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宋時烈)
송시열 (宋時烈 ... 1607~1689) ...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또는 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33년 생원시에서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仁祖가 삼전도에서 淸나라에 항복한 후 낙향한다. 그 후 효종이 즉위하자 장령(掌令)에 등용되었으나,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한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후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金自點이 淸나라에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밀고함으로써,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지목받아 淸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그 뒤 충주목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송시열의 執權과 失閣, 그리고 사사(賜死)
1658년(효종 9)에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琪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2년설을 주장하는 南人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며 西人의 지도자로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에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에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의 죽음으로 시작된 2차 禮訟에서는 기년설(琪年說)을 주장한 南人에게 패배하여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고, 그 후 여러 곳으로 옮겨가며 유배생활을 계속하였다.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南人이 실각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南人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西人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송시열을 영수로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었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하여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그리고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가 끝난 후에 신원(伸寃)되었다.
송시열의 영정(影幀) ... 국보 제239호
국보 제239호로 지정된 이 그림은 가로 56.5cm 세로 97cm의 크기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반신상(半身像)이다. 머리에는 검은색 건(巾)을 쓰고 유학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인 창의(彰衣)를 걸치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과장되게 표현된 巨軀의 몸체와 개성적인 눈썹, 깊게 패인 광대뼈의 주름, 강한 눈매, 붉은 입술 등에서 그의 학문의 깊이와 동시에 과격한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얼굴은 엷게 채색한 다음 갈색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의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옷의 黑과 白의 극명한 대조는 유학자로서의 기품을 더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누구인지 모르며, 제작 시기도 알 수 없다. 그림 오른쪽 상단에 1651년 45세인 송시열이 지은 제시(題詩)와 1778년(정조 2)의 정조 어제찬문(御製讚文)이 적혀 있는데, 이를 근거로 이 그림을 1651년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하기는 곤란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우암연보(尤庵年譜)에 기록된 송시열의 생시도사본상(生時圖寫本像)의 기술내용과 다르며, 그림의 얼굴모습이 45세가 아닌 노년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어제찬문이 씌여진 정조초기에 이모(移摸 .. 원본을 충실하게 옮겨 그린 모사본)된 것으로 추정하며, 그 위에 송시열이 45세 때 지은 제시(題詩)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성리학의 보급과 함께 서원이나 사당이 지역별로 늘어나면서 이 곳에 봉안할 초상화가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송시열의 비중을 말해주듯 그가 죽은 뒤 그를 받들고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많은 영당과 서원이 건립되었고, 그 곳에 봉안하기 위하여 이모본(移摸本)들이 제작되었는데, 현재 5점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 이 그림이 가장 뛰어난 즉, 비록 이모본이라고 하더라도 明暗을 사용하지 않은 솜씨가 훌륭한 그림이라고 한다.
1차 禮 訟 論 爭
孝宗이 죽은 뒤,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 .. 趙大妃)가 효종의 喪에 어떤 服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란이었다. 조선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에 근거한 예론에서는 자식이 부모에 앞서 죽었을 때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적장자(嫡長子)인 경우에는 3年喪을, 그 이하 次子일 경우에는 1년상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仁祖는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가 죽은 뒤,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次子인 봉림대군 (효종)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하였다. 따라서 효종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王統은 인조에서 효종으로 이어졌지만, 적장자(적장자가 有故 時, 嫡長孫)가 잇는 관념에서는 벗어난 일이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西人세력은 1년상을 주장한 것에 반하여, 윤휴(尹휴),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 南人은 그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1차 예송논쟁이 시작되었다.송시열 등 西人은 효종이 왕통상으로는 仁祖의 적통을 이었지만 宗法上으로는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당연히 종법에 따라 1년상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고, 반면 허묵 등 南人은 天理인 종법이 왕가의 의례에서는 변칙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논리로 자의대비는 효종을 위하여 3년의 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경국대전에 장자와 차자의 구분없이 1년복을 입게 한 규정에 의거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西人의 禮論이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서인정권은 현종시절에 계속 유지될 수있었지만, 종법질서에 있어서 효종의 위상에 대한 논란은 결론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이 문제는 결국 2차 禮訟의 빌미가 되었다.
장례 복상 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한 이 논쟁은 단순한 왕실의 장례절차 문제가 아니었다. 禮란 그 자체가 사회규범이자 행동의 절차이다. 예송논쟁은 禮의 틀에 각 정파의 정치적 이해가 실림으로써 일어난 정치국면이다. 仁祖이래 정치권력을 독점한 西人과 그에 대항하여 정권교체를 추구해 온 南人 사이의 정치투쟁이 예송이란 외투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예론이란 형식을 빌려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정운영에 대한 철학과 노선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서인의 신권(臣權)강화론과 남인의 왕권(王權)강화론의 대립이었다. 西人이 도학의 경지를 이상적 정치로 상정하는 것은 도학의 권위자인 사대부가 정치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차례의 예송에서 일관되게 국왕의 특수 지위보다 朱子家禮의 규정을 상위에 두고자 한 것은 국왕의 국정에 대한 전권 행사를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었다.
한편 南人의 왕권강화론에는 권력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던 소수세력의 처지가 담겨져 있다. 평소 구상해 온 정책을 펴보기 위하여는 집권을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왕권과 결합할 수 밖에 없었다. 두 차례의 예송에서 국왕의 권위를 일관되게 주장한 것도 그런 이유이었다.
2차 禮 訟 論 爭
2차 예송은 효종의 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효종의 계모인 조대비(趙大妃 ..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1차예송에서는 국제기년복(國制箕年服)이 채택됨으로써 효종의 장자,차자 문제가 애매하게 처리되었으나, 인선대비가 죽으면서 이 문제가 다시 표면으로 떠 올랐다.
즉 효종을 장자로 인정한다면 인선대비는 長子婦이므로 조대비는 기년복(1년)을 입어야 되지만, 효종을 차자로 볼 경우 복제는 대공복(大功服 .. 9개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禮曺에서는 처음에 기년복으로 정하였다가, 다시 대공복으로 바꾸어 올렸다. 현종은 예조에서 대공복제를 채택한 것은 결국 효종을 次子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 잘못 적용된 예제로 판정하였다. 이후 송시열계의 西人세력이 대대적으로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결국에는 南人政權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孝宗이 송시열에게 下賜한 방한복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주도한 효종이 중국으로 가는 송시열(宋時烈)에게 만주의 추위를 걱정하며 내린 방한복...담비로 만들었다.
회니시비 懷尼是非. 1. ... 스승 宋時烈과 제자 尹拯의 대 립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송시열의 제자이며 소론의 영수이었던 윤증의 대립을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부른다. 송시열이 대전의 동쪽에 위치한 회덕(懷德)에서 살았고, 윤증(尹拯)은 논산군 노성면에 해당하는 니성(尼城)에 살았기 때문이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이 지나면 조선은 朋黨政治에 휩싸인다. 붕당(朋黨)은 조선 중기에 모습을 드러내어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등장하는조선 말기까지 이어진다. 애초 붕당정치의 정국 주도권을 잡은것은 東人이었으나, 仁祖反正을 거치며 西人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서인도 숙종초에 핵분열을 일으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며 이후 약100여년 가량 각종 현안에 대하여 대립과 갈등을 보였다. 老論과 少論.. 그 중심에는 송시열과 그의 제자 윤증이 있었다.
송 시 열 윤 증
송시열은 8세에 송이창의 문하로 들어갔는데 이 때 송준길(宋浚吉)을 만나고, 두 사람은우여곡절 속에서도 평생지기로 지낸다. 그 후 송시열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김집(金集)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는 尹拯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우정을 나누게 된다.
송시열은 병자호란과 효종의 북벌계획이 탄로나면서 조정과 재야를 넘나들던 중, 20년가까이 절친하게 지내던 윤선거와 사이가 벌어진다. 그 발단은 백호 윤휴(白湖 尹虧)의 경전 해석... 윤휴가 "중용(中庸)'에 대해 集註를 달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붙였다.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禮訟論爭으로 극에 달하였고, 윤휴는 숙종 6년 허적(許積)의 庶子 許堅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다. 반면 윤증의 아버지이자 송시열의 친구이었던 윤선거는 윤휴의 경전해석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오직 朱子 解釋만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통념에서 다소 벗어난 시각이었다.
윤증은 1629년에 출생하여 송시열보다 22세 아래이다. 아버지 윤선거를 비록하여 송준길, 송시열에게서 수학하였고, 윤휴,윤선도 등 남인계 석학들과도 교류를 갖으며, 양명학에도 관심이 컸다. 특히 송시열 문하에서는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끝까지 한사코 뿌리쳤다.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송시열이 예송논쟁을 벌이는과정에서 尹宣擧 父子가 자신에 동조하지 않고,윤휴를 감싸고 돌자 병자호란 당시의 강화도 수난과 탈출 사건을 들고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송시열의 주장에 따르면... 윤선거는 강화도에 있을때 친구들과 함께 義兵을 모집한 뒤 城을 사수하기로 약속하였다. 친구인 권순장과 김익경, 이돈오 등은 남한산성이 청나라 군사에 함락되던 날 약속대로 자결하였고, 윤선거의 妻도 자결하였다. 오직 윤선거만이 살아 남았다. 더구나 윤선거는 적군에게 무릎을 꿇고 구걸하였다. 鳳林大君(후일 효종) 사신 일행이 성으로 들어오자 이름을 바꾸고 노비로 위장한 뒤, 돌아가는 사신 일행에 붙어 몸만 살짝 빠져나온 모양새가 참으로 부끄러운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윤선거의 주장은 조금 다르다. 그는 권순장과 김익경은 남문을 지키던 정승 김상용(金尙容)이 분신자살하자 싸우지도 않고 자결하였으며, 자신의 妻가 죽은 것 역시 敵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 탓이다. 微服으로 강화도를 탈출한 것은 교전이 이미 끝났을 뿐만 아니라 적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급히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양쪽의 주장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당한 수난과 탈출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윤선거는 과거시험도 단념하고, 재취도 얻지 않은채 평생을 자숙하여 在野에서 지내야 했다. 죽을 때까지 강화도에서의 일은 그를 옭아맨 족쇄이었다.
회니시비 懷尼是非. 2 .
그러나 송시열과 윤선거는 회니시비를 벌이면서도 아주 절교하지는 않았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가 1669년에 죽자, 41세의 윤증은 아버지의 연보(年譜)와 박세채(朴世埰)가 지은 행장(行狀)을 갖고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인 송시열을 찾아가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한다.
이에 송시열은 새삼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의 비겁한 행적을 거론하며, 억지로 묘갈명을 써 주지만 아술부작(我述不作 ... 나는 다만 기술만 하였지, 짓지는 않았다 )이라는 첨언을 분명히 하였다. 즉 "나(송시열)는 윤선거를 잘 모른다. 오직 박세채가 쓴 行狀에 의거하여 말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윤증은 4~5년에 걸쳐 장문의 편지를 보내거나 직접 송시열을 찾아가 개찬(改撰)을 청했으나, 송시열은 비문(碑文) 내용에는 전혀 손대지 않고 글자 몇 군데만 고쳐서 주었다. 이는 스승과 제자 두사람이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먼저 윤증이 비명(碑銘)을 요청하며 가져간 기유의서(己酉疑書)가 화근을 낳았다.윤선거가 죽기 4년 전에 작성한 기유의서는 설령 윤휴와 허목 등이 잘못했을지라도 같은 士林이니 너무 배척하지 말고 차차 중용하는것이 옳다며 송시열에게 충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윤증은 윤선거가 생전에 보내지 않았던 서신을 善意로 보여주었지만 이는 송시열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신유의서(辛酉疑書)가 덧붙여지면서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만 한다. 신유의서는 숙종13년 경신환국이 있었던 다음 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이다. 송시열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이라고 하나 기질이 편백하여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못하고 있다는 내용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송시열의 존명벌청(尊明伐淸)은 말로만 방법을 내세울뿐 실익이 없다는 것이었다.
윤증은 이 疑書를 먼저 박세채에게 보여 주었는데, 박세채가 보내지 말라고 강권하여 일단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이 박세채의 집에서 의서를 몰래 가져가 송시열에게 전하였다. 송시열은 크게 화를 내며 치를 떨었고, 그 후 두 사람은 의절하였고, 老論과 少論의 分黨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삼전도의 비문(碑文)을 뚤러 싼 是非로 이어졌다. 삼전도 비문은 송시열을 조정에 천거한 이경석이 지었다. 송시열은 숭명(崇明)의리에 입각하여 이경석을 성토하고 나섰고,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은 어차피 君臣이 淸에 항복한 이상 누구든지 그 비문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반박하였다.
송시열을 영수로 한 老論과 윤증을 따르는 少論은 이처럼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며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송시열은 주자학 절대주의자이었으며, 철저한 崇明反淸을 정치철학으로 삼았다. 반면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도모하고 현실에 바탕한 정치를 꿈꿨다. 그 탓에 스승과 제자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갈라섰다.
宋子와 宋者 그리고 李子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된 송시열(宋時烈)은 83세의 나이에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井邑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의 유학자 가운데 송시열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를 추앙하는 이들은 "사문(斯文)의 종사(宗師)" ... "아동(我東)의 朱子" .. "태산교악(泰山喬嶽)"이라 평가하여 칭송하고, 반대쪽에 있는 이들은 "黨爭의 화신" .... "權力慾의 화신" .... "골수 事大主義者" 등이라 비난한다.
그를 일컫는 송자(宋子)에 대한 해석도 극단적이다. 송시열을 추앙하는 이들에게는 孔子와 朱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존칭하여 쓰는 말이고, 비난하는 쪽은 욕할 때 쓰이는 " 놈 者 "를 써서 宋者라는 최하급의 비칭으로 부른다. 그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단어이다.
이자 李子
율곡 이이(李珥)와 퇴계 이황(李滉)도 한때 이자(李자)로 불린적이 있다. 이도중(李度中)이 이율곡의 책을 편찬하며 "이자성리서(李子性理書)"라는 제목을 붙인 적이 있고, 성호 이익(李瀷)은 퇴계 이황의 책에 "이자쇄어(李子粹語)"라고 이름 붙인적이 있다.
이율곡과 이퇴계의 이름 뒤에 "자(子)"를 붙인 이유는 만주족의 淸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후 聖賢의 道가 중국에서는 사라진 반면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적극적인 의사표시이었다. 하지만 이는 한 때뿐이었고, 또한 個人 차원의 높임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송자(宋子)로 존숭된 것은 조선 후기 내내 이루어졌고, 또 국가 차원의 높임이라는 점에서 율곡이나 퇴계의 경우와 달랐다.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典)"은 正祖의 명에 의하여 國費로 간행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사약을 마시고 죽은 송시열른 不死身처럼 국가의 성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송시열의 죽음
송시열... 그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최고의 聖賢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전러북도 정읍시에는 송시열의 수명유허비(受命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송시열은 이 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 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83세이었다. 당시 유배지이던 제주도에서 국문(鞫問)을 받기 위하여 압송되어 오던 중 이 곳에서 賜死된다.
受 命 遺 墟 碑 ..전북 정읍, 이곳에서 송시열은 賜死된다.
송시열은 83세라는 아주 많은 나이에 , 그것도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다. 조선시대에 대신이라는 신분은 역적의 죄가 아니라면 사형 당한 전례가 없었는데, 송시열은 逆賊이 아닌 " 罪人들의 首魁 "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사형을 당하였고, 그것도 국문을 당하기 위하여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서둘러 사약을 마시고 죽은 매우 특이한 죽음이었다.
연려실기술
연려실기술에는 송시열의 죽음에 대해 완전히 相反된 두 개의 기록이 실려 있다.
김재구(金載久)의 조야회통(朝野會通) ... 송시열은 오직 바를 직(直)자, 한 자로 후손들을 가르쳤다. 죽기 전날 밤,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죽는 날 밤에는 규성(奎星 ... 학문을 상징하는 별)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빛이 지붕위에 뻗쳤다...
나량좌(羅良佐)의 명촌잡록(明村雜錄) ... 사약을 받던 날, 송시열은 효종과 명성왕후의 어찰을 빌어 목숨을 구걸하였다. 그러나 받아 들여지지 않자 다리를 뻗고 바로 드러 누웠다. 끝내 마시지 아니하니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었는데, 한 그릇 반이 지나지 못해 죽었다고 되어있다. 죽음에 임한 그의 모습은 목숨을 구걸하는 소인배이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송시열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동시에 실려 있다는 것은, 이긍익이 이 역사서를 쓰면서 당시의 상반된 두가지 주장을 동시에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저술을 객관화하려는 의도이었다. 송시열은 조선 후기 최고의 유학자로 훗날 宋子로까지 칭송된 인물. 그러나 살아서는 물론 죽음의 순간까지 극단적인 讚辭와 非難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송자대전 宋子大全
책의 이름을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고 한 것은 ... 송시열을 孔子와 朱子에 버금가는 聖人으로 존칭하여 송자(宋子)라고 한 데서 비롯한 것이며, 서명을 문집(文集)이 아닌 "대전(大全)"이라 한 것도 이례적인 것으로, 당시 송시열의 門人들이 주축이 된 老論이 정계와 학계의 주도적 위치에 있으면서 송시열을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시켰기 때문이었다.
1717년(숙종 43)에 왕명으로 운각활자본(芸閣活字本)으로 간행된 우암집(尤庵集)과 경례문답(經禮問答), 그리고 부록. 年譜 등을 합하여 1787년에 간행되었다. 평안감사 이명식(李命植)의 주선으로 총 236권9원편 215권, 목록 2권, 부록 19권), 102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간행되었는데, 평안감영에서 간행되어 기영본(箕營本)이라고도 한다.
체재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의 편찬 방식에 따라 엮었으며, 券頭에 편찬의 원칙을 밝힌 18칙(則)의 범례(凡例)가 있다. 그리고 어제(御製) 묘비명과 제문, 어필(御筆)의 발문이 있어 송시열의 정치적 입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 책은 주로 소(疎), 차(箚), 서(書), 명(銘), 축문, 제문, 신도비명(神道碑銘), 묘갈명(墓碣銘)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들 자료에는 북벌(北伐)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을 주장한 송시열의 정치적,사상적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서찰은 102권에 걸쳐 수천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당대의 정치가와 학자들이 망라되어 있어,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을 밝혀 주는 자료들이 다수 있다. 그리고 삼학사전(三學士傳), 임경업장군전(林慶業將軍傳) 등 이 책의 전반에 나타나 있는 의리명분론(義理名分論)은 당시 집권층을 형성하고 있던 門人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조선사회 내의 학문 역량을 심화시키고 위정척사 사상과 韓末의 의병운동의 사상적 연원이 된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에, 18세기 이후에 조선 사회를 보수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한 주요한 축이 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後學들이 그린 송시열의 초상화
호걸과 영웅의 자태로 以豪傑英雄之資 조심하고 삼가하여 공덕을 세웠네 有戰兢臨履之功 좁은 담 안에서도 호연지기를 모으니 險浩氣禦環堵之灼 우주를 채울 만하고 可以塞宇宙 작은 한 몸으로 중임을 감당하니 任至重於一身之小 화산 숭산에 말 설 만하네 可以抗華嵩 높은 조정에 출사하여 進而置之巖廊 제왕의 사부가 되어도 영화를 뽐내지 않고 爲帝王師而不見其秦 골짜기에 물러나 退以處乎丘譴 사슴과 벗하여도 곤궁하다 여기지 않네 與嬖鹿友而不見其窮 우뚝할 손, 단단한기둥이 큰 강물에 솟은듯 巖巖乎抵柱之峙洪河 늠름할 손, 낙락장송이 한겨울을 견디는 듯 稟稟乎寒松之挺大冬 진실로 억만년 뒤에 苛億世之下 이 칠분의 모습을 바라 본다면 觀乎此七分之貌 삼백년간 기운이 모인 바를 우러러 알 수 있으리 尙識其爲三百年間氣之所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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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규봉(金圭鳳)의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非山非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