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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삼각주 답사기
일시 : 2005년 10월 9일 원화여고 박정희
Ⅰ. 답사를 들어가며
눈이 부시게 푸르른 가을 주말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신라대로 향한다. 이번 답사는 좀 더 특별할 듯 하다. 대구에서 지리교육의 열정을 온몸으로 품고 사시는 분들이 지리답사를 떠나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서른 명 정도가 답사 신청을 했었는데 당일에는 인원이 많아져 대형 버스로 바꾸었다. 매번 강행군을 하시는 교수님 건강이 염려되지만 우리가 지리 수업 시간에 가르치는 대표적인 지형인 삼각주를 가까이서 보고 느끼며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행운에 내 심장은 마구 뛰고 있다. 언제 보아도 정겨운 캠퍼스의 나무 터널이 우리를 반긴다. 첫 대면은 회장님의 소개로 이루진다. 실외조사 전 교수님의 주도하에 지도를 통한 답사의 주제와 경로를 다루는 실내조사가 이루어진다. 짧은 교수님의 말씀은 오랜 세월에 걸친 연구성과의 핵심만을 골라 집어 주셨기에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과서 삼각주 내용에 더해져 충분히 든든한 사전 지식이 되었다.
Ⅱ. 낙동강 삼각주에 대해서
삼각주란 하천이 영속수역(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바다, 호수 등)으로 유입할 때 유속의 약화로 퇴적되어 형성된 지형을 일컫는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시작해 1300리(남한에서 가장 긴 강으로 522km)를 거쳐 남해로 유입된다. 8차수 하천으로 태백,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영남 지역 내륙(1차수 하천이 6만개 이상인) 거대 분지를 휘감아 도는 우리나라 대표하천이다. 낙동강의 마지막 코스인 부산은 삼각주의 형성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삼각주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는 안 된다. 퇴적물질이 먼 바다로 쓸려나가 쌓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고서저의 우리나라 지형에서 남서해안으로 유입되는 큰 강의 하구에 삼각주가 형성되지 못한 이유가 조차가 크기 때문이다. 낙동강의 경우 남해로 유입되는 하구부분은 경사가 1/1만~ 17/1만으로 경사가 거의 없는 평형하천이다. 이러한 조건은 유속이 느려져 운반물질이 퇴적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게다가 조차가 1m미만이라 하천의 퇴적물질이 바다 쪽으로 쓸려가지 못하고 퇴적되어 삼각주를 형성하게 된다.
낙동강 삼각주 - 하천에 의해 형성된 상부 삼각주와 조류에 의해 형성된 하부 삼각주로 나눌 수 있다. 주변 분지까지 합하면 굉장히 큰 규모이다.
Ⅲ. 삼각주 위기설과 역동하는 모래톱 이야기
이런 조건에 의해 형성된 삼각주는 1987년 부산시민의 식수, 농업, 공업용수 공급과 진해간 교통로 건설을 목적으로 건설된 하구둑으로 인해 한때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설이 대두되었다. 그런데 막상 하구둑이 건설되고 난 후 사람들의 예상과는 정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유인 즉! 하구둑 건설 이후 상류의 물질 공급이 많이 차단되었지만 (홍수가 발생할 때는 하구둑을 열어 공급이 약간 되기도 하지만..) 이미 이전에 낙동강으로부터 공급되었던 많은 물질이 인근 바다 밑에 많이 쌓여 퇴적되어 있다. 이는 남해의 등심선을 들여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구 부근의 해안선에서 수km 밖까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물이 빠질때는
낙동강 하구둑 모래톱 - 밀물과 썰물의 흐름이 잠시 멈추는 smag time(참) 일때 찍은 사진이다. 등의 높이는 3-4m정도 되어 등 건너편의 사람은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하부 삼각주 - 조류에 의해 형성
포구 출입구 - 포구마을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수로를 남겨두기 위해 건설된 다리
이 땅을 키운 것의 팔할은 낙동강이다. 거친 바다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자란 갯마을 사람들에게 낙동강은 어머니와도 같을 것이다. 생명의 젖줄... 부산사람에게 낙동강은 고스란히 삶의 터전이 된다. 물이 빠지면 무릎까지 밖에 안오는 얕은 곳에는 조개씨를 뿌려 조개양식장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조그마한 배를 끌고 다니며 미역따는 모습, 숭어, 재첩, 뽀시래기등을 잡으러 다니는 모습... 지금이야 세월이 흘러 강이 오염되고 포구가 매립되고, 공단이 들어서고, 폐수가 방류되어 그 어로활동이나 양식업이 줄었다 하지만 과거에는 객지에 공부시키는 아들 녀석의 톡톡한 후원금을 마련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과거 하구둑을 건설하면서 퍼낸 흙과 주변의 야산을 허물은 흙을 이용해 산밑까지 들어차 있는 바닷물을 밀어내고 주변
육계도와 육계사주 -구름이 진다는 몰운대와 다대포 해수욕장 보덕포 - 무지개공단 조성으로 그 삶의 터전을 잃을뻔 했다.
모래톱에서 약간만 고개를 돌려 다대포 해수욕장쪽으로 향하면 구름이 진다는 몰운대가 보인다. 섬과 육지 사이 오랜 세월의 파도, 바람에 의해 퇴적된 모래로 연결된 육계도가 눈 앞에 펼쳐진다. 바다로 툭 튀어나온 두각지에는 해식애, 파식대, 해식동 등 해안침식지형이 종합선물세트 마냥 한자리에 모여있다. 육지와 섬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역할의 육계사주에는 바닷가 싱싱한 해산물을 타지인에게 제공하며 삶을 이어가는 질퍽한 사람들의 모습이 모여있다.
한때 고운 모래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다대포 해수욕장은 지금은 모래와 뻘로 많이 메꿔져 바닷물을 쫒아 몇분을 걸어 들어가야 해수욕을 겨우 할 수 있을 지경에 까지 왔다. 게다가 인근 공단에서의 폐수방류로 인한 유기물질 유입으로 모진 생명의 식물이 하나둘 그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여기! 말도 마~~ 몇 년전 답사때 양말벗고 갯골을 건넌 한 여학생이 교수님 때문에 내 다리가 엉망이 되었다며 타박 하더라구. 진짜인가? 학생 다리를 봤더니 이건 정말 어휴~~ 그렇게 이 바닷가는 병들고 있는 거야..” 한여름 락 페스티발의 장소로 젊은이들이 쿵쿵~ 거리며 열기를 높여갈 장소로 이용될 뿐, 빼곡히 비치 파라솔이 펼쳐져 가족단위로 물장구를 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과거의 영화를 다대포 해수욕장은 이렇게 보듬은 채 늙어가고 있다.
Ⅴ. 삼각주로 향하다.
낙동강 동편 토지이용 - 화명동 신시가지 강서구 대저동 일본식가옥
이 일대는 과거 배농사를 대규모로 지었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 지주, 농장 주인집이였던 곳에서는 아직도 배저장고(저도고)를 볼 수 있다. 게다가 바닷가 강한 바람을 막기 위해 장독대를 둘러싼 야트막한 담벼락은 바닷가 근처 삼각주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과수원으로 이용되던 인근의 토지이용은 근래 들어 따뜻한 겨울철 기온과 대소비시장의 인접성 이용해 시설재배를 통한 화훼. 채소, 과일(딸기) 재배지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고가의 화훼는 바로 김해공항을 통해 외국으로 출하되어 그 수익이 짭짭하다. 이정도면 자연적, 인문적 조건이 탁월한 곳이라 칭송할만 하다. 또 인근에 개사육장을 많이 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나무가 심겨져 있고 정원이 있는 대규모의 일본식 가옥들은 영양탕을 주메뉴로 하는 대형식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건너편 구포장에 개고기 시장이 혹시 여기서 운반된 개가 팔리는게 아닌가 싶다. 경적을 울리며 바쁘게 다니는 대형차들의 운전자들이 피로 회복을 위해 즐겨찾는 것이 이 영양탕(보신탕)이라 하니 외곽도로망이 이어져 있고, 대도시 부근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지가인 이곳에 개고기 사육장이 성행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대저수문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건설되었다가 최근들어 다시 세운 것이다. 동낙동과 서낙동강을 나누는 경계가 되는 이 수문은 수위차로 인해 배의 원할한 소통이 고려하여 수위를 조절해 가며 배를 통과시키는 갑문식으로 이루어졌다. 대저수문이 만들어지고 난 다음 서낙동강의 수위가 조절되면서 주변의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고여있는 물은 썩듯이 대저수문과 녹산수문으로 인해 흐르는 강이 아닌 멈춰있는 호수가 되어 버린 서낙동강은 뱅어가 잡힐 정도로 깨끗했던 명성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예안리 타포니 예안리 노치
다음은 점심을 먹고 하부 삼각주로 향했다. 교수님은 건너편 을숙도가 보이는 이곳에 1986년에 답사하러 오실때만 하더라도 주변이 모두 파밭으로 평당 6~8만원가량 했던 땅이 하구둑 완공이후 평당 300~500만원으로 상승하였다고 하시며 “이런걸 안 가르쳐 주었으니 학생들이 나에게 뭘 배울려고 하겠어...?“ 특유의 넉넉한 웃음을 풀어내신다. 그러고 보니 낙동강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강은 참으로 여러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가야시대 뱃길따라 외국 상인들과 교역을 하던 낙동강 하구는, 조선시대까지 풍랑과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흐르는 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물건을 실어나르는 교통로가 되기도 한다. 우리들에게 교역의 기회를 가져다 주는 강줄기는 적들에겐 다시 침입의 근거가 되기도 하여 낙동강줄기를 따라 침략한 왜구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근처에 많은 왜성이 쌓기도 하였다. 삼각주 퇴적평야가 형성되어 수문을 막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사람들은 어렵게 지은 농작물을 소 구루마에 실어 가까운 읍내로 내다 팔았을 것이다. (근교농업 또는 트럭 파밍) 그러던 것이 교통의 발달로 도로망이 형성되고 시가지가 확대되면서 농경지는 한쪽으로 점점 밀려나고 있다. 점점 밀려나긴 하지만 워낙에 농사가 잘 되는 토질이라 이곳에서 재배된 작물은 전국으로 또는 해외로 까지 팔려나가고 한다. (원교농업 또는 트레인 파밍) 시간을 떠나면 살펴볼 수 없는 공간의 의미가 낙동강 물줄기를 바라보며 머릿속에
진우도
우리는 배를 타고 진우도에 갔다. 배를 처음타서 그런지 불안하기도 했지만 배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바닷물을 가르며 시원하게도 달렸다.
진우도에서 단체 촬영
바다를 하얗게 가로지른 이삼 킬로 남짓 긴 모래톱이 눈부시고, 남해에서는 보기 드물게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모래톱이라 바다의 흰 옷자락을 밟으며 자전거를 탈수도 있는 섬. 사람 없어 사람들의 헛된 욕망도 없고, 그저 자연이 부여해준 대로 단순하게, 때론 치열하게 때론 평화롭게 더불어 사는 생명들의 땅. 가끔 우리 사는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우리 사는 세상이 너무 각박해서 답답해질 때마다 간절히 그리워지는 섬입니다. 이번 주말엔 녹산공단, 자유경제무역청 아래에 자리잡은 선착장에 가서 바람보다 빠른 모터보트를 타고 그 섬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진우도>
송창우 詩
진우도에 가면
한 손에는 숟가락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일생을 땅 파먹고 사는 달랑게가 있다
한쪽 날갯죽지가 몸의 전부인
새조개 오두막이 있고
한쪽 젖가슴이 몸의 전부인
떠돌이 해파리가 있고
오직 성기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개불이 꿈틀거린다
눈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귀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입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단순한 형상들이 우글거리는
진우도에는
낮에는 서로 물고 뜯고 싸우다가도
밤에는 한 이불을 덮고 자는 풍습이 있다
누구나 몸뚱어리만큼만 집을 짓고 살다가
그대로 관을 삼는 풍습이 있다
살아 생살을 물어뜯던 이웃들에게
죽어 살점을 고루 나누어주는 풍습이 있다
마지막으로 몰운대로 갔다. 몰운대는 원래 섬이었다고 한다. 부산의 3대(臺)라 하면 태종대, 해운대, 몰운대를 말한다. 이 3대는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가운데 해천만리(海天萬里)의 바다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승경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해운대와 태종대는 잘 알고 있지만, 나머지 3대중의 하나인 몰운대(沒雲臺)는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부산 사람들조차 이 멋드러진 비경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다대포에서 바라본 사주(등)
浩蕩風濤千萬里
白雲天半沒孤臺
扶桑曉日車輪赤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리요 만리로 이어졌는데 하늘가 몰운대는 흰구름에 묻혔네
그곳에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 답사를 기약했다. 삼각주 답사로 행여나 교수님 건강이 상하셨을까봐 참으로 마음이 아프며, 더불어 이렇게 생생하게 삼각주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도와주신 점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직 할 일이 많다. 대마등 답사도 해야하고 이번 답사기에서 궁금했던 지형도 다시 공부해야 한다.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더 열심히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나 자신을 채찍질 해본다. 혼자였다면 엄두도 못냈을 이 모든 일들이 함께이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지역사회답사회 최석주 회장님, 모든 일을 총괄하고 많은 애를 쓰신 김시구 총무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인간은 아는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만큼 보인다’ 말을 소중히 느낀 하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