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서울 의대 졸업후 군대 갔다 와서 미국 갈까 어쩔까
고민 하고 서울대 병원 인턴 원서도 않넣고 집에서 빈둥 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친하던 지금은 고인이 된 친구 김 군이 찾아 와서 왜 인턴 지원 않하느냐고 닥달을 하였다.
그에 손에 끌려 할수 없이 정원 미달이 었던 인턴 재모집에 응하게 되었다.
원서에 장래 수련 희망 과를 꼭 적어 넣게 되어 있는데
졸업생의 반수 이상이 군대를 가는 바람에 인턴 정원의 1/2 은 미달 이었다.
무슨 과를 지원할까?
내과는 싫고 산부인과 소아과도 싫고 외과는 친한 친구 두놈이 지원 했으니 장래에 경쟁 상대가 될것은 뻔하니 이 것도 않되겠고.
원서를 들고 복도에서 서성 거리고 있는데 3 년위의 아는 선배를 맞났다.
당시 외과 2년차 레지덴트로 성격이 화끈 하고 아주 직설적인 양반이었다.
'저 무슨 과 지원 하면 좋을 까요?"
'마취과 해라.' '왜요?' '우선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장래 네 경쟁 상대가 별로 없고 서울대에서 진급 하기 쉬울 거야.''그래요?'
마취과로 정하고 인턴 원서를 넣었고 4월1일 부터 근무를 시작 했다.
인턴 일년은 재미 있게 또 보람 되게 보냈다.
인턴 말이 되자 다시 고민 거리가 생겼다.
아직 군대 갔다 미국갈 기회는 있는데..
사실 몇명의 동기가 군입대를 해버렸고 몇명은 돈 쓰고 빽쓰고 하거나
위장 이민으로 미국으로 캐나다로 도망 가버렸다.
당시 집안 형편은 말씀 아니게 경제적으로 쪼달리고 있어서
어디로던 도망 치고 싶었었다.
어찌할가 고민 하고 있는데 마취과 선배 하나가 말하기를
일년차만 지나면 나가서 소위 알바이트로 돈 벌 구멍은 많으니
경제적으로 힘들면 그냥 마취하란다.
그래 일년차 레지덴트를 시작 하였다.
레지덴트 일년차 나 하나, 이년차 세명인데 한명은 정형 외과로 도망 가버리고, 인턴 둘 데리고 수술실 5개를 카버 하려니 죽을 맛이다.
그 당시 응급 수술은 왜 그리도 많았는지.
일년차라 하루 건너 당직인데
당직 아닌 날도 일이 늦게 끝나니 집에 갈 틈도 없고 아예 당직실에서 살았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다 식어 빠지고 달라 붙은 짜장면 이나, 남들이 새우는 다 건져 먹은 식은 쨤뽕 으로 때우고 저녁은 수술실 간호원들이 불쌍히 여겨
자기들 먹는데 같이 끓여 주는 라면으로 때웠다.
이렇게 일년을 지나니 수면 부족에 영양 실조, 과로로 피골이 상접 하여
유태인 수용소에서 나온 것 같이 보였다.
이년차 부터는 제일 병원에서 한달의 반은 자면서 당직을 했다.
여기서 받는 돈은 레지덴트 봉급의 두 세배는 되어 돈 걱정은 좀 덜 하게 되었으나 수면 부족에 항상 피곤 하기는 매일반 이었다.
3년 차가 되니 외부 파견으로 심 전도실, 폐기능 검사실, 뇌파 검사실등을
돌고 그 지긋 지긋한 당직을 않해도 되었다.
그래 형편이 좀 나아지자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수없이 선을 보다가 지쳐 이제 선 그만 보고 수련 끝나면 군대 갔다 와서 미국 가버려야지 하고 생각할
즈음에 우리 집 사람을 맞나게 되었다.
고교 동창이고 어렸을 때 부터 친구인 김 군이
자기가 몇년간 죽자 사자 연애 하여
힘들게 결혼한 마누라의 동생인 처제를 보여 주겠단다.
그래 내가 우선 '않 해' 하였더니, 강제 아니니 한번 맞나 보고 마음에 않들면
그냥 나와 버리란다.
좋아 한번 맞나자. 일 끝나면 한 7시쯤 되는데 괜챦냐? 하니
문제 없단다.
몹시 추운 2월 어느날 이었다.
약속된 다방으로 나갔다.
첫인상은 좀 날카롭게, 까다롭게 보였다.
이야기를 좀 해보니 괜챦다. 중매장이 내 친구가 머무적 거리고 있길래
탁자 아래에서 발로 차며 눈짓을 했다. '빨리 꺼져 주라'
친구가 히히 웃더니 내가 방해 되는 모양이니 나는 간다 하며 가 버렸다.
둘이 남아 한 두시간 쯤 이야기 하다 저녁 먹고 소공동에 있는 조선 호텔
꼭대기의 바로 올라 갔다. 전망이 좋았다.
그런데 어렵소 이 여자가 맥주를 나 보다 더 잘 마시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가 점점 개인 적인것으로 흐르자 이 여자가 내가 생각 했던 것보다는
훨씬 괜챦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 했다.
며칠후 다시 맞나기로 약속 하고 헤어 졌다.
그리고 아마 서너번 데이트를 했을 지음 어느날 그 친구로 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 장인 영감이 너 좀 보잔다.
아이구 걸렸구나. 식은 땀 흘리며 영감님 취조에 대답 하고 나왔다.
그해 5월 1일 우리는 결혼 했다.
일년후 첫 아들이 태어 났고 몇달후에 레지덴트를 수료하였고 군 입대를 했다.
일년 반은 광주 통합 병원에서 6개월은 수도 통합 병원에서,
마지막 일년은 수도 통합 병원 분원에서 근무 했다.
이때 백병원 야간 마취 당직에 낮에는 수술있으면 불러 주는 개인 병원에 다니며 마취 해주고 현금 봉투 받아 수입이 짭짤 했었다.
제대 하고 나서 중부 시립 병원에 적을 두고 몇군데 종합 병원과 개인 병원의
마취를 도맡아 해주니 은행에 돈이 차곡 차곡 싸였다.
너무 바삐 일하다 보니 아침 6시에 아이들 자는 모습 보고 나갔다가 밤 12시에
들어와 자는 모습 다시 보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우리 아이들의 3-6 세 사이의 기억이 없다.
2년을 이렇게 일하고 돈이 좀 모이자 당시 막 분양을 시작한 반포 한신 공영
33평형 아파트를 사게 되었다.
먼저 살던 집은 삼선교에 있는 작은 한옥으로 재래식 변소에
수도는 마당에 하나 밖에 없었다.
새 아파트에 들어와보니 수세식 변소에 중앙 난방이라
우린 19세기 생활에서 20세기로 하루 아침에 건너 뛰게 되었다.
먼저 타던 헌차도 새로 나온 기아 브리사로 바꾸고
직장도 강남에 새로 지은 강남 시립 병원에서 근무 하게 되었다.
마침 이지음에 우리 오 찬규 선생도 강남 구청 앞에 안과 개업을 했으므로
우리는 다시 교류를 시작 할수 있었다.
또한 오 선생이 나를 오디오 시스템에 미치게 만든 시기 였기도 하다.
기회가 와서 서울대 병원 마취과 조교수로 발령을 받아 근무 하게 되었다.
모교에서 똑똑한 후배들 가르키는 맛은 좋았으나 위의 과장님은 너무
줏대가 약하고 게을러서 출근도 제대로 않하고 월급만 받아 잡숫고 계셨다.
우리나라 의사중 최초로 U of Pennsylvania Hospital 의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마취과 에서 그 유명한 Dripps 교수 밑에서 수련을 받고 오신분인데.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양반 바로 밑에 있는 양반이 야심과 욕심덩어리 에
거짓말과 부정을 밥먹듯 저지르는 사람이었다는데 있었다.
나는 왼만 하면 일생을 이 직장에서 끝내고 싶었는데
일상 다반사로 이루어지는 옳지 않은 일들과 횡포와 억압과 협박에
손을 들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집에와 집사람에게 이야기 했다.
'당신 오빠가 sponsor한 미국 영주권 신청이 어찌 됬는지 한번 알아 보오.'
이튿날 아내의 대답 ' 우리 차례는 이미 지나 가서 여권만 신청 하면 된데요.'
그날 부터 이민을 궁리 하기 시작 했다.
우선 내년 7월 레지덴트 자리 찾기가 급선무 였다.
미국 지도를 꺼내 놓고 연구 했다.
나이가 이미 많으니 양 쪽 해안지역은 빼자. 남부는 인종 차별이 아직 있을 것이고 하니 중서부 지방을 주로 공략 하기로 하자.
마침 큰 처남이 St.Loius 에서 살고 있으니 거기 Barnes Hospital 과
그 옆의 주 Iowa Univ Hosp. 과 Ohio 주 Cincinnati Hospital 에
편지를 보냈다.
세군데서 다 인터뷰 하러 오라는 답장을 받았다.
첫댓글 어느 사회나 그런 인간상이 꽤 많지요! 내가 남느냐? 저 사람이 남느냐? 결국은 누가 남든 불행한 일이지요! 그러니 고생은 기다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래도 극복한 과거지사이니 지금은 쉽게 얘기하고 쉽게 듣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