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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주의 메모 (이웃공개) | 미술 속 시간여행 | 2005/11/14 1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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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주의 르네상스 이후로 변화무쌍하나마 무난하게 이어져오던 회화의 전통을 일순간 무너뜨린 혁명전사 입체주의, 큐비즘이라는 말은 살롱 도똔느(빠리 가을 공모전)에 출품된 브라크의 풍경화 <에스타크의 집들>을 본 마티스가 ‘조그만 큐브(상자)들을 모아놓은 것 같군’이라고 말한 것에서 출발한다. 처음부터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인 회화 운동은 아니나 몇 사람에 의한 조형적 시도가 근대 미술사를 바꾸어 놓기에 이르른 큐비즘의 선두주자는 파블로 피카소와 죠르즈 브라크이다. 이후로 후안 그리그, 페르낭 레제, 로베르 들로네 등이 합류하였다. 브라크가 유서 깊은 고장 에스타크에 체재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을 무렵 피카소는 그의 '청색 시대'와 '홍색 시대'를 거쳐 대작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본격적인 입체주의 조짐을 보인 첫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은 감상적인 요소보다는 볼륨의 기하학적인 처리, 대담한 데포르마숑, 거리감 없는 평면적인 공간 등 이베리아 조각과 흑인예술의 영향을 받아 피카소가 꾸준히 탐구해 온 조형성의 결과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입체주의의 특징인 3차원의 입체를 2차원의 화면에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역력히 드러나 있다. 입체주의는 보통 제 1기 전기 입체주의, 제 2기 분석적 입체주의, 제 3기 종합적 입체주의 세 단계로 구분하여 이해하면 된다. 연대적으로 정확히 구분 짓기는 어려우나 대략 1907∼09년, 1910∼12년, 1913∼14년으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그림이 대상을 한 자리에 앉아서 관찰하여 감상하는 사람이 화가의 자리에서 함께 바라보는 것처럼 시점을 정하고 있는 반면 입체주의는 어떤 것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관찰한 옆모습, 앞모습, 뒷모습을 한 화면 안에 한꺼번에 그려넣는 다시점화 형식이다. 그래서 감상자는 한 화면 안에서 대상의 여러 면이 펼쳐져 있거나 서로 겹쳐진 것을 보게된다. 대체로 피카소의 인물화를 난해한 그림의 대명사로 떠올리지만 입체주의 그림은 표현주의나 상징주의처럼 화가의 감추어진 의도를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러한 기법을 이해하고 보면 훨씬 쉬워진다. 초기 입체주의 시기의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연의 모습을 원통, 원추, 원구로 본다는 세잔느에게서 영감을 얻어, 무수한 입방체들이 서로 겹쳐져 있는 듯한 파사쥬 기법의 공간, 세잔느 화풍을 쫓았다. 둘은 더 없이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작업에 임하였으며 실제로 그 기간 동안의 작품은 누구의 것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분석적 입체주의의 특성은 대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것에 있다. 대상의 형태를 상자로 만들었다가 점점 세분화된 면으로 분할하여 나중에는 상자를 펼쳐놓은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해체하고 해체된 조각들을 자유롭게 재조립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 현실 자체가 조형적 재구성에 지나지 않음을 암시한다. 자연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을 어떻게 그려낼까 고심하던 것을 중지하고 화가의 의도대로 구조를 형성해가는 미술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점이다. 그 결과, 형태를 정직하게 그리지는 않지만 어떤 것이든 그것의 존재성을 회화적으로 해명하려던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지나친 분석으로 현실감과 일상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아직은 전통 회화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기 어려운 까닭인지 실물 이미지를 다시 끌어들이기 위하여 종합적 입체주의로 넘어가는 시기에 트롱프 뢰이유나 파피에 콜레가 등장한다. 빠삐에 꼴레는 ‘종이를 붙이다’라는 불어표현이다. 화면의 일부분에 나무의 결이나 돌의 결, 활자 등을 실물 그대로 그려 넣거나 신문지, 벽지, 상표와 같은 실제 종이를 화면에 붙여 효과를 노리는 것을 말한다. 일일이 보고 그리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점도 그렇지만 그리는 것 보다 훨씬 실물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이 기법은 나중에 신문지나 벽지를 캔버스에 붙이고 데생과 약간의 그래픽한 요소만 가하면 되는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하였다. 꼴라즈는 입체적인 물질을 화면에 덧붙이는 것이다. 피카소의 <등의자가 있는 정물>은 콜라즈 기법을 이용한 수작으로, 브라크가 파피에 콜레 기법으로 실재성을 획득하고 있는 반편 구체적인 물체로 더욱 구체화된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콜라즈와 파피에 콜레는 다시점으로 난해해진 공간에 시각적 통일감을 주었고, 종이와 물체가 가진 다채로운 색과 질감은 입체주의에 색채의 부활 뿐 아니라 표현의 다양성까지 선물했다. 종합적 입체주의 시기에 들어서면서 후안 그리스가 등장한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그랬듯이 그는 종합적 입체주의를 대표한다. 종합적 입체주의는 분석적 입체주의에 비하여 주지했듯이 색채가 다시 살아나고 미미하나마 대상의 형태가 다시 등장한다. 큼직한 색면과 명쾌하고 평면적인 구성으로 색채를 되살려, 소재를 넓히고 표현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는 등 입체주의의 범위가 넓어졌음을 페르낭 레제, 로베르 들로네 등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상을 자유롭게 분해하고 재구성하여 화면에 역동감을 부어 넣으려는 시도도 발견된다. '회화는 모든 예술중에서 가장 자유스런 것이다. 포름과 색채는 평면상에서 놀며 일종의 직물을 짜는 것이나, 그 다양함은 무한에 가깝다. 거기에는 한계는 없고, 복잡하게 얼킨 관계야 말로 포름과 색채의 본질이라 할 것이다'라고 그리스 말하였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자연의 질서와 무관하게 추상성을 시도하면서 이념적으로는 대상의 표면성을 완전히 버릴 수 없었던 입체주의는 1914년 많은 화가들이 1차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내몰리면서 끝이 났다. 그리그의 중병과 창조력의 고갈, 그토록 밀접하였던 피카소와 브라크도 이후로 각각의 세계를 구축하여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