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친환경 개발, 저탄소 녹색성장의 새만금"
(군산=연합뉴스) 임 청 기자 = 세계 최장 새만금방조제가 개통된 지 1년여 만에 관광객 880여만명을 끌어모으며 해양관광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나 아직도 보완하거나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
세계 최장 방조제의 위용과 인근 고군산군도의 장관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기에는 관광과 상업 인프라 측면에서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해 개통 후 1년 동안 찾아온 관광객 880여만명이 앞으로도 매년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첫해에는 세계 최대 규모라는 언론보도를 접하고 '너도나도 한번 가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했지만, 숙박과 놀이시설, 먹을거리 등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새만금방조제 일대를 매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
열악한 관광 인프라와 미흡한 서비스 문화, 불편한 교통 문제 등이 시급히 해결돼야 하는 이유다.
개통 1주년을 맞아 새만금의 현 실태와 앞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짚어본다.
◇방조제 관광·편의 시설 전무
지난해 4월 27일 개통 이후 1년 사이 무려 880여명의 관광객이 다녀간 새만금은 웅장함 그 자체로는 손색이 없다.
새만금을 찾은 관광객 대부분은 방조제의 위용과 방조제 연결로 더욱 가까이서 마주하는 고군산 열도의 장관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 때문에 바다 위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방조제 도로를 '중국의 만리장성'에 견주어 말하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
하지만, 새만금 방조제 개통이란 상징성과 장엄하고 웅장한 모습을 제외하면 새만금 방조제에는 마땅히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없는다는 지적이 높다.
대다수 관광객도 "처음에 한번 정도는 둘러볼 만한데 제대로 쉬거나 놀 수 있는 곳이 없어 다시 오기가 꺼려질 것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현재 운영 중인 상업구역은 군산-부안 간 방조제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비응도 횟집단지가 전부다. 이곳에는 100여 개의 횟집과 5-6개의 호텔만 있어 하루에 밀려드는 2-3만여 명의 관광객을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관광객은 부안 격포나 군산 시내까지 나가 식사를 해결하거나, 아니면 아예 군산과 부안 지역을 벗어나기도 한다. 변산의 대명콘도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숙박업소도 거의 없어 당일치기로 이곳을 방문하고 돌아가기 일쑤다.
고군산군도 중에서는 비응항에서 여객선으로 30여분 걸리는 선유도가 해변을 갖춰 그런대로 둘러볼 관광지로 두드러지고 있지만, 여름과 겨울마다 되풀이되는 식수난 때문에 외지 관광객을 제대로 유치할 수 없는 실정이다.
◇"관광·상업 인프라 빨리 구축해야"...예산.속도가 문제
전북도와 한국 농어촌공사는 놀거리와 볼거리가 없다는 지적에 따라 방조제 일대를 부분별로 나눠 관광과 놀이, 해양체험 시설을 갖추려 하고 있다.
이들 시설이 들어설 곳은 ▲방조제 중간에 있는 신시도 광장(6㏊) ▲야미도-신시도 구간 방조제 내측 매립지인 다기능부지(195㏊) ▲부안 출입구 쪽의 관광단지(990㏊) 등 3곳이다.
가장 먼저 개발이 진행될 신시도 광장에는 새만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대형 전망대와 복합 휴게소 등이 2015년까지 들어서며, 다기능 부지에는 아쿠아리움, 횟집센터, 놀이시설 등이 조성된다. 전북개발공사가 시행할 관광단지는 골프장과 호텔, 컨벤션센터 등이 꾸며질 예정이다.
전북도는 "이들 3개 지역에 대한 시설물 등이 완료되면 새만금이 매력이 넘치고 흥미진진한 휴식·체험 공간으로 탄생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보아왔던 일반 관광지와는 품격이 다른 복합해양관광지로 개발될 것이라는 게 전북도의 포부다.
하지만, 문제는 '과감한 투자'와 '속도'다.
이들 3개 지역의 시설이 일러야 2015년 이후에나 완공될 계획이어서 이때까지 새만금에 관광객을 끌어모으기에는 한계가 있다. 조성 작업이 터덕거렸다가는 인근 다른 도시 또는 중국 동북해안의 관광지로 관광객을 뺏길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신시광장과 다기능부지사업은 모두 민간 컨소시엄이 맡고 있어 자금부족에 따른 공사차질도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부에 적극적으로 예산을 요청해 공사를 빨리 진척시키는 것이야말로 동북아 관광 허브로의 자리매김을 확고히 할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드웨어 구축 못지않게 서비스 마인드 고취와 국내외 관광객들을 장기적으로 끌어모을 수 있는 다양한 스토리 텔링 개발도 시급하다.
이를테면 신시도와 선유도, 장자도, 말도 등 8개의 섬으로 이뤄진 고군산열도의 각 섬에 얽힌 전설과 설화, 유적지 등을 발굴해 이를 다양한 이야기로 풀어내야만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선 취항·철도 연결 급선무
새만금 내부에 다양한 관광 프로그램과 상업 시설이 갖춰진다고 하더라도 이곳까지 관광객을 끌어올 수 있는 교통여건이 부실하면 '연간 1천만 관광객' 유치목표는 헛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전북도는 새만금을 국제업무와 산업, 관광, 레저 중심으로 조성하고 신항을 건설해 중국으로 가는 전초기지로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더욱이 새만금에 들어설 새만금 신항만을 동북아의 거점 항만으로 육성할 방침이어서 더더욱 교통 인프라 확충은 절실한 셈이다.
문제는 현재의 군산공항에 국제선을 취항하는 일과 군산에서 새만금까지의 철도를 연결하는 것이 시급하다.
국제선은 외국 관광객을 신속하게 새만금 현장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일 것이며, 인입 철도는 새만금 신항만의 물동량 운송은 물론 철도를 이용한 새만금 관광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 간의 합의각서가 조만간 개정돼 취항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던 군산항 국제선이 최근 복병을 만나 좌초 위기에 처했다.
무안국제공항의 탑승객의 감소를 우려한 전남도가 정치권을 통해 군산공항의 국제선 취항을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전북도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관철하겠다고 벼르고 있지만, 정치적 입지가 좁은 전북도로서 마냥 쉽지만은 않은 일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철도연결 또한 중차대한 과제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정부와 전북도, 군산시는 군산 대야역에서 군장산단 현대중공업까지 연결하는 인입철도(30㎞)를 건설하고자 실시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애초 2013년에 끝날 계획이었지만 정부의 예산난 때문에 지연되면서 올 7-8월께야 착공될 예정이다.
따라서 이 인입 철도 중간에서 새만금방조제 쪽으로 빠지는 철도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새만금 관광객 유치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 불가결한 인프라라고 할 수 있다.
군산시 관계자는 "국내 관광객이 새만금을 찾는 방법에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통하거나 아니면 철도를 이용하는 방법"이라면서 "현재 계획 중인 대야-현대중공업 간 인입철도 건설과 맞물려 이 구간에 새만금으로 연결되는 철도를 추가로 건설하는 것이 매우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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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萬金의 어원과 의미 ‘새만금'이란 명칭은 김제·만경 방조제를 더 크게, 더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에서 예부터 金堤·萬頃평야를 ‘金萬평야'로 일컬어 왔던 ‘금만'이라는 말을 ‘만금'으로 바꾸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로, 오래 전부터 옥토로 유명한 만경·김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이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萬金 명칭의 역사 새만금의 명칭은 1987년 11월 2일 당시 정인용 부총리 주재로 관계장관회의에서 황인성 농림수산부 장관이 처음으로 서해안 간척사업을「새만금간척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사용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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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 모 |
40,100㏊(토지조성 28,300 / 담수호 11,800) |
사업구역 |
전라북도 군산시ㆍ김제시ㆍ부안군의 1 도 2 시 1 군 19 읍 ㆍ 면 ㆍ동 |
시 설 |
방조제 33㎞, 배수갑문 2 개소 (656m), 방수제 ( 농업용지구간 ) 54 ㎞ |
사업기간 |
방 조 제 1991 ~ 2010(2 조 9 천 490 억원) 내부개발 2010~2020(20 조 8 천억원) |
시행기관 |
국무총리실 새만금사업추진기획단 등 10 여개 기관 ※ 방조제 : 농림수산식품부 ( 총괄 ), 전라북도 ( 보상 ), 한국농어촌공사 ( 시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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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 1986년 1987.12.10 1989. 11 1990 ~ 1991 1991.10.22 1991.11.28 1999.5 ~ 2000.6 2000.8 ~ 2001.3 2001.3.21 2001.5.7, 5.10, 5.11 2001.5.25 2001.8. 6 2001.8.21 2006.4.21 2007.4.3 2007.12.27 2008.2.12 2008.4.25 2008.10.21 2008.12.3 2009. 1.14 2009. 4.30 2009. 7.23 2010. 1.28 2010.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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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만금 사업 예정지조사 등 실시 - 대통령 후보 새만금사업 선거공약 발표 - 새만금종합개발사업 기본계획 발표 - 기본계획 관계부처 협의, 환경영향평가, 동의서 징구 등 - 공유수면 매립면허ㆍ고시 * ’91.11.13 사업시행인가ㆍ고시 - 방조제 사업 착공 - 민관공동조사 실시 * ’00.8.18 공동조사보고서 총리실 제출 - 관계부처 합동 수질대책 등 실천방안 마련 -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 정부방침 결정유보 건의 - 국무조정실ㆍ지속가능발전위원회 공동주관 공개토론회 - 총리 주재 ‘물관리정책조정위원회’에서 정부방침 결정 - 정부방침에 대한 후속세부실천계획 수립 - 매립면허 취소 소송 * ’06.3.16 대법원 판결(정부측 승소) - 방조제 최종연결공사 완료 -「새만금 내부토지개발 기본구상」수립 (농지 72%, 산업·관광 등 28%) -「새만금사업 촉진을 위한 특별법」제정 * ’08.12.28 특별법 발효 - 인수위에서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개발계획 발표 - 새만금 일부지역 경제자유구역 지정 (산업·관광지구 2,860ha) -「새만금 내부토지개발 기본구상」변경안 보고(국무회의) -「새만금사업추진기획단」발족 (대통령 훈령 제234호) - 새만금위원회 발족 -「새만금사업촉진을 위한 특별법」개정안 국회의결 -「새만금 내부개발 기본구상 및 종합실천계획(안)」 정부 발표 - 새만금종합실천계획 정부안 확정 - 33km 새만금방조제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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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 2010. 상반기 2010 ~2011 2011 ~2012 2012 ~2013 2014 ~2020 2021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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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제별 종합실천계획(Action Plan) 수립 - 방조제 준공 - 새만금 종합 마스터플랜 수립 및 용지별 기본계획 - 사업시행자 지정 및 기본계획 수립 - 실시계획 수립 및 용지매립(조성) - 기반시설 조성 및 용지별 건설(1단계) - 2021년 이후 2단계 조성사업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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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기후 특성상 농경문화가 발달되었고, 그중에서 특히 벼 재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논농사는 BC 1세기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벽골제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리사업도 일찍부터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 간척의 역사를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 삼국사기에 기록된 벽골제 관련 지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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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나라는 산악지가 많은 반면 농경지가 협소하여 특히 논으로 활용할 만한 토지가 그리 많지 않아서 비교적 논으로 이용 가능성이 높은 곳을 선택하여 간척지 개발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록에 의하면 고려 고종 22년(1235년) 몽고병의 침입을 피하여 강화도로 천도한 후 전략적으로 연안 방조제를 축조하여 해상 방어는 물론 군량미를 조달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간척의 기원이며 순수한 농경지를 조성하기 위한 간척은 고려 고종 35년(1248년) 몽고병란시 군량미 조달을 위하여 병마판관 김방경이 안북부(평안남도 안주, 청천강하구)의 갈대섬에 제방을 축조하여 농지를 조성하고 백성들에게 경작케 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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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하여 강화도(삼간, 태청, 장지, 굴진포, 기포 등), 황해도(사리원), 평안남도(위도)에 간척지를 조성하였으며 특히 정다산(丁茶山)은 목민심서에서 기중가(起重架)라는 기구를 만들어 큰돌을 이용한 제방축조 기술과 배수갑문축조 방법을 기록하였다. 또, 간척사업 실적을 기록한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아래표와 같이 국가외에 민간인도 간척사업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서 간척사업이 매우 활발하게추진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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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대 |
년대 |
소재지 |
시설명 |
시설자 |
비고 |
인 조 효 종 현 종 현 종 숙 종 숙 종 숙 종 정 조 정 조 정 조 |
병 자
6 년 병 자 병 술 을 미 병 술 병 술 병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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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해 면 길 상 면 선 원 면 자 정 포 양 륙 선 두 포 선 두 포 대청언 근처 초 지 남 갈 곶 |
삼 간 포 언 굴 곶 언 대 청 언 장 지 언 기 포 언 선 두 언 선 두 중 언 만 월 언 어 지 랑 언 사곡남북언외(21개소) |
국 가 국 가 국 가 국 가 국 가 국 가 국 가 국 가 이시원 민 간 |
판서, 정조시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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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는 일본이 전략적으로 군량미 조달을 목적으로 산미증산 계획에 의하여 공유수면 매립법, 간척지 이주장려 보조규칙, 수리조합령 시행규칙 등을 공포하여 간척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이때의 간척지 조성 기술은 궤도 인력 토운차, 우마차, 손수레, 트럭 등을 이용하여 제방기초에 돌을 보강하는 수준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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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간척사업 추진실적은 고려조 이후 조선조 말까지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일제치하의 1910년부터 해방이전까지의 실적은 40,877ha이며 이것을 규모별로 구분해 보면 아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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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간척사업 실적(1917~1938)> |
규 모 별 |
지구수 |
개발면적 (정보) |
1ha당 제방연장(m) |
부기 |
50ha미만의 면적 50~100ha의 면적 100~200ha의 면적 200~500ha의 면적 500~1000ha의 면적 1000ha이상의 면적 |
88 38 19 23 2 8 |
3,535 3,674 3,708 9,758 1,531 18,671 |
6.98 5.88 3.79 2.37 0.66 2.31 |
1941년기록 |
계 |
178 |
40,877 |
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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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이후의 주요 간척사업으로는 정부와 E.C.A(국제연합 민사처) 원조에 힘입어 일제하에서 시행중 중단되었던 사업을 수행함과 동시에 강화 간척사업과 같은 신규 사업이 정부를 대행한 대한수리조합 연합회 직영으로 추진되었고 그 후 UNKRA(국제연합 한국재건단)와 수리 및 간척사업 체결 후 간척사업은 정부주도로 바뀌었으며 민간 간척사업은 부진하게 되었다. 또 5·16군사혁명 이후 정부는 국토종합개발사업을 추진하여 다목적 사업을 수행할 의도를 갖고 특히 농업분야에 있어서는 수리권 중심 개발 사업에서 벼농사를 위한 관개사업과 더불어 개간, 간척, 목야지 등의 종합개발 차원의 농지기반 조성 사업을 수행하여 왔다. 이에 따라 공유수면 매립법의 제정 공포,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의 수립 실시와 더불어 외국 원조양곡 지원 등으로 1963년 대규모 동진강 간척사업이 시작되어 4,000ha의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1970년도부터는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평택지구 18,149ha에 관개용수를 공급할 인공 담수호 조성을 위한 아산방조제와 남양 간척지 (매립면적3,650ha) 방조제(2,060m)가 준공된 것을 계기로 획기적인 간척기술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삽교천 방조제(3,360m), 영산강 하구둑(4,350m), 대호 방조제(97,800m), 금강 하구둑(1,841m), 시화지구 방조제(12,676m), 영산강 Ⅲ-Ⅰ지구 영암방조제(2,219m), 영산강Ⅲ-Ⅱ지구 금호방조제(2,120m)등 대규모의 간척사업이 시행되어 각각 차례로 준공되었다. 또한 민간사업으로 서산 A, B 지구의 대단위 간척사업으로 약 1만2천ha의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또 1991년에는 새만금 종합개발사업지구(방조제33km), 홍보지구(홍성방조제 1,856m, 보령방조제 1,082m) 간척사업이 착공되어 홍보 지구는 완공되었고, 새만금 종합개발사업지구는 진행 중에 있으며 해방이후 지금까지 조성된 간척지 면적은75,770ha로서 간척연대별로 보면 아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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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추진해온 우리나라 간척사업추진 현황은 아래 표와 같이 정부가 시행한 대단위지구, 서남해안의 소규모지구, 미 완공 및 유휴지개발 간척지와 민간이 시행한 대규모 및 소규모 간척지를 포함하여 총대상면적 156,865ha중 2002년까지 준공한 면적은 75,770ha, 2002년 현재 시행중인 면적은 60,021ha이며 개발예정지 면적은 21,074ha이다. |
[년도별 간척개발 실적]
년도별 |
계 |
정부시행 |
민간시행 |
지구수(개) |
면적(ha) |
지구수(개) |
면적(ha) |
지구수(개) |
면적(ha) |
’46~’60 ’61~’69 ’70~’79 ’80~’89 ’90~’97 ’98~’01 |
177 1,136 233 63 16 3 |
6,329 16,945 19,372 9,307 22,043 1,774 |
39 58 50 25 11 3 |
3,777 7,364 8,245 5,266 9,155 1,774 |
138 1,078 183 38 5 - |
2,552 9,581 11,127 4,041 12,888 - |
계 |
1,628 |
75,770 |
186 |
35,581 |
1,442 |
40,189 |
※ 자료 : 업무자료(1994 농림수산부), 간척사업추진현황(2002 농업기반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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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정부가 수립되면서 1945∼1960년경에는 그동안 중단되었던 간척사업의 마무리와 국민식량 확보 차원에서 소규모 간척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어 간척사업의 재건기를 맞이하였고 이때의 간척 기술은 일정 때의 기술을 모방한 수준이었다. 1961∼1972년에는 5.16군사 혁명 후 경제개발 계획에 의한 식량증산을 목적으로 UN특별기금 간척 조사 협정체결(정부∼FAO-UN특별기금), 공유수면관리법, 토지개량사업법(방조제관리법 공포), UN특별기금한국간척사업기구(UNTID)발족, UNTID-NEDECO에 의한 간척자원조사, 동진강수리간척 방조제 준공, 대단위 농업종합개발 사업(금강, 평택지구)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주요장비는 트럭, 크레인, 소형선박과 6∼8톤 덤프트럭 개발 등 건설장비의 국산화가 이루어 졌는데 이시기를 선진기술의 도입 시기(60년대 초반), 기술확립시기(60년대 후반), 기술 성숙기(70년대)로 세분할 수 있다. 1973∼1990년 까지를 우리나라의 독자적 간척기술 활용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정부의 대단위 간척사업(아산, 삽교, 영산강, 금강)과 민간의 대규모 간척사업 시행(김포, 서산 A, B지구), 간척자원조사(건설부, 농진공) 계화도 지구, 농업종합개발 사업 등이 대형 덤프트럭(12톤), 준설선 제작 등 국산건설 장비의 본격적인 생산에 힘입어 지역농업 종합개발사업(배후지 포함)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1991년 이후는 우리나라 간척기술의 선진화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시공 장비의 대형화 및 다양한 종류의 건설장비 개발 보급으로 지역별 농어촌 광역종합개발 차원의 거점 개발추진(시화, 새만금 지구)과 시행중인 대규모 간척사업 준공 (금강 하구뚝, 김포, 서산 A, B지구, 영산강Ⅲ-Ⅱ지구), 새로운 간척사업 착공 (화옹, 홍보, 고흥지구 등)등이 다목적 종합개발 간척사업 목적으로 추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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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갯벌에서 파괴와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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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27일 새만금 방조제가 개통됐다. 1991년 11월28일 사업을 시작한 이래 18년 5개월 만의 성과였다. 언론은 앞 다퉈 「동북아 경제중심」과「글로벌 녹색성장기지」로의 꿈을 향해 거대한 역사의 출발이라고 이날을 기념했다. <서울 면적 3분의 2가 지도에 추가> 새만금 방조제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대흥리에서 군산시 비응도항에서 이르는 바다를 막은 것으로 세계 最長(최장)이다. 새만금 방조제가 밀어낸 바다만큼, 4만100㏊(서울 면적의 3분의 2)가 우리나라 지도에 추가됐다. 그중 2만8300㏊는 간척토지로, 1만1800㏊는 담수호로 조성된다. 향후 용도는 명품복합도시(23.8%), 농업용지(30.3%), 산업·과학연구·신재생에너지용지(21.9%), 도시(5.1%), 생태환경용지(15%) 등이다. 방조제로 바다를 막는 골격 작업은 마쳤으니 이젠 방조제 내부개발을 해야 한다. 내부개발 사업 중 첫 번째 공사인 산업단지는 2009년 1월 착공했다. 산업단지는 새만금 전체부지의 5%인 1870㏊로 서울 여의도 면적의 두 배가 넘는다. 새만금을 관광 허브로 만들기 위한 사업도 시작됐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신시도~야미도 구간에 들어설 아일랜드 리조트이다. 농어촌공사가 다기능 부지로 매립을 이미 마친 200㏊(60만평)가 본격적 개발을 기다린다. 이곳에는 휴양 리조트·놀이공원·수상레포츠 시설 등을 유치해 해양·생태 리조트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환경단체 주도로 공사 중단과 재개 반복> 새만금사업은 환경단체와 종교계 반대로 공사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왔다. 새만금호 수질오염 논쟁은 96년 7월 시화호 오염사건으로 시작됐다. 98년 4월27일 감사원은 새만금사업에 대해 특별감사를 단행했고 民官(민관)합동조사단은 타당성 조사에 들어갔다. 근본적 문제는 없었고, 98년 12월30일 제1호 방조제 공사가 시작됐다. 국내 좌파성향 단체들이 「새만금 간척사업 백지화 운동」에 가세하면서, 논란은 커갔다. 99년 1월11일 유종근 지사까지 「새만금사업 전면재검토」 선언에 나섰다. 99년 1월22일 총리실 수질개선기획단은 다시 民官(민관)공동조사단을 구성을 결정하고 같은 해 5월 조사단이 발족했다. 이후 조사단의 결과 발표 延期(연기)와 하고 정부의 애매한 태도가 겹치면서, 2001년 5월25일 새만금사업 계속이 최종 결정되는 2년여 간 새만금사업은 또 다시 중단됐다. <전교조까지 가세, 새만금 토론수업> 새만금사업이 표류하는 기간 동안 환경단체 등은 안티(anti)역량을 총동원했다. 몇 개의 사례를 들면 이랬다. ▲2000년 7월1일부터 이틀 동안 환경운동연합(以下 환경연합) 회원 2000여 명은 새만금 갯벌에서 全國회원대회를 열었다. 환경운동연합 전국회원대회가 열린 것은 93년 단체 창립 이후 처음이었다. ▲2000년 10월16일부터 33일간 환경연합·녹색연합 등 운동가들은 서울 조계사에서 새만금 갯벌 살리기 33일 밤샘농성을 벌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교사들까지 나서 새만금 갯벌 살리기를 주제로 토론수업과 홍보, e메일 보내기 운동에 동참했다 ▲2001년 5월25일 정부가 새만금사업 재개 방침을 발표하자, 환경연합 등이 이끄는 「새만금갯벌 생명평화연대」는 정권퇴진운동도 불사하겠다며 투쟁에 나섰다. 이는 같은 해 8월 」공유수면 매립면허ㆍ사업시행인가 처분취소 소송」으로 이어진다. ▲2001년 7월11일 환경연합·녹색연합및 민노당·민노총·전국연합 등 289개 단체는 시국선언문을 냈다. 이들은 『퇴행적이고 파괴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현 시국을 심각하게 걱정한다』며 『새만금 간척사업 강행, 개발위주의 댐 건설 추진, 국토 난개발 부추기는 판교 신도시 건설계획 등을 전면백지화하고 환경친화적인 종합적 국토정책을 시급히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우리 현대사에서 미흡하나마 민주적 정통성을 갖춘 최초의 정부로서 김대중 정권이 출범했을 때, 우리 국민들은 역사상 다른 정권들과는 다른 커다란 기대를 보냈다』고 말한 뒤 그럼에도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서슬 퍼런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보수우익 기득권 세력의 무기로서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고 했다. ▲수도권 집회도 잇따랐다. 예컨대 2001년 12월2일 서울 종로에서는 「반전평화 미국반대 전국민중대회」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새만금 간척사업 강행반대, 환경파괴 생명파괴 댐건설 반대』와 함께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철수, 미군기지 반환, 미국의 아프칸 침략전쟁반대, 한국군 파병 및 戰費(전비)지원 반대』 등을 주장했다. <美軍철수와 함께 『새만금 강행반대』 주장> 「三步一拜(삼보일배. 세 걸음 걷고 한번 절하는 불교의식)」라는 이벤트도 나왔다. 2003년 3월28일 「전문 시위꾼」으로 불리는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승려(불교환경연대)를 비롯해 이희운 목사(기독생명연대), 김경일 교무(새만금생명을 살리는 원불교 사람들)가 64일에 걸친 三步一拜에 나섰다. 三步一拜 출발 직전 녹색연합이 민중의 소리(2003년 2월13일)에 기고한 글 가운데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새만금 갯벌에서 십 년 넘게 파괴와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은 도룡뇽을 살려야 한다며 천성상 터널을 막았던 女僧 지율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기 새만금 갯벌에서도 십 년이 넘게 소리 없는 파괴와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인간의 그릇된 허상과 탐욕이 빚고 있는 거대한 전쟁터입니다...끊임없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폭력과 파괴의 범죄자는 바로, 그칠 줄 모르는 우리의 이기심과 탐욕입니다. 내 것이 아니면 바로 외면하는 무관심과 냉정함입니다. 자본과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의 생활입니다...어려운 때,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 기독교와 원불교 성직자들은 이곳 새만금 갯벌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의 길을 나섭니다...길 위에 쓰러지고 더 이상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온다 해도, 새만금 갯벌을 살리고 온 세상의 생명ㆍ평화를 구하는 우리의 여정은 계속 될 것입니다.』 三步一拜는 새만금사업 반대 여론을 자극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03년 5월3일 천안역 광장에서는 「새만금갯벌 생명평화의 날」 행사가 열렸다. ▲5월6일 환경연합·녹색연합 등 단체들은 서울 시내 1호선·4호선 모든 지하철역을 돌면서 「새만금중단 죽음의 새만금 방조제를 생명의 갯벌로」라는 제목의 포스터 3천장과 「새만금은 도박판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에 대한 참회 삼보일배」 등의 문구가 새겨진 팜플렛을 돌렸다. ▲5월10일 당시 한명숙 환경부 장관은 경기도 평택시에서 三步一拜를 진행 중이던 이들을 찾아갔다. ▲5월22일 서울 청운동 파출소 앞 사거리에서 환경연합 등「새만금갯벌생명평화연대」 주최로 새만금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黙言(묵언) 집회가 열렸다. 수경 승려는 서울 입성 3일을 앞 둔 5월21일 과천 정부청사 인근 관문체육공원 앞에서 三步一拜 중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수경은 이튿날 휠체어를 타고 三步一拜를 재개했고 5월23일 서울에 들어왔다. 5월25일 여의도 시민공원에선 三步一拜의 마지막 이벤트로 「범종교인 기도회 및 시민촉구대회」가 열렸다. 三步一拜 주도자들 뒤로 백여 명이 따랐고, 국회의원 김원웅(개혁국민정당), 이부영(한나라당) 등도 손에 목장갑을 끼고 동참했다. 행렬에는 대여섯 살 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本행사에서 원불교 천지보은회 상임대표 이선정 교무는 『(4명은) 온 몸으로 경전을 쓰며 이곳까지 온 것』이라고 표현하며,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이 고통에 진리인들 어찌 감동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날 참가한 국회의원들은 새만금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對정부 정책제안서」에 서명한 의원들 대표로 나왔다. 이 제안서는 환경연합 등 「새만금갯벌생명평화연대」와 환경연합의 오세훈 변호사가 공동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편집자 주 : 한나라당 소속인 오세훈 서울시장은 환경연합 출범 초기부터 참여한 인물이다. 매주 월요일 무료법률상담을 해주고, 환경연합 광고모델도 했었다. 그는 환경연합 등이 주도했던 선거법 제87조의 「시민단체 낙선운동 금지조항」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헌법소원을 냈었다. 吳시장은 2000년 국회진출 당시에도『환경전문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혔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는 당선 직후 환경연합 활동가를 보좌관으로 채용하기 위해 연합 측에 추천을 의뢰했었다. 吳시장은 2006년 서울시장에 당선되자, 환경연합을 만들고 이끌어 온 최열 前대표를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吳시장의 정치권 입문을 권유한 것이 최열 前대표였다). <오세훈 변호사, 새만금 중단 보고서 작성> 김원웅 의원은 『새만금 공사 후 거대한 새만금호가 생겨나면 그것의 오염을 막기 위해 전라북도에는 공장도 세울 수 없고 축사도 지을 수 없다. 댐 건설 후에 갯벌이 일부 생기기는 하지만 제가 직접 가보았을 때 그곳 주민들이 그것을 죽은 갯벌이라 해서 죽벌이라고 부르더라』고 말했다. 이부영 의원은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되면 새로 생기는 땅 중 150만 평이 군산에 주둔한 美 공군에 공여되기로 되어 있다』며 새만금 건설 중단 이유를 들었다. 三步一拜 이후에도 반대투쟁은 이어졌다. 예컨대 2003년 6월12일 새만금 간척사업 4공구 방조제에서 방조제를 파내려는 환경연합 등 회원들과 이를 막는 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 환경연합 등「새만금갯벌생명평화연대」회원 70여명은 이날 아침 7시부터 물막이 공사가 끝난 4공구 현장을 점거한 뒤 철조망을 치고 삽 20개와 곡괭이 5개 등으로 방조제 일부를 파냈다. 이에 대해 새만금사업을 찬성하는 군산시 야미도 주민 등 140여명은 오후 3시께 작업현장을 둘러싼 경찰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환경단체 회원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서울행정법원, 「새만금사업」 잠정중단 결정> 2003년 6월10일 새만금 제4호 방조제 1.8km구간 끝막이가 완료됐다. 그러나 같은 해 7월15일 서울행정법원이 「새만금사업 잠정중단」 決定(결정)과 2004년 1월29일 서울고등법원의 「새만금사업 공사재개」 決定이 이어지면서 혼란이 재개됐다. 본안 소송 역시 서울행정법원이 2005년 2월6일 「새만금사업 계획을 변경 또는 취소하라」는 1심 判決(판결)을 내렸고, 서울고등법원은 같은 해 12월21일 원심을 뒤집고 「새만금사업을 계속하라」는 判決을 내렸다. 법정논란은 2006년 3월16일 대법원이 새만금사업 속행 判決(판결)을 내리면서 일단락됐다. 농림부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날 『새만금사업의 합법성과 당위성을 인정한 대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존중한다.』고 밝혔고, 전라북도 역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강현욱 전북지사는 판결 소식을 접하자마자 『이번 판결은 대한민국 미래와 지역 발전을 바라는 전북 도민의 간절한 염원이 반영된 당연한 결과』고 밝혔다. 반면 환경연합은 『대법원마저 군사독재 시절에 정략적으로 추진된 예산낭비, 국토파괴 사업을 합리적으로 제어하지 못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탓』이라고 비난했다. 새만금사업은 2007년 11월22일 「새만금사업 촉진을 위한 특별법」과 「동서남해안권발전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총선환경연대, 『反환경(?) 정치인 심판』> 새만금사업 반대투쟁은 대한민국 左派문화권력의 역량을 보여준 사건이다. 2004년 2월에는 환경연합·녹색연합 등이 「2004 총선환경연대」라는 단체를 만들어 공천 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했다. 기준은 새만금사업 찬성자 등 『反환경 정치인 심판』이었다. 당시 발표된 공천부적격자와 기준은 이랬다. ▲강봉균 (열린우리당, 전북 군산, 16대 초선) : 새만금사업과 관련해서 주무부서인 환경부의 「수질개선 불가능」이라는 의견을 무시함. 새만금 갯벌의 70%가 죽었다는 등의 허위사실을 유포. 공영방송에서 『환경단체는 국가정책에 관여하지 말라』는 등의 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발언을 함 ▲김영진 (새천년민주당, 전 농림부 장관, 13,14,15,16대 4선) : 왜곡된 식량안보론을 내세워 농지목적 상실한 새만금 간척사업 강행. 현직 장관으로 민주주의 기본정신인 삼권분립을 전면 부정하고, 장관직을 사퇴한 민주정치의 부적격자 『젊은 법관 2명이 2년 전 환경단체가 제기한 문제들을 내세워 공사를 다시 중단하도록 결정을 내린 것은 납득할 수 없다』 (2003.7.22) 『사법부가 대형 국책사업에 대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월권행위다』(2003.8.10) ▲김태식 (새천년민주당, 전북 완주/임실, 11,13,14,15,16대 5선) : 새만금사업에서 『최근 내려진 법원의 결정은 국론분열을 야기 시킬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기에 서명운동으로 맞서지 않을 수 없다』는 발언을 함으로서 현직 국회의원으로 민주주의 기본 정신인 삼권분립을 전면 부정한 민주정치의 부적격자. ▲맹형규 (한나라당, 서울 송파 갑, 15,16대 2선) : 핵 발전 중심의 에너지 정책 강력 추진. 96년부터 2001년까지 매년 원자력발전보고서 ▲ 박병윤 (새천년민주당, 경기 시흥, 16대 초선) : 시화호의 생태적 복원을 위한 사회적 노력을 거부하고, 실익이 없는 개발사업 재추진 ▲이상희 (전 한나라당 의원, 비례대표, 11,12,15,16대 4선) : 사회적 합의가 된 국가의 생명윤리정책을 무시하고, 생명윤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 제정을 가로 막음. 냉동배아 연구의 원칙적 허용 등을 주장함으로서 생명윤리법 제정목적과 내용을 왜곡함. <새만금갯벌 간척을 막지 못한 업보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싶어...> 새만금사업 반대 주도세력은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4대강 사업 반대 등으로 투쟁을 이어간다. 문규현 신부가 대운하 반대를 위한 「생명의 강을 모시는 순례단」을 만든 직후인 2008년 2월13일 「민중의 소리」에 기고한 글은 이렇다. 『2008년 2월 12일, 막바지 추위가 유난했습니다. 이런 날 종교인들이 다시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경기도 김포 애기봉에서 시작했습니다...대운하 개발은 하늘을 거스르는 일. 망국운하입니다. 대운하 추진 발상을 멈춰야 합니다. 거짓되고 허황된 논리들로 가득한 대운하 망상은 절대 거둬져야 합니다...새만금갯벌 간척을 막지 못한 업보가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싶어 자꾸만 목이 울컥거렸습니다... 2008년 2월 13일 「생명의 강을 모시는 순례단」 이틀 째 이른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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