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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육의 요람' 협동학교 출범 초석 다졌다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경북의 재발견 - 16. 안동 백하구려(白下舊廬)
기사입력 | 2010-04-16
백하 김대락 선생의 고택 '백하구려' 전경. 경북 안동에 위치한 '내앞마을'은 영남의 사대길지(四大吉地) 중의 한곳으로 유명하다.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곳이며, 오랜 전통을 이어온 명승지와 고택 등 다양한 문화유산도 함께하고 있다.
특히 125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작은 고택 하나는 안동사람들의 정신적 문화유산이라는 별칭이 붙어지면서 문화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필수답사 코스로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시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2000년 4월10일)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일까?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강윤정 학예연구실장과 함께 안동지역 애국계몽운동의 산실이자, 구국운동의 모체로 알려진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선생의 옛 집을 배경으로 한 역사적 발자취를 재조명 해본다.
백화구려 측면 마루.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자리한 이 가옥의 당호(堂號)인 백하구려(白下舊廬)는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헌신한 백하 김대락(1845~1914)선생이 42세 때(1855)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애국적 논필로 풍운의 한말 정국을 매섭게 비판한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따르면 백하구려는 신축 당시 50여 칸의 가옥이었다(1909년5월)고 보도됐다.
'백하'는 김대락의 호이며, '구려'는 옛 집(작은 초가집)이라는 뜻으로 건물의 당호인 백하구려는 김대락이 순국한 이후, 금상기(琴相基)에 의해 쓰여 졌다고 한다.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 백하구려의 구조를 살펴보면 이 집은 정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로 구성돼 있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단 기단위에 서 있으며, 아랫단 기단은 앞쪽으로 3m가량 돌출됐는데,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혔다고 한다.
앞에 쪽마루가 설치된 동쪽 2칸은 큰 사랑방이고, 이 사랑방 서쪽 뒤로 방이 한 칸 붙어 있어 안마당으로 통할 수 있도록 배치돼 있다. 아래채는 사랑방과 붙어 중문간이 있고, 동쪽으로 광·아랫방·마루방이 한 칸씩 배열돼 있다.
안채는 전면이 개방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남북으로 긴 2칸의 방이 놓이고, 그 앞으로 2칸 부엌이 뻗어 앞채의 아랫방에 접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간소한 구조이지만, 안채 대청 앞면 기둥은 둥근 기둥을 세워 격을 높인 것으로 보인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강윤정 학예연구실장은 "이 가옥의 중요성은 협동학교를 출범시킨 산실이라는 점과 건축주 김대락이 개화와 독립에 참여해 활약한 인물이라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비록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校舍)로 쓰던 건물은 독립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해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있던 축대와 초석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다.
백하구려가 김대락에 의해 건축되었다 하더라도 그 터전을 닦은 것은 아버지 우파(愚坡) 김진린(金鎭麟·1825~1895)이다. 그는 의성김씨 30세로 내앞마을 입향조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둘째아들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후손이다.
1825년 김헌수(金憲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억수(金億壽)에게 출계하였으며, 1886년 3월 17일 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강윤정 학예연구실장은 "김진린이 도사(都事)를 지냈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이 집을 '도사댁'으로 불렀다"며 "도사댁은 사람천석, 글천석, 살림천석으로 세칭(世稱) '삼천석댁'으로 불릴 정도로 경제력과 학문을 두루 갖춘 집안"이라고 소개했다.
"당대의 가세를 입증할 만한 호구단자 넉 점이 집안에 남아 있지요. 이 가운데 김진린이 43세(김대락 23세)되던 해의 호구단자를 살펴보면, 솔거와 외거노비 3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이들 노비들이 일직·선산·풍기·순흥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상당수의 토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집의 규모가 빗공에서는 가장 큰 구자(口字) 반가 구조임을 보면 그 당시의 규모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백하 선생의 집은 당시 안동지역에서 세도를 부리는 여느 양반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곳의 특별함을 거론하며 주목하고 있는 것일까?
학계 및 관련 전문가들은 "백하구려가 안동지역 근대교육의 요람이었던 협동학교의 교사(校舍)로 활용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이 가옥을 새롭게 조명 할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1907년에 가산서당에 설립된 협동학교는 안동지방 계몽운동의 산실이요, 안동 유림의 사상적 대변환의 갈림길이었다.
사상적으로 보수성을 가장 강하게 고집하였던 안동지역에 혁신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경북 북부지역으로 확산시켜 나간 출발점이 협동학교였다는 것이다. 백하 김대락 선생은
대한제국 멸망 만주망명 결정 한인 교육·민족의식 일깨워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
1910년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 시기가 김대락 선생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던 것일까?
"당시 안동지역 곳곳에서는 자진과 장례가 이어졌고, 이런 상황속에서 선생은 자신의 길을 결정해야 했을 것입니다. 척사유림들이 유가적 의리론과 출처관에 입각해 자진의 길을 선택하는 한편에서는 만주 독립군기지 건설론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대락 선생은 만주망명을 결정했다.
그의 망명길에는 마을의 청장년들과 조카들이 함께 했다고 한다.
심지어 만삭의 임부가 된 손부와 출가한 손녀를 망명길에 대동했다고 한다.
"1911년 만주의 삼원포에 도착한 선생은 한인들을 지도하고,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등 만주 독립운동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1914년 12월 삼원포 남산에서 선생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뜻은 동생들과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강윤정 학예연구실장은 "선생의 여동생인 김락(金洛), 집안 조카 김만식(金萬植), 김정식(金政植), 김규식(金圭植) 종손자 김성로(金成魯) 등 집안 대대로 항일투쟁에 몸을 바쳤다"면서 "훗날 이들은 독립운동유공자로 포상, 백하구려는 2008년 5월 9일 현충시설로 지정됐다."고 말했다.
백하구려 마당은 협동학교 교사들이 의병에 피살된 역사적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래서 이 앞마당에 위치한 바위를 '비극의 바위'라고 부르는 것일까?
조국을 구하려고 애쓴 영웅들의 혼(魂)이 서린 바위가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심용훈기자 simyh@kyongbuk.co.kr
낙포 이굉선생, 자연과 함께 살다가다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경북의 재발견 - 17.안동 귀래정(歸來亭)
귀래정. 우주의 법칙을 동양 사상으로 풀이한 음양오행설과 동양의학이 만날 때 적용하는 오수혈(정형유경합 井·滎·兪·經·合)이라는 경락(經絡)의 속성이 있다. 이것은 샘에서 물이 솟아(井), 조금씩 흐르고(榮), 점점 더 흐르고 모아져(兪), 넘치며(經), 다시 합쳐진다(合)는 뜻이다.
이 경락의 흐름은 비록 인체와 연관된 형이상학(形而上學)적 개념으로 풀이 되지만, 물이 솟기 시작해 실개천을 거쳐 큰 강물로 이뤄지는 현상을 자연의 조화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경북 중동부 산지에서 발원해 영양군의 지류를 품고, 안동(安東)까지 유입되는 반변천(半邊川·109.4㎞)은 경북 함백산에서 발원한 낙동강(洛東江)과 합쳐져 큰 물줄기를 만든다. 이 낙동강과 반변천이 만나는 경승지에 정자(亭子)가 하나 있는데, 옛 안동지역의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안동팔경에 소개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가페상. 500년 전 이곳에 충만했던 강 기운(氣運)이 안동의 정신문화를 한층 더 일깨워 줬던 것일까? 안동민속박물관 손상락 학예사와 함께 안동 유림들의 얼이 깃든 정자, 귀래정(歸來亭)에 대해 알아본다.
경북 안동시 정상동(亭上洞)에 위치한 귀래정(경상북도문화재 자료 제17호)은 고성이씨 낙포(洛浦) 이굉(李肱)선생이 1513년(중종8)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부성 건너편 낙동강이 합쳐지는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그곳이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같다하여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귀래정의 건물구조는 정면 2칸, 측면 2칸, 배면 4칸의 T자형 팔작지붕으로 전면 4칸에는 대청마루를 두고 배면은 온돌방을 꾸몄으며, 마루 주위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을 뿐 그밖에는 모두 각기둥를 사용했다.
작은 규모에 꾸밈이 없어, 검소하게 보일 수 있으나, 앞쪽에 큰 누마루는 별당으로서의 여유와 운치를 더 없이 느끼게 해주고 있다.
당시 안동의 선비들은 이곳에서 시회와 향회(鄕會)를 자주 열었다고 하는데, 훗날 동·서재를 비롯해 장판각과 주사(廚舍)까지 중축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정자를 강학당 수준의 건물로 발전시킨 장본인들은 비단 선비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 최초의 인문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은 유배 생활과 방랑 생활을 통해 전국 각지의 산천과 풍물에 접할 수 있었다는 데, 귀래정을 건립한 낙포 이굉 선생 역시 귀양의 아픔을 지녔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일까?
손상락 학예사는 "예로부터 안동의 수많은 정자 가운데 귀래정, 임청각 군자정, 옥연정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며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내용을 설명했다.
귀래정의 건립 배경을 보면 낙포 이굉이 안동에 정착하게 된 것과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의 정신적 배경 등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손 학예사는 "안동의 대표적인 5가문 13인으로 이루어진 우향계(友鄕契·1478년 결성)는 후손들에 의해 40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며 "고성이씨의 안동 입향조 이굉의 아버지 이증(李增)은 당시 안동의 지식인과의 결속체인 우향계를 배경으로 향후 안동인으로 입지를 굳히게 됐다"고 말을 이었다.
이무렵 아들 이굉은 관료로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갑자사화(1504년)에 연루돼 귀양 후 중종반정으로 다시 등용되는 등 인생의 파란곡절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굉은 정치적 환멸을 느끼고 아버지의 연고지인 안동에 정착을 결심했다는 것.
손 학예사는 "그의 결심은 유학적 관료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자연에 동화되어 사는 삶, 즉 '귀거래(歸去來)'였다"면서 "그는 어릴 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오고 가는 이치(去來)로 돌아가는 삶을 원했다"고 말했다.
이마도 당시 이굉이 안동 귀래정을 창건한 이유도 이 일대에서 두 줄기의 물이 합쳐 다시 흘러 드나드는 낙동강의 장관 속에 삶의 깨달음을 얻었던지,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싶어 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귀래정이 있는 위치는 귀래정을 지은 이굉의 생각과 대단히 관계가 깊다. 손 학예사는 "귀래정의 의미는 정자 자체가 가진 건축학적 의미보다는 지리환경적 위치(자연 경관)와 귀거래의 삶이 어떻게 상응하고 있는가에서 찾아 볼 수 있다"며 이 정자가 담고 있는 속내를 표현했다.
"귀래정은 우선 안동부성에서 낙동강을 건너 있으며, 임청각과 마주보고 있습니다. 안동부성과 강을 건너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번거로운 삶을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임청각과 마주보고 있다는 것은 아버지가 처음 뜻을 두었던 곳과의 연대성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해 볼수 있다.
손 학예사는 "옛 귀래정 터는 낙동강 합류 지점인 관계로 가장 드넓은 경관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변화를 보여주며 강물의 흐름을 늘 볼 수 있는 위치였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시절 선비들은 귀래정에서 두 물줄기가 합수되는 변화를 보며, 자연과 사람들의 삶을 동시에 관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귀래정이라는 현판은 명필 황기로(黃耆老)가 썼으며, 내실에는 이굉을 비롯한 집안 9대손의 시와 이현보, 이식, 이우, 김령 등이 남긴 시판 30장이 게판 되어 있다.
이 중에 이굉의 생각을 잘 알고 있는 이우가 쓴 시는 "일찍 벼슬 버리고 돌아와/두 강 나누어지는 곳에 정자 세웠다네/시내와 산은 주인 있음을 알았으니/갈매기와 해오라기가 무리를 지었네/차조가 익으면 먼저 술 빚고/마음 한가하면 구름과 어울리고 싶네/노나라 은공처럼 은거하여 늙음을 마칠 이 땅/임금의 부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네.(解綬歸來早/亭開兩水分/溪山知有主/鷗鷺得爲群/熟先充釀/心閒欲和雲 /終老地/非是作徵君)"라고 표현했다.
이 시는 강과 산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요, 주인은 자연에 동화되어 사는 갈매기와 해오라기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의하며, 한가하게 구름과 어울리는 것이 벼슬살이로 번거롭게 사는 것보다 참 삶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무덤서 '원이 엄마의 편지' 출토 남편잃은 애절한 마음 심금 울려 손상락 학예사에게 듣는 '조선판 사랑과 영혼'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움을 볼 수 있는 귀래정의 혼(魂)이 고성 이씨 집안을 아름다운 정서로 깃들게 하고 있는 것일까? 귀래정을 논하면서 원이 엄마의 애절한 사랑 편지를 빼놓을 수 없다.
손상락(사진) 학예사로부터 '조선판 사랑과 영혼'을 들어 본다.
1998년 4월 귀래정이 위치한 안동시 정하동 일대에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나온 편지와 유물은 당시 모습 그대로 출토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고성 이씨 이응태(李應台,1556~1586)의 무덤에서 발견된 애절한 편지글과 부인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짠 미투리(신발)는 '조선판 사랑과 영혼' 이라 불 릴 만큼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손상락 학예사는 "이응태 부부의 몸은 비록 떨어져 있었으나, 그들의 영혼은 늘 함께였을 것"이라며 "420년 전인 병술년(1586년) 6월1일 서른한 살의 나이로 죽은 남편 이응태를 그리워하며 쓴 원이 엄마의 글은 각박한 세태를 살아가는 모든 부부들이 함께 읽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랑의 편지"라고 소개했다.
편지 내용 일부를 보면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어서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의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손 학예사는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며 아내가 쓴 이 편지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고스란히 전달해 심금을 울리고 있다"면서 "건강하지 못한 남편에게 머리를 풀어 만든 미투리(신발)가 함께 발견돼 더욱 눈시울을 적시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5년 4월 귀래정 인근 서쪽에 위치한 안동시 정하동 대구지검 안동지청 앞에는 '원이 엄마'의 애절한 편지를 담은 조형물 '안동아가페상'이 세워져 이들의 숭고한 사랑을 기념하고 있다.
송소 선생 받들던 솔숲은 여전히 울창한데…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경북의 재발견 - 18.안동 송소종택(松巢宗宅)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중요민속자료 제203호로 지정돼 있는 안동 송소종택(松巢宗宅) 전경. 경북 안동에는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금자리'의 의미를 잘 담아내고 있는 고택이 하나 있다.
안동시내에서 이 고택에 가기 위해선 고려 탄생의 시발점이 된 역사적 흔적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일대가 견훤과 왕건이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병산전투(일명 고창전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택은 과거의 역사적 배경과는 사뭇 다르게, 사람들에게 안락함을 선사해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고택을 두고 "자연 향기가 표출(表出)돼 사람들의 오감(五感)을 편안하게 자극한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송소종택은 밖에서 보면 정면은 날개집 모양의 입구(口)자 형태를 하고 있다.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대표지킴이와 함께 새의 둥지처럼 아늑하고 평화롭다는 안동 송소종택(松巢宗宅·중요민속자료 제203호)에서 옛 선조들의 숨결을 다시 느껴 본다.
송소종택에 가려면 후삼국시대에 후백제 시조 견훤의 패배 땅이자, 고려 건국의 결정적 계기가 된 태조 왕건의 마지막 승리의 땅을 거쳐야 한다.
당시 두 수장이 치룬 전쟁의 전설을 담은 가수내를 따라 올라가면 와룡면(臥龍面) 이상리(伊上里)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중앙선 철길을 넘어서면 큰 골짜기가 보인다.
송소종택 앞밭에 있는 '이계서당(伊溪書堂·중요민속자료 제203-3호)'. 이곳이 바로 송소종택이 위치한 황새골이다.
"고택이 위치한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에 황새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황새골이라 불렀습니다. 이 집의 주인 권우(權宇)는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호를 송소(松巢-새 보금자리)라 하고, 집의 이름도 송소종택이라 붙였다고 합니다."
김호태 대표지킴이는 "옛날의 황새와 주인 송소 선생은 없지만 지금까지 골짜기에는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며 옛 모습을 연상했다.
그는 또 송소종택의 큰 장점으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는 정 남향의 위치를 꼽으며, 종택 뒤를 두르고 있는 언덕배기 야산의 분위기가 안정감을 더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대표지킴이가 송소종택 내부에서 유래와 연혁을 설명하고 있다. 송소종택의 구조를 살펴보면 집터는 경사진 면을 최대한 살려 마당에서 1m와 1.2m 높이의 기단을 연속으로 두개의 층으로 쌓고 그 위에 一 자형 안채를 세워 아래채와 구별했다.
밖에서 보면 정면은 날개집 모양의 입구(口)자 형태로 보이지만,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안채를 받치는 2층의 계단을 경계로 거리를 두고 있다. 동서로 사람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이 2칸으로 측면은 앞뒤로 각각 반칸 씩 내어 만든 느낌을 준다. 중간에 6칸 대청을 두고 좌우로 각각 정면 1칸의 작은 온돌방을 두어 서당이나 향교의 강당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마도 아랫채의 대문 칸이 없다면 향교나 서원의 강당과 동서재 형태를 연상할 수 있는 건축구조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안채의 대청 앞부분에는 툇마루를 달아내고 퇴주(退柱)를 둔 모습이 당시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서쪽의 온돌방은 2칸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두고 동쪽의 1.5칸 온돌방은 앞에 툇마루를 대청보다 높게 만들어 변화를 주고 있다.
아랫채는 정면 5칸에 서쪽에서부터 2칸의 부엌, 대문, 마구, 문간채를 배치했으며, 동쪽에는 고방과 마루가 서쪽 방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특히 대문의 나무를 조각해 만든 나무돌쩌귀가 특이해서 눈길을 끈다.
송소종택의 앞밭에 있는 이계서당(伊溪書堂·중요민속자료 제203-3호)은 송소 선생의 부친인 권대기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4칸은 마루를 두고 양쪽은 각각 2칸의 온돌방으로 만들어졌다.
비록 밭 한가운데 자리한 모습이 외롭게 느껴지지만, 당시 선비들이 모여 경서(經書)를 토론하며, 여유와 시간을 풍요롭게 채웠을 것이라 그려보면 자연이 선사한 아름다운 풍경이 새삼 살갑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계서당 창건 당시에는 종택이 서당 가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김호태 대표지킴이는 "송소종택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한옥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면서 "많은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안식을 취했을 '보금자리' 모습을 여전히 담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자연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송소고택의 주인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황새골에 정착한 안동 권우(權宇) 집안은 부정공파(副正公派) 후손들이다. 부정공파는 고려 때 지방 고을의 녹봉에 관한 업무를 보았던 4품의 식록부정(食祿副正)을 지낸 권통의(權通義)를 파조로 하며, 안동 부내 성곡(城谷·지금의 화성동)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1467년(세조13) 함경도 일대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亂)을 평정하다 목숨을 잃은 권징(權徵)의 증손 권위기와 권대기 두 형제가 퇴계 문하에서 생원(生員)이 되어 터전을 일궜다고 한다.
고서(古書)에는 동생 권대기가 안동 이상리 황새골에 이계서당을 열고 지방에서 조목, 구봉령, 금란수 등과 계(契)를 맺고 철마다 모여 경사(經史)를 강론했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권우 또한 퇴계 선생의 가르침 아래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때 퇴계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 매헌 금보(梅軒 琴輔·1521~1584)가 쓴 '주역대전'을 주며 경학에 밝은 권우를 격려했다고 한다. 권우는 퇴계 선생 사후에도 조목과 구봉령에게 경학(經學)을 공부해 중앙에서 벼슬을 하면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573(선조6)년 22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1586년에는 학행으로 추천,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됐다고 한다. 또한 1589년에 세자사부(世子師傅)가 됐는데, 선조가 당시(唐詩) 10절(節)과 풍아(風雅·민요풍의 한시) 3첩(牒)을 써서 특별히 하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듬해 권우는 천연두로 향년 39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학자적 기질은 후세에 길이 전해져 지금까지도 명성이 높다.
"황새골 살던 안씨 집안 갓바우 손대 가세 기울어" 김호태 문화지킴이에게 듣는다
김호태 대표 문화지킴이는 송소종택이 위치한 황새골과 갓바우에 얽힌 묘한 전설을 들려준다.
"옛날 이 마을에는 광주 안씨, 안동 권씨, 광산 김씨들이 들어와 살면서 형제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그 중에 광주 안씨는 마을 중간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 후로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살림이 점점 늘어나고 윤택해져 다른 성씨들에 비해 부유하게 살게 됐다고 합니다. 물론 자제들도 윤택한 생활환경 덕분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어 벼슬에 오르는 등 부귀공명을 동시에 가질 수 있었지요. 이 때문에 광주 안씨 댁에는 늘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지요."
김 대표는 "그 집안 아낙네들은 매일 손님맞이로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안씨 댁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중에 어떤 시주승을 만나 묘안을 제시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이 종택 건너 산에 있는 갓바우의 갓을 내리면 나와 같은 걸인들이 찾아오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며 묘책을 알려줬다는 것.
스님의 말을 귀담아 들은 아낙들은 어느 날 밤, 마을 사람 몰래 갓바우의 갓을 골짜기 아래로 굴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기 시작했다. "갓바우에 손을 대고 난 뒤부터 안씨 집안의 가세는 점점 기울어졌고, 자제들도 벼슬을 잃고 마을로 돌아오게 됐다고 합니다. 물론 손님의 발길도 뚝 끊어졌지요."
화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원인이 갓바우에 있음을 알고 갓바우를 괭이와 큰 망치로 깨려는 순간 '우르르 쾅'하며 천둥번개가 치면서 바위를 내리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지요. 그때야 사람들은 신령스런 바위임을 알고 굴렸던 갓바우를 다시 올려놓고 사죄하는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김호태 대표지킴이는 "사람들의 작은 욕심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운 조각품이 없어질 뻔 했다"며 "나누며 살아가라는 교훈을 담은 황새골 갓바우 전설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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