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9/일. 버섯빵, 관료제
버섯빵
홍룡사에서 원효암 오르는 길에 지나가는 비가 살짝 뿌린다. 곳곳에 버섯이 꽃처럼 피어난다. 땅도 공기도 습기를 잔뜩 머금어 토양은 이미 균사로 가득하고, 참을 수 없다는 듯 빵이 부풀어오른다. 버섯빵이다. 솔땀버섯 하나를 손가락으로 톡 치니 거저리 성충 30~40 마리가 후두둑 떨어진다. 불개미들도 많다. 한쪽에서는 민달팽이가 열심히 냄새무당버섯의 살을 파먹고 있다. 버섯은 이들 작은 벌레들에게 얼마나 부드럽고 맛있는 빵인가? 냄새도 구수하다. 버섯들에게도 그렇겠지만 민달팽이에게도 이맘때가 천국 같은 시절일 것이다. 촉촉한 숲 어디를 가도 마를 위험이 없고, 어디를 가도 먹을 것이 널려 있다. 민달팽이는 하얗고 촉촉한 버섯빵으로 잔뜩 배를 채우고 짝짓기를 할 것이다. 한편 초소 근처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살쾡이 새끼들 생각이 난다. 요즘은 초소를 떠나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긴 듯 눈에 안 띈다. 운무 휘날릴 때 뒤돌아보며 걷던 새끼 살쾡이 모습이 눈에 선하다. 비바람에 흠뻑 젖어 죽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가혹한 시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없는 기회인 것이 자연이다. 그러니 무엇을 좋고 무엇을 나쁘다 하겠는가? 보기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오늘 본 버섯들은 긴골광대버섯아재비, 냄새무당버섯, 노랑무당버섯, 넓은갓젖버섯, 노란다발버섯, 느티만가닥버섯, 말불버섯, 비듬땀버섯, 솔땀버섯, 황갈색시루뻔버섯, 비늘버섯 등이다. 버섯들 종류가 하도 다양하여 대조하는 것이 쉽지 않다.
흰자줏빛 등골나물꽃들이 요즘 곳곳에서 올라오고 있다. 어제 달맞이꽃도 그렇지만 벌써 가을을 예감케 하는 꽃들이다.
관료제
어제도 천성산 정상 부근에는 15동의 텐트가 쳐지고 야영객이 20여명 있었다. 이곳에서 생활하다보니 이곳 사람들의 습성과 경향에 대해 대충 알게 되는 게 있다. 일단 천성산 정상은 군부대였고 바로 밑엔 원효암이라는 암자가 있는 탓에 도로가 잘 닦여 있다. 주차장까지 넓게 마련되어 있어 접근이 용이하다. 야영객의 경우 70~80% 가량은 해질 무렵 자가용을 이곳에 주차시켜 놓고 야영장비를 챙겨 정상으로 이동한다. 가족 단위나 친구, 동호회 등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홍룡사나 영산대 등 기타 방향에서 등산으로 오는 경우도 있지만 다섯에 하나를 넘지 못한다. 산악자전거의 경우도 비슷하다. 홍룡사 가는 자동차길 임도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하지만 양산을 포함해 부산이나 울산 등 거리가 되는 지역에서 동호회 단위로 오는 경우 트럭을 대절해 트럭에 자전거를 싣고 원효암 주차장까지 와 그곳부터 자전거를 타고 온다. 야영객이나 산악자전거나 모두 천성산 정문 철문을 통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문 철문에 국립공원 수준으로 확고한 경고문을 부착하고, 정물의 안쪽 철문은 습지복원 안내문과 출입금지 안내판, 그리고 열쇠를 채워놓아야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꾸준히 계도를 하는 것이 관행화된 산악 레저문화를 바꾸어나가는 길이다. 하지만 사람들도 요령을 발명해내기 때문에 금지 안내판은 여러 곳에 설치해 자꾸 인지되도록 해야 한다.
한 동안 텐트나 산악자전거나 만나는 족족 말로 설명을 했다. 하지만 말로 해서는 거의 먹혀들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말로 타일러야 그 순간만 지나면 끝이고 변화가 없었다. 산악자전거는 동호회의 전파력이 강한데 동호회의 설득은 쉽지 않았다. 이런 요인에는 아무래도 우리 사회가 행복을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경쟁사회인 탓도 있겠고, 국가와 정권의 강압과 명령에 의해 행동을 수정하는 습성에 너무 익숙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당장 국립공원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대개 금지판을 보면 자연공원법 몇 조에 의거 벌금을 물리겠다 고발조치 하겠다 등의 법적 권위와 협박성 경고를 동원한다. 그냥 협조와 부탁 정도로 되질 않는다. 일종의 파상공격에 의한 장기 게릴라전이 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 사회가 이기적 자본주의와 강권의 역사를 겪으며 길러진 습성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으로서는 사적 이기심을 최대한 추구하고, 강권과 명령에 의해 공공의 규칙을 준수하는 데 익숙해졌다. 공공에 대한 사유와 합리적 판단에 의한 행동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 때문에 자연공원 안에서의 레저스포츠는 공공영역과 사적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공간이 되기 일쑤다. 정작 공공의 주인이 되어야 할 시민이 공공의식 부재로 공공의 침입자가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가지산 도립공원 내원사 지구 관리를 담당하는 양산시청의 산림공원과의 책임과 권한에 부득이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처음 이곳에 와 자연공원 내에서 금지된 산악 레저스포츠 문화를 보고 지월스님을 통해 이곳의 상황을 전해드리고 대책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스님이 이곳에 관심을 갖고 양산시청과 꾸준히 대화를 해오고 계시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우선 인터넷에 홍보하고 안내되고 있는 이곳의 스마트 산악자전거길 구간이 폐쇄되고, 정상 데크 길에는 산악자전거 출입을 금한다는 문구판이 부착되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철문에 설치해야 할 안내판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산악자전거인들이 정상의 데크길을 이용하지 않고, 정문 철문을 통과하거나 넘어 출입이 금지된 습지복원지역을 관통해서 올라왔다. 데크길에는 목계단이 있는 탓이다. 그게 거의 굳어져 데크길을 이용해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단속괴 철문 금지안내판의 필요를 알려도 양산시에서는 별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5월 10일인가 철쭉제와 더불어 산악자전거 대회를 하고 이후 조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름 정책의 실적과 관계가 있다고 하니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 기다렸다. 하지만 대회가 끝나도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청에 야영과 산악자전거 문제로 거듭 민원을 두 차례 넣었다. 산악자전거는 자신들이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답변의 전부였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식이었다. 기존의 조치와 방식이 효과가 없다는 것이 민원 내용인데 고작 기존의 방식을 하고 있다는 게 답변이었다. 야영문제도 민원을 넣으니 전화가 왔다. 야영객들이 주로 야영하는 지역을 묻기에 알려줬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렇게 7월 중순이 지나니 지월스님이 시청의 산림공원과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매년 1월에만 인사이동을 하는 줄 알았는데, 7월에도 인사이동이 있었다. 한숨이 푹 나왔다. 한편 과거 등산안내판 지도가 이미 10년 전에 폐쇄된 등산로를 버젓이 주등산로로 표시해놓은 상황이기에 등산안내판 교체를 건의했었는데, 새로 제작된 것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0년 전 폐쇄되어 사용되고 있지 않은 등산로를 이제야 폐쇄 등산로로 바꾸어 표기한 게 전부였다. 주등산로도 잘못 그려진 곳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고칠 부분을 말해주었건만 쇠귀에 경 읽기가 되어버렸다. 도무지 천성산과 등산로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부재한 상태에서 같은 실수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상에 세운 야영금지 안내판을 보고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내판의 문구는 이랬다. ‘야영·취사 행위 금지구역-양산시’ 이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정상에 한 개. 문구 내용도 그렇지만, 최소 다섯 개 이상을 세워야 하는데 달랑 하나인 것도 문제였다. 소극적 정책기조가 확 눈에 띄었다. 그러자 당장 바로 어제 야영객들은 정상을 제외한 사자봉이나 화엄벌 언덕에 야영을 하였다. 천성산 부근은 야영할 곳이 그야말로 널려 있기 때문이다. 정상의 야영금지 안내판으로는 정상만 금지된 것으로 읽힐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역시 아니구나 싶었다. 일단 시 정책이 시민들의 불평을 염려해서인지 소극정책을 기조로 삼는 것을 안 이상, 그리고 담당자가 현장은 물론 업무파악을 정확히 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 자명해진 이상,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을 구체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제시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험을 하니 공무원과 관료제도의 맹점이 확 드러난다. 돌고 도는 관료제 속에서 그들이라고 어쩌겠는가? 현장은 멀고 어느새 타성에 익숙해지고, 어느새 실적과 전시행정이 주업무가 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것은 무능 때문이 아니라 구조 때문이다. 나는 현대 한국사회의 전문가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부분 직업적 기득권에 안주하고 권력에 타협하여 소신을 펴는 전문가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전문가의 지배를 가장 위험하고 끔찍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일에 정통한 사람이라는 순수한 의미 그대로의 전문성이라는 말을 여기서는 사용해야겠다. 관료로서 공무원은 일종의 철밥통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유능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공무원을 지원한다. 하지만 자신이 진짜 좋아서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담당해야 할 업무의 성격도 다양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잦은 인사이동과 담당업무 변화는 현장을 이해하고 현장에서 필요한 일을 할 가능성을 거의 없게 만든다. 그러니 과시적인 기획과 정책이 속출하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나름 열심히 일을 하지만 엉뚱한 경우가 많다. 이래서 공공의 일을 관료제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늘 한계가 있다. 때문에 관료들은 전문가에 의지해 일을 추진한다. 하지만 전문가의 경우도 현장에 대해 정통하지 못한 채 피상적 수준에서 전문성을 발휘한다. 그들의 가장 큰 약점은 현장의 다양한 맥락을 읽지 못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들의 논거는 대개 정책이 필요로 하는 정당성을 위한 코스프레로 사용된다. 결국 돈줄을 쥔 권력을 위해 전문성은 복무한다. 왜냐하면 전문가란 전문성을 독점해 돈을 버는 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장에 능통하고 맥락을 훤히 꿰고 있으면서 공공의식을 갖춘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뭄에 콩 나듯 어려워졌다. 현장은 결국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뿐인가 정책이 현장을 교란하고 파괴하게 된다. 관료와 전문가들은 분리불가능한 공생관계이다. 현장과 공공은 어떠한가? 알 수 없고 알 수 없다. 그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시민의 관심과 참여가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정말 중요한 공공의 일을 관료와 전문가에게 모두 맡겨두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살던 예천의 면사무소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귀농할 때 귀농인 이사지원비를 신청했는데 담당자가 군청에 신청을 하지 않고 서랍에 그대로 묵힌 채 해가 바뀌고 다른 면으로 옮겨가버렸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귀농한 사람이 있어 같이 신청했던 터라 담당자에게 몇 차례 물었으나, 신청자가 더 모이면 한꺼번에 신청하려 한다며 한 달 두 달 미루었다. 우리 둘이 모두 순둥이란 알아서 해주겠지 하며 기다리다 또 물어보면 기다리라는 답변을 듣다가 1년이 훅 지나가 버리고, 담당자는 떠나버렸다. 소위 시쳇말로 어이가 털리는 일이었다. 시골 면사무소와 직원들의 실태가 한 눈에 확 들어왔다. 관료제의 타성이 그렇게 무섭다.
나는 관료제도를 부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현실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으니 관여할 때는 관여하며라도 공공의 일이 제대로 집행되도록 힘쓰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민이 인민의 일을 자발성과 자치력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렇게 제도와 기구에만 의존한다면 얄팍한 공공을 위해서도 엄청난 비용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직접성 만큼 민주주의에 절실한 것은 없다.
나는 교사도 되지 말고 관료 내지 공무원도 되지 말자고 한다. 우리의 삶을 우리가 직접 꾸리자고 말한다. 왜 못하는가? 인류는 그렇게 살아왔다. 공공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공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공공에 봉사하는 사람 보았는가? 공공을 빙자해 이익을 챙기고 군림하는 것이 관료제요 전문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