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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자료명 |
저 자 |
강학회 시기 |
강학회 장소 |
A |
달레교회사 (다뷜리 보고서) |
샤를르 달레 (원저자: 다뷜리) |
丁酉年, 1777년 |
어떤 절 |
B-1 |
선중씨(정약전) 묘지명 |
다산 정약용 |
기해년으로 추정함 |
주어사 |
B-2 |
녹암 권철신 묘지명 |
다산 정약용 |
기해년, 1779년 |
천진암주어사 |
C-1 |
<<蔓川遺稿>>의 <天主恭敬歌> |
다산으로 추정됨 |
기해년 |
주어사 |
C-2 |
<<蔓川遺稿>>의 <十誡命歌> |
다산으로 추정됨 |
기해년 |
주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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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문헌들을 놓고 볼 때, 천주교적인 성격을 띤 강학회가 최소한 기해년에 주어사에서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다뷜리 주교의 보고서도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면 1777년부터 이미 천진암과 주어사를 근거로 하여 강학회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천주교적인 공동체를 띤 강학회의 연도를 어느때로 보아야 할 것인가. 변기영신부님은 여러 가지 의견을 종합하여 기해년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6) 그러나 최석우 신부님은 다뷜리 보고서가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에 근거하여 만들어졌고, 또 연도가 丁酉라고 干支로 분명히 나오므로 1777년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7)
여기서 최석우 신부님과 변기영신부님의 논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문헌학적으로 볼 때, 이상의 표에서 보듯이 주어사에서 강학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변신부님의 주장은 문헌적인 논리성에 근거하기보다는 어떤 영감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즉 천진암에서 강학이 이루어졌다는 강한 통찰력을 가지고 모든 사료를 해석하고 이에 맞추어 해석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본인은 학식과 식견이 부족하므로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하나 하나 반박하거나 반론을 재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변신부님께서 다산의 견해를 중시하셔서 강학의 연도를 1779년으로 한다면 강학의 장소도 <與猶堂全書>(사료 B-1, B-2)나, < 蔓川遺稿>(사료 C-1, C-2)의 해제를 따라서 ‘주어사’로 보아야 이치적으로 더 타당하지 않은가 한다. 그러나 어떤 영적인 통찰력으로 이벽이 참여한 첫 번째 강학회가 천진암에서 있었다는 강한 믿음이 있다면 이러한 문헌적인 근거도 아울러 인정하여 1779년을 전후하여 이루어진 강학회를 ‘천진암․주어사 강학회로 해야 더 마땅하지 않은가 한다. 변기영신부님께서 한문을 해석하신 것을 보면 최석우 신부님이 강하게 비판하는 것과 같이 너무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해석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즉 b-1의 嘗於冬月 寓居朱魚寺講學 會者 金源星 權相學 李寵億 等數人.을 해석하는데서도 일찍이 동월에 권철신이 주어사에서 강학을 할 때라고 하여 권철신을 주어로 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8) 또한 b-2 公昔在己亥冬 講學于天眞庵朱魚寺 雪中李檗夜至 張燭談經)를 해석함에도 ‘공이 일찍이 천진암에서 강학을 할 때 주어사로부터 눈이 오는 가운데 이벽이 밤에 찾아와 오래도록 촛불을 켜놓고 경(經)을 담론하였다’라고 해석하는 것도 최석우 신부의 지적대로 지나친 아전인수식의 해석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9)
또한 C-1과 C-2에 제시된 <蔓川遺稿>의 <십계명가>와 <천주공경가>의 내용과 그 저자의 내용에 대하여는 모두 그 문헌과 해제에 나타난 것을 인정하면서도(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초기 천진암 성지에서 천주교적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의 중요한 이론적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해제에 나타난 ‘주어사’부분만은 후기에 가필한 것이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10) 이 해제(附記)의 부분이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저자가 이벽이나 정약종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기해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 모두를 인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해제의 부분에도 자신의 주장과 맞는 부분은 옳다고 인정하고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는 부분은 잘못된 것이라고 배척하는 것은 본인의 주장을 합리화시키는데는 도움이 될 지 모르지만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만천유고>에 나타난 내용들 그리고 그 저자와 저술년도 등에 대하여 최석우 신부님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완전한 사료로서 인정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취한다. 11) 그러나 변신부님은 이 자료가 천진암 성지에서 천주교적인 성격이 분명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자료로 인정하고 활용한다. 12) 그러면서도 그 부기(附記)로 나오는 己亥年 臘月 於朱魚寺 李曠菴檗 作詞에서 기해년과 광암이벽작사 부분은 취하고 어주어사(於朱魚寺)는 우주어사(于朱魚寺)로 해야 마땅하다며 취하지 않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즉 변신부님 말씀대로 부기(附記)부분이 가필(加筆) 또는 조작(造作)된 것으로 본다면 그 부기 전체가 조작되거나 가필된 것으로 보아야지 어떻게 장소부분은 조작되고 저자나 연도 부분은 조작이 안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전체적으로 변신부님의 이러한 태도가 다른 학자들로부터 ‘학자’가 아니라고 평을 받으며 그분의 연구가 인정받지 못하는 원인이 아닌가 한다. 이 부분도 인정하려면 전체를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면 최석우 신부님처럼 아예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 <십계명가> 등이 모두 초기 한국 교회의 작품인 것을 의심해야 마땅할 것이다. 물론 본인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현재의 천진암 성지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근거를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들이 천진암과 주어사의 강학회 기간에 나왔다고 보기 때문에 그 시기에 천주교 신앙의 성격을 띤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을 인정하려면 그 작품속에 나타난 사실 전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그 논리의 타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상의 나타난 사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 천주교의 출발을 의미할 수 있는 강학회는 1777년과 1779년 즈음에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결론이 아닌가 한다. 최석우 신부님의 주장은 다산의 기록보다는 다뷜리 보고서에 근거한 달레 교회사를 더 중시하는 입장이며 여러 문헌에 나타난 개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1777년 주어사에서 최초의 천주교적 강학회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한편 변기영신부님은 다산의 기록과 다뷜리의 기록을 모두 중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인 1779년 천진암에 목표를 두고 양쪽 사료에서 필요한 부분을 취하여 인용하고 있다. 본인의 소견으로는 최석우 신부님의 주장이 개관적인 면에서 훨씬 타당성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수년간 천진암을 왕래하며 생각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의 기원문제를 논하는 이 문제에서 만큼은 문헌적인 고찰만으로는 결론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문헌적인 고찰을 뛰어넘는(그것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문헌적인 것만으로는 결론내기 어려운 부분에서는) 어떤 영적인 통찰력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천진암에 20 여년간 거처하며 그와 관련된 사료를 수집하며 연구해온 변기영 신부님께서 일반 문헌의 자구상으로는 밝혀낼 수 없는 어떤 영적인 통찰력을 지니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하여 본인은 1779년 천진암에서 결정적인 천주교적 강학회가 있었다는 변기영 신부님의 이론을 일단 따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초의 천주교의 강학회가 아니더라도 즉 1777년에 이미 천주교적인 강학 모임이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1779년에는 이미 더욱 성숙한 모임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고, 다산의 기록에 나타난 내로 주어사에서 강학이 있었다 하더라도 천진암에 넘어와서 강학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기영 신부님이 천주교적인 강학이 주어사가 아닌 천진암에서 주로 이루어졌다고 고집하는데는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어떤 면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단지 주어사에서 천주교적 강학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분명히 나타난 다산의 기록 등을 부정하는 것이 되므로 옳은 주장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사료 B-1, B-2, C-1,C-2) 분명 강학회는 천진암과 주어사의 양쪽에서 있었다고 본다. 이 두 사찰의 거리는 걸어서 1시간 거리로는 2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변신부님의 주장대로 강학의 주관자인 권철신이 양평 쪽에 집이 있었으므로 주어사에 먼저 거쳐하며 강학회를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있고 젊은 선비들이 모여오자 장소를 천진암으로 옮겨 강학을 계속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먼저 주어사에서 강학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벽선생이 주어사를 향하여 출발하였는데(그리고 실제로 주어사에서 강학을 시작한 것이 맞는 사실일 수 있다) 그 사이에 강학의 장소가 바뀌어 천진암으로 옮겨갔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변신부님의 주장대로 주어사에 당도한 이벽이 절을 잘못 안것이므로 다시 산을 넘어 천진암으로 오게 된 것이고 이렇게 될 때 다뷜리 보고서나 달레 교회사에 나오는 기록과도 일치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본인은 1779년에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강학이 있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며 한국에서 최초로 천주교적 성격을 띤 강학의 명칭을 1777년과 1779년 즈음의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로 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이렇게 하면 문헌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주어사’를 주장하는 다른 학자들(최석우신부님. 조광 교수 등)과 천진암만을 확신할 수 없어 이 시기의 강학회를 ‘천진암․주어사 강학회)라고 부르는 다른 여타의 학자들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여지가 생길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 ‘한국 천주교회 창립’이라는 말의 사용문제
이 문제에서 이론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 교회가 발생했다’고 보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두 전문가의 견해를 살펴본다.
A. 변기영신부: 예비신자도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신자공동체에 포함된 것으로 보고 나아가서 ‘신자’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비신자들의 공동체도 ‘신자들의 공동체’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이 ‘신자들의 공동체’는 곧 ‘교회’가 성립됨을 의미한다.
( 이론의 근거로서 제시하는 조항 )
①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14항.
성령의 감도를 받아 교회에 결합되려는 명백한 의사를 표명한 예비자들은 이 소망 자체로써 교회와 결합되는 것이므로 자모이신 교회는 그들을 이미 자기 자녀로 알아 사랑하고 돌보아주며 감싸주고 있다.
② 교회법 제 206 조.
1항. 예비신자들은 특수한 방식으로 교회와 연결된다. 즉 그들은 성령으로 감도되어 교회에 합체되기를 명백한 의지로 소망하고, 따라서 바로 이 원의와 함께 실행하는 신덕과 망덕과 애덕의 삶으로써 교회와 결합되고, 교회는 이들을 이미 회원들로서 애호한다.
2항. 예비신자들을 특별히 보살피는 교회는 복음적 삶을 살도록 그들을 초대하고 거룩한 예식을 거행하도록 그들을 인도하며 그리스도교인들의 고유한 여러 가지 특은을 그들에게도 베푼다.
B. 최석우 신부: 예비신자도 교회의 구원대상에 포함될 수 있으나 완전한 신자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갖는 것은 세례성사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한 사람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완전한 신자가 된다고 할 수 있고, 이 세례를 통한 신자들의 모임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신자들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고 곧 ‘교회’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 이론의 근거로 제시하는 조항 )
① 교회헌장 14 항. 공의회는 성경과 성전에 의거하여 나그네 길에 있는 이 교회가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 . . .이 그리스도는 당신 몸인 교회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과 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교회의 필요성도 확인한 것이니, 문을 통해서 집에 들어오듯이 사람들이 세례를 통해서 교회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 . . . 이 교회에 들어오기를 거부하거나 끝가지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 교회 단체에 완전히 결합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교회제도와 교회 안에 마련되어 있는 구원의 수단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보이는 교회조직 안에서 교황과 주교들을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이니, 즉 신앙고백과 성사(聖事), 교회의 행정과 교류의 끈으로 결합된 사람들이다.
② 교회법 204조
1항: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례로 그리스도께 합체됨으로써 하느님 백성으로 구성되고, 또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과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 하느님이 교회에게 이 세상에서 성취하도록 맡긴 사명을 각자의 고유한 조건에 따라 실행하도록 소명받은 자들이다.
2항: 이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회로 구성되고 조직되어 베드로의 후계자 및 그의 친교 안에 있는 주교들에 의하여 통치되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
③ 교회법 205조 : 이 지상에서 가톨릭 교회의 친교 안에 온전히 있는 이들은 그 교회의 보이는 조직 안에서 신앙선서와 성사들 및 교회 통치의 유대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영세자들이다.
이와 같은 이론에 근거하여 변기영 신부님은 1984년 이전의 즉 1779년 전후의 강학회에서 천주교 신앙을 표현한 이벽과 그 추종자들의 공동체를 ‘명백한 신앙 공동체’로 보며 따라서 ‘한국 천주교회가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며, 최석우 신부님은 세례성사를 받은 이승훈이 돌아와서 함께 했던 동지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 세례받은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된 1784년의 한국 교회의 공동체를 ‘비로소 처음으로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회’라고 보는 것이다.
(해석과 판단)
C. 필자 참고제시 자료: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해설」(정진석 주교)
제2편 전례와 성사: 제2장 성사(세례성사) 해설 110. 쪽 (3)예비신자(cathecumenus)
가. 예비 신자의 위치.
① 예비신자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기에 교회에 온전히 합체되지는 아니한다.
② 예비신자들은 신자들에게 고유한 의무와 권리를 온전히 가지지는 못한다.(교회법 제 96조 참조)
③ 예비 신자들은 순전히 교회가 제정한 법률(규율법)은 적용받지 아니한다.(교회법 제 11조 참조)
나. 예비신자의 특은.
교회는 예비신자들도 이미 회원으로 애호한다.
① 복음적 삶을 살도록 초대한다. (갈라 3,2 참조)
② 점차로 교회의 전례 생활로 인도된다. 전례는 교회생활의 정점이며 원천이다.(전례헌장, 10항 참조)
③ 예비신자들도 가톨릭 신자의 고유한 특은 중의 일부를 적용받는다. 예를 들면 교회의 축복을 받고(교회법 제1170조 참조), 교회의 장례식도 허용된다.(교회법 제 1183조 1항 참조)
이상의 이론에 대하여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의 판단으로는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과 교회법의 해석을 그것을 지은 사람의 의도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의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본다. 즉 이는 가정에 가장이 신앙을 가질 결심을 하고 영세를 받고 차츰 가족들이 영세를 받기 시작하여 몇 년 안에 가족 모두가 영세를 하게 되는 성가정(聖家庭)을 이루었다고 볼 때, 이 가정에서 가정교회 창립기념일을 세운다면 어느 날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이 가장이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를 생각할 수 있고, 둘째로 확실하게 입교할 결심을 하고서 예비자반에 등록한 때를 생각할 수 있고, 셋째로 이 가장이 예비자 교리반을 잘 마치고 성당에서 영세를 한 때를 생각할 수 있고, 넷째로 이 가장이 영세를 받고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가족 기도모임을 시작한 때를 생각할 수 있고, 다섯째, 가족들이 모두 영세를 받게된 때를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 가정에 교회가 발생하고 창립되었다고 기념식을 거행한다고 하면 어느 날로 해야 할까. . . . 가정 교회 창립기념일을 거행한다고 하면 어느 날로 해야할까. 가장이 천주교에 관심갖기 시작한 날로 해야할까. 입교한 날로 해야할까. 영세한 날로 해야 할까. 가정기도모임을 시작한 날로 해야 할까. 가족 모두가 영세한 날로 해야 할까. 여러 가정에 설문조사를 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무래도 가장이 영세한 날로 하는 것이 제일 많지 않을까 주측해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을 확실한 정답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영세하기 전에도 가족들이 모여서 기도모임을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고 어떤 가정에서는 굳이 이날을 자신들의 가정교회 창립일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논쟁이 꼭 해야만 하는 논쟁도 아니고 어쩌면 부질없는 논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기념일을 하자면 가장의 영세 주년 기념일, 내가 영세를 하기로 결심한 몇 주년 기념일, 가족 기도 모임을 하기 시작한 지 . .주년 기념일 등 나타난 사실을 가지고 기념하면 될 것이다. 교회의 시작은 성령이 활동하시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사도 행전 2장 참조) 가정 안에 언제 교회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본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나타난 사실만을 인식할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교회의 시작도 언제 정확히 한국교회가 시작되었는지 함부로 말할 수 없지 않는가 한다. 말한다 해도 개인적인 소신으로 그치는 것이 좋지 않는가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많은 경우에서 그러했듯이 불필요한 논쟁을 유발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나탄난 사실을 가지고 원할 경우 그 기념식을 하면 되지 않는가 한다. 즉 한국 천주교 기원 천진암 강학회 00주년 기념. 이승훈 영세 00주년 기념. 교구설정00주년 기념 등으로 한다면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중의 어느 하나를 ‘한국 천주교 창립일’이라고 못을 박아서 지칭하며 이 날을 기념일로 정하여 행사를 한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천진암에서 거행하는 ‘한국 천주교 창립 00 주년 기념 행사’의 명칭을 바꾸어 사용했으면 한다. 이 명칭은 ‘한국 천주교 창립’이라는 말이 들어감으로써 많은 오해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오히려 ‘한국 천주교 기원 천진암 강학회 기념’이라고 말한다면 이의를 달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언급한 변기영 신부님과 최석우 신부님의 토론내용을 보면 변기영신부님께서 다른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아전인수(我田引水)식의 해석을 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발생은 완전한 신자가 발생하고 그 신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예비신자들의 모임으로서도 ‘교회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해석이고 영적인 해석일 것이다. 공적으로 교회의 시작을 규명하는 데서는 이러한 주관적인 해석을 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변신부님처럼 생각한다면 각 지역교회의 시작일을 정하는데는 분명한 연도와 날짜를 잡기가 참으로 애매할 것이라 생각한다. 수원지역 천주교회의 발생과 성립, 평택 천주교회의 발생과 성립일을 무엇으로 잡아야 할까. 이미 신자들이 와서 살고있고 일부 사사로운 공동체가 형성이 되어있더라도 공적으로 (즉 성사적으로나 교계적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를 그 교회의 시작으로 보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예: 본당의 설립, 교구의 설립. 지역에서 세례성사의 집전행위 발생 등) 그렇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동의하며 그 기념일을 지내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이승훈의 영세사건과 그가 돌아와 세례성사를 전파하며 공동체를 형성한 것이 공적으로 그리고 교회법적으로 확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건이고 명백하게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요건을 갖춘 것이므로 이 때를 공적인 성격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발생으로 보아야하지 않나 생각한다.
이승훈의 영세사건과 그가 귀국하여 이루어진 공동체를 한국 천주교회의 발생과 창립으로 본다고 하여도 광암 이벽을 통한 한국 초기 선각자들의 활동이 과소평가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이승훈이 영세받을 수 있는 정신적이고 신심적인 기초는 이미 초기 천진암․주어사 강학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13) 그리고 이승훈의 영세와 귀국 후 세례성사를 통하여 형성된 공동체를 공식적인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으로 한다면, 즉 최석우 신부님의 이론을 따른다면 한국 천주교회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준 그랑몽 신부에 의하여 그리고 세례를 준 장소인 북경의 북당 성당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변신부님의 주장은 일면 일리가 있는 듯하지만 다시 신중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지나친 비약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승훈에게 블란서 신부인 그라몽 신부가 세례를 주었다 해도 이것은 그라몽 신부가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이고 그랑몽 신부는 단지 그 도구의 역할을 했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교회(보편 교회와 지역교회를 총망라해서)의 진정한 창립자는 진리이신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강림절(聖靈降臨節)을 교회(敎會)의 창립일(創立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승훈의 영세 사건을 기점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시작을 삼는다고 해서 그 공이 결코 불란서 신부에게로 돌아가거나 그 탄생지가 북경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될 것이다. 이미 이승훈 선조는 다산(茶山)이 회고하는 바와 같이 이미 1777년 또는 1779년을 전후해서 이미 오랜동안 이벽 등과 교류하며 천주교 사상을 익히며 실질적인 영세준비를 하여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영세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파견한 전(前) 예비 단계의 한국 천주교회의 공동체 즉 광암 이벽을 수장으로 하는 예비교회의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를 가지고 블란서 신부가 한국 교회를 만든 것이라느니, 또는 북경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만들어진 것이라느니 하고 평하는 것도 지나친 비약이며 본질을 왜곡시키는 그릇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국 천주교 창립’이라는 말을 정식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주체는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다른 기관이나 시설에서 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공적인 권위 없이 또는 공적인 권위 내지 신빙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주관적인 판단에서 하는 행사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수원교구 설정기념일은 현재 10월 7일로 되어 있는데(이는 명확한 사항이므로 이론의 여지가 없다) 어떤 본당에서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하고 홀로 다른 날을 택하여 ‘교구 설정 기념일’을 지내고 있다면 그 본당의 판단의 이상 유무를 떠나서 주제넘는 행위임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교구 설정기념일 교구에서 정해서 할 문제이지 본당에서 정해서 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혹 교구가 교구 설정기념일을 지내지 않고 있다면 교구청에 이야기해서 그 날을 기념하도록 건의를 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해나가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없이 독불장군식으로 혼자서 그것도 하지말라는 기념식을 계속해나간다면 이것은 만인의 인정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종내에는 우스운 꼴을 당하고 말 것이다. 이상에서는 교구설정기념일을 예로 들었지만,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일의 경우는 한국 천주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일이 분명하다. 이것을 굳이 천진암 성지 한곳에서 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넓은 의미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기념행사는 필요하다면 한국 천주교 전체가 해야할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기념행사가 분명하게 한국 천주교회의 일치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에 대하여 생각하는 사람은 변신부님의 해석과 주교회의의 해석이 다른 것을 보면서 교회의 불일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교구 사제단안에서조차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고, 이러한 불일치가 잠재된 행사이고 이 행사를 통하여 알게 모르게 교구장과 사제들, 사제와 사제 사이의 불일치가 확산되어 나가는 행사라면 그 행사를 중단하고 특히 ‘한국 천주교 창립’이라는 말의 사용을 중단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교회 내에 유력한 그리고 전문가적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고, 더욱이 한국 천주교회를 공적으로 대변하는 기관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름을 계속 사용하며 행사를 지속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천진암의 의미를 살려서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에 기초하여 누구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 근거하여 ‘한국 천주교 태동 천지암 주어사 강학회 기념 000 주년’행사를 한다면 누구나 긍정할 수 있는 행사가 되지 않을까 한다.
교구 내에서도 주교님께서도 천진암 성지에서 큰 잔치를 마련해놓고 오시라고 하면 가주시는 식의 태도도 제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구장님의 입장에서도 한 성지 신부의 행사를 격려하는 차원도 있지만 더 큰 차원에서 그 사제가 하고 있는 일이 ‘교구 내 신자들의 일치’를 저해하는 일이고 전반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일이라며 이를 시정시켜주고 그 다음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다. 선임교구장님부터 현 교구장님까지 천진암 행사에 참석하신 것이 거의 20년에 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년동안 수원 교구장의 이름으로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천진암 이외의 수원교구 어느 본당, 어느 시설, 어느 신학교에서도 이 날에 교구장님과 일치하여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 행사 또는 전례’를 거행하는 곳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교구장이 20년동안 긍정하고 있는 일을 교구내 거의 모든 본당, 특히 신학교에서 일치하고 있지 않다면 그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신자나 사제는 본의 아니게 교구장님과 일치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구장님이 천진암에 참석하는 행사가 다른 여느 성지 행사 처럼 ‘그 성지 고유의 행사’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 행사의 제목이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행사’라면, 그리고 교구장님께서 그 문제에 관하여 그와 같이 확신을 가지신다면 당신 관할 교구내에서라도 모든 교구민이 일치하여 이 기념일을 기념하도록 조치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 교구장으로서 교구민의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구장님께서는 행사에 참여하여 많은 신자들 앞에 서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큰 차원에서 교구의 일치를 이루어놓고 그 다음에 행사에 나가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천진암에서 교구장님의 주관으로 ‘한국천주교 창립 기념’행사를 하고 있는데, 신학교나 다른 여느 본당에서는 전혀 이러한 의미와는 상관없이 지낸다면 그리고 이것이 수십년을 지속해오고 있다면 이것은 그 행사 명칭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고 교구 스스로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한다. 교구장님께서 사목적인 판단으로 변신부님이 하는 기념행사를 전적으로 긍정하고 이를 허락하기로 한다면 그 행사의 성격상 교구 전체에서 동일한 기념식을 거행할 수 있는 조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교구장의 조치와 행동에 일치하는 강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교구 신학교 한국교회사 시간에 한국 천주교 기원에 대하여 전혀 다른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고14), 나아가 변신부님 이론의 부당함이 강의되고 있는데 그리고 그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하나 둘 계속하여 사제가 되어 나오고 있는데 교구장님은 변신부님의 손에 이끌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소위 그리고 자칭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행사’에 계속 나가서 변신부님이 써준 원고를 계속 읽고 계시다면, 그리고 교구의 다른 많은 성당에서는 교구장님의 이러한 모습에 전혀 동조하지 않고 있고 오히려 외면하는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 간다면 이는 본의아니게 교구의 일치, 특히 교구장과 사제들과의 일치가 소리없이 망가져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책임은 결국 교구장님과 변기영 신부님께 돌아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본인은 이러한 점에서 교구장 주교님께서 두 가지 조처 중에 하나를 택하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과거 1984년 한국 주교회의의 권고를 되새기고 받아들여 현재 천진암 성지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시행하고 있는 소위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행사’를 중단하고 다른 명칭의 천진암 행사 이를테면 ‘한국 천주교 창립 선조 광암이벽 기념 행사’ 또는 ‘한국 천주교 태동 천진암 강학회 기념행사’ 또는 ‘한국 천주교 창립 선조 기념행사’ 등의 명칭을 바꾸어 행사를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교회의나 특히 서울 교구 교회사 연구소 등에서 더 이상의 비웃음을 듣지 않게 될 것이고, 그 행사 자체의 정당성을 얻게 될 것이며 ‘창립 기원’에 관하여 교구마다 왜 견해가 다르냐는 등의 신자들의 비판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행사의 성격도 다른 여타의 성지와 마찬가지로 성지 자체 행사가 되는 것이며 반드시 교구 행사이거나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행사가 되는 것이 아니므로 교구장님의 참여도 훨씬 자유로울 것이고, 그 성지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사제들도 교구장님과 불일치하고 있다는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주교회의 권고를 무시하고 변신부님의 주장을 받아들여 수원교구 자체적으로 그리고 교구장의 권한으로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 행사’를 거행해나가고자 한다면(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교구 자체적인 교구 기념일로서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일’을 제정하고 교구가 전체적으로 일치하여 이 기념일을 거행할 수 있도록 조처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 행사의 정당성을 뒷받침할만한 역사적 신학적 근거를 마련하여 신학교에서부터 신학생들에게 ‘한국 교회사’안에서 강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이 적어도 수원교구 안에서만이라도 신학생들은 물론이고 전체 사제단과 교구장이 일치하여 명실상부하게 ‘한국 천주교 창립’을 기념하는 행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에 관한한 교구장님과 사제들과의 근본적인 불일치의 문제 중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이론적인 타당성의 부족함으로 인해 공개적으로 주교님의 결정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제들이 있을 것이고 또 많은 사제들이 교구의 결정에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을 경우가 있을 것이라는 점과, 또한 타교구 특히 서울 대교구와 기타 지방 교구의 교회사 연구소나 교회사 전문가들이 수원교구의 결정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나올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현재와 마찬가지로 천진암 성지에서 주관하는대로 계속 교구장님께서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의 이름으로 행사에 참여하신다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교구장님과 사제들, 교구장님과 신자들 사이의 불일치가 싹트고 퍼져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교구장님의 행동 자체가 정당한 근거 위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사제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오직 힘이 세고 목소리 큰 한 사제에 이끌려 행동하신다는 것 이외에는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3. 천진암 대성전 건축에 관한 문제.
- 천진암 대성당 건립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현재 천진암에는 100년 대성전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이 계획은 거의 변기영 신부님의 주관에서 비롯되어 <천진암 대성전 건립 추진위원회>의 이름으로 발의되고, 전임교구장님이신 김 안젤로 주교님의 추인으로 공식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변기영 신부님은 이 대성전 건립을 추진하면서 여기에 유형 무형의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천진암이 성지인가 아닌가, 또는 1779년을 한국 천주교 창립기원 연도로 정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을 떠나서 1779년에 분명히 천주교 강학이 이루어졌고, 또 그것이 천진암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면 천진암이 한국천주교 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증명되는 것이고 이곳이 한국의 성지가 됨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또한 천진암을 한국 천주교가 발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성지로 인정을 한다면 이곳에 기념성전을 짓는 것은 후손들이 해야할 당연한 일일 것이고 나아가 성지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도 후손들이 해야할 당연한 몫이라는데 이의가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진암을 분명한 성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꼭 100 년 대성전이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큰 성당을 꼭 천진암에 지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한번쯤 다시 검토하고 재고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배티성지나 배론 성지 또는 새남터 성지 또는 미리내 성지 등을 가보면 그곳의 기념 성전이 알맞게 세워져있음을 본다. 때로는 주위경관과 잘 어우러지지 않는듯한 기형의 성전도 있지만 아무튼 크게 무리되지 않는 기념성전이 세워져 있고 이는 흔히 그 성지 자체적인 수입과 후원자들의 성금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이 성전이 세워지는데는 그 성지에 관계된 순교자 또는 성인들을 기리기 위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고, 그에 걸맞는 성전이 지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성전 건립에 대하여 아무도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건립의 이유 뿐 아니라 그 건축의 규모나 방법 등도 그 성지에서 알아서 정하는 것이었고 그것이 사회적으로나 전교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천진암 100년 대성전의 경우는 그 경우가 다르다고 본다. 우선 건축의 규모가 일반 건축의 규모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천진암 성지의 안내책자를 보면 이 대성전의 완공비는 대략 500억을 잡고 있다. 그리고 그 기간은 100년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건축의 규모는 성당터만 약 3만평이며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1 층의 안밖 건물 평수는 약8,000평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좌석수는 1-2층 합하여 33,000석에 달한다. 문제는 천진암이 성지라 하여도 꼭 이렇게 큰 성당이 이곳에 지어져야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성지의 성당 처럼 몇 백평 또는 크게 잡아 천평이나 이천평 규모의 성전을 지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현 천진암 성지 책임자이신 변기영 신부님이 말하는 천진암 100년 대성전의 건립이유를 들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과거 명동 대성당이 지어졌을 때 한국 신자들의 숫자는 약 4만명이었다. 이 4 만명의 신자가 있을 때 현재 규모의 명동성당을 지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 신자가 400만명에 달하고 수원교구의 신자수도 40만을 훨씬 넘어섰다. 그렇다면 이 숫자에 걸맞는 대성전을 지어 하느님께 바쳐야 마땅한 것이다. 15)
2) 대성전은 그 시대 신앙의 표현이다. 유럽의 신앙을 지켜가고 있는 것은 대성전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을 잘 지켜가기 위하여도 유럽의 대성전 못지않은 대성전을 꼭 하나 남겨야 한다. 16)
3) 대성전은 주교좌 대성전(cathedral)과 기념 대성전 (basilica)이 있다. 천진암 대성전은 기념 대성전에 속하는 것으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에 걸맞는 성전이 되려면 현재 계획된 규모정도는 되어야 한다.17)
4) 천진암 성지와 대성전은 남북한 통일 이후까지도 내다보고 있다. 남북한 통일이 이루어지면 남북한 신자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하느님께 예배를 봉헌할 장소가 현재의 천진암만한 장소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남북한 신자가 모여서 함께 하느님에 대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는 이렇게 큰 대성전이 필요하다고 본다. 18)
이러한 변신부님의 주장은 언뜻 들으면 매우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신중하게 생각하면 변신부님의 표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맹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인구 4만명이었을 때 500 평의 명동성당을 지었다면 이제 한국 신자 400만이 되었을 때는 수만평 규모의 대성전을 짓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은 정말 그러해야 하는가 다시 한번 검토해본다. 이미 도심 곳곳에서는 수천 평의 거대한 성전들이 들어서 있다. 때로는 너무 성당을 크게 지어서 문제가 되는 곳도 있다. 수원교구에만 큰 성당들이 몇 개있는데 그 성당의 건축평수와 건축비를 따져보면 수원 권선동 2817평(건축비 약 80억 땅값제외), 분당 요한 1258 평(약 300억), 안양 중앙성당 1940평(약 200억), 수원 정자동 2223평(47억) 등이다. 이미 성당의 규모는 커질 대로 커져서 더 이상 성당을 크게 지으려 한다면 신자들로부터 외면당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성당을 지으신 신부님과 신자분들은 그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 많은 경우 여러 신자들로부터 비판의 소리도 또한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더구나 교구의 성당분가 정책으로 대성당을 지어놓고도 신자수가 줄어들어 대성전을 채울 수 없음을 곳곳에서 보곤 한다. 인구 4만명일 때 성당이 명동 1개였다면 신자 400만 명인 현재는 대한민국 안에 본당 수만 1190개이고 수도원과 공소 성당까지 헤아리면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이다. 1190개의 본당 중에서 그 규모가 1000 평 이상 되는 성당도 상당히 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본당과 성당이 있는데 신자수가 400만 가까이 되었다고 하여 이를 상징하는 거대한 대성당을 천진암 산 위에 꼭 지어야 한다는 논리가 과연 맞는 논리인가 심각하게 질문하여 보지 않을 수 없다. 천진암에 한국 천주교 발생을 기념하는 성당을 지어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을 없을 것이다. (천진암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지(聖地)임을 인정하는 사람에 한해서는) 그러나 그러하기 때문에 한국 신자 인구 400만을 상징하는 성당을 천진암 성지에 성당터 3만평에 건물 바닥평수 8000평의 규모로 지어야한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줄 안다. 왜냐하면 천진암 성지가 중요하다고 하여 그곳에 수만명이 들어가는 성당을 지어야한다는 필연적 이유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전터를 그렇게 닦아놓았으면 1 년에 한 두 번 있는 행사는 성당 밖에서 치루어도 아무 이상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변기영 신부님의 일관되고 지속적인 성지 발전 노력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지만 지나친 논리의 비약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이미 변신부님이나 천진암 성지 행사에 교구장님을 비롯한 주요한 인사들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미 천진암 성지는 천진암 성당 신자 만의 성지가 아니고 교구 전체의 성지요 한국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전건립의 차원도 천진암 성지 독립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언젠가는 교구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것이고 여기에는 교구 사제단의 필연적 동의와 지원이 따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짧은 식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천진암 대성전의 건립문제는 교구의 문제요 곧 나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기념성전을 지어야 하는 것과 공사비 500억 규모의 건평 8000평 규모의 대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전혀 구분되어 생각하여야 할 것이고, 한국 신자 400만을 상징하는 거대한 성전을 지어야 하는 것도 과연 꼭 그래야만 하는가 하는 점을 반드시 검토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본인은 오히려 천진암에 그러한 규모의 대성당보다는 좀 더 소박한 규모의 1-2천 명을 수용하는 성당이 들어서면 족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미 몇 천명을 수용하는 대성당이 수원교구에만 여러 곳에 서있고, 이러한 성당으로서 40만 교구민을 상징하는 대성당의 건립은 어느 정도 충족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천진암은 그 성격상 ‘대성전’으로서의 이미지보다는 본래 고유의 의미를 찾아 ‘한국 천주교 발상지’의 의미를 부각시키면서 좀 더 신자들이 친근하게 다가가고 마음의 고향을 삼을 수 있는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둘째로 변신부님께서 들고 있는 이유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그 논리에 깊은 맹점이 있음을 느낀다. 대성전은 그 시대의 신앙의 산물이라고 하는 점은 공감한다. 그러나 그러한 대성전이 오늘날 현대인의 신앙을 이끌어 가는 주요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지나치게 비약된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성전이 그렇게 많은 유럽의 교회는 이미 신앙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태에 놓여진 교회로 전락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대성전에서 미사를 하고 오면 그 큰 대성전에서 나이든 노인 몇 사람이 주일 미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와서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대성전을 지어서 신자들 안에 신앙의 불을 일으키고 그래서 그 대성전을 채울 만큼 많은 신자들이 열심해진다면 우리는 가능하면 성당을 크게 열심히 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타나는 결과는 반대이다. 나는 유럽에서 몇 년 사시다 온 어느 선배신부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분과 말씀을 나눌 당시 화제의 주제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하는 것이었다. 그 때 그분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교회가 결국은 베드로 대성전과 프로테스탄트와 바꾼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간 신자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었으며 얼마나 소중한 신자였는가.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대성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사이에 어떤 성전과도 바꿀 수 없는 수 많은 신자들이 프로테스탄트로 넘어가버린 것이라는 뜻이다. 수많은 신자와 대성전을 교황님이 바꿀 것을 결정했을리는 만무하지만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러한 해석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일면 수긍이 가면서 그러한 역사적 과오는 다시는 교회 안에 되풀이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신부님의 말씀은 역으로 뒤집어 해석을 하면 ‘성전 건축을 무리하게 잘못하면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을 망쳐놓거나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식견이 짧은 사람이지만 천진암의 대역사도 자칫 역사의 이런 오류로 남을 가능성은 없는지 한번쯤은 분명 생각해 보고 검토하여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천진암 성지 신자들의 신앙을 책임지는 사제로 성지에 근무한 적이 있다. 거기서 느낀 것은 신자들의 영적으로 매우 목말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주임신부이신 변기영 신부님께 말씀 드려서 신자들이 신앙 교육을 강화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제안하고 교구에서 강조하는 소공동체 모임과 성서 교육 과 성체 신심 등 몇 가지를 시도하려 해보았지만, 오직 대성전 건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성지의 사목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이것은 천진암 성지에 국한하여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이지만 확대하여 볼 때 대성전 건축이 교구 전체 또는 한국 교회 전체에 파급되는 효과에 대하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대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대성전 건립 자체가 신자들의 신앙의 쇄신을 가져온다는 논리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신자들이 신앙이 향상되고 불이 타올라 성전을 지었다 라는 것은 타당한 논리이지만, 대성전을 지음으로써 신자들의 신앙이 향상된다는 논리는 교회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대단하고 훌륭한 성전은 그 성전이 있기 전(前)에 그 성전을 지을 만한 신자들의 신앙수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새 신부가 새 본당에 나아가 성당을 지으려 할 때 신자들의 신앙심을 향상시켜놓고 성전을 지으면 자연스럽게 성당을 지을 수 있지만, 교육과 신심을 뒤로하고 성전건축만을 앞세울 때 사제와 신자 사이에는 불편한 관계가 형성이 되고 수많은 냉담자가 발생하며 성전을 다 지어놓고서도 성당이 비게 되는 현상이 나온다는 것이 많은 의식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정설로 볼 때, 천진암 성지의 대성전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신자들, 특히 수원교구 신자들의 신앙의 쇄신이 된다는 것은 앞 뒤가 바뀐 논리가 아닌가 한다. 현재 신자들의 수준에서 수용할 만한 성전의 규모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거기에 맞추어 성전을 지으면 무리가 없지 않는가 한다. 대성전이 없는 현재에도 천진암에서 어떤 행사를 못했거나 부족하게 치루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눈에 보이는 성전(聖殿)은 우리 신앙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聖殿)을 통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쇄신시킨다는 것은 천진암 본래의 정신과도 맞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 초기 선각자들은 오직 서적을 통한 연구와 무형(無形)의 정신세계를 통하여 보이지 않은 천주에 대한 신앙을 깨닫고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천주학의 도리를 깨우치고 곧 바로 실천한 것은 정신계몽과 삶의 실천을 통한 무형(無形)의 교회(敎會)를 형성해나가고자 한 것이지 건물을 짓는다거나 하는 유형(有形)의 교회(敎會)를 세우고자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천진암 성지가 이런 차원의 정신 계몽이나 신앙 쇄신의 부흥을 꾀하는 철학적 신앙적인 기반을 마련해나가고 그 영향력을 확산하는 일에 우선적으로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 변기영 신부님도 충분한 안목을 가지고 또 연구소를 활용하여 중요한 작업들을 해나가고 계신 것으로 안다. 그러나 누가 보더라도 현재의 천진암 성지는 대성전 건립을 최우선의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이 점이 바로 천진암 성지 본래의 정신을 거스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대성전 건립은 신자들의 신앙 쇄신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산물로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성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성전에 대한 강론보다는 천진암에 연원을 둔 한국 천주교 초기 순교자들의 진리탐구와 중생구원 그리고 천주공경의 정신을 우선적으로 배우고 돌아올 수 있게 하여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유럽의 대성전이 그나마 유럽인의 신앙을 지켜주고 있으므로 해서 우리도 대성전을 지음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쇄신하고자 한다는 논리는 잘못된 논리임을 지적하며 오히려 유럽의 대성전이 현재의 빈 공간으로 남아있음을 교훈 삼아 우리는 유형(有形)의 대성전(大聖殿)을 짓기보다는 무형(無形)의 신앙쇄신(信仰刷新)과 교육(敎育)에 더 힘써야 한다는 지향과 지침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셋째로 천진암 대성전은 기념 대성전(basilica)에 속하는 것으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에 걸맞는 성전이 되려면 현재 계획된 규모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점도 우리는 잘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천진암 성지는 학자들이 순수히 연구를 통하여 천주의 존재를 깨닫고 그 도리를 삶으로 실천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곳의 기념성전을 짓는다면 이러한 의미가 충분히 부각되고 그 정신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성당이면 되리라고 생각한다. 성당의 규모가 너무 클 경우 이는 성당의 규모나 건축 등에 압도되어 천진암 본래의 정신을 배우는데 소홀하게 될 염려도 있을 것이다. 현재 천진암 성지를 갈 경우 천지암의 순교자 정신보다는 대성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듣게 될 때 성지의 본래의 의미와 부차적인 의미가 순서가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500억 규모의 기념 대성전이 지어질 경우, 이 때는 한국 천주교 발상의 의미가 있기에 중요한 성지가 아니고 ‘어마어마한 대성전’이 있기에 유명한 성지가 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자칫하면 의미를 ‘기념’한다고 하면서 기념이 사업화되면서, ‘기념’의 본래 의미가 가려질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로, 남북 통일이 되었을 경우 남북한 신자가 다 함께 모여서 대규모의 인원이 함께 예배를 드릴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서 대성전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변신부님 특유의 안목에서 나오는 논리가 아닌가 한다. 일반적인 안목으로 볼 때 남북통일이 되어서 남북한 신자들이 모일 장소를 걱정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 그렇게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상항은 아니라고 본다. 남북이 통일되어 신자들이 언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지는 모르지만, 그 장소를 예비하여 꼭 천진암 성지가 그 장소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고, 천진암 성지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그러한 장소는 그 때에 가서 구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오히려 천진암 성지에서 매달 촛불기도회를 하듯이 신자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의 기원을 이루는 초기 순교자들의 전구를 구하며 ‘통일을 이루기 위한 기도운동’을 벌려나가는 것이 '미래의 남북한 신자들이 함께 모일 성당을 건립‘하는 것보다 훨씬 요긴하고 훨씬 타당하며 성지 본래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결 론
본인은 이상에서 천진암 성지가 보다 많은 지식인들 특히 교회사가들의 인정을 받으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토대 위에 설 수 있기 위하여 몇 가지 점을 재검토하고 변화를 시도해야한다는 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최초의 천주교적 성격을 띤 강학회의 장소와 시기문제에서 교회사학계 내에서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1777년 주어사설과 1779년 천진암설에 대하여 검토해보고 어느 것이 객관적으로 더 타당한 이론인가를 검토하였다. 나타난 문헌들을 검토하여 보았을 때 연도에서는 1779년이 더 비중을 두고 제시되며, 장소에서는 주어사가 더 많은 비중을 두고 나타남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문헌학상으로는 어느 것도 확정적으로 단정하기에는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론의 여지가 많은 1779년 천진암설을 고집하기보다는 이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1777년과 1779년을 즈음한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기념하는 것이 보다 합당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왜냐하면 불확정적인 어느 연대나 장소를 고집하여 반대이론을 견지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보다 긍정적인 안을 제시하여 실제로 이루어진 사건자체를 올바르게 기념하는 것이 초기 선각자들의 정신을 계승하는데 훨씬 실속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 지속하고있는 천진암 성지의 ‘한국 천주교 창립기념’ 행사가 가지는 문제점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한국 천주교 창립 기념’은 원칙적으로 그 기념의 주체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명백하게 행사의 거행을 반대하는 주교회의의 권고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현재 천진암 성지에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 기념행사’의 근거가 되는 이벽등 예비신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공의회 문헌과 교회법 그리고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해설 등의 조항을 검토할 때 그 문헌을 만든 이들의 취지를 살펴 헤아릴 때 ‘온전한 교회의 발생’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밝혀내었다. 이 시기의 공동체가 1784년 이승훈 영세 이후에 정식으로 이루어지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준비시키는 전(前) 예비 단계의 교회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며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수원교구 내에서 20 여년간 시행되고 있는 이 행사로 많은 사제들과 신자들이 교구장님과의 불일치를 체험하고 있으며 특별히 신학교 교육에서 교구장의 실제 행동과 불일치하는 면이 있다는 것과 이것이 서품 후 사제 생활에서 교구장과의 불일치로 확산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교구장님의 결단이 필요함을 제시하였다. 원칙적으로 수원교구 자체 내에서 그리고 사계(史界)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는 불완전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기념행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제들과 신자들의 불일치를 확산시켜나갈 소지가 있으므로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명칭의 사용을 중단하고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한국 천주교 태동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 기념’의 명칭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셋째로, 역시 불완전한 역사적 근거 위에서 무리하게 진행되고 있는 ‘백년 대성전 건축’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특별히 ‘백년 대성전 건축’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변기영 신부님의 주요한 이론근거를 검토하면서 그 논리의 모순성과 맹점을 지적하고, 자칫하면 훗날 교구 내에 큰 문제로 부각될 대성전 건축에 대하여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함을 언급하였다. 결과적으로 천진암 대성전의 대역사(大役事)는 그 성전건축의 이유와 근거를 따져볼 때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요소가 많을 뿐더러 오히려 대성전 건축으로 말미암아 무형의 신앙을 찾아서 삶으로 실천한 천진암 초기 한국 순교자들의 정신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천진암 대성전 건축’은 그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천진암 성지가 어느 본당, 어느 사제, 어느 신자 일부분의 소유가 아니라 한국 신자 전체 특별히 수원교구 전체 신자의 문제라는 데서 인식이 이루어졌다. 나아가서 천진암에서 주장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교구 신자들과 사제들 안에서 충분히 공감을 못 얻고 있는 상태에서 천진암의 변기영 신부님 개인의 주장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계속되는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나아가서 교회 내에 불일치의 영역을 확산해나가고 있음을 우려하는데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뜻에서 이루어졌다. 본인의 짧은 안목으로 큰 일을 하시는 선배 신부님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고 섣부른 주장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인은 여러 해 동안 성지를 다니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생각해온 바이고 특히 실제 천진암 성지에 근무하면서 느꼈던 것을 기술한 것이어서 전혀 근거 없고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여러 동료, 선배 신부님들의 고견(高見)을 청하면서 천진암 성지의 문제가 어느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사제단 모두의 문제로 승화되어 성령 안에 일치된 마음으로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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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부님 말씀 잘 읽고 이해했습니다.
다른 부분들은 신자로써 어떤 결론이 나든지 따르면 된다고 생각하구요,
대성전 건립의 문제는 좀 심각하게 고민되어져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개신교에서도 대성전 건립의 문제로 신자들이 많이 발길을 되돌리고 있다고 알고 있구요...
작아도 그 의미를 되새길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을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