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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어떤 이들은 넘지 못했던 철벽과 같던 산길
시간이 지나니...
이제는 누구든
아무 때나 오를 수 있는 산길이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세상에 영원한 거란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나라면 과연 갈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처절했던 몸부림들
그땐 실패한 혁명으로
그들은 죽었지만
그 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그네들은 알까요?
누군가의 작은 몸짓 하나가
시대를 초월해 누군가에게는 울림이 되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1894년 동학농민 움직임이
1919년 3.1운동으로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
2016년 촛불혁명
그리고 아직 진행중인 2024년 12.3까지...
과거의 죽음이 현재의 삶을 지켜내는
이 역사라는 아이러니
의미없는 움직임이란 과연 있을까.
한때 내가 머물기도 했던 너무도 사랑하는 공주 땅
이곳 공주에 오면 나는 이렇게 편안하고 좋은데...
하늘나라에 계신 교수님과
선배들, 후배들... 그리고 그 시절을 같이했던 동기들이며
고향에 온 듯 옛 사람들이 그립고.
그때는 왜 이런것들을 궁금해하지 못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나무데크 아래 백제큰다리와 금강교 사이로
공주의 원도심 심장을 관통하는 제민천이 금강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오늘의 걸음 시작입니다.
본격적으로 걸음하기 전,
먼저 금강 북쪽에 위치한 연미산 위에 올라 일출도 보고
금강 너머 공주의 원도심을 한번 조망해 보고자
잠시 올라 봤습니다.
제민천 옆, 늘푸른요양원 인근 주차(금강공원길 37-10)
금성교 인근 출발-정지산유적-무령왕릉-곰나루-웅진단건물터-
금강변 곰사당-송장배미(웅진동 737-14, 공주의료원 맞은편)
봉황산-일락산-상왕산-견준산-우금티-눈물 흘리는 소나무-
지막곡산-주미산-철마산-희귀목-산불감시 초소-묘지-월성산봉화대-옥룡정수장-
은개골/공산성(공북루~금서루) / 서북쪽 매표소-
-금성교 앞 제민천변(느티나무길71)까지
24.5km
반 이상 공주둘레길(공주대간)과 겹치며
저는 두리봉을 빼고 송장배미에서
봉황산과 일락산을 지나 견준산으로 올랐습니다.
동학관련 자료좀 찾아보고 싶어서 겸사겸사 나들이 걸음.
참고로 공주둘레길(공주대간)은
공주경찰서-두리봉-견준산-우금티-주미산-철마산-월성산 봉화대-옥룡정수장
대략 13km
금남정맥 안골산(이인)에서 갈라져 나온 공주로 향하는 산줄기인 공주단맥
안골산 나무에 시그널이 많이도 달려있더니만
단맥 갈림길이었나 봅니다.
봉황산에서 봉화대(월성산)까지 오늘은 봉봉~이네요.
2025년 03월 09일(일)
새벽6시20분 연미산 아래 주차 후,
(주차장: 공주시 우성면 신웅리 산26-8, 연미산자연미술공원 맞은편)
사부작사부작 올라 갑니다.
나무데크 조망터 위로 묘지가 있고
한쪽에 정상석이 자리합니다.
연미산 해발 239m
붉은 기운이 꾸물거리기는 하는데
일출 볼 수 있을까...
일출명소라고 하여 조망이 제법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뭇가지가 많아 주위 조망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금강 왼쪽으로는 신관동이 자리하고 뒤로 장군산과 세종 방향
금강 오른쪽으로는 정지산 유적과 백제큰다리 뒤로 공산성과
가장 뒤에 높은 산이 봉수대가 있는 월성산으로 보입니다.
오늘 걸어 지나갈 산군들이 자리하고~
공주의 원도심은 안개에 가려져 잠들어 있습니다.
중간 오른쪽 앞에 높은 산이 두리봉(망월산),
왼쪽 뒤로 높은 산이 월성산(봉화대)
그만 내려가야하나 일출 보기 포기할 즈음...
태극무늬처럼 햇님이 살포시 그 속살을 드러내 줍니다.
오래 기다렸지? 얼굴 삐죽 내밀고 헤벌쭉~
늦잠자서 부끄부끄
ㅎㅎㅎ
연미산에서 내려와 차 끌고 백제큰다리 건너 금성교 인근
늘푸른요양원,비둘기아파트 앞 주차 공간에 차 세워 둡니다.
바로 옆으로는 제민천이 금강으로 합수하는 지점.
늘푸른 요양원 오른쪽으로 길 따라 올라갑니다.
오른쪽 옆은 백제큰다리
정지산유적은 백제큰길로 이어지는 터널 위에 위치합니다.
잠시 오르막 올라가면... 만날 수 있어요.
공주 정지산 유적(사적 제474호)은
백제시대 국가적 차원의 제의(祭儀, 제사 의식) 시설로 추정되며
백제의 옛 도읍인 공주와 부여를 잇는
백제큰길 공사 과정에서 확인 되었다고 합니다.
도로 설계를 터널로 변경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되었구요.
1996년 국립공주박물관 발굴 조사 결과 국가의 중요시설에만 사용된
8잎의 연꽃잎이 새겨진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화려한 장식의 그릇받침 등
국가적인 제사와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며
이 유적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무령왕과 왕비의
매지권(죽은 사람이 묻힐 땅을 구입한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방향과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왕비의 시신을 무령왕릉으로 모시기까지 2~3년간 모셨던
빈소일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빈소 외에도
주변을 경계하던 국가 시설일 가능성도 검토되고 있으며
유적지 내의 대벽건물지(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를 채운 벽으로 지붕을 지탱하는 건물)에서는
얼음을 보관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빙고 시설도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오른쪽 언덕 계단을 올라가면 넓은 터가 나오고...
잔디 위로는 이슬이 하얗게 덮여 있습니다.
기와 건물지는 정지산 유적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기와 건물터로
유적 중앙에 위치한다는 점과 이곳에서 국가 중요 시설에서만 사용했던
연꽃무늬 수막새가 발견되었기에
이 유적을 무령왕비의 빈전으로 추정.
빈전이란, 왕이나 왕비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기 전에
임시로 보관하던 곳을 말합니다.
그 외 터만 표시되어 있는 1호, 2호, 3호 대벽건물지.
정지산유적 나무데크 조망터
이곳도 일출명소라고 합니다.
접근성도 좋고~
시야 가리는 나무도 없으니
연미산보다 오히려 일출 보기는 좋을 듯 싶습니다.
바로 앞의 백제큰다리와 낮은 제2금강교(2026년 12월 완공예정)와 뒤로
신관동에서 금성동으로 넘어가는 금강교
그 뒤로 공산성과 월성산까지~
해가 떠오르니 안개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공주 원도심의 물줄기인 제민천이
백제큰다리 바로 뒤 금강으로 합류하구요.
여기 정지산유적에서 내려서면 바로 산길로 연결~
산길을 통해 곰나루로 바로 갈 수 있을줄 알았는데...
옆으로 빠질 수 있는 길이 보이질 않아
가다보니 무령왕릉까지 가게됐습니다.
그래서 한옥마을과 국립공주박물관 사이 길로 곰나루까지 도로따라 갑니다.
처음 가보는 길은 생각과 다른 부분이 좀 있어용^^
곰나루국민관광단지에 세워진 웅비탑은
충청남도 개도 10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졌구요.
높이 15.6m,폭 24.2m
2000년 1월 준공식
당간지주와 봉황의 날개 태양 빛 등을 종합해 제작
양 옆의 백제금동대향로(국보)는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향로로
진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대학 들어오고 곰나루에서 모임도 하고 그랬던거 같은데
그때 이곳 기억은 전무합니다.
처음온 듯 그리 둘러보며...
금강을 사이에 두고 연미산과 곰나루가 마주보며 자리하고
공주시 웅진동에 있는 나루터인 이곳 곰나루(고마나루)
공주의 옛 이름이 고마나루라 하며,
한자로는 웅진(熊津)
곰나루 전설비 내용
아주 먼 옛날 강 저편 연미산에 외롭게 살고 있던 암곰 한마리
금강에서 고기를 잡던 한 어부를 끌고가
동굴 속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자식을 낳았다.
어부는 강건너 인간세상을 늘 그리워하였고
암곰이 사냥을 나간 틈에 나룻배를 타고 도망쳤다.
암곰은 새끼 두마리를 품에 안고
남편에게 돌아와달라 애원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두 새끼를 안은채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아~ 어째 전설이 극단적이고 살벌합니다.
암곰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끔찍할 듯.
ㅠㅠ
사람이 아니니 뭐라 말할 수도 없고.
나루터가 있었을 법한 금강 가까이로 가봐야겠습니다.
곰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쭉쭉 뻗어오른 소나무 숲길이 맑은 공기를 토해내며 서 있어요.
산에서 만나는 소나무와 강변에서 만나는 소나무
어째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소나무들은 제각각으로
소리없는 아우성 깃발처럼
한 많고 고생 많았던
동학농민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금강변으로 잠시 내려가 봅니다.
강 건너 연미산이 강물을 내려다 보며 서 있구요.
물이 흐르는 강변임에도 불구하고
쩍쩍 갈라진 사막처럼 보이는 이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물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이렇게 메말라 갈라질 수 있는건가?
아~ 금강가의
고운 모래는 모두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ㅠㅠ
모래없는 강변이라니...
왼쪽 끝에 공주보의 모습도 보입니다.
올라가며 바라본 솔숲과 나무데크의 모습.
한폭의 수묵화 같아 한참을 올려다 봅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_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_
연미산과 금강, 그리고 이곳은 무슨 제단 같은데...
웅진단과 수신제라는 친절한 안내판이 옆에 있습니다.
웅진단 제사는 처음에는 곰에 대한 제사였으나
점차 수신(水神)에 대한 제사로 성격이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에는 곰 신이 아닌 용왕신에 대한 제사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구요.
민간에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곰이 좋아하는 도토리묵과 마를 제사상에 올려 제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011년 인근 지역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 웅진단 건물터가 확인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 금강변의 솔숲길에는
맨발걷기 하는 사람이며...
건강 챙기는 부지런한 분들이 홀로, 둘이, 셋이...
솔향을 즐기고 있습니다.
쉬어갈 수 있는 의자며 안내판도 잘 되어 있고.
천혜의 요새인 이곳 웅진은
공주둘레산길(공주대간)^^ 산지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육로를 통한 공격이 쉽지 않았고
수로인 금강 또한 진입로의 폭이 좁아서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진입하기 어려워서
백제는 적이 어느쪽에서 공격해도
방어하기 좋은 웅진을 두 번째 수도로 택했었습니다.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475년까지(494년간) 한성 시대에 이어
공주 웅진 시대는 475년부터 538년(64년간)
부여 사비 시대는 538년부터 660년(123년간)
각각 백제의 수도가 되었었습니다.
사당을 그리 많이 만나봤었는데...
곰사당이라니...
공주는 역시 곰 빼고는 이야기가 안되는 도시인 듯^^.
금강에 빠져 죽은 암곰과 새끼 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낸 사당이었대요.
1972년 백제 유물로 추정되는 돌곰이
송산리 고분군 주변 밭에서 출토되어
현재 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구요.
백제 시대 만들어진 것이라 추정~
사당 안의 돌곰은 모형^^
돌곰은 신앙적인 의미가 담긴 소품이거나
부여(사비) 구아리 건물터에서 발견된
흙으로 만든 곰상과 크기와 재료는 다르지만
기본적인 모양이 비슷하므로
무덤에 넣는 부장품, 즉 진묘수로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곰사당 전체 모습 담아봤구요.
이 주위 안개낀 솔숲의 모습을 담으려
찍사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고 하네요.
사당 안으로 들어가보면 내부 모습은 이렇습니다.
웅신단비(熊神壇碑)의 내용
금강의 물이 남동편으로 휘어돌고
연미산 올려다뵈는 한갓진 나루터
공주의 옛 사연 자욱하게 서린곳
입에서 입으로 그냥 전하여온 애틋한 이야기
아득한 옛날 한 남자
큰 암곰에게 몸이 붙들리어
어느덧 애기까지 얻게 된다
허나 남자는 강을 건너버리고
하늘이 무너져 내린 암곰
자식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진다
여긴 물살의 흐름이 달라지는 곳이여서
배는 자주 엎어지곤 하였다
곰의 원혼 탓일까 하고
사람들은 해마다 정성을 드렸는데
그 연원 멀리 백제에까지 걸친다
공주의 옛 이름 웅진 고마나루
그 이름 여기에 아직 있어
백제때 숨결을 남기고 있다.
_공주사범대학 백재문화연구소 찬_
아주 오랜 옛날부터 고마나루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번화가였다는 사실이며
당나라가 고마나루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다는 기록 등
이곳 고마나루가 웅진 백제의 중심부였다는 이야기가 담겨있고.
곰사당 솔숲에서 나와 한옥마을을 곁을 지나
공주문예회관과 박세리공원에서 우측으로~
금성여고를 지나면 경찰서앞교차로
도심 한복판인 공주의료원 맞은편에 이건 뭐지? 싶은 곳을 지나게 되는데...
여름이라면 이곳에 연꽃잎이 가득하겠지만
지금은 이런 모습~
큰 가뭄에도 절대 마르지 않았다는 연못으로
이곳 이름은 '용못'이라 합니다.
이곳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전적지 송장배미
이름이 좀 낯설고 생소한데...
논배미에 동학민의 송장이 가득 쌓였다 하여
용못이라는 이름보다는 송장배미라 불리는 곳입니다.
고마나루(곰나루)에서 공주 감영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송장배미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사망한 동학농민군의 시신이 가득 찼던 곳으로
살아남은 동학 농민군들까지도
일본군이 무참히 학살한 곳이래요.
사건이라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터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전부터 누적되어 오던 것들이
어느 순간 폭발해서 야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학과 공주의 만남
1892년부터 동학교도들은 충남 공주 집회를 시작으로
동학을 공식적으로 세상에 드러냈고
억울하게 죽은 최제우의 명예회복 및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 중단 요구
공주 감영의 부당한 착취와 탄압에
결국 1893년 2월 11일 서울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렸고
고종의 원하는 바를 처리하겠다라는 말이 있었지만
탄압은 여전히 이어졌습니다.
공주에서도 탐관오리의 횡포가 있었던가 봅니다.
희대의 탐관오리 대명사 조병갑이
고부군수(1892년 4월 28일)로 내려왔었고
이후 자기 아버지 비석을 세운다며 농민들에게 세금을 인상해서 받는 등
군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씌워 부당한 돈을 거두어 들입니다.
만석보를 쌓기 위해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고
물세를 지나치게 거두어들이니...
1893년 극심한 흉년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고부 관아에 몰려가
만석보 물세를 낮춰달라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오히려 체포하고 매질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한 달만에
장독으로 죽게되며 민심이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고부군의 분위기가 나빠지자 조정에서 11월 30일
조병갑을 익산 군수로 발령을 냈고 민심은 잠시 주춤했지만
1894년 1월9일 조병갑이 익산으로 가지 않고
다시 고부 군수로 임명되니
1894년 1월 10일 밤, 말목장터에서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괭이와 낫, 죽창 등으로 무장한 농민들이 모여
고부관아를 향해 움직였고
1월 11일 새벽 고부 관아를 점령하며
동학농민혁명의 포문은 열리게 되었습니다.
3월20일 무장현 당산마을에서 1차 봉기
.
.
그리고 2차 봉기의 서막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
1894년 6월 23일 아산만에 머물던 청나라 군함을
일본이 공격하며 청일전쟁이 발발...
일본은 조선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기 시작
갑오개혁을 실시.
9월 10일 전북 완주 삼례 봉기
10월 12일경 남접 호남 농민군과 북접 호서 농민군이
충남 논산에서 만나 공주를 향해 북진합니다.
동학농민군의 공주성 전투는
10월 23일 이인전투를 시작으로
10월 24일 대교전투
11월8일~11일 우금티전투로 이어지고.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격을 시도
11월 9일 우금티를 넘기 위해 40~50차례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우금티를 뚫지 못했고
11월 11일 논산 방향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동학농민군이 왜 하필 공주에서
이렇게 죽어가야만 했었을까?
농민군에게 공주 감영 및 공산성 공격은
서울로 가기 위해 꼭 점령해야 했던 곳
당시 공주에는 농민군 진압을 위해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이
강력한 화력을 지닌 신식무기와
잘 훈련된 전술을 활용하여 곳곳에 포진하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구식무기를 지닌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역부족...
※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을미개혁에 따라
1895년9월9일 태음력을 폐지하고 태양력을 채택
1895년 11월17일을 양력 1896년 1월1일로 결정
우리나라 각종 연표나 역사에 등장하는 날짜는 대개
1895년 11월 16일 이전의 날짜는 예전대로 음력 날짜이며
1895년 11월 17일부터는 1896년 1월 1일로 시작하는 양력 날짜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도이기에 음력으로 기재돼 있겠죠^^
송장배미 사거리에서 왼쪽길로~
충남통일관 건물을 지나 조금더 가다보면 등로인듯 등로 아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길인듯 했지만
봉황산으로 오르는 제일 가까운 곳이라
이곳에서 무작정 위를 향해 산으로 오릅니다.
뭐 길이 잘 보이질 않아 다른 등로 만날때까지
막무가내 방향만 맞춰 올라갑니다.
송수신용 안테나 건물을 지나 조금 오르면 만나게 되는...
아담한 해발 148.3m의 봉황산 정상석
봉황산 정상석 뒤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곳 어딘가에
충청감영이 있을테지요.
(현재,국립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자리)
동학농민군은 우금티를 주력부대로
효포마을쪽에서 능티과 금학동을 공격하는 부대
주미산 아래 오실마을쪽에서 공격하는 부대
두리봉 옆 한산을 통해 곰나루 쪽으로 공격하는 부대로 나누었다 합니다.
이곳까지 걸어온
곰나루에서 송장배미 봉황산쪽으로의 공격을 위해
곳곳에서 싸우며 죽어갔을 농민군들.
봉황산 정상 나뭇가지
많이 보던 시그널의 주인들도 다녀가신 듯.
반가운 마음에 올려다 보고^^
속으로 뭐 이런 곳(산이 낮아요^^)도 다들 벌써 다녀가셨다고??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웅진동 137 쇼골지를 지나 밭을 가르며 지나가고..
쇼골지라는 이름 우리나라 이름 같지 않은 느낌?
시어골이라는 이름 외에도
숏골, 쇳골, 금곡(金谷)이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이 물은 송장배미(용못)을 지나
금강으로 흘러들어간다고.
지도상으로는 물길 표시를 찾을 없고, 어딘가로 숨어서 흐르는건지.
개인사유지 녹색 휀스를 넘어가 꾸준히 오르면...
시그널이 왜 이렇게 많이 붙어있나 했더니
이곳이 일락산(167m) 정상이라네요.
내려가다 보니 나무목이정표가 나오고
아래 떨어져 있던 일락산 방향 표식
두리봉과 일락산, 공주교대 갈림길 삼거리를 지나~
두리봉은 우금티를 공격하던
동학 농민군의 최전방 지휘소였던 봉우리
원래 공주둘레길(공주대간)에서 공주경찰서를 시작으로 오르는 첫 산
이번에 저는 패스한 봉우리.
전에 공주대간길 걸어봤으니^^
시그널에 상왕산(206m)이라 표시되어 있어
잠시 발길 멈춰 확인해 봅니다.
이 아래 원효사라는 절이 있는데
검색을 해보면
'상왕산원효사'라고 나옵니다.
어찌 이렇게 산 이름도 잘 찾아서 메모해두셨을까~
공주시 봉정동의 견준산(233m)
사람들이 덕분에 써넣고
써서 매달아 놓고... 수고로움 더하고 있습니다.
견준산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꽤나 커다란 바위가 숨기 좋게 모여 있고
이곳이 동학농민혁명의 전적지라는 안내판이 보입니다.
동학농민군의 거점이었던 부여로 이어지던 봉정동 마을
견준산 일대는 관군 백낙완 부대가 방어하였던 곳이며
백낙완 부대의 일부는 송장배미 산자락전투에 파견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견준산 일대 우금티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조선관군과 일본진압군의 신식 무기에 밀려
수많은 학살을 당했습니다.
우금티터널을 지나 남서쪽 공주시 주미동 마을 방향
마을이 꽤나 가깝게 보입니다.
견준산은 우금티를 방어하던 관군 지휘소의 하나였습니다.
견준산에서 우금티전적지 방향으로 내려가는 하산길이
우금티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와 희생이 있었던 곳이며,
내리막길 내려서면 우금티전적지 너른 터가 펼쳐져 있고
남서 방향이 이인면으로 향하는 곳이고
북동 방향이 동학농민군이 그토록 점령하고자 했던 충청감영과 공산성 방향
공주의 원도심으로 들어가는 목구멍인 우금티
우금티? 우금치?
무슨 마시는 차도 아니고 김치, 시금치도 아닌데...
ㅠㅠ
백두대간을 하면서도 늘 뭐라고 쓰고 말해야할지
갸웃하게 만드는 '티'와 '치'
일단 공주의 (사)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에서는
'우금치' 대신 원래 우리말 표현인 '우금티'
로 불러야 한다며 이름 바로 잡기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주 옛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우금티 또는 우금고개라고 불렀다고 하며
일본군과 관군이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고 기록으로 남기며
한자 표현 치(峙, 고개치)를 넣어 불렀다고.
잠시 아래로 걸어 내려가 보면
동학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동학혁명군위령탑
우금티전적지는 동학 농민군의 최대, 최후의 격전지로
1994년 견준산을 중심으로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387호로 지정 관리 보존 중.
잠시 고개 숙여 인사 드리고 갑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또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동학하면 자동 떠오르는 단어
사실 사람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이 하늘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은 생명이라도 귀히 여기는 마음
사는 동안 그리만 산다면
세상에 끔찍한 일들이란 없을텐데...
누구든 이곳에 들른다면
시비 앞에서 잠시 발길 멈춰
천천히 읽어보며 가길... 바래봅니다.
지금은 우금티 터널이 있어
차로 몇 초만에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고.
이 터널 지역은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당시 통행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고
지금의 모습보다 높은 봉우리였다고 합니다.
원우금티는 주미산 방향으로 조금 더 가다 있습니다.
우금티전투에 참전한 관군의 기록 '선봉진 일기'에서
"아! 저 몇 만 명 되는 동학농민군의 무리가 40~50리를 연이어 에워싸서
길이 있으면 빼앗고 높은 봉우리는 다투어 차지했습니다.
동쪽에서 소리 지르는데 서쪽에서 나타나고
왼쪽에서 번쩍하다가 오른쪽에서 튀어나오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죽을 각오로 먼저 산에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며 무슨 담력입니까?"
저들의 행동을 말하려 하니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관군이 동학농민군을 바라보며
저들은 무슨 의리냐고 물음표를 던지는데...
나라가 우리한테 해준게 뭐가 있는데???
그렇게 말을 이어나가는 듯
이 관군의 말이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여기 저기서 번쩍번쩍... 도깨비와 같았던 동학농민군들.
우금고개를 지나 조금 오르다보면 만나게 되는...
소나무의 송진을 이렇게 표현해 놓다니...
누구의 발상이었는지 약간의 헛웃음이.
우금티를 지나 오르면 만나게 되는 첫 봉우리 194.6m봉
몇 곳에 공주대간 코스안내 표지판이 이렇게 잘 세워져 있습니다.
현위치에서 주미산 철마산 봉화대 방향으로 붉은 선 따라서~
지막곡산(297.6m)
써 놓은 글씨가 어쩐지 귀신 나올 듯
산에서의 전투들을 생각하면
그냥 걸어 올라가는 것도 힘든데
다들 얼마나 이중고를 겪었을지...
생사를 가르던 공주의 둘레 산들
북쪽으로 바로 아래 공주산림휴양마을과 중앙의 수원지
예전 충청감영, 공주목관아가 있었던 방향
공주의 원도심 조망
일락산에서 봉황산으로 가는 길이며
왼쪽 가장 높은 산은 두리봉
그리고 가장 뒤쪽의 능선은 금강 너머 오늘아침 올랐던 연미산으로 보입니다.
공산성까지 조망은 나쁘지 않네요.
주미산(381m) 나무데크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아른아른~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한 계룡산
그 달달한 맛을 즐겨봅니다.
머리봉, 중앙 뾰족한 봉우리 옆으로 철탑이 있는 천단
쌀개봉을 살포시 그 능선을 그려보며.
앞에 가야할 철마산 능선이 보이며~
성화산에서 팔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까지.
이 봉우리는 뭐하는 봉우리인고~
철마산(345.7m)
주미산에서 철마산 사이 계곡 길이 공주의 젖줄 제민천 발원지~
어디쯤 내려서면 물을 만날 수 있을까?
비탈이 좀 있는데...바닥에는 낙엽이 가득하고~
이제는 지도보면 대충 최종 발원지가
어느 봉우리쯤 되겠다라는 건 쪼매 알겠습니다.
^^
철마산에서 진행해 가다가 만난 희귀목
줄기가 열두갈래로 갈라진 희귀한 형태로 자라는 나무라 하여 희귀목
이거 가지 세어보면....
어라? 그새 1가지가 늘었나? 13개??
지제부(식물체 지상부와 토양 사이의 경계 부위)에서 갈라져 나온건 열두갈래?
다음에 가시는 분 제대로 잘 세어봐 주세요^^
암튼 이 나무님 다복해 보입니다.
외롭진 않겠다 싶어요.
나름 나도명품소나무라~ 우기는
방금 이발소 다녀온 듯 보이는 소나무가 자리하는 조망터~
아래로 보이는 마을이 효포마을
아늑하니 그저 평화로워 보이기만 한데...
좀더 당겨서 보면 효포초등학교가 보입니다.
효포초등학교 일대가 효포·능티 전투지로
1894년 10월 24일과 25일
효포 들판과 능티, 봉화대에서 동학 농민군은 공주 동족에서 능티를 넘어
산 안쪽에 위치한 충청감영을 점령하고자 했었습니다.
산불감시초소 곁을 지나 걷다보면...
묫자리 잘 썼네 싶은 묘지 옆을 지나게 되고.
(능티고개 인근입니다^^)
앞에 보이는 산이 오늘 산행에서 마지막 오를 월성산
무슨 돌멩이들이 이리도 난잡하게 많이 굴러다니는지...
오르막 올라서면...
봉화대 뒤로 옥룡동 방향~
월성산 봉수대(봉화대) 313.2m
공주시에 자리하고 있는 3개의 봉수대(고등산봉수대, 쌍령산봉수대)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봉수대로
남쪽으로는 논산시 노성산성에 있는 봉수대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고등산봉수대와 이어집니다.
이제 마지막 봉우리에 왔으니
배낭 먹을 것 치우는 정리좀 하며^^
뱃 속으로 고이 모시겠습니당~
계룡태극종주 60km가 넘는...
저는 기회가 되지 않아 해보지는 못했는데
좌측 금강변 소학동에서 시작해
와우산~성화산~팔재산~계룡산 수정봉으로 올라
관음봉~쌀개봉~천왕봉~황적봉~관암산~백운봉~
도덕봉~갑하산~우산봉~금병산~적오산~
화봉산~우성이산~대전MBC(갑천변)까지
진행한 분들 트랙 살펴보니
우산봉에서 금병산 구간이 안산천을 건너게 되던데...ㅠㅠ
물론 마루금따라 갈 수 없어 그렇게 우회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산의 마루금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번 기회 되면 마루금에 최대한 맞춰서
반석마을아파트쪽으로 통제구간 좀 점검해서
물 건너지 않고 계룡태극종주길
깔끔하게 걸어보고 싶어집니다.
수원사지는 1982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구요.
지정면적은 7,219㎡
'삼국유사' 미륵선화(彌勒仙花) 미시랑(未尸郞) 진자사(眞慈師)조에
'웅천주의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를 볼 수 있다.'
라는 진자의 꿈 내용이 적혀 있어
‘수원사’가 신라 진지왕대 6세기 후반에
이미 존재했을거라 추정한다고 합니다.
1967년 시굴조사 때 탑지(塔址) 등이 확인되었고
이 부근 길을 ‘수원골길’이라 부르고 있는데
예전부터 소원골이라고 부러왔다고 해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지적삼각점을 지나고~
이제 하산하면 옥룡저수장 앞 도로로 진입
무령로 길 건 왼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농협하나로마트(옥룡점)을 지나 골목으로~
안내판이 잘 되어 있어 은개골 길 따라 올라가면
우측은 옥녀봉, 좌측은 공산성
공산성 오름 전 화장실도 비치되어 있으니 이용하시면 됩니다.
공산성 방향 산길 따라 계단을 올라가 광복루를 지나고
이제 성벽길 따라 금강변으로 북서쪽으로~
공주대교 방향으로 금강 조망~
아~ 여기 금강에는 그래도 모래톱이 반갑게 보입니다.
강이란 역시 이런 맛이죠.
아~ 좋다.
산성길을 걷고 있는데
공주산성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분이 계셔서
뒤에 서서 잠시 이야기 듣다 갑니다.
산성을 자주 찾으시는 분으로 이렇게 산성 찾아온 분들 있을 때
설명도 해주고 그러시고 계시더라고요.
은근히 열심히 듣는 분들^^
금강 발원지 이야기부터~우와~
제가 금깅길 걸어봤다고 얘기하고 싶어
입이 다 근질근질^^
제가 모르던 사실들도 많이 말씀해주시고
역사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셨더라구요.
말씀 끝나면 가져갔던 사탕이라도 드리며
감사 인사 드리려고 했는데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말씀이 길어지셔서 슬그머니 먼저 자리 이동합니다.
금강교가 앞에 보이구요.
일제강점기인 1933년 건설되었구요.
준공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긴 인도교이자
한강철교 다음의 한강 이남 최장의 교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등록문화유산 232호로 지정.
1932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그 보상으로 건설해 준거래요.
과거에는 공주시내에 있는 유일한 금강 교량이었고요.
6.25 1953년 7월 전의전투가 벌어져 전략적으로 폭파시켰었고
전후 응급 복구를 거쳐 1956년 9월 정식 재개통
원래 양방향 통행이 모두 가능한 다리였으나
2009년 1톤 트럭이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 발행 후
보수공사를 했고 이후로는
자동차는 신관동에서 공산성 방향으로 일방만 가능
반대방향은 자전거 도로로 활용.
이길을 걸어갈수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압니다.
이후 생긴 백제대교(1968년), 공주대교(1980년), 웅진대교(2002년).
그 뒤로 아래 보이는 다리는 제2금강교(2026년12월 예정)
강에 뭔가 있었던 흔적은...
공주 배다리 유적이구요.
금강철교가 설치되기 전 1910년대 초부터
1933년까지 약 20여 년간
구도심과 강북 일대를 연결해 주던 배다리가 있던 자리.
공주는 웅진 백제의 도읍과
조선 시대 충청감영이 있었던 곳으로
중부 지방의 교통중심지로
서울에서 육로로 전라도를 가려면
금강을 건너야 했고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 나루터가
바로 공북루 앞에 있던 금강나루였다고 합니다.
1910년대에 들어오면서
금강을 오가는 사람들의 통행량이 늘자
육로로 사람뿐만 아니라
마차, 차량 등이 쉽게 다닐 수 있게 배다리가 설치.
배다리의 또다른 이름은 금강교, 산성교, 금강목교 등
다리의 구조가 다른 것은
잦은 홍수로 다리가 떠내려가거나 부서지는 일이 많아
자주 복구했기 때문이래요.
사진을 보면 그 기초와 목재 교각 등이 남아 있습니다.
공북루와 공산정을 지나~
연인, 가족단위로 산성에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공산성의 깃발은 동서남북으로
동쪽의 영동루(청룡)
서쪽의 금서루(백호)
남쪽의 진남루(주작)
북쪽의 공북루(현무)
공산성의 성문을 동서남북으로 배치한 깃발은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제현한 것.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백제의 나라색인 황색(깃발의 바탕)
깃발의 테두리는 각각의 상징하는 동물색을 담았습니다.
동학농민군들이 그토록 점령하려했던 천혜의 요새인 공산성
매표소 옆에서 바라본 금서루의 모습.
매표소가 있는데 뒤로 들어오면 따로 돈을 내지 않아요.
좀 찔리긴 하지만...
감사히 공산성 잘 지나 갑니다.
공산성 앞에서 건널목 건너...
식당가 골목길로 제민천까지 잠시 걸어 이동
물길 앞에서 트랙 정지하고 제민천 환종주 마무리 합니다.
지방하천인 충남 공주의 제민천은
금학동 주미산과 철마산 인근 계곡에서 발원하여
공주목관아와 황새바위성지
금성동에서 무령왕릉과 공산성 사이를 지나
금강으로 유입되는 도상거리 6.5km의
짧지만 궁금증 자아내게 만드는 물길
시간되면 제민천 강행도 한번 걸어보고 싶어집니다.
그때 그들은 넘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는 그 길을 걷습니다.
지금 우리가 넘지 못하는 길도 있지요.
접근이 금지된 산봉우리랄지,
북한의 대간길 정맥길 등
미래의 누군가들은 또 그 길을 걸어갈테지요.
영원한 건 없으니까요.
소용없다고,
나 하나 바뀐다고
설마 세상이 달라지겠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분명 달라질꺼라 믿습니다.
제가 해왔던 행동 하나하나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듯
지금 제 행동 하나하나가
미래의 저를 만들 것을 알기에
미래의 나를 위해
생각하는 사람으로 멋지자.
후지지 말자.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의 이 글로
이번 후기글 마무리 짓습니다.
^^
<후기 참고 자료>
충남 지역 동학 농민 혁명 교육 자료집
(충청남도교육청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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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주둘레산길, 잘 보았어요. 언제나 그러하시듯 수고 많으셨어요.
'공주대간'이란 길이 깊은 유래가 있는 건 아니고, 공주시에서 20년쯤 전에 한두 분의 선배 산꾼들께 의뢰해서 조성한 길입니다.
그 결과, 무령왕릉이 계룡산에서 벋어내린 산줄기의 끝점이라는 사실을 영영 잊은 채 뜬금없는 반달 모양의 길만 남게 되었네요.
철마산은 안골산에서 제법 거칠게 굽이쳐들어와 공주둘레산길과 접하는 지점입니다. 두리봉-주미봉-철마산-안골산-팔재산-수정봉-관음봉으로 거슬러오르는 길은 대단한 종주길이고, 동학농민군의 주요 퇴각로이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연락을 하고 오셨더라면 '우금치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하여 좋은 분들을 소개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네요. 일기장을 넘겨보니 그날 집에 있었는데... 다만, 그 전날 두텁게 눈에 덮힌 대미산, 황장산 구간을 넘느라 다소 피곤해있긴 했지만.
꽃길만 걸으시길. 아니, 깽이님이 걸으시면 다 꽃길이 되길.
덧붙이자면, 그날은 넘지 못했지만 그뜻을 이어받으신 '전봉준투쟁단'이 현 시국에서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진격하여 남태령을 넘으려고 여러 번 싸움을 해 오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공주감영이 있어서
대전보다 훨~씬 큰 도시였던 공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그마한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지만 역사는 예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것 같네요.
동네 뒷동산 같은 제민천 환종주길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보고 갑니다.
봄이니까 꽃길 많이 걸으세요.
아름다운길.
느낄것도 배울것도 많은길.
잘보고 갑니다.
낭중에 시간내서 걸어봐야 겠습니다.
~~~~~~~~~
해남에서 삼남 길따라 올라 서울로 가기위해 꼭 넘어야했던 충청 감영이 있었던 공주
그리고 전봉준이 그토록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와 동학 농민
공산성에서 보는 금강은 옛 백제의 마지막왕이셨던 의자왕의 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기에 더욱 애틋한 아름다움이 있죠
수고로운 걸음 그리고 후기 잘보고 갑니다.
산에 갈때는 늘 불조심 하시기 바랍니다.
공주 주변의 제민천
주변으로 이어지는 편안한 길과 유적지 볼거리가 많네요.
새로운 주변의 설명 한번 확인해 봅니다.
항상 즐겁게 다니시길 바랍니다.
제가 사는 구미는 낙동강이 동서로 나뉘어 강동, 강서로 구분이 되는데
공주는 금강이 남북으로 반을 나누고 있네요.
금강 남쪽의 제민천 한바꾸 매력 있어 보입니다.
깽이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한번 걸어보고 싶네요.
기회 되면 언제 안내 부탁합니다 ㅎㅎ
백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알찬 후기 잘 보고 갑니다.
제가 이글을 다 읽었을까요 중간까지 읽다가 포기했을까요 ㅋㅋ
산타는것보다 방장님 깽이님 후기읽는게 더 힘든 1인입니다 ~~~😂😂😂
오래 된 것 같은데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 동학혁명을 방영하면서 우금티전투, 그 후 일본과 조정의 동학농민에 대한 보복
사회자인 최원정도 울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고, 저는 울분에 차 있다가 나중에 못난 조상을 원망.했습니다.
그래도 현재 우리나라 오천년 유사이례 최고의 강성대국이죠. 이름 모를 애국자들의 밑거름이 이룩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좋은 음악 잘 듣고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