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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2. 10:47. 수정본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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彰烈巖記 洪直弼
梅山先生文集卷之二十八
記
彰烈巖記
人皆有一死。死得其所難矣。苟得其所。則死有榮於生者。以所惡之甚於所欲也。然死生之於人大矣。在男子猶然。况于婦人乎。在冠冕珮玉之君子猶然。况充後宮下陳之類乎。三代之制。世婦以下。自稱曰婢子。婢之言卑也。未必皆敦詩禮之敎。著柔靜之德。彼引羊車得蝶幸者。固是貽羞彤管。而寄情邊衣。題詩紅葉。用紓其幽怨者。亦豈女史內官之道哉。以故歷代革國之際。未聞有宮婢殉國者。豈秉彝之性爾殊哉。積欝之氣。因變故而發之。所以不志于死也。當百濟之亡。宮人爭投於白馬江。故名之曰落花巖。花巖之名。將與天地同其悠久。而扶蘇屋社。猶有一段生氣者。賴有是耳。粤若端廟之遜荒于越也。舊宮人隨侍于淸泠浦觀風軒。調護其飮食起居。備經百罹於霧露之中。而玉體無愆者。左右服勤之功。與爲多焉耳。逮端廟陟遐。咸赴越之錦障江而死。浮屍蔽江。是日也雷雨大作。烈風拔木。黑霧彌天。經夜不散。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邑人憐之。名其地曰落花巖。襲白江也。設壇于巖上。有事則禱。知府洪聖輔樹三字碑。卽巖西十數武。建祠而祭之。愍忠祠是也。後知府曹夏望。改落花曰彰烈。鑱巖壁而銘之。余來越中。遊錦江亭。自亭而上。歷愍忠祠撫花巖碑。泛舟錦江。摩挲彰烈巖。徘徊久之。不忍去。守祠者爲言月夜環珮怳惚。往來於祠巖之間。若有覩焉云。苟其然者。芳魂貞魄。尙有不泯者存歟。不與大化同其冥漠歟。嗚呼。婦寺之忠。惟服事宮闈。趨走唯諾而已。不遑講君臣之大義。辨熊魚之取舍。而臨難致命。視死如歸。無一人苟免。若斯人之爲者。歷選千古。靡與倫匹。詎不奇哉。當是時。背恩喪義。賣國販君者。咸出於赤芾蔥珩。而蹈節輕生。乃在於紫衣紅袖何哉。所謂卿士。利害亂其中。禍福奪其外。而巧於趨避。故瞞天讕人。至於斯極。若婢子者。全理義之良心。不爲怵疚。靡所計較。故决性命於危迫之際。而有所不避也。端廟聖德罔愆。不以冲齡而或忽貫魚之戒。以故無內寵。斯人者皆非承恩之類也。特以眞誠所發。與共患難。義不可以苟活耳。豈欲與殉名之烈士。爭不朽於竹帛哉。昔田橫之客五百。重峯之士七百。而咸同日幷命者。是乃男子之身衣冠之族。氣義相感。至百死而不貳者固也。若至廁椒掖之側。侍巾屣之末者。豈知泰山鴻毛之重輕哉。用能殺身成仁如此。比兩者又加難矣。是所謂侍御僕從。罔非正人者耶。嗚呼。目見天地崩坼。人物消盡。而鼎湖之弓劒莫攀。蒼梧之廵狩未追。劫火餘焰。炎炎來逼。亦何忍無死哉。是豈可以已者乎。苟使若人。老死帷閫之內。孰知其純忠姱節。與日月爭光乎。然有知無知。亦何與當人分上哉。只是天理當然。吾不得不然耳。嗚呼。天憂無疆。無往不返。端廟復九五之位。備千乘之禮。黃流玉瓚。饗于淸廟。珠丘花欄。煥乎喬陵。死事之宗英文武。咸配食于仙寢之傍。而侍女寺人。亦與於其間。列朝追遠之誠崇報之典。殆無虧欠。於是焉神理人情。各安其正矣。沉江化碧之血。其將怡渙而無憾乎。抑亦凝結不散。與盂山錦水。同其崩絶乎。吾不得以知之。故述以文而志之。
彰烈巖記 / 洪直弼
창렬암기 / 홍직필
人皆有一死。인개유일사。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나,
死得其所難矣。사득기소난의。마땅한 곳에서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苟得其所。구득기소。만약 마땅한 곳에서 죽을 수 있다면,
則死有榮於生者。칙사유영어생자。죽어도 사는 것보다 영예로운 것이니,
以所惡之甚於所欲也。이소악지심어소욕야。무엇인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삶을 원하는 마음보다 크기 때문이다.
然死生之於人大矣。연사생지어인대의。그러나 삶과 죽음이란 사람에게 있어 중대한 문제다.
在男子猶然。재남자유연。남자에게도 그러하거늘,
况于婦人乎。황우부인호。하물며 부인의 경우야!
在冠冕珮玉之君子猶然。재관면패옥지군자유연。관을 쓰고 패옥을 친 군자에게도 그러하거늘,
况充後宮下陳之類乎。황충후궁하진지류호。하물며 후궁과 희첩의 경우야!
三代之制。삼대지제。삼대의 제도를 살펴보면,
世婦以下。세부이하。세부(世婦) 이하의 여인들은
自稱曰婢子。자칭왈비자。스스로를 비자(婢子)라고 칭했는데,
婢之言卑也。비지언비야。비(婢)는 비천하다는 의미다.
未必皆敦詩禮之敎。미필개돈시례지교。이들 모두가 시경(詩經)과 삼례(三禮)의 교화에 익숙한 것은 아니었고,
著柔靜之德。저유정지덕。온유하고 정숙한 덕행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彼引羊車得蝶幸者。피인양차득접행자。양이 끄는 임금의 수례를 유인하여 총애를 얻는 것은
固是貽羞彤管。고시이수동관。진실로 동관(彤管)에 수치를 남겼다.
而寄情邊衣。이기정변의。변방을 지키는 남편에게 옷을 보내 마음을 전하거나,
題詩紅葉。제시홍엽。붉게 물든 나뭇잎에 시를 적어
用紓其幽怨者。용서기유원자。마음속에 서린 원망을 펼치는 것이
亦豈女史內官之道哉。역기녀사내관지도재。어찌 여사(女史)와 내궁(內宮)의 도리이리오!
以故歷代革國之際。이고력대혁국지제。그러므로 역대로 나라가 바뀔 즈음에
未聞有宮婢殉國者。미문유궁비순국자。궁비(宮婢)가 순국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豈秉彝之性爾殊哉。기병이지성이수재。하지만 어찌 하늘이 내려준 떳떳한 성품이 달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積欝之氣。적울지기。켜켜이 쌓인 울분이
因變故而發之。인변고이발지。변고로 인하여 표출된바,
所以不志于死也。소이불지우사야。죽음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當百濟之亡。당백제지망。백제(百濟)가 망할 무렵,
宮人爭投於白馬江。궁인쟁투어백마강。궁인들이 다투어 백마강(白馬江)에 몸을 던졌기 때문에
故名之曰落花巖。고명지왈락화암。 ‘낙화암(落花巖)’이라 명명했다.
花巖之名。화암지명。낙화암이라는 이름은
將與天地同其悠久。장여천지동기유구。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而扶蘇屋社。이부소옥사。그리고 부소산(扶蘇山)의 옥사(屋社)에
猶有一段生氣者。유유일단생기자。한 토막의 생기라도 남아 있는 것은
賴有是耳。뢰유시이。오직 낙화암이 있기 때문이다.
粤若端廟之遜荒于越也。월약단묘지손황우월야。아! 단종께서 저 황량한 영월로 은둔하셨을 때,
舊宮人隨侍于淸泠浦觀風軒。구궁인수시우청령포관풍헌。옛 궁인들이 수행하여 청령포와 관풍헌에서,
調護其飮食起居。조호기음식기거。시종하며 음식과 일상생활을 조호(調護)하였다.
備經百罹於霧露之中。비경백리어무로지중。안개와 이슬 속에서 온갖 환난을 겪으면서도
而玉體無愆者。이옥체무건자。옥체가 무탈했던 것은
左右服勤之功。좌우복근지공。與爲多焉耳。여위다언이。
좌우에서 근실하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 공로가 크기 때문이다.
逮端廟陟遐。체단묘척하。단종께서 승하하시자,
咸赴越之錦障江而死。함부월지금장강이사。모두들 영월 금장강(錦障江)에 나아가 목숨을 버렸는데,
浮屍蔽江。부시폐강。강물에 뜬 시체가 온 강을 가릴 지경이었다.
是日也雷雨大作。시일야뢰우대작。바로 그날, 비와 천둥이 크게 몰아쳤고
烈風拔木。렬풍발목。사납게 이는 바람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으며
黑霧彌天。흑무미천。經夜不散。경야불산。하늘을 뒤덮은 시커먼 안개가 밤새도록 개지 않았다.
卽丁丑十月二十四日也。즉정축십월이십사일야。이날이 바로 정축년(丁丑年 1457. 세조 3) 10월24일이다.
邑人憐之。읍인련지。고을 사람들은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며
名其地曰落花巖。명기지왈락화암。그곳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襲白江也。습백강야。백마강의 전례를 계승한 것이다.
設壇于巖上。설단우암상。그리고 낙화암 위에 제단(祭壇)을 설치한 뒤,
有事則禱。유사칙도。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그들의 신명에게 기도하였다.
知府洪聖輔樹三字碑。지부홍성보수삼자비。영월부사 홍성보(洪聖輔)는 ‘낙화암(落花巖)’ 세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운 뒤,
卽巖西十數武。즉암서십수무。낙화암 서쪽으로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建祠而祭之。건사이제지。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다.
愍忠祠是也。민충사시야。이곳이 바로 민충사(愍忠祠)다.
後知府曹夏望。후지부조하망。훗날 영월부사 조하망(曹夏望)은
改落花曰彰烈。개락화왈창렬。 ‘낙화(落花)’라는 이름을 ‘창렬(彰烈)’로 고치고는
鑱巖壁而銘之。참암벽이명지。절벽 위에 새겨 넣었다.
余來越中。여래월중。나는 영월에 와서
遊錦江亭。유금강정。금강정(錦江亭)에서 노닐다가,
自亭而上。자정이상。위로 올라가
歷愍忠祠撫花巖碑。력민충사무화암비。민충사(愍忠祠)를 경유하여 낙화암(落花巖) 비석을 더듬어보았다.
泛舟錦江。범주금강。그리고 금강(錦江)에 배를 띄운 채
摩挲彰烈巖。마사창렬암。창렬암(彰烈巖)을 어루만졌고
徘徊久之。배회구지。한참동안 배회하며
不忍去。불인거。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守祠者爲言月夜環珮怳惚。수사자위언월야환패황홀。사당을 지키는 자의 말에 의하면,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패옥 소리가
往來於祠巖之間。왕래어사암지간。사당과 낙화암 사이를 어렴풋이 왕래하는데,
若有覩焉云。약유도언운。 실제 두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苟其然者。구기연자。만약 그러한 일이 사실이라면
芳魂貞魄。방혼정백。곧고 아름다운 혼백이
不與大化同其冥漠歟。불여대화동기명막여。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인가!
여태껏 죽은 귀신이 되어 적막한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인가!
嗚呼。아아!
婦寺之忠。부사지충。부시(婦寺)의 충성스러움은
惟服事宮闈。유복사궁위。오직 궁궐에서 시종하며
趨走唯諾而已。추주유낙이이。경건히 걸음을 옮기고 공손히 순종하는 것뿐이다.
不遑講君臣之大義。불황강군신지대의。군신 간의 커다란 절의를 강론하거나
辨熊魚之取舍。변웅어지취사。곰발바닥과 물고기를 취사하는 의리에 대해 변론할 겨를조차 없었다.
而臨難致命。이림난치명。그러나 위난(危難)에 맞닥뜨리자 목숨을 버리는 것을
視死如歸。시사여귀。마치 집으로 돌아가듯 아무렇지 않게 여겼고,
無一人苟免。무일인구면。若斯人之爲者。약사인지위자。단 한 사람도 구차하게 죽음을 회피한 자가 없었다.
歷選千古。력선천고。이들이 실천한 것은 천고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아도
靡與倫匹。미여륜필。필적한 만한 경우가 없으니,
詎不奇哉。거불기재。어찌 기이하지 않은가!
當是時。당시시。당시
背恩喪義。배은상의。배은망덕하고 의리를 저버리며
賣國販君者。매국판군자。나라와 임금을 팔아먹은 자들은
咸出於赤芾蔥珩。함출어적불총형。모두 붉은 슬갑과 푸른 패옥을 착용한 고관대작 중에 나온 반면,
而蹈節輕生。이도절경생。절의를 지키며 목숨을 가볍게 여긴 자는
乃在於紫衣紅袖何哉。내재어자의홍수하재。자주색 저고리와 붉은 소매를 착용한 미천한 사람들이었다.
所謂卿士。소위경사。그 까닭은 무엇인가?
利害亂其中。리해란기중。이른바 벼슬아치들은 이해관계가 그 마음을 어지럽히고
禍福奪其外。화복탈기외。화복이 그 행실을 좌우하므로,
而巧於趨避。이교어추피。약삭빠르게 이익을 추구하고 재앙을 회피한다.
故瞞天讕人。고만천란인。그러므로 사람과 하늘을 기만하는 것이
至於斯極。지어사극。이 지경까지 이르는 것이다.
若婢子者。약비자자。궁녀의 경우는
全理義之良心。전리의지량심。의리를 변별하는 선한 마음을 온전히 지켰으므로
不爲怵疚。불위출구。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않았고
靡所計較。미소계교。요모조모 따지지도 않았다.
故决性命於危迫之際。고결성명어위박지제。그러므로 급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목숨을 내던지며
而有所不避也。이유소불피야。죽음조차 회피하지 않은 것이다.
端廟聖德罔愆。단묘성덕망건。단종의 성스러운 덕은 허물이 없다.
不以冲齡而或忽貫魚之戒。불이충령이혹홀관어지계。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행여 관어(貫魚)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은바,
以故無內寵。이고무내총。딱히 총애하는 궁녀가 없었다.
斯人者皆非承恩之類也。사인자개비승은지류야。이들은 모두 임금의 승은을 입은 자가 아니다.
特以眞誠所發。특이진성소발。다만 진실한 정성이 발로하여
與共患難。여공환난。임금과 환난을 함께한 것이요,
義不可以苟活耳。의불가이구활이。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豈欲與殉名之烈士。기욕여순명지렬사。어찌 명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烈士)들과 더불어
爭不朽於竹帛哉。쟁불후어죽백재。사책에 남길 불후한 명성을 다투겠는가!
昔田橫之客五百。석전횡지객오백。옛날 전횡(田橫)의 식객 500명과
重峯之士七百。중봉지사칠백。중봉(重峯)의 병사 700명은
而咸同日幷命者。이함동일병명자。모두 같은 날에 죽음을 맞았다.
是乃男子之身衣冠之族。시내남자지신의관지족。이들은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거니와 의관을 갖춰 입은 사대부 출신이었다.
氣義相感。기의상감。그러니 의기(義氣)가 감별하여
至百死而不貳者固也。지백사이불이자고야。백 번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은 진실로 마땅하다.
若至廁椒掖之側。약지측초액지측。그러나 초액(椒掖)의 곁에 끼어들어서
侍巾屣之末者。시건사지말자。두건과 신발 따위를 시중드는 말단의 사람들이
豈知泰山鴻毛之重輕哉。기지태산홍모지중경재。어찌 태산(泰山)과 홍모(鴻毛)의 경중을 알아
用能殺身成仁如此。용능살신성인여차。이처럼 살신성인했겠는가!
比兩者又加難矣。비량자우가난의。이들의 살신성인은 전횡이나 중봉의 경우보다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是所謂侍御僕從。시소위시어복종。이른바 “시종하며 수레를 모는 복종(僕從)들이
罔非正人者耶。망비정인자야。 올바른 사람이 아닌 이가 없었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嗚呼。오호。아아!
目見天地崩坼。목견천지붕탁。이들은 하늘과 땅이 무너지고
人物消盡。인물소진。수많은 인물이 죽어가는 상황을 두 눈으로 목도했다.
而鼎湖之弓劒莫攀。이정호지궁검막반。게다가 정호(鼎湖)의 궁검(弓劒)을 더위잡을 수 없거니와
蒼梧之廵狩未追。창오지순수미추。창오(蒼梧)의 순수(廵狩)를 뒤따르지 못했는데,
劫火餘焰。겁화여염。겁화(劫火)의 남은 불길마저
炎炎來逼。염염래핍。 맹렬하게 핍박해 오니,
亦何忍無死哉。역하인무사재。어찌 차마 죽지 않을 수 있겠으며,
是豈可以已者乎。苟使若人。시기가이이자호。구사약인。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老死帷閫之內。로사유곤지내。만약 그들이 궁궐 안에서 늙어 죽었다면,
孰知其純忠姱節。숙지기순충과절。어느 누가 그들의 순수한 충정과 아름다운 절개가
與日月爭光乎。여일월쟁광호。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오!
然有知無知。연유지무지。그러나 알아주거나 혹은 알아주지 않는 것이
亦何與當人分上哉。역하여당인분상재。그 사람의 직분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只是天理當然。지시천리당연。그저 천리상 마땅하므로
吾不得不然耳。오불득불연이。부득불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嗚呼。오호。
天憂無疆。천우무강。끝없는 우환일지라도
無往不返。무왕불반。언젠가는 회복되기 마련이다.
端廟復九五之位。단묘복구오지위。단종께서는 구오(九五)의 자리를 회복하셨고,
備千乘之禮。비천승지례。천승(千乘)의 예법이 구비되었으며,
黃流玉瓚。황류옥찬。옥찬(玉瓚)으로 울창주를 따라
饗于淸廟。향우청묘。종묘에 모셔졌고,
珠丘花欄。煥乎喬陵。주구화란。환호교릉。능침의 아름다운 난간이 높다란 언덕에서 환히 빛나게 되었다.
死事之宗英文武。사사지종영문무。그리고 나랏일로 목숨을 바친 종친과 문`무반은
咸配食于仙寢之傍。함배식우선침지방。모두 능침 곁에 배향되었고,
而侍女寺人。이시녀사인。시녀와 환관도 그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亦與於其間。역여어기간。여러 임금께서
列朝追遠之誠崇報之典。렬조추원지성숭보지전。현인을 추모하는 정성과 융숭히 보답하는 전례가
殆無虧欠。태무휴흠。거의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於是焉神理人情。어시언신리인정。이에 신리(神理)와 인정(仁情)이
各安其正矣。각안기정의。각각 올바른 명분에 안주했으니,
沉江化碧之血。침강화벽지혈。강물 속에 가라앉아 푸른 옥으로 변한 피가
其將怡渙而無憾乎。기장이환이무감호。장차 흔쾌히 풀리며 더 이상 유감이 없을까?
抑亦凝結不散。억역응결불산。아니면 여전히 응결되어 흩어지지 않은 채
與盂山錦水。여우산금수。 우산(盂山)`금장강(錦障江)과 더불어
同其崩絶乎。동기붕절호。운명을 같이하여 무너지고 끊어질까?
吾不得以知之。오불득이지지。이것은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故述以文而志之。고술이문이지지。그러므로 기문을 찬술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 역주 장릉지속편 장릉지보유 288~292쪽
홍직필 洪直弼 은
*순조 20년(1820년)에 영월부사를 지낸 홍이간(洪履簡1) , 뛰어난 문장가인 오희상(吳熙常)2) , 홍직필(洪直弼)(홍이간의 아들)3) 세 사람이 구름에 싸인 선돌의 경관에 반하여 시(詩)를 읊으면서 선돌의 암벽에다 『운장벽(雲莊壁)』이라는 붉은 주색(朱色) 글자를 새겨놓은 것이 있다.
• 홍직필 洪直弼
• 생년 1776년(영조 52) • 몰년 1852년(철종 3)
• 본관 남양(南陽) • 저서(작품) 매산집 52권
[정의]1776(영조 5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초명은 긍필(兢弼). 자는 백응(伯應)·백림(伯臨), 호는 매산(梅山). 서울 출신. 병마절도위 상언(尙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선양(善養)이고, 아버지는 판서 이간(履簡)이다.
[생애]
재능이 뛰어나 7세 때 이미 한자로 문장을 지었다. 그리고 17세에는 이학(理學)에 밝아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 : 올바른 도를 맡길 만함.)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801년(순조 1) 부모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해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실패하였다. 이로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원로 명사인 송환기(宋煥箕)·이직보(李直輔)·임로(任魯) 등과 연령을 초월해 교유하였다. 특히 오희상(吳熙常)과 가장 오래 교유했는데, 그로부터 유종(儒宗 : 유학자의 으뜸)이라 일컬어졌다. 또한 이봉수(李鳳秀)로부터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1810년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814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로 제배되었다. 이 때 동궁(東宮 : 뒤의 翼宗)이 새로 세자에 올라 당시의 유명인사들을 뽑아 매일 서연(書筵)을 열 때 발탁되었다. 1822년 장흥고봉사에 임명되었으나 물리쳤다.
1838년(헌종 4)에 이조에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어, 이듬해 장악원주부·황해도도사에 임명되고, 1840년에는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다음해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고, 이어 지평을 거쳐 집의에 이르렀다.
1844년 특별히 당상관으로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다시 동부승지에 제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좨주를 비롯해 1851년(철종 2) 대사헌에 전후 두 차례나 특배되고, 이듬해에는 지돈녕부사에 승배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 해 7월 형조판서에 제수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졸하였다.
[활동사항]
그의 학문은 궁리(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그리고 천지음양귀신(天地陰陽鬼神)의 묘와 역대흥망치란(歷代興亡治亂)의 자취와 산천풍토인물족계(山川風土人物族系)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하였다.
성리학에서 정자(程子)의 심본설(心本說)을 극력 지지하고,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임성주(任聖周)의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고 한 주장에도 반대하였다. 따라서 주리파(主理派)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매산집≫ 52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헌종실록(憲宗實錄)』『철종실록(哲宗實錄)』『숙재집(肅齋集)』
『매산집(梅山集)』『조선유교연원』(장지연, 회동서관, 1922)
『한국유교사』(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