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29 – 6. 4 갤러리인사아트 본관 (T.02-734-1333, 인사동)
신춘향가: 자유와 존엄을 향한 노래
전영미 개인전
글 : 전영미(한국화가)
춘향, 다시 만나다
나는 한국화가로서 우리 고전 속에 담겨있는 한국인의 정서와 아름다운 가치들을 찾아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해 오고 있다. 그 두 번째 시리즈로 춘향전을 택했다. 춘향전은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사랑 이야기로 오랜 시간동안 구전으로, 판소리로, 소설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지금까지 다양한 예술형태로 재창조되고 있는 한국 고전문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채색화 작업에 앞서 3개월간 춘향전 관련 문헌자료들과 영상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춘향전을 열린 마음으로 새롭게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내 시야에 점점 선명하게 다가온 춘향은 과거에 내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춘향, 대중매체를 통해 익숙해진 춘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다시 만난 춘향은 단순히 봉건적 굴레에 갇힌 순종적인 열녀가 아니라 오히려 유교적 질서와 신분제라는 높은 담을 뛰어넘어 무엇이 진정 인간다운 삶인지, 무엇이 삶을 아름답고 고귀하게 만드는지를 치열하게 보여준 아주 용감한 소녀였다.
사랑가 120×120cm 비단에채색, 조각보 2019
자유롭고 열정적인 사랑
춘향은 퇴기 월매와 남원 부사 성참판이 늘그막에 치성을 드려서 낳은 귀한 딸이다. 하늘의 선녀가 품에 안기는 태몽을 꾸고 태어난 춘향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서책을 익히며 예의범절과 재주가 뛰어나 부모의 사랑과 주위의 칭찬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란다. 그러던 어느 봄날, 소녀가 된 춘향은 단오를 맞아 그네를 타러 나갔다가 사또 자제 이몽룡을 만나게 된다. 열 여섯 살 동갑내기 소년 소녀는 한 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가>에서 보듯이 춘향과 몽룡의 사랑은 어떠한 가식도 없이 솔직하고 열정적이다. 신분의 귀천을 떠나 이들은 한 남성과 여성으로서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신분제가 지엄하고 가문의 결정으로 남녀가 만나던 시대에 이들의 자유롭고 정열적인 사랑은 매우 대담하고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별가 61×46cm 비단에채색 2019
춘향이 수절을 택한 이유
그러나 이 순수한 사랑은 엄혹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고 이몽룡은 힘없이 부모를 따라 한양으로 떠나가고 만다. 홀로 남은 춘향은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을 견디며 스스로 수절을 택한다. <이별가>에는 춘향의 사무치는 그리움이 잘 나타나있다. 훗날 변사또가 기생의 딸이 웬 수절이냐고 비웃었듯이 그 당시 양반댁 규수가 아닌 천기의 딸 춘향에게 수절을 강요하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신임 사또의 명을 따라 수청을 드는 것이 관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향이 스스로 수절을 택한 것은 당시 유교적 질서와 운명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진실한 사랑과 신의를 지키려는 춘향의 단호한 결의와 진정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와존엄을향한행진_광목에채색_145x130cm_2019
차라리 죽음을 달라
신임 사또 변학도는 춘향에게 변절의 댓가로 부귀영화를 약속한다. 그러나 춘향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천한 기생에게 무슨 충렬이 있냐는 질문에 춘향은 충효열녀에 어찌 상하가 있느냐며 논개와 같은 의기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대항한다. 화가 난 변학도가 관장을 조롱하고 거역한 죄를 물어 엄벌로 다스리겠다고 위협하니 춘향은 두 눈을 부릅뜨고 유부녀를 겁탈하는 것은 죄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소리친다. 자신의 목숨을 빼앗아갈 수도 있는 권력자 앞에서 천기의 딸 소녀 춘향은 거침없이 저항하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지키겠다는데 왜 그것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지를 묻는다.형틀에 매여 모진 매질을 당하며 거의 죽게 되었어도 자신의 마음조차 지킬 자유가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절규한다. 춘향가 중 <십장가> 대목에 이러한 춘향의 마음이 절절이 잘 표현되어있다. 나는 이 <십장가>야말로 춘향가의 절정으로서 춘향의 진실한 사랑과 고결한 인간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부용당2 57×42cm 비단에채색 2018
옥중에 갇혔어도
큰 칼을 쓰고 옥에 갇힌 춘향은 매질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탄식한다. 이 <장탄가>에서 춘향은 자신을 절개 높은 청송에 비유하며 자신의 억울함과 연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짓는다. 한편 춘향이 그토록 기다리던 이몽룡은 과거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온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거지꼴로 나타난 이몽룡을 보고 춘향의 어미는 크게 낙담하고 괄시하지만 춘향은 자신의 처지보다 몽룡을 생각하며 어머니에게 사정한다. 자신이 곧 죽더라도 몽룡을 잘 대접해주고 자신을 보듯이 대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춘향의 어떠한 댓가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확인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한 사람을 믿어주고 오롯이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인간을 본다.
암행어사 출두: 정의의 심판
변학도의 생일 잔치가 벌어지던 날 춘향은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다. 꽃다운 춘향의 죽음은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하나의 눈요기일 뿐이다. 이몽룡은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암행어사로서 그의 군사들과 함께 출동하여 순식간에 불의한 세력들을 제압한다. 이 대목에서 청자와 독자들은 이야기 속 백성들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만세를 부른다. 천한 출신의 힘없는 소녀 춘향의 고난은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이었으며, 무고한 춘향의 억울한 사정은 오랜 세월 불의한 관리들에게 수탈 당한 백성들의 한맺힌 삶과 맞닿아 있다. 춘향의 사면과 변학도의 봉고파직을 통해 백성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달래고 그들을 괴롭히던 불의한 권력이 심판받는 통쾌함을 만끽한다.
만민평등의 꿈
춘향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춘향은 이몽룡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서 정렬부인이 되고 아들 딸 낳고 백년해로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 이는 당시 백성들에게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천한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 양반과 똑같은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행복을 누리는 춘향의 모습 속에 백성들의 간절한꿈과 소망이 투영되어있는지 모른다. 실제로 춘향가 중 암행어사 출두 대목은 ‘신분제 철폐’와 ‘만민평등’을 외쳤던 동학혁명의 행진가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백성들의 오래된 열망은 머잖아 갑오개혁을 통해 현실화되고 신분제 폐지라는 역사적 결실을 맺게 된다.
부용당1 57×42cm 비단에채색 2018
춘향, 우리 겨레의 얼굴
춘향전은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면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마치 오랜 세월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지층처럼 춘향전 속에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이 겪어온 삶의 흔적들과 애환, 소망 같은 것들이 켜켜이 쌓이고 녹아들어 이야기 속의 사건들이 만들어지고 생생한 인물들이 탄생되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춘향은 누구인가? 비록 신분이 천하여도 비굴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부당한 권력에 맞서서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당당히 싸웠던 춘향, 고난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과 신의를 지켜냈던 춘향. 이러한 춘향의 모습 속에서 나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얼골을 보았다. 구전설화를 통해 태어난 춘향은 우리 민족이 오랜 시간 공들여 빚어낸 우리 민족의 얼골이라고 할 수 있다. 춘향의 말과 행동 속에는 백성들의 응축된 열망과 이상이 아로새겨져있다. 십육세 소녀의 이미지로 현신한 우리 겨레의 얼은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아름답다. 그리고 자유로우면서도 지조가 있고 불의에 맞서 끝까지 싸우는 결기와 용기로 충만하다.
신춘향가, 다시 자유와 존엄을 노래하다
춘향을 통해 표출된 진정한 자유와 존엄을 향한 민족적 염원은 우리 역사 속에서 동학혁명으로, 의병운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의 뜨거운 불길로 솟아오르며 그 영롱한 빛을 드러내었다고 본다.그리고 지금도 춘향가는 우리 곁에서 여전히 순수한 사랑, 신의, 자유, 정의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인간답고 고귀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나의 작업들이 부족할지라도 이번 전시를 통해 춘향가가 신선한 봄바람처럼 우리 안에 깃들어있는 겨레의 아름다운 얼을 북돋우고 다시 한번 신명나게 울려퍼지기를 바란다.
전영미 | Jeon, Youngmi
2019개인전 “신춘향가: 자유와 존엄을 향한 노래” (갤러리인사아트 본관)
2017개인전 “청의 마음” (경인미술관)
2015개인전 “그 시절 그 소녀”(갤러리인사아트 본관)
2014개인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엄마” (갤러리 라메르)
2012개인전 “강아지와 친구들” (갤러리 루벤)
초대개인전 6회(서울, 취리히, 뉴저지 등) 및 개인 부스전 4회
국제아트페어11회(파리, 뉴욕, 밀라노, 싱가폴, 북경, 서울, 부산 등) 및 단체전 30회
삼성생명 달력 협찬, 삼성증권 달력 협찬, 중국 상진케미컬주식회사 달력 협찬 등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100주년 기념 우표대전 대상(서울시장상),
KPAM대한민국미술제 대상(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대한민국 여성작가상
올해의 작가상, 대학민국 혁신한국인 문화예술부문 대상 등 수상
서울대 졸, 이화여대 대학원 졸, 미국 미시간주립대학 디지털미디어아트대학원 졸,
뉴질랜드 빅토리아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박사
한국미술협회,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현대한국화협회, 한미현대예술협회, 송파미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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