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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길에서 만나는 인물사(人物史)
◇ 백범김구기념관 (白凡金九記念館) : 용산구 효창동 255번지(임정로 26)
- 2002년 백범 김구 선생의 유지(遺志)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한 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인 백범 김구(1876년 ~ 1949년 6월 26일)를 기념하기 위해서 건립된 시설이다. 2002년 10월 22일에 기념관을 개관하였으며, 2008년 12월에 백범기념관에서 백범김구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 기념관은 1949년 8월 6일에 백범 김구의 유지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1996년 1월 30일에 백범김구선생시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기념관 건립을 제안하였고, 1998년 12월 3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기념관 건립 지원을 약속하였다.
1998년 4월 30일에 (사)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가 발족하여, 1999년 8월 3일부터 백범기념관 건립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2000년 6월 26일에 기공식을 했고, 2002년 10월 22일에 개관하였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 정치인이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게 피격당하여 사망하였다.
백범 김구선생은 대일 의열단체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양반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했다.
김방경의 25대손으로 본관은 구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자(字)는 연하(蓮下),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號)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6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피난 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으며, 28세 때 부친 탈상 후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양산학교, 보강학교 등에서 교육자로 교편을 잡기도 했고,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도 활동했다. 교육·계몽 운동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연행되어 갇히기도 하였다.
3·1운동(1919년) 이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 성과를 얻지 못하자 1921년 임시정부 내 노선 갈등 이후 일부 독립운동가가 임시정부를 이탈하고, 만주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정부를 옮겨 다녔다. 1924년에는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고, 1931년에 독립운동 단체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의 동경 의거,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 내무장, 재무장 등을 거쳐 1940년 3월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년 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 : 용산구 효창동 286-7
- 이봉창 의사가 살던 곳에 세운 효창동의 역사울림관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
은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가 용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 울림관은 2020년에 지상 1층, 연면적 70㎡ 규모로 전통 목구조에 기와지붕을 올렸으며, 전시실, 사무실, 툇마루를 갖췄다.
전시실로 들어서면 우선 김영원 작가(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의 작품인 이 의사의 흉상이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은 김호연 빙그레 회장(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이 용산구청에 기증했다. 전시는 흉상 왼쪽부터 둘러보면 된다. 이 의사의 생애에 맞춰 ‘용산구 효창동에서 이봉창과 마주하다’, ‘거사를 준비하며’, ‘다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로 주제를 설정했다.
지도와 사진, 그래픽에 그치지 않고, 키오스크(무인 종합정보안내시스템), 증강현실(VR) 등 최신 전시기법을 도입한 게 특징이다. 이 의사가 직접 쓴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 ‘의거자금 요청 편지’ 등 사료 · 유품(복제본)도 함께 전시했다.
전시를 둘러보고 나오면 건물 밖의 부지는 ‘이봉창 역사공원’으로 꾸몄다. 배롱나무, 사과나무, 매화나무, 소나무 등 수목과 초화류를 심고, 공원 경계 일부에 전통 한옥식 담장을 둘렀다. 역사울림관의 툇마루, 벤치에서 조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봉창 의사는 용산을 대표하는 독립투사이다. 1901년 8월 10일, 경성부 용산방 원정2정목(현 원효로2가)에서 태어났으며, 얼마 후 금정(현 용산구 효창동) 118번지로 이사했다.
이 의사가 13세 되던 해에 가정형편이 기울어서. 이듬해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약국 등에서 일을 하며, 일본어를 배웠다. 1919년 용산철도국에 임시 인부로 들어가 역부(驛夫)가 되었는데,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24세 때 사직하였다. 이때 이 의사는 금정청년회의 간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 이 의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을 쓰고, 철공소 직공 생활 등을 하며 지냈다. 1928년에 일왕 즉위식을 보러 교토에 갔을 때 일본경찰이 이 의사 몸수색을 하더니 한글과 한문으로 쓴 편지를 소지하고 있는 이유만으로 9일 간 유치장에 가두었다.. 그는 오사카, 도쿄시 등지를 전전하면서, 일본 사회에 적응하려 했지만 일본인들의 차별 대우를 받자, 조국이 독립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이 의사는 1930년 말 중국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았다. 이듬해 5월, 이 의사는 백범 김구 선생에게 “폭탄을 구해주면 일본에 가서 일왕을 살해하겠다”라고 결심을 밝히자, 김구 선생이 “폭탄을 구해주겠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1931년 12월 31일, 이 의사는 김구 선생이 주관한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되었다. 이 의사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가슴에 선서문을 달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기념 촬영을 했다.
역사적인 동경 거사는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분에 벌어졌다. 도쿄 경시청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이 의사가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나오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거사는 실패하여 이 의사는 현장에서 스스로 체포됐다. 이후 1932년 9월 30일, 일본 대심원에서 ‘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31세에 처형당하였다. 유해는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됐다.
이봉창 의사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온 건 광복 후인 1946년 5월 15일이다. 이 의사는 윤봉길 ·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환국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은 7월 6일, 이봉창 의사 등 삼의사(三義士) 국민장을 치른 후에 효창공원 내의 삼의사 묘역에 이들을 안장하였다.
◇ 만리창 터(萬里倉址) : 용산구 효창동 199번지 / 효창공원역 6번 출구 효창 파크 푸르지오 아파트 앞, 용마루 고개 위 건널목
- 조선후기에 국가의 쌀, 베, 돈의 출납을 맡았던 선혜청의 별창(別倉) 터
만리창은 공물(貢物: 왕실과 중앙에 바치는 물품)로 거두어들인 쌀, 베, 돈의 출납을 맡았던 선혜청(宣惠廳)의 별창(別倉)으로 ‘신창’으로도 불렸다. 그리하여 이 고개를 신창고개로 불렸다.
선혜청은 임진왜란 후인 선조 41년(1608)에 설립되었으며, 영조 29년(1753)에는 균역청(均役廳)까지 병합하였다가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만리창은 처음에는 흉년 때 백성들을 구제하는 진휼청(賑恤廳)에 속하였다가 조선 후기 순조 때 선혜청의 별창고로서 황해도와 전라도의 대동미(大同米)를 저장하였다.
이곳에 만리창을 둔 것은 전국의 대동미 공물을 받는 마포나루가 가까우므로 이를 집결해서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새창고개이므로 홍수 때 마포항의 수해를 견딜 수 있었다.
이곳 만리창 인근은 경복궁과 가까운 관계로 일본군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명목으로 이곳에 혼성부대를 주둔하고, 사령부를 설치하여 청일전쟁의 거점으로 삼았다.
◇ 마포 공덕리 금표(孔德里禁標) : 마포구 공덕동 394-3번지(공덕역 2번 출구, 쌈지공원 내)
- 흥선대원군의 별장 위치를 알리는 푯돌
마포 공덕리 금표(禁標)는 조선말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거처하는 별장인 아소당(我笑堂)의 위치를 알리는 푯돌로 조선말인 1870년 8월(음력)에 공덕동 로터리에 세웠다가 재개발사업으로 공덕동 394-3번지(현 백범로 139)에 이전하였다.
푯돌에는 「공덕리 금표 한 120보(孔德里 禁標 限一百二十步)」라고 쓰였다. 이는 공덕리 별장(아소당)이 이곳에서부터 120보(步) 거리에 있으니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 아소당(我笑堂) 터 : 마포구 백범로 25길 9(서울 디자인고등학교 내)
-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으로 사후에 묘소를 조성
아소당은 마포구 염리동 동도고등학교(서울 디자인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별장이다.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 때(1882년) 일시 집권했다가 4년간 청나라 보정부에 유폐된 후 귀국하여 운현궁과 이곳에 머물렀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민씨 일파에게 정치적 패배자로 내쫓겨 1895년 이곳에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했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자신의 일생이 덧없음을 뒤돌아보며 스스로 조소(嘲笑)한다는 뜻으로 별장 이름을 ‘아소당(我笑堂)’이라 이름 짓고, 불우하게 지냈다.
흔히 대원군 ‘공덕리 별장’이라고 부르는 99칸의 이 집은 정계에서 물러나 운현궁에 머물던 흥선대원군이 1895년에 큰손자 이준용(李埈鎔)이 유배형을 받아 교동도로 가게 되자 큰손자와 동행하려고 마포 강변에서 배를 타려다가 제지 당한 이후부터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4월에 고종을 몰아내려는 역모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이 가장 사랑하던 큰손자 이준용(李埈鎔)이 관련되어 10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강화도 옆의 교동도(喬洞島)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75세의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서 명성황후 민씨 일파에 의하여 감금을 당하고 있는 데다가 손자까지 유배를 떠나게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손자를 따라 교동도로 들어가서 고생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은밀히 마포 강변에 나룻배를 준비해 놓도록 하고, 이른 아침에 내금위(內禁衛)의 군사들의 눈을 피해 운현궁에서 나와 마포 강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윽고 흥선대원군이 배에 올라 막 떠나기 전에 이를 뒤늦게 알아낸 내금위 군사들이 출동하여 제지당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흥선대원군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까운 공덕리 별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에 머물자 명성황후 민씨 측은 30여 명의 수비병을 배치하여 엄중하게 감시하였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에 조선이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와 긴밀하게 지내는 친러정책을 취하자 조선을 그들 뜻대로 장악하기 위하여 명성황후 민씨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은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미우라(三浦)를 조선의 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미우라 공사는 오까모도(岡本) 일본 불량배 두목에게 아소당에 머무는 흥선대원군을 은밀히 만나도록 하였다.
오까모도는 일본이 명성황후 민씨를 제거하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친일정권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알리고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마침내 흥선대원군에게서 이 계획에 참여하겠다는 응낙을 얻어내자 일제는 을미년(1895) 8월 20일 새벽 3시, 무장한 일본인들이 흥선대원군을 앞장세웠다. 서대문이 열리자 훈련대장 홍계훈이 지키는 광화문을 깨뜨리고 경복궁에 난입하였다. 이어서 궁중을 샅샅이 뒤져 명성황후 민씨를 찾아 시해하니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흥선대원군은 을미사변 때 일본에게 이용되었다가 1898년에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부인과 합장했다.
1908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했으며, 다시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이장했다.
한편 국태공 흥선대원군이 1902년 2월에 세상을 떠나자 이 아소당 안에 묘를 썼으므로 한 때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고 불렀다. 아소당 자리에는 광복 후에 동도중학교(서울 디자인고등학교) · 서울여자중고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동도중고등학교 교정에 있던 아소당 건물은 5·16 군사정변 이듬해인 1962년에 철거되었다. 이 건물 재목은 신촌동의 봉원사에서 매입하여 1966년에 염불당(대방)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현재 서울 디자인고등학교 정문 옆에는 1995년에 마포구청에서 ‘아소당 터’라는 표석(標石)을 세워놓았다.
◇ 서강대학교 박물관 : 마포구 백범로 35, 아루페관(AR) 6층
- 주로 민속품과 미술품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대학박물관
서강대학교 박물관은 1974년 2월 2일에 개관하였다. 개관 초기에는 손세기(孫世基)가 기증한 고서화 200여 점을 모아 도서관 입구 왼쪽에 박물관을 꾸몄으나, 기증 유물이 늘어남에 따라 1994년 6월 다산관 2층으로 확장 이전하였다.
2003년 6월 13일 교내에 새롭게 지어진 동문회관 6층으로 다시 이전해서 같은 해 12월 29일 전시실을 개관함으로써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언제든지 관심을 가지고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박물관은 총넓이 99.194㎡, 소장품은 1,700여 점으로. 크게 민속품과 미술품으로 나뉜다. 발굴이나 야외조사를 하여 수집한 유물은 거의 없고, 기증품이 주류를 이룬다.
1973년 손세기가 기증한 고서화 200점을 비롯하여 1974년 최구(崔鳩)가 상감청자 국화문 소변을 비롯한 청자 21점, 1978년 이문원(李文垣)이 기증한 민속품 539점, 1990년 서강대학교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원곡 김기승(金基昇)이 기증한 서예작품 37점을 교대로 전시하고 있다.
주축을 이루는 유물들은 조선 초부터 근현대에 걸쳐 만들어진 다양한 서화작품이고, 약 300여 점에 이르는 서화들은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손세기가 기증한 조영석(趙榮祏) 의 「유음납량도(柳陰納凉圖)」는 일본에서 최근 발간된 『세계미술대전집』에 실렸고, 양사언(楊士彦)의 초서는 2010년 1월 4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개관 이래 1988년 한국의 탑 특별전, 1990년 개교 30주년 기념 김기승 기증 유물 특별전시회, 박물관 이전 기념 손세기 기증유물전 등의 특별전시회를 열었고, 1981년 손세기 · 최구 기증 유물 도록과 1990년 김기승 서예작품 도록 등 2종을 발간하였다.
해마다 외부 인사를 초빙하여 강연회를 열고 있으며, 세계 각국의 민속품 및 고고·미술·종교 분야 유물을 발굴 · 수집하는 데 힘쓰고 있다.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회, 전문가 초청 강연회, 도록 발간, 홈페이지의 가상박물관, 문화유산답사 등을 통해 교수 ·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다양한 학술연구 활동에 도움을 주는 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