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597]범중엄(范仲淹)-영문(詠蚊)
詠蚊(영문)-모기를 읊다
범중엄(范仲淹, 989∼1052)
飽去櫻桃重(포거앵도중),
실컷 먹고 떠나니 앵두처럼 무겁구나.
飢來柳絮輕(기래류서경).
굶주리고 올 땐 버들솜처럼 가볍더니.
但知離此去(단지리차거),
먹은 뒤엔 이곳을 벗어나기 바빠서,
不用問前程(불요문전정).
제 앞길은 전혀 따지지 않는구나.
◦ 앵도(櫻桃/鶯桃/鸎桃) : → 앵두. 앵두나무의 열매. 모양이 작고 둥글다.
붉게 익으면 식용하며, 잼ㆍ주스ㆍ술 따위의 원료로도 쓰고 약재로도 쓴다.
◦ 유서(柳絮) : 버드나무의 꽃.=버들개지.
◦ 불요(不要) : 필요하지 않음.=불필요.
◦ 전정(前程) : 앞으로 가야 할 길.=앞길.
이하=동아일보|오피니언
모기 이야기[이준식의 한시 한 수]〈225〉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3-08-10 23:45
실컷 먹고 떠나니 앵두처럼 무겁구나.
굶주리고 올 땐 버들솜처럼 가볍더니.
먹은 뒤엔 이곳을 벗어나기 바빠서,
제 앞길은 전혀 따지지 않는구나.
(飽去櫻桃重, 飢來柳絮輕. 但知離此去, 不用問前程.)
―‘모기에 대하여(영문·詠蚊)’ 범중엄(范仲淹·989∼1052)
버들솜처럼 가볍게 왔다가 앵두처럼 무거운 몸으로 떠나는 것,
제 앞길 따지지 않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려고만 하는 존재,
시인은 재바르게 치고 빠지는 모기의 속성을 이렇게 묘사했다.
피를 포식했으니 앵두빛 짙붉은 몸뚱어리가 쉬 눈에 띄기도 하고
날갯짓도 둔중해질 건 뻔하니 그만큼 생존의 위험성도 가중될 터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범죄 현장’을 떠나려는 건 녀석으로선 당연한 선택이다.
시인이 보기에 녀석이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탐욕의 화신일지라도
굳이 그 미물을 책망할 이유는 없겠다. 앞날에 도사린 위기를 외면한 채
무분별하게 탐욕에만 매몰된 인간 군상을 경계하고 싶었을 것이다.
기어이 피를 보고서야 마무리되는 인생 최초의 혈투는 모기와의 오랜 악연이다.
한밤중 무시로 잠에서 깨어나 녀석과 겨루었던 약 오르는 추억이 아련하다.
모깃불을 피워 쫓아내기만 하던 인도주의적인 방식부터,
향긋함을 위장한 독 연기로 저도 모르게 목숨을 앗아버리는 은밀한 도살법,
그리고 쫓고 쫓기는 고도의 신경전을 벌이다 ‘찰싹!’,
기어코 녀석의 피를 확인하고야 마는 통쾌한 보복전까지
녀석과 벌여온 쟁투 과정은 다양하다.
옛사람들의 경험담이라고 다를 바 없다.
당 유우석(劉禹錫)은 ‘난 7척 거구, 넌 가시만큼 작은 존재.
하지만 난 혼자요 너희는 다수이니,
나를 다치게 할 수 있지’(‘모기떼 이야기’)라 했고,
다산(茶山)은 ‘제 뺨을 제가 때리지만 헛방 치기 일쑤요,
넓적다리 다급히 치지만 녀석은 이미 떠나버렸네.
싸워봐야 공은 없고 잠조차 설치기에,
지루한 여름밤이 일 년처럼 길구나’(‘가증스러운 모기’)라고 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