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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애욕과 같은 것은 없다(There is nothing like lust).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애욕과 같은 것은 없다. 애욕은 가장 강한 열정이다. 다행히 우리는 더 강한 것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진리에 대한 갈망이 애욕보다 약하다면 세상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나 바른 도를 따를 수 있겠는가?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애욕에 빠져 있는 사람은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러 달리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손을 태우는 화를 입는다. 천신이 붓다에게 아름다운 선녀를 보내어 붓다의 뜻을 깨뜨리려 하자 붓다가 말했다.
“물러가거라! 오물로 가득 찬 가죽 주머니가 와서 어쩌자는 것이냐?”
그러자 천신이 공손하게 절하고 도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붓다가 그를 위해 말해 주니, 그는 곧 수다원과를 얻었다.
붓다의 종교의 정수는 각성이다. 그 안에 기도란 없다. 신이 없기 때문에 기도가 있을 수 없다. 그 안에 어떤 기도도 있을 수 없다. 기도에는 항상 동기가 있기 때문이다. 기도란 욕망의 한 형태, 탐욕의 한 형태이다.
기도 안에 바로 불행의 원인이 깊숙이 숨어 있다. 불행의 원인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지 못하는 데 있다. 불행의 원인은 우리가 다른 류의 삶, 다른 환경, 다른 세상을 원하는 데 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의 상상보다 못하다. 불행의 원인은 상상, 욕망, 희망에 있다. 기도 속에는 온갖 이유들이 존재하므로, 붓다의 종교에는 기도가 존재할 가망성이 없다. 오직 각성만이 그 열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성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기도할 때 그대는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명상할 때 그대는 어떤 것을 명상한다. 하지만 깨어 있을 때는 단순히 그대의 존재에 중심을 두고 있다. 다른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른 것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대는 단순히 깨어 있다.
각성에는 대상이 없다. 그것은 순수 주체이다. 그것은 그대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대의 존재에 중심을 내리고 있다. 그대가 그대 존재 위에 서 있을 때 그대는 밝게 빛난다. 그대의 불꽃은 어떤 연기도 없다. 그대의 빛 속에서 삶 전체가 맑아진다.
그 맑은 속에 침묵이 있다. 그 맑은 속에 시간이 멎는다. 그 맑음 속에 세계가 사라진다. 그 맑음 속에는 욕망도 없고 동기도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단순히 존재한다. 미래도 원하지 않는다. 더 나은 세상도 원하지 않는다. 천국이나 모크샤도 원하지 않는다. 신도 원하지 않는다. 앎도, 해방도 원하지 않는다. 그대는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각성은 순수한 현존이며 중심에 자리잡은 의식이다. 붓다의 모든 노력은 그대가 중심을 잡고, 뿌리를 내리고, 연기 없는 불꽃, 흔들리지 않는 불꽃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 빛 속에 모든 것이 명료해지고 환영은 사라지며 모든 꿈들은 비존재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꿈꾸는 마음이 멎을 때 거기 진리가 있다.
그것을 기억하라. 오직 꿈꾸는 마음이 멎을 때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왜 그런가? 꿈꾸는 마음은 끊임없이 투사하여 사실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만일 욕망을 가지고 사물을 본다면 그대는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욕망이 그대를 가지고 논다.
한 여자가, 아름다운 여자가 지나간다. 혹은 남자가, 잘생긴 남자가 지나간다. 갑자기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그 남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대는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다. 그대의 욕망은 대상 주위에 꿈을 창조한다. 그대는 그대가 보고 싶은 대로 보기 시작한다. 그대는 투사하기 시작한다. 타인을 스크린으로 하여 그대의 가장 깊은 욕망들을 투사한다. 그대는 대상을 채색하여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 그대는 비전을 보고, 백일몽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물론 이 백일몽은 깨어지게 되어 있다. 실체가 터져 나올 때 그대의 꿈꾸는 마음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런 일은 수없이 일어났었다. 그대가 여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꿈은 사라진다. 여자는 전에 보았던 만큼 우아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대는 자신이 어떻게 그것에 속았는지 믿을 수가 없다. 그대는 여자의 단점을 찾기 시작한다. 마치 그녀가 그대를 속여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듯, 마치 그녀가 속임수를 쓰기라도 한 듯, 마치 그녀가 그렇지도 않으면서 우이한 척 한 듯이 그대는 그 원인들을 찾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대를 속이지 않는다. 그대 자신의 욕망과 꿈꾸는 마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대를 속일 수 없다. 그대가 환영을 창조했다. 그대는 결코 여자의 실체를 본 적이 없다. 조만간에 실체가 승리할 것이다.
모든 연애들이 항상 위기에 처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하여 연인들은 두려워지고 점점 실체를 보는 것을 피한다. 아내가 남편을 피하고 남편이 아내를 피한다. 그들은 똑바로 보지 못한다. 그들은 두려워한다. 그들은 꿈이 사라졌다는 것을 이미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제는 서로를 피한다.
들은 얘기이다.
한 남자가 그의 아내를 몹시 걱정했다. 그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자연히 그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는 흥신소에 요청해, 아내를 추적해서 그녀가 누구와 돌아다니는지,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필름에 찍도록 했다.
몇 주만에 탐정이 필름을 가지고 돌아왔다. 필름이 상영되고 남자가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듭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의 아내가 누군가와 수영을 하고, 극장에 가고,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하고, 그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정말 믿기지 않는 듯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탐정은 그 이유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그가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일까?’
마침내 필름 상영이 끝났을 때 남자가 말했다.
“믿을 수가 없소!”
탐정이 말했다.
“너무하군요. 필름을 보셨지 않습니까? 이 외에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그가 말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내 아내가 누군가를 저토록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거요. 저 남자가 내 아내에게서 무엇을 보는지 알아봐요. 나는 여태까지 그녀와 살아왔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저 남자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 거요?”
남편들은 아내에게서 보곤 했던 것들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아내들은 남편에게서 보아 왔던 것들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실체는 동일하게 남아 있다. 실체를 거스르는 꿈은 영원히 승리할 수 없다. 조만간 꿈은 산산이 부서진다. 그런 일은 사방에서 일어난다.
그대는 돈을 좇는다. 그대는 돈을 꿈꾼다. 그대는 결코 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보지 않는다. 그대는 그들을 보지 않는다. 그대는 돈을 추구할 뿐이다. 그대는 돈이 있다며 모든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다음 쉬고 즐길 것이라고, 그런 다음 축제를 벌이고 노래하고 춤출 것이라고, 그리고 하고 싶어도 돈이 없고 기회가 없어서 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대는 돈 있는 사람들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춤추지 않는다. 그들은 축제를 벌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때때로 행복해 보이는 거지를 마주치는 일은 가능하다. 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부자를 마주치는 일은 불가능하다. 행복한 부자를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거지는 아직도 꿈꿀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거지에겐 여전히 희망이 있다. 그가 여전히 행복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는 내일은 더 나아지리라고, 아니면 모레는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거지에게는 미래가 있지만 부자에게는 모든 미래가 사라졌다. 그는 얻고 싶은 모든 것을 얻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돈이 모아졌을 때 그는 문득 좌절감을 느낀다. 그가 돈을 가지고 상상했던 것들을 이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그 꿈은 사라졌다.
인간은 끊임없이 돈, 명예, 권력을 꿈꾼다. 그러나 그것을 얻으면 항상 좌절한다.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결코 욕망을 달성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욕망을 달성하여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때 거기에 좌절이 있다.
욕망의 본성은 꿈꾸는 것이다. 그대는 자기에게 없는 것만을 꿈꿀 수 있다. 그대의 옆집의 아내를 꿈꿀 수 있다. 어떻게 그대 자신의 아내를 꿈꿀 수 있겠는가? 그대는 한 번이라도 그대의 아내를 꿈꿔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남의 아내에 대해서만 꿈꿀 수 있다. 그 사람 역시 그대의 아내를 꿈꿀 것이다.
멀리 있는 것은 무엇이나 좋아 보인다. 가까워질수록 사정은 달라진다. 현실은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낸다.
깨어 있는 것은 꿈꾸지 않는 것이고, 깨어 있는 것은 우리가 보통 살고 있는 이 무의식적인 잠의 상태를 버리는 것을 뜻한다고 붓다는 말한다. 우리가 몽유병자, 잠자면서 걸어다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살고 있지만, 우리의 삶은 너무도 피상적이다. 삶 깊숙이 꿈, 꿈, 꿈이 있다. 꿈의 암류(暗流)가 계속되고, 그 암류는 계속 우리의 시각을 오염시킨다. 그 꿈의 암류는 계속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한다. 그 꿈의 암류는 계속 우리의 머리를 혼란시킨다.
잠속에서 사는 사람은 절대로 지성적일 수 없다. 각성은 지성의 가장 순수한 불꽃이다. 잠속에서 사는 사람은 점점 더 어리석어진다. 만약 그대가 혼미하게 산다면 그대는 어리석어질 것이다. 둔해질 것이다.
이 둔함은 부서져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더욱 깨어 있음으로써만 가능하다. 더욱 각성을 가지고 걸어라. 좀더 각성을 가지고 먹어라. 좀더 각성을 가지고 말하라. 좀더 각성을 가지고 들어라.
들은 얘기이다.
철학적인 성향의 마음을 지닌 엄마 원숭이가 있었다. 이 성향은 종종 그녀를 건망증에 빠뜨리고, 이름이 찰스인 그녀의 아기에게조차 부주의하게 하였다.
많은 신식 엄마들처럼, 그녀는 아이를 잘 돌보지 못했고, 대신 생각들로 언제나 마음이 산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에 그녀의 어머니가 했던 대로 일상의 일은 했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를 등에 업고 야자나무를 기어 올라갔다. 거기엔 야자열매들이 있었다. 그녀는 열매들 사이를 뒤지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아기가 엄마의 등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고 있었다.
역시 생각이 많던 찰스가 떨어지면서 엄마에게 소리쳤다.
“엄마, 우리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매달리기 위해서야.”
우리는 매달리기 위해 여기에 있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평생 그 짓만을 한다. 그는 줄곧 희망과 꿈과 미래에 매달리려고 한다. 그는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 마치 그것만이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여기 살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처럼.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생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않는 한,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 그 각성 속에 엑스터시가 있고, 그 각성 속에 만족이 있으며, 그 각성 속에 평화가 있는 존재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는 한, 그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은 두 가지 길로 살 수 있다. 하나는 계속해서 주변에 매달리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더욱더 자각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깨닫기 위한 엄청난 노력일 뿐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애욕 같은 것은 없다. 애욕은 가장 강한 열정이다.
사람들은 아주 손쉽게, 아주 과학적으로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평생을 성 지향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 무엇을 말하든 그것은 단지 표면일 뿐이고 깊은 곳에는 성에 대한 강박 관념이 남아 있다. 그것은 성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어린이는 여기저기에서 유희하기 시작한다. 어린이는 여기저기에서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생동안 계속된다. 늙어 죽을 때도 그들은 성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은 내가 관찰한 것 중의 하나인데, 사람이 죽을 때 그의 얼굴이나 눈을 보면 그가 살아온 삶이 어떤 부류였는지 알 수 있다. 만약 그가 마지못해, 저항하면서, 죽음과 싸우면서, 죽고 싶어하지 않으면서, 무력감을 느끼면서, 삶에 매달리고 싶어하면서 죽는다면 그에겐 성에 사로잡힌 생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커다란 위기의 순간에, 그 죽음의 순간에 그의 모든 성욕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를 것이다.
사람들은 성을 생각하며 죽는다. 99%의 사람들이 성을 생각하면서 죽는다. 그대는 놀랐을 것이다. 아주 드물게 성을 생각하지 않으며 죽는 사람들이 있다. 성을 생각하면서 죽는 사람은 곧바로 다시 태어난다. 그의 생각은 온통 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즉시 그는 자궁으로 들어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음의 순간에 그대의 일생은 응축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에 그대가 살아왔던 모든 것과 맞닥뜨려야 한다.
그대가 각성의 삶을 살아 왔다면 그때 죽음은 아주 편안하고 평화롭고 우아하다. 거기엔 품위와 우아함이 있다. 그때 사람은 쉽게 죽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그것을 환영한다. 거기에 저항은 없고 아름다움이 있다. 거기에 투쟁은 없고 협력이 있다. 그는 그저 죽음에 협력한다.
성적인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성에 대립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해되어져야 한다. 성은 탄생이고 죽음은 성을 반대한다. 죽음은 탄생이 그대에게 주었던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대에게 이것을 상기시켜야겠다. 그대 마음속에 있는 삶과 죽음의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죽음은 삶의 정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성과 정반대이다. 성은 탄생과 동의어이다. 탄생은 성 속에서 나온다. 죽음은 탄생과 대립되고 죽음은 성과 대립된다. 죽음은 삶을 반대하지 않는다.
각성의 삶을 산다면 머지않아 성욕으로 움직였던 에너지는 변형된다. 그대가 그것을 변형시켜서가 아니다. 단지 깨어 있음으로써 꿈은 사라진다. 타고 있는 횃불을 방안에 가져오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성은 그대 존재 안의 어둠과 같다. 그것은 그대가 깨어 있지 못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붓다는 말한다.
애욕 같은 것은 없다. 애욕은 가장 강한 열정이다.
그것은 아주 일찍부터 시작된다. 만약 그대가 프로이드 학파의 학설을 듣는다면……. 그리고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소위 성자라고 하는 사람들보다 그들이 더 옳기 때문이다. 성자들은 그대에게 편리하고 안락한 진리들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결코 편리하지도, 안락하지도 않다. 오직 거짓만이 편리하고 안락하다. 프로이드는 몹시 불편한 진리를 말한다. 그대는 거짓된 삶을 살아 왔기에 진리가 불편한 것이다.
누가 진리를 말할 때면 늘 그것은 그대에게 충격을 주고, 그대의 깊은 곳을 치고, 거짓을 치고, 그대를 불안하고 불편하게 한다. 그대는 그대의 거짓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프로이드가 어린이는 아주 처음부터 성적이라는 이 사실을 주장했을 때, 그는 전 세계와 맞서게 되었다. 소위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적대시했다. 지금 나는 종교인들이 그토록 엄청난 진리를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이는 성에서 태어나므로 그가 성적인 것은 당연하다. 아이는 성에서 나오므로 그가 성적인 것은 당연하다. 아이들은 그들의 성적인 삶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었다.
네 살 난 여자애와 세 살 난 남자아이가 손을 잡고 이웃집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소꿉놀이를 하고 있어요.”
이웃 여자가 문을 열었을 때 여자애가 말했다.
“이 애는 내 남편이고 나는 아내예요. 들어가도 되나요?”
여자는 그 광경에 매혹되었다.
“들어오너라.”
그녀가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아이들에게 약간의 레모네이드와 과자를 내놓았고 그들은 그것을 고맙게 받았다. 두 번째 잔의 레모네이드를 내놓자 여자애가 거절하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가야겠어요. 내 남편이 막 바지에 오줌을 쌌거든요.”
그것은 아주 일찍부터 시작된다. 남편과 나애의 소꿉놀이……. 그들은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후까지 간다.
또 다른 이야기.
80대의 노파가 정신과 의사에게 가서 남편의 무력증을 불평했다.
“남편의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의사가 물었다.
“아흔 살이에요.”
“그가 당신의 육체에 무관심한 것을 처음 안 것이 언제지요?”
“글쎄요…….”
그녀가 말했다.
“처음 안 것은 지난밤이었고,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은 오늘 아침이죠.”
아흔 살 된 남자의 아내는 남편의 무력증을 걱정하고 있다. 그녀는 지난밤과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그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계속된다. 평생 동안 성에 사로잡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산소를 호흡함으로써, 운동을 함으로써 에너지를 얻고, 삶을 삶으로써 에너지를 창조한다. 그는 계속해서 에너지를 창조한다. 이 에너지가 그대 안에 쌓였을 때 그대는 불편하다. 그대는 그것을 밖으로 쏟아 버리고 싶다. 그것이 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섹스는 단순히 짐을 덜어내는 것으로 쓰인다. 이것은 어리석다.
한편으로 그대는 열심히 일한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음식을 먹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영양가를 취할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집을 갖고 더 쉴 수 있을까. 그대는 더욱 신선한 공기와 태양과 해변과 하늘과 푸른 나무를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그대는 에너지를 축적하고 에너지를 일으킨다. 그러고 나서 그대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쏟아 버릴까, 어떻게 하면 그것을 아래로 배출할까 걱정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쏟아 버리고는 다시 축적한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한 쪽에서는 계속 에너지를 쌓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것을 버린다. 이것이 일생이다! 에너지를 모으고 버리고, 에너지를 모으고 버린다. 만약 이것이 전부라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반복이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에너지가 없을 때는 에너지에 굶주리고, 에너지가 있을 때는 버릴 준비를 한다. 그대는 그것을 버릴 방법과 수단을 찾는다.
붓다는 이것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강한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이것에 맞추어서 인생을 산다면 그때 삶은 낭비이다. 순전한 낭비이다.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결코 어디에도 이르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충족되지 못한다. 마지막에 가서 죽음이 오면 그대의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인생의 목적일 수 있는가? 만약 이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삶은 의미가 없다. 삶 그 자체는 단지 우연히 생겨난 것일 뿐이다.
서양의 가장 심오한 사색가 중의 한 명인 G.K. 체스터톤은, 인간은 타락한 신이거나 아니면 머리가 텅 빈 동물이라고 말하곤 했다.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 있다. 인간이 타락한 신이거나 아니면 머리가 텅 빈 동물일 가능성. 만약 성이 유일한 이야기라면 인간은 머리가 텅 빈 동물이다. 그러나 거기엔 분명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거기엔 틀림없이 삶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그대의 부모는 그대에게 탄생을 주기 위해 살았다. 그대는 몇몇의 아이들에게 탄생을 주기 위해 살 것이다. 그리고 그들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탄생을 주기 위해 살 것이다. 이것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목적은 무엇인가?
붓다는 말한다.
“각성함으로써 그대는 에너지에게 다른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성 에너지는 아래쪽으로 움직인다. 성 에너지는 땅을 향해 움직이다. 성 에너지는 중력에 따라 움직인다. 그대가 각성하게 될 때 변화가, 방향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대가 깨어 있으면 있을수록 성 에너지는 좀더 위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중력을 거슬러 가기 시작한다. 그것은 하늘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중력의 선상에서가 아니라 우아함의 선상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만약 성 에너지가 아래쪽으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소모이다. 성 에너지가 위쪽으로 움직인다면 그대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존재의 풍요, 새로운 의식의 높이로 폭발하기 시작한다.
자, 이 에너지를 위쪽으로 움직이는 데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다. 그대는 그것을 억지로 위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이 하타요가가 하는 일이다. 물구나무서기가 의미 있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대는 물구나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가? 그것은 성 에너지가 머리를 향하게 하려고 이용하는 속임수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대는 중력 아래서 산다.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머리가 성 센터보다 낮게 되어 에너지는 머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얼마 동안 머리로 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다시 다리로 서야만 할 것이다. 중력의 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다. 그대는 단순히 중력의 법칙을 이용할 뿐이다. 실제로 그대는 중력의 법칙을 속인다. 그것은 합법적인 길로 비합법적인 짓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변하지 않는다. 그대는 변형되지 않는다. 그대의 존재는 동일하게 남아 있다.
하타요가(Hatha yoga)는 성 에너지가 아래쪽으로 흐르는 것을 막는 많은 방법들과, 성 에너지를 강제로 위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개발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폭력적이고 일종의 강요된 투쟁이다. 그 성장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대는 하타요기들의 얼굴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얼굴은 항상 긴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대는 거기에서 우아함을 발견할 수 없다. 그대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을 발견할 수 없다. 그대는 거기에서 신을 발견할 수 없다. 그대는 미묘한 에고만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속인 것이다. 그는 본성 자체를 속인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속일 수 없고 그것은 진짜일 수가 없다.
붓다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개발했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방법을. 붓다가 그 상징이 되었다. 그대는 붓다의 상을 본 적이 있는가? 그토록 우아하고, 그토록 성스럽고, 그토록 평화스러운, 한 점의 흠도 없는, 얼굴에 긴장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토록 순수한……. 그는 그의 에너지를 가지고 무엇을 했는가? 그는 결코 그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그것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으며 본성을 기만하지 않았다.
붓다는 모든 법칙은 그대가 알든 모르든 간에 그것의 반대를 가지고 있다는 아주 미묘한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제 과학은 그것을 잘 안다. 만일 거기 우리가 중력이라 부르는, 땅 쪽으로 끌어당기는 법칙이 있다면 반드시 중력에 맞서는 또 다른 법칙이 있다. 우리가 그것을 알든 모르든 간에.
법칙은 서로 상반된다. 그리고 상반됨으로써 그들은 균형을 유지한다. 그 대립과 대비 때문에 그들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존재함으로써 존재한다. 남자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고 여자도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아래쪽은 위쪽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바깥쪽은 안쪽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삶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성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성을 초월해 갈 수 있는 법칙이 존재한다. 그래서 성이 아래쪽을 향해 움직인다면, 반드시 위쪽으로 움직이는, 에너지가 위쪽으로 움직이도록 돕는 법칙이 있고, 이 법칙을 탐구하고 발견해야 한다.
붓다는 깨어 있을수록 에너지는 자동적으로 위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의 몸에는 많은 센터들이 있는데, 각각의 센터는 에너지의 질을 바꾸다. 그대는 전기가 매일 수많은 형태로 변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어떤 곳에서 그것은 빛이 된다. 어떤 곳에서는 선풍기를 돌리고, 어떤 곳에서는 모터를 돌린다. 단지 다른 종류의 메커니즘만 있으면 전기는 수백만 가지의 형태로 사용될 수 있다. 인간의 인격 속에도 많은 센터들이 존재한다. 성 센터는 가장 낮은 센터이다. 에너지가 그 센터로 움직일 때, 그것은 생식력이 된다. 그대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그것은 성 에너지의 가장 낮은 이용이다. 그것이 조금 더 높이 움직이면, 그때 다른 특질들이 찾아온다. 그것이 가슴의 센터에 이를 때, 그것은 사랑이 된다. 그리고 사랑은 그대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준다.
에너지가 성 센터에서만 움직이는 사람은 절대 많은 것을 알 수 없다. 만일 여자가 지나가면 그는 오직 육체만을 볼 것이다. 만일 그대의 에너지가 가슴의 센터에서 움직인다면, 여자가 지나갈 때 그대는 그의 미세한 육체―훨씬 높고 아름다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그녀의 육체가 아닌 그녀의 가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별로 보잘것없는 몸 속에 아름다운 가슴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 반대로 아주 추한 가슴이 아주 아름다운 몸 속에 존재할 수도 있다.
만일 그대가 육체밖에 볼 수 없다면 그대는 조만간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몸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가슴하고 살기 때문이다. 생명력은 가슴에서 온다. 그대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추한 여자를 선택할 수도 있다. 만약 그녀의 가슴이 아름답지 않다면, 그녀의 미세한 육체가 아름답지 않다면, 그대는 곤란해질 것이다. 그대는 아주 멋있어 보이고 강해 보이는, 그러나 내면의 멋이라고는 없는, 내면의 질은 형편없고 육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짐승 같은 남자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대는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조만간에 그대는 야수와 만나야 할 것이다. 그대는 야수와 함께 살아야 할 것이다. 그대는 항상 “이렇게 멋진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 아름다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하며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만약 에너지가 더 높이 올라간다면, 그땐 가장 높은 봉우리인 사하스라르(sahasrar)에 이르는데, 그곳에서 에너지는 기도가 된다. 그곳에서 돌연 그대의 가장 깊은 눈이 뜨여 그대는 몸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슴도 볼 수 있고 영혼도 볼 수 있게 된다. 사하스라르가 열린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전적으로 다르다. 그는 결코 육체만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를 바라봐도 그는 나무의 영혼을 본다. 형태만이 유일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있지만 이제 그것은 내면의 빛으로부터 광채를 발한다.
사하스라르에서 사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산다. 그대는 붓다가 그대와 같은 길로 걷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다른 길을 걷고 있고 다른 세계를 걷고 있다. 그는 그대와 함께 걸을 테지만 그것엔 어떤 의미도 없다. 그의 비전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에너지는 다른 높이에 있다. 그는 다른 명료함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애욕은 모든 에너지의 축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강한 열정이라고 붓다는 말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낙담할 필요는 없다.
애욕 같은 것은 없다. 애욕은 가장 강한 열정이다. 다행히 우리는 더 강한 것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진리에 대한 갈망이 애욕보다 약하다면 세상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나 바른 도를 따를 수 있겠는가?
그는 애욕보다 더 높은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진리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한다. 삶보다 더 높은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진리를 향한 추구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삶을 희생할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열정을 희생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열정은 진리에 대한 것이다. 붓다는 그것을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 부른다. 그대는 그것을 신에 대한 열정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오직 성(性)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은 미라의 이야기나 차이타냐의 이야기, 그리스도, 붓다, 크리슈나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 이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 예수가 거기 있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이 예수란 사람은 어떤 류의 사람인가? 어떤 식의 삶을 사는 사람인가?”
그들은 욕망과 성이라는 한 가지 삶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다. 그것은 마치 그의 성 에너지 전체를 높은 하늘에 화살로 쏘아 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의 과녁은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만질 수 없다. 그것을 자로 잴 수 없다.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삶은 위대한 열정, 위대한 모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붓다는 포기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는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는 변형을 지지한다. 성으로 움직이는 에너지를, 진리를 향해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저 서로를 탐험하고 싶어한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탐험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평생 서로의 존재를 탐험하는 것 같다. 진리에 대한 갈망이란 이 존재계의 실체를 탐험하고 싶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위대한 열정, 가장 위대한 열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보다 더욱 강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그것을 향해 움직이려고 하겠는가?”하고 붓다는 말한다.
사람들은 진리를 향해 움직였는데, 어떻게 이 진리에 대한 갈망을 알게 되겠는가? 그것을 좀더 설명해 보자. 그대가 진리에 대한 갈망을 느끼게 되는 데는 많은 것이 관건이 된다. 그대는 내 강의를 듣고 올 수 있다. 그대는 책을 읽고 올 수 있다. 그대는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을 보고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빌려 온 것일 테고, 갈망은 결코 빌려 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있거나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대는 갈망하는 것을 위장할 수 없다. 갈망은 위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 숱한 불행을 창조한다.
많은 사람들은 내게 와 진리를 탐구하고 싶어도 열망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 숱한 불행을 창조한다. 많은 사람들은 내게 와 진리를 탐구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단 한 가지를 묻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의 삶이 환영이이 입증되었는가?”
만일 그것이 환영임이 입증되지 않았다면 진리에 대한 진정한 열망은 일어날 수 없다. 그대 삶이 환영임을 보았을 때, 오직 그때만 진리를 알고자 하는 진정한 갈망이 일어난다. 만일 그대가 아직 삶의 환영 속에 있다면, 아직 그것의 마법에 걸려 있다면, 아직 그것에 의해 환각을 일으키고 있다면, 그때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다시 또 다른 환영, 또 다른 욕망이 될 것이다. 그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진리는 그대 욕망의 일종이 될 수 없다. 진리는 모든 욕망들이 헛되다는 것이 입증될 때, 모든 삶이 무의미하게 보여서 그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그대의 모든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대는 곤경에 처한다. 그대는 말할 수 없이 낙담했다. 그대는 실패했고, 그대의 모든 꿈은 사라졌다. 그대는 뿌리부터 산산조각 났다. 그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에너지로 진동하며 서 있다. 그때 그 에너지는 모여서 그대 안에 새로운 갈망,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갈망을 창조한다. 세상을 하나의 환영으로서 알 때, 오직 그 때에만…….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깊이 세상을 체험하라. 어디로부터 도망치지 말라―성에서조차도. 절대로 도망치지 말라. 단지 한 가지만 하라.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의 욕망이 어디로 움직이든지, 깨어 있음과 함께, 각성과 함께 가라. 성 행위를 할 때에도 그것을 명상으로 만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하라. 그러면 머지않아 그대는 그것의 환영을, 그 덧없음을, 되풀이의 무의미함을, 그 지겨움을, 둔함을, 그것을 통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에너지를 낭비하면 낭비할수록, 그대는 더욱더 죽음에 가까워진다.
들은 얘기이다.
한 세일즈맨이 서부의 자그마한 시골 도시를 지나고 있을 때 조그만 노인이 자기 집 앞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조그만 노인은 무척 만족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세일즈맨은 그에게 가서 말을 걸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영감님은 세상에 근심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군요.”
세일즈맨이 그에게 말했다.
“영감님의 장수와 행복한 삶의 비결이 뭡니까?”
“글쎄…….”
조그만 노인이 대답했다.
“나는 하루에 담배 여섯 갑을 피우고, 네 시간마다 버본 위스키 사분의 일을 마신다오. 또 일주일에 맥주 한 상자를 마시지. 그리고 절대 씻지 않고 매일 밤 나간다오.”
“저런!”
세일즈맨이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대단하십니다! 그래, 연세는 어떻게 되십니까?”
“스물다섯이오.”
그대는 계속 에너지를 낭비할 수도 있다.
환영 속에서 걷는 걸음걸음은 죽음을 향한 것이다. 탐욕 속에서 취하는 동작동작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니 주의 깊게 움직이고 깨어 있으라. 그것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자각하라. 그것은 단지 습관은 아닌가? 그것은 단지 자연의 최면은 아닌가? 그것은 단지 그대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계속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업무는 아닌가? 그것은 단지 삶에 대한 걱정들로부터의 망각은 아닌가? 아니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편견도 갖지 말라. 성자들이 말한 것을 듣지 말라. 그들은 아마 그것이 나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듣지 말라. 그들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그대는 그대 스스로 체험해서 찾아야 한다. 오직 그때만, 오직 그때만 그대는 진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른 누구의 경험이 아닌, 오직 자신의 경험만이 그대에게 진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
한번 그대가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그 진리를 보게 되면 에너지는 짐으로부터 해방되고, 에너지는 낡은 패턴에서 풀려나 그대 안에 모이게 된다.
과학자들은 양적인 변화가 어떤 단계에서는 질적인 변화가 된다는 법칙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물을 가열하면 열이 100도일 때 물은 증발한다. 그전에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99도에서 상당히 뜨겁지만 증발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1도 더, 100도에서 물은 갑자기 껑충 도약하여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대는 그 변화를 보았는가? 물은 아래로 흐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증발할 때 그것은 위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다른 노선을 취한다. 그대는 단순히 물을 어떤 온도로 가열했을 뿐 다른 무엇을 한 게 아니다. 어떤 열량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물은 눈에 보이고 수증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물은 아래로 가고 수증기는 위로 간다.
성 에너지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변화가 일어나려면 먼저 일정한 양, 일정한 분량이 쌓여야 한다. 그대가 에너지 저장소가 되어야 하고, 완전한 양이 모이는 순간 도약이 일어난다. 에너지는 더 이상 아래로 움직이지 않는다. 에너지는 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로 수증기처럼.
에너지가 아래쪽으로 움직일 때, 성은 바로 가시적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과학자들이 에너지가 위쪽으로 움직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것은 비물질적이 된다. 그것은 분명히 움직이지만 거기엔 통로가 없다. 붓다의 몸을 해부해도 위로 움직이는 성 에너지의 통로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엔 통로가 없다. 통로는 필요하지 않다. 물이 아래로 흐른다면 수로가 필요하지만 물이 증발될 때에는 수로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움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성 에너지에서도 일어난다.
각성은 열이다. 인도에서 우리는 그것을 바로 타프(tap)라고 불러왔다. 타프란 열을 의미한다. 타프는 그대가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대가 그대 안에 더욱 각성의 불을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각성의 불이 성 에너지를 가열시키는 것, 이것이 내면의 연금술이다. 그러면 에너지는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먼저 그대의 성은 사랑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그것은 명상이나 기도가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헌신의 용어를 따른다면 그것을 기도라 부를 수도 있다. 만약 그대가 보다 과학적인 용어를 따른다면 그것을 명상이라 부를 수도 있다. 한번 그대의 에너지가 위로 움직이면 그때 그대는 완전히 다른 빛 속에서 사물을 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 조그마한 노인이 버스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디디 덤덤 디디덤.”
버스 운전사가 주위를 빙 둘러보니 여행 가방이 좌석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가 노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방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디디 덤덤 디디덤.”
대단히 화가 난 버스 운전사가 벌떡 일어나 가방을 들어 창 밖으로 던져 버리고는 노인을 보며 소리쳤다.
“이제 뭐라고 하겠소?”
노인이 그를 보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디디, 덤덤, 디디덤―그건 내 가방이 아니야.”
붓다는 억압을 강조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해석자들은 여러 세기 동안 그렇게 말해 왔다. 나는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그 해석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억압은 사람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억압은 결코 사람을 변모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내 자신의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억압은 그대를 아래로 끌어당긴다.
그것은 억압이 아니다. 그것은 각성이다. 물론, 바깥에서 보면 그것은 억압처럼 보인다. 그대는 돈을 향해 달려간다. 뜻밖에 그대는 길바닥에서 보물을 발견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지나간다. 그 역시 그것을 보지만 관심이 없다. 그대는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대는 그가 보물을 요구할 것을, 그가 분명히 그것을 두 쪽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을 걱정했다. 그런데 그는 그냥 지나간다. 그는 그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대는 그가 미쳤거나, 아니면 포기했다고, 그가 세상을 포기하고 돈에 대한욕망을 억제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대는 돈에서 아무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대는 돈에서 너무나 많은 가치를 보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돈이 없다면 삶 전체가 무의미한 것 같다. 돈은 그대 삶의 전부로 보인다. 돈이 전혀 무의미해 보이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다. 그 사람이 너무 어리석어서 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모르든가, 아니면 욕망을 억누르고 있든가―그는 욕망, 탐욕, 야심을 억누르고 있다―둘 중의 하나이다.
붓다와 같은 사람이 세상에 출현할 때 사람들은 그 일을 그들 자신의 마음에 따라 해석한다. 그는 너무나 멀리 있는 것 같이 보이므로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이 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말할 것이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가 삶을 훈련해 왔다고, 훌륭하게도 탐욕과 갈망을 버렸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둘 다 틀렸다.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 둘 다 붓다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이 붓다가 되었을 때만 붓다를 이해할 수 있다. 달리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만일 그대가 히말라야의 정상에 서 있는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대 자신이 그 정상에 올라가야만 한다. 오직 그때, 그의 시각은 그대의 시각이 될 것이다.
나는 붓다에 대한 해석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이 모두 붓다가 마치 억압을 가르치는 것처럼 암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억압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각성을 가르칠 뿐이다. 각성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억압을 통해서 그대는 어떻게든 조절할 수 있겠지만 사정은 여전히 똑같이 남아 있다.
나는 교회 목사에 관한 얘기를 읽었다.
가슴을 드러낸 옷을 입은 소녀가 교회에 들어가려 하자, 교구 목사가 문 앞에서 그녀를 제지했다.
“하지만 목사님, 목사님은 제가 교회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어요.”
그녀가 항의했다.
“나는 신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구요.”
그가 말했다.
“양쪽 다 신성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야. 너는 집에 가서 좀더 단정한 것을 걸쳐야 해.”
지금 그녀는 말한다.
“나는 신성한 권리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목사는 말한다. “양쪽 다 신성하지만 그래도 넌 집에 가서 좀더 단정한 것을 걸쳐야 해.” 목사의 억압된 마음은―그는 그녀의 가슴을 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대는 욕망을 억압할 수는 있지만, 뿌리째 뽑을 수는 없다. 그것은 미묘한 방식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로 부상할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간파할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게 위장할 것이다. 억압된 사람은 변형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똑같다. 그는 단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억압적인 사람이 아니다. 붓다는 변형적인 사람이다. 억압은 아주 쉽다. 그대는 성을 억압할 수 있다. 그것이 수많은 성자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사회를 버릴 수 있다. 그대는 여자로부터 도망갈 수 있다. 그대는 히말라야 동굴에 갈 수도 있고, 거기에 앉아 그대가 독신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독신이 아니다. 히말라야의 동굴에 앉아 있으면서 그대는 여전히 여자를 꿈꿀 것이다. 그대는 여자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대의 공상은 더욱 황홀하고 다양해질 것이다. 물론, 그대는 그것과 싸울 것이다. 싸움으로 욕망을 무의식 깊숙이 억누를 순 있지만 그것을 근절할 수는 없다. 싸우는 것으로는 그 누구도 변화된 적이 없다. 오직 각성에 의해서만 사람은 변화된다.
각성은 싸움이 아니다. 각성이란 무엇인가? 각성은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 유명한 틸로파(Tilopa)의 노래가 있다. “진정, 받아들이고 거부함으로 해서 우리는 사물의 여여함을 가지지 못한다.”―우리는 사물의 여여함을 놓친다. 우리는 받아들이거나 거부함으로써 실체를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받아들일 때 우리는 탐닉한다. 거부할 때 우리는 억압한다.
붓다는 말한다.
“받아들이지도 말고 거부하지도 말라―다만 깨어 있으라. 다만 보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선입견 없이 보라.”
그대가 그렇게 무관심 속에, 그렇게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자각 속에 있을 수 있다면 상황들은 저절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영가 현각은 말한다.
그것은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서 항상 완벽하다.
그대가 그것을 찾을 때는 그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대는 그것을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
그대가 양쪽 다 놓을 때―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다.
그대가 침묵할 때, 그것은 말한다.
그대가 말할 때, 그것은 침묵한다.
각성이란 그대가 해야만 하는 무엇이 아니다. 각성이란 그대가 자신에게 강요해야 하는, 자신에게 짐지우는 무엇이 아니다. 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그것은 거기에 있다. 그대의 행위는 그대의 비행위이다.
다행히 우리는 더 강한 것을 가지고 있다. 진리에 대한 갈망이 애욕보다 약하다면 세상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나 바른 도를 따를 수 있겠는가?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애욕에 빠져 있는 사람은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러 달리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손을 태우는 화를 입는다.
그대는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의 손이 타고 있는 것을. 하지만 그대는 결코 자신의 손은 보지 않는다. 그대는 항상 타인의 손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래, 그들의 손은 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더 현명하게 할 것이다. 나는 더 현명하다. 나는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러 달릴 것이고, 나는 예외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아무도 예외는 없다. 존재는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대가 달려가면서, 바람을 향해 돌진하면서, 손에 타고 있는 횃불을 들고 있다면 그대의 손 또한 화상을 입을 것이다. 탐욕은 바람을 향해 돌진한다. 그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화상을 안 입을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 서로를 바라본다. 아무도 자기 자신을 보지 않는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대는 산야신이 된다.
읽은 이야기이다.
캔토 부인은 그녀의 남편과 가정부와의 관계를 수상쩍게 생각했다.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기 위해 며칠 집을 비우게 되자 그녀는 어린 아들 하비에게 아빠와 가정부를 잘 지켜보라고 일렀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들에게 물었다.
“하비야, 아무 일도 없었니?”
소년이 말했다.
“아빠랑 가정부랑 침실로 가서 옷을 벗었어요. 그리고는…….”
“그만! 그만!”
캔토 부인이 소리쳤다.
“우리, 아빠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자.”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 문 앞에서 성난 아내와 울고 있는 가정부, 그리고 어리둥정해 있는 아들과 마주쳤다.
“하비야, 아빠와 가정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라.”
캔토 부인이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말한 대로야, 엄마.”
하비가 말했다.
“아빠와 가정부는 침실로 가서 옷을 벗었어요.”
“그래, 그래, 계속해라, 하비!”
캔토 부인이 안달하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뭘 했지?”
하비가 대답했다.
“왜? 엄마, 그들은 아빠가 시카고에 있을 때 엄마와 베르니에 아저씨가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했어요.”
모든 사람이 계속해서 타인의 허물, 결점, 어리석음을 보고 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을 보지 않는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그대는 산야신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위대한 변화가 시작된다. 그대는 탐욕을 거슬러 사랑을 향해, 욕망을 거슬러 무욕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손을 볼 때 그 손들이 수없이 데여 왔고 자신이 수많은 상처들을 지니고 다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피하는 길이다. 그대가 누군가를 비난할 때마다 지켜보라. 그것은 그대가 그대 자신을 용인하도록 하는 마음의 속임수인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 타인을 비난한다. 온 세상을 비난할 때 그들은 기분이 대단히 좋다. 비교 속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남보다 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 그들이 더 낫다. 때문에 그대는 누군가를 비난할 때 과장하고 극단으로 치달으며, 두더지가 파 놓은 흙더미를 산으로 만들고, 산을 자꾸만 크게 만든다. 그러면 자신의 산은 무척 작게 보이는 것이다. 그대는 흐뭇해 한다.
이 짓을 그만두라! 이 짓은 그대를 돕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살과 같은 행위이다. 그대는 타인에 대해 생각하려고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인생은 그대의 것이다. 타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이다. 그대 자신에 대해 생각하라. 그대 스스로에 대해 명상하라. 그대가 여기서 하고 있는 것에 더욱 깨어 있으라. 단지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정말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성뿐이다. 그대 죽음을 통과하여,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성뿐이다.
천신이 붓다에게 아름다운 선녀를 보내어 붓다의 뜻을 깨뜨리려 하자 붓다가 말했다.
“물러가거라! 오물로 가득 찬 가죽 주머니가 와서 어쩌자는 것이냐?”
그러자 천신이 공손하게 절하고 도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붓다가 그를 위해 말해 주니, 그는 곧 수다원과를 얻었다.
아름다운 우화이다. 브라마가 붓다에게 왔다. 힌두교도들은 그처럼 아름다운 우화를 발명한 불교도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힌두교도들은 브라마가 세상의 창조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도들은 브라마가 붓다에게 길을 물으러 왔다고 말한다. 물론 하나의 시험으로써 그는 아름다운 선녀를 데리고 왔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이야기인데 거기엔 오직 두 유형의 인간, 즉 성적인 인간과 진리의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붓다가 진정으로 진리의 인간이라면 그는 현혹될 수 없다. 그때 그대는 그에게 어떤 환각도 일으키게 할 수 없다. 최고로 아름다운 선녀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가 진리에 도달했는지 어떤지를 가려내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사람이 완전히 성을 초월할 때, 오직 그때……. 그렇지 않으면 그의 에너지는 여전히 탐욕 쪽으로 움직이고, 여전히 아래쪽으로 갈 것이다.
천신이 붓다에게 아름다운 선녀를 보내어 붓다의 뜻을 깨뜨리려 하였다.
그 유혹은 시험이다. 그리고 유혹은 오로지 맨 마지막에 온다.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그대는 반드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마주칠 것이다. 예수가 거의 집에 도달했을 때 악마는 그를 유혹한다. 붓다가 거의 도달했을 때 브라마가 와서 그를 유혹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마하비라의 생애에, 진리에 도달한 모든 이의 생애 속에 있다. 이러한 우화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
하시드 신비주의자이며 하시디즘의 시조인 바알 셈(Baal Shem)에 관해 읽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그에게 가서 물었다.
“스승님, 어찌해야 제가 유혹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해야 저를 유혹하는 악마로부터 피할 수 있겠습니까?”
바알 셈이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기다려라! 너는 유혹을 피할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은 유혹받을 일이 없을 테니 말이다. 너는 그만한 자격이 없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혹은 오직 마지막 순간에만 온다. 지금 당장은 악마가 너를 걱정하지 않는다. 사실 악마는 너를 쫓아오지도 않는다. 오히려 네가 악마를 쫓아가고 있다. 그러니 유혹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아라. 그런 일은 당장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때에는 내가 너를 돌봐 주겠다.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주겠다.”
유혹은 오직 마지막 순간에만 온다. 왜인가? 성 에너지가 100도의 지점에 이를 때 모든 과거, 성욕 속에서 살았던 수백만 생이 그대를 끌어당긴다. 악마는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대의 과거이다. 수많은 생 동아의 무의식적인 성이 그대를 뒤로 끌어당긴다. 그대는 뛰어넘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머뭇거린다.
마치 강물이 바다에 이르러 바다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잠시 머뭇거리는 것과 같다. 강물은 아름다운 산들, 눈덮인 산봉우리들, 숲들, 골짜기들, 새들의 노래, 언덕들, 사람들, 여행―수천 마일이나 되는 과거를 향수에 젖어 뒤돌아볼 것이다. 그런데 문득 지금 여기, 그대가 도약할, 그대가 영원히 사라질 순간이 온다. 강은 생각할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머뭇거리고 전율하며 뿌리째 흔들릴 것이다.
그것이 유혹이라는 것이다. 에너지가 궁극적인 도약을 할 준비가 되고 비성욕적이 되는 지점에 붓다가 이르렀을 때, 욕망이 무욕 속에 용해되었을 때, 마음이 죽고 무심(無心)이 태어날 준비가 되었을 때―그러한 위대한 도약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 우화가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다.
붓다가 말했다.
“물러가거라! 오물로 가득 찬 가죽 주머니가 와서 어쩌자는 것이냐?”
인간이 그 지점에 도달하면 몸은 무의미하다. 그때 몸은 주머니, 오물로 가득 찬 가죽 주머니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몸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만일 그대가 못 믿겠거든, 가끔 수술실에 가서 벌어져 있는 몸을 보라. 그러면 그대는 붓다의 말을 믿을 것이다. 아니면 병원에 가서 온몸이 해부된 시체를 검사하는 것을 보라. 그러면 그대는 그가 말하는 것을 볼 것이다.
한번은 우리 마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한 남자가 총에 맞고 죽어 시체 부검이 실시되었다. 나는 부검을 보았다―그때 나는 어린애였다―어쨌든 나는 해냈다. 나는 의사를 설득했다. 의사의 아들이 내 친구였기 때문에 그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보도록 허락해 주세요. 보고 싶어요.”
“그런데 넌 왜 보려고 하는 거냐?”
내가 말했다.
“나는 몸이란 오물로 가득 찬 가죽 주머니에 불과하다는 붓다의 말을 접했어요. 꼭 한 번만 보게 해 주세요.”
그가 허락하며 말했다.
“좋아, 남아 있어도 좋다.”
하지만 곧 내가 말했다.
“이제 남아 있을 필요가 없어요. 아무래도 있을 수가 없군요.”
거기에선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고, 내장은 벌려져 있었다. 바로 오물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어린이가 시체 검사하는 것을 봐야 한다. 붓다는 그의 제자들을 화장터에 데려가서 몸이 타는 것을 지켜보고 거기서 명상하게 했다. 그는 “몸이 무엇인지 완전히 자각하지 않는 한, 몸이 아름답다는 환상과 몸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옳다.
붓다가 말했다.
“물러가거라! 오물로 가득 찬 가죽 주머니가 와서 어쩌자는 것이냐?”
그러자 천신이 공손하게 절하고 도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붓다가 그를 위해 말해 주니, 그는 곧 수다원과를 얻었다.
그 시금석은 붓다가 순금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자 천신이 공손하게 절하고…….
불교 신화에는 신들조차 인간처럼 욕망적이다―오히려 더 심하다. 그들의 모든 삶은 하나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자 천신이 공손하게 절하고 도의 본질에 대해 물었다.
붓다가 그를 위해 말해 주니, 그는 곧 수다원과를 얻었다.
수다원(srotaapanna)은 흐름 속으로 들어온 자를 의미한다. 의식, 각성, 민감함의 흐름 속으로 들어온 자. 그것은 붓다 메시지의 정수이다. 기도도 없고 의식도 없고 성직자도 사원도 없다―그대가 성직자이고, 그대가 의식이며, 그대가 사원이다. 오직 한 가지만 필요하다. 붓다는 필요 조건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는 완전히 수학적이다. 그는 각성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대가 깨어 있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은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두 술꾼이 철도를 따라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평생 이토록 많은 계단을 본 적이 없어.”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건 계단이 아니라, 낮은 난간이야.”
어쨌든 필요한 단 한 가지는 술을 깨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두 술꾼이 롤러 코스터에 올라탔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쩐지 버스를 잘못 탄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모두가 버스를 잘못 탄다―무의식은 잘못 탄 버스이다. 그땐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차이가 없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지 차이가 없다. 무의식 속에서는 그대가 무엇을 하든 그대는 잘못 갈 것이다. 잘못이란 무의식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고, 옳음은 의식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에드윈 아놀드(Edwin Arnold)는 ‘아시아의 빛’이라는, 붓다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책 중의 하나를 썼다. 몇 줄로 요약하면,
이것은 평화―
자아에 대한 애착과 생에 대한 갈망을 정복하는 것.
가슴으로부터 깊이 뿌리내린 열정을 떨쳐 버리는 것.
내면의 투쟁을 가라 앉히고,
사랑을 위해 영원의 아름다움을 꽉 쥐고,
영광을 위해 자아의 주인이 되는 것.
기쁨을 위해 신들을 초월하여 사는 것.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위해, 불변하는 보배를 쌓는 것.
완벽한 베풂으로 보답하기 위한 임무는 행해졌고
자비 속에서, 부드러운 음성, 그리고 티없는 날들,
이러한 풍요들은 삶 속에 소실되지 않으며,
어떤 죽음도 비난하지 않는다.
이것은 평화―
자아에 대한 애착과 생에 대한 갈망을 정복하는 것…….
이것은 붓다의 메시지의 전체 핵심이다. 평화는 훈련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성의 소산이다. 사랑은 훈련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성의 소산이다. 올바름은 훈련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성의 소산이다.
각성은 모든 병을 치료한다. 각성은 그대를 건강하고 전체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당연히 성스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