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마지막 질문 : 삶이라는 물음의 끝에서 마주한 천년의 지혜
정재현 저, 추수밭, 2020.08.05.
출판사 서평
“위기의 순간마다 나를 일깨우는 간절함의 시간”
정답 없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천년의 통찰 100
“나는 ‘왜’ 이 삶을 견디고 있는가”
인생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단 하나의 질문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물음에 직면한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통해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통해 삶의 방법을 고민한다. 대부분이 ‘행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길을 선택한다. 길이 이리저리 꼬여 있다면 내 손으로 직접 활로를 뚫고자 한다. 이 모든 질문과 대답은 ‘내가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이 전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삶이 힘겨운 순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럴 때는 누구든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느냐며 울부짖고 싶어 한다. [인생의 마지막 질문]은 이와 같이 삶의 한계와 마주하는 ‘종교적 인간’이 내뱉는 ‘왜’라는 탄식에 주목한다. 그리고 지식으로는 다 알 수 없는 ‘모름의 지혜’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세상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70여 고전에서 가려 뽑은 수천 년간 축적된 ‘모름의 지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들로 가득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로 이어져 있다. [인생의 마지막 질문]은 이렇게 ‘없음’과 ‘모름’으로 가득한 삶의 이치를 깨우쳐주고 위기로부터 사람을 살리는 깊은 지혜를 일러준다. 수천 년간 이어져온 경전에서부터 현대철학과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전들로부터 지혜의 정수 100가지를 길어 올려 3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 막막한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한다.
1장 ‘인생의 꼴’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모양을 가늠하고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지혜를 얻는다. 2장 ‘인간의 틀’에서는 종교의 왜곡된 면모를 비판적으로 살피면서 자신의 한계와 직면하고 씨름하는 ‘종교적 인간’의 본래 의미를 되짚는다. 3장 ‘지혜의 길’에서는 인간이 문제를 해결할 때 흔히 쓰는 ‘선악의 이분법’과 ‘양자택일’을 넘어서 모순적인 것들을 모두 싸안는 역설의 통찰을 소개한다. 4장 ‘기도의 얼’에서는 종교적 인간의 구체적 몸짓인 ‘기도’를 살피며 위태롭고 쓸모없어 보이는 작은 행위가 어떻게 우리를 살릴 수 있는지 안내한다.
“지식이 멈추는 곳에서 지혜가 시작된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역설의 지혜’
어떤 문제가 있으면 이를 해결하는 ‘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질문]은 ‘질문-대답’의 공식에 갇혀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오히려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가진 ‘앎’으로 쉽게 답을 얻으려는 태도가 나와 타인, 내 편과 상대편을 가르는 편견이 될 수 있다며 저자는 우리의 삶을 이루는 무수한 ‘역설’의 순간들에 주목한다. 역설은 서로 정반대라 여겨지는 것들을 하나로 엮어 삶을 보다 깊고 멀리 내다볼 수 있게 하는 지혜가 된다. 희망과 절망, 부처와 중생, 신과 인간까지 모두 감싸 안는 이 책의 지혜는 문제로 뒤얽힌 나 자신과 화해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길을 안내한다.
“손을 놓고 있을 때 오히려 문제가 해결된다”
소유로부터 자유로 도약하는 ‘비움의 지혜’
현대 사회는 ‘자기 자신’이 삶을 이끌어가는 유일한 주인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그만큼 개인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동시에 무거운 책임이 부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도 정해주지 않은 삶의 길을 각자가 알아서 개척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닥쳐오는 고독과 우울을 견디지 못해 한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질문]은 오히려 ‘삶의 주인이 나 자신이 아니다’라는 지극히 소박하지만 위대한 통찰로 우리를 안내한다. 갈지자로 뻗어나가는 인생길의 끝 어딘가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 가정하고 사람들은 직선 방향으로 지름길을 뚫고자 비법을 갈구한다. 그러나 ‘내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살고 있다’는 통찰을 얻게 되면, 우리는 구부정한 삶의 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삶을 그저 놓아둘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예상치 못한 위기 앞에서도 삶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견뎌낼 수 있는 ‘비움의 지혜’를 역설한다.
“사람의 깊이는 가장 간절해지는 순간에 드러난다”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고 다시 일어서는 ‘기도의 지혜’
비움의 지혜를 곱씹고 성찰했다 하더라도,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문제들이 우리 삶에 들이닥칠 때가 있다. 아무리 목 놓아 울부짖어도,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는커녕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종교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망 앞에서 초월적인 누군가에게 부르짖는 절규를 우리는 ‘기도’라 부른다.
아주 소박한 바람에서부터 거대한 포부를 밝히기까지 기도에도 다양한 언어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진심’이다. [인생의 마지막 질문]은 흥정하고 협박하다가 이내 받아들이고 기다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도의 언어를 살피며 우리에게 필요한 ‘간절함의 태도’란 무엇인지 안내한다. 바닥 모를 심연으로 떨어진 듯한 괴로움에 빠졌을 때,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고 삶을 다시 일으키는 용기를 얻는다. 위기의 순간마다 가장 간절했던 순간을 상기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이 책은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하는 모두를 위한 인생지침서다.
저자 정재현
연세대학교 철학과 문학사
미국 Emory University 신과대학원 MTS, 문리대학원 종교학부 Ph.D.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임
현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 철학적 신학
발췌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문구에서 따온 “네 자신을 알라”는 격언은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소크라테스가 다른 현자들과의 대화에서 한 말, “당신들이나 나나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대들은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데 비해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한 것은 자기를 알기 시작하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바로 모른다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얼마나 모르는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모름의 앎’을 넘어 ‘모름의 모름’까지 가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제 파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도 우리에게 그렇다. 무엇을 더 알아야만 한다고 안달복달하고만 있을 일은 아니다. 또한 모른다고 안타까워만 할 일도 아니다. 얼마나 모르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p.49)
니체는 삶의 이유인 ‘왜’를 찾으면 ‘어떻게’는 설령 어렵더라도 견딜 만하다고 이야기한다. 적절한 이유나 근거를 찾는다면 방법 모색은 부차적으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왜’라는 질문에 대답될 수 있는 이유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유들이 더 많다. 그래서 지식으로 추려내는 방법과 달리 이유는 ‘지혜’를 필요로 한다. 쉽게 그 답을 얻을 수는 없더라도 더듬는 것만으로 뜻을 지니는 ‘이유를 추구하는 지혜’ 말이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과 그 답을 찾는 것은 한편으로 유한한 인간의 지위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면서 또한 인간 존재의 근거가 바닥 모를 심연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왜’라는 질문을 통과하면서 얻는 삶의 깊이는 무수한 ‘어떻게’를 견디고 넘어서는 힘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p.79)
사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기도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모자라 보이기도 하며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안쓰러워 보이기도 한다. 평상시에는 도저히 하지 못할 것 같은 행동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비상시에는 상황이 사뭇 달라진다. 평상시에 알고 있었던 것이 완전히 뒤집어지거나 부정되고 전혀 다른 삶의 차원이 들이닥치게 된다. 아버지가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위독한 상황에서 아들은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누구를 향해서 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더 큰 힘에게 빌고 애원하게 된다. 그런 힘이 있기는 한지, 있다면 이름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해도 크게 상관없는 듯하다. 그저 빌고 비는 것이다. 이래서 인간을 ‘종교적 인간’이라고 한다.
(p.167)
왜 문제를 파헤칠수록 더 꼬이게 되는 걸까? 문제와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를 단지 둘 사이의 관계로만 엮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결책에 집중하다 보면 문제가 온 세상이고 전 우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문제이든지 세상은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크고 복잡다단하다. 따라서 문제와 해법의 아이디어로만 한정시켜서 볼 일이 아니다. ‘즉문즉답’이 간결해 보이지만 먹혀들 수 있는 범위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그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손을 놓고 있을 때 오히려 해결의 실마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앎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넓고 깊은 삶의 차원에서 벌어진다. 그것은 실험실의 선반과 같은 앎의 영역과는 사뭇 다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알려고 발버둥치는 과정이 무의미하지는 않겠지만 이는 삶을 앎으로 축소시키는 행위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해결을 위한 아이디어가 제한되거나 아예 나오지 않을 수 있다.
(pp.187~188)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우웬은 말한다. 솔직히 우리 자신이 이런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많은 종교인들이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면서 결국 실용성의 이념에 사로잡혀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해 보인다.
‘그렇다면 기도로 바뀌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여전히 실용주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일 테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우리 삶의 마땅한 꼴이다. 확실하다고 규정하는 것이 대부분 거짓인 것은 내가 만든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일찍이 키르케고르가 ‘믿음은 객관적 불확실성에 대한 내면적 결단’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불확실성은 제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무용한 시간을 가치 있게 해주는 삶의 깊이이니 결국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p.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