겠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25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악함을 증명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지은 죄는 너그럽게 봐주시고 해결책을 마련해 주셨는데, 그 해결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제물로 주셨고,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짧은 본문 안에 훗날 기독교의 기본 교리로 정착하는 원죄론과 속죄론의 근거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진보적인 신학자들 중에는 바울을 싫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망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사도 바울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분들도 많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이신칭의’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뜻인데, 헬라어 원어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에는 ‘안에서’라는 전치사가 들어있습니다.
헬라어는 독일어처럼 격변화가 활발한 언어입니다. 제가 헬라어를 배운지 오래 되어 격변화까지는 기억나지 않아 원형만 소개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의 헬라어에는 ‘피스튜오’라는 동사에 ‘안에’라는 뜻을 가진 ‘에이스’라는 전치사가 붙어있습니다. 영어에도 이 구조가 그대로 따라갑니다. 영어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believe in God’입니다. 그러니까 헬라어에서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단어에는, 내 존재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존재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다시 기독교의 중심교리,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교리가 아니라 영성으로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르친 이신칭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건 인간의 논리로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맹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자기부정과 하나님과 하나 되는 깨우침과 삶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다.’ 교리주의자들의 해석과는 180도로 다른 해석입니다. 이어서 30절을 보겠습니다.
30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십니다.
교리의 바울을 말하는 사람의 눈으로 이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성의 바울로부터 이 본문을 들으면, 사람이 어느 종교를 갖고 살아가건, 아니 종교를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로운 사람이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이 말을 불교나 유교, 도교 같은 동양 종교의 언어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로운 사람이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