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요한 복음서 (1)
이끎말
요한복음서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복음사가 요한이 앞부분에서 예수님 표징을 집중 묘사했다면(1-12장) 뒷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영광을 중심으로 묘사했습니다(13-21장). 앞부분을 ‘세상에 대한 아드님 영광의 계시’로, 뒷부분을 ‘제자들에 대한 아드님 영광의 계시’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자기 계시에 대한 표현?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다.’ 라는 자기계시의 표현 양식을 상징적 표현이나 구원을 뜻하는 말과 함께 자주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구약에 나오는 포도나무나 목자들 이야기를 도입함으로써 구약의 약속과 대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요한복음서의 주요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표현은 크게 일곱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겠습니다. 많은 경우 계시의 말씀(“나는······ 이다.”)은 초대의 말씀(“······ 하는 사람은”)으로 이어지며 구원의 말씀(“······ 할 것이다/하지 않을 것이다.”)으로 끝납니다.
초대의 말씀은 듣는 이에게 ‘계시의 말씀’을 깨달아 ‘구원 약속’에 도달하게 하고자 합니다. 이보다 더 짧고 뚜렷한 계시의 말씀이 또 있을까요? ‘나는······ 이다.’ 란 표현은 자신의 정체를 밝혀주는 최소한의 표현이며 지름길입니다. 일곱 가지 계시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①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48-51)
②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8,12)
③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10,9)
④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0,11.14)
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25)
⑥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14,6-7)
⑦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15,5)
요한복음서와 공관복음서의 차이점 몇 가지
예수님 기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공관복음서 안에는 훨씬 다양하고 많은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에 비해 요한복음서에는 일곱 가지 기적[표징] 이야기만 나옵니다. 요한이 충만, 온전함, 구원의 완성 등을 뜻하는 상징 수 ‘일곱’에 의미를 두고 일곱 가지 기적만 뽑아 전해준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도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으로부터 시작하여 빵을 만드신 성체의 기적을 거쳐, 태생소경의 눈을 열어주시는 기적을 분기점으로 하여 마지막 일곱 번째로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키시는 부활로 기적의 대단원을 마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수많은 기적 이야기들 가운데 요한이 의도적으로 단 일곱 가지만을 뽑아 전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참조: 20,30-31; 21,24-25).
아울러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흔히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을 때 기적을 행하십니다(예, 마르 6,1-6). 그에 비해 요한의 경우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게 됩니다.
요한의 경우 기적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아보게 되는 표징이 되어 사람들을 주님 계시로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2,1-11).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도움 없이 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로 향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 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19,17-18ㄱ) 당시 법에 따르면 형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형구(刑具)를 스스로 날라야 했습니다.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님 좌우에 못 박힌 사람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을 가운데로 하여 이쪽저쪽에 하나씩 못 박았다.”(19,18ㄴ) 공관복음서에서 죄수[강도]라고 일컫는 이들 두 죄인들이 요한복음서에서는 그냥 둘, 두 사람으로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안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처음으로 빈 무덤을 발견한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공관복음에서 막달레나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무덤을 향하는데 비해 요한복음에서는 막달레나 홀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20,11)
요한복음서에서 막달레나는 예수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선포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두고 ‘사도들 중의 사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20,18)
예수부활과 제자 파견(20,1-23)?
네 복음서 모두 예수수난기와 부활 이야기로서 막을 내립니다. 특히 요한 신학에서는 성 금요일과 부활성야뿐 아니라, 그로부터 승천과 오순절에 이르기까지가 서로 분리된 두 가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끊을 수 없는 연속적이며 하나인 사건으로 이해됩니다.
복음서 맺음말?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0-31)
복음서 맺음말은 네 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요한에게서만 발견됩니다. 이는 구약 신약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줄 뿐 아니라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주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1517년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 이래로 흔히 개신교 신학자들이 주장하던 ‘신앙만으로[sola fide], 은총만으로[sola gratia],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가 잘못되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좋은 자료이며 교훈이기도 합니다. 복음사가 요한이 명확하게 ‘성서만으로’에 종지부를 찍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이루신 행적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들을 다 기록하고자 한다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21,25)는 말로 복음서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더없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성서가 모든 신학적 문제나 신앙에 다 답을 줄 수는 없으며 성서를 경전목록으로 결정한 것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7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