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달과 한량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
북한 사전에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이라는 속담이 나온다. 이 속담에서도 알 수 있듯, ‘건달’은 거들먹거려도 쓸 돈이 없어 처량한 신세의 사람이라면, ‘한량’은 속없어 보여도 흥청망청 쓸 돈은 있어 스스로는 신나는 사람이다. 그러나 ‘건달’이건 ‘한량’이건 아무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는 한심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건달’이라는 단어는 16세기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도 ‘게으른 사람’을 뜻해 지금의 ‘건달’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건달’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다. 범어(梵語, 산스크리트) ‘Gandharva〔樂神〕’를 한자의 음을 이용해 표기한 중국어
‘乾闥婆(건달바)’에서 출발하여 그 어형과 의미가 달라진 말이다.
‘Gandharva’는 수미산(須彌山) 남쪽 금강굴에 살면서 하늘 나라의 음악을 책임진 신(神)이다. 말하자면 ‘음악의 신’인 셈이다.
이 신은 향내만 맡으면서 허공을 날아다니며 노래와 연주를 하며 살아간다. ‘Gandharva’가 노래와 연주를 전문으로 하는 신이었기에 인도에서는 이를 근거로 악사(樂士)나 배우까지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 ‘Gandharva’를 한자의 음으로 표기한 ‘乾闥婆(건달바)’라는 단어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해졌다. 한국에 전해진 초기에는 그 본래의 불교적 의미인 ‘악신(樂神)’의 의미로 쓰였다. 그러다가 불교 사회에서 일반 사회로 넘어와 쓰이게 되면서 어형이 ‘건달’로 축약되고 그 의미도 크게 달라졌다.
아마 일반 사회로 넘어와 처음으로 획득한 의미는 ① ‘하는 일 없이 놀거나 게으름 피우는 사람’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가 이미 16세기에 확인된다. ①의 의미는 ‘건달바’가 본래 노래나 하며 한가롭게 지내는 악신(樂神)이라는 점이 비유적으로 확대되어 파생된 것이다. 이는 ‘백수건달(白手--)’과 같다.
‘건달’이 두 번째로 얻은 의미는 ②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이다. 이는 게으름을 피운 결과로서 생겨난 의미이다.
이쯤 되면 ‘건달’은 바가지나 깡통만 차지 않았지 ‘거지’나 다름없다.
세 번째로 얻은 의미는 ③ ‘난봉이나 부리고 다니는 불량한 사람’이다. 이것은 ‘건달’이 그저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족속이 아니라 허랑방탕한 짓까지 하고 다니는 족속이라는 데서 생겨난 의미이다. 이러한 족속은 ‘건달’보다는 ‘건달패’가 더 잘 어울리며 ‘난봉꾼’과 똑같다.
그런데 최근에는 ‘건달’에 또 다른 의미가 생겨났다. ‘폭력을 휘두르며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그것이다.
빈털터리인 ‘건달’이 먹고살기 위해 주먹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의미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어쩌다가 ‘건달’이 ‘깡패’와 같은 족속이 된 것이다.
한편, ‘한량’이라는 말은 옛 문헌에 ‘한량’ 또는 ‘할냥’으로 나온다. 본래 ‘한량’은 한자어 ‘閑良’으로 조선시대에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지 못한 무반(武班)’을 가리켰다. 그런데 실제 옛 문헌에 보이는 ‘한량’이나 ‘할냥’은 그 본래의 의미가 아니라 ‘일정한 직사(職事) 없이 놀고먹는 양반 계층’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놀고먹는 무반’에서 의미가 확대되어 그러한 처지에 있는 무반(武班)과 문반(文班)을 모두 가리키게 된 경우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 변화가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한량’은 ‘놀고먹는 양반’이라는 의미에서 더 나아가 ‘돈을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이라는 좀 더 일반적인 의미로 변한다. 돈푼깨나 있는 양반들이 하릴없이 돈을 펑펑 써 가며 잘 노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그와 같은 행위를 일삼는 일반인 모두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 변화가 일어난 시기 역시 알 수 없다.
20세기 초에 출간된 문세영 저 『조선어사전』(1938)이나 한글학회에서 펴낸 『큰사전』(1957)에도 ‘한량’에 그 본래의 의미인 ‘벼슬을 못 한 호반(虎班)’이라는 의미만 달려 있지 변화된 의미는 달려 있지 않다. 물론, 최근에 나온 사전에서는 그 본래의 의미를 포함하여 여기서 파생되어 나온 두 가지 의미 모두를 싣고 있다.
『큰사전』(1957)을 비롯해 그 이후에 나온 사전에는 ‘한량’과 더불어 그것에서 변형된 ‘활량’이라는 단어까지 싣고 있어 주목된다. ‘한량’이 동화 작용에 의해 ‘할량’으로 발음된 다음 다시 ‘활〔弓〕’과의 연상 작용으로 ‘활량’이 된 것이다. ‘할’을 통해 ‘활’을 연상한 것은, ‘한량’이 무인(武人)이고 이들이 ‘활’을 사용한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지금의 ‘건달’이나 ‘한량’은 의미가 상당히 변했으며, 그것도 부정적인 쪽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할 일 많은 이 세상에 게으르고 무능한 ‘건달’, 그리고 돈 귀한 줄 모르고 흥청대는 ‘한량’은 모두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건달과 한량 - 돈 없으면 건달, 돈 있으면 한량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2009. 9. 25., 조항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