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선문은 행정구역으로 아라동과 오라동의 경계의 계곡으로 들렁귀가 옛 지명이고 방선문 또는 환선대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목사들이 새겨놓은 수많은 마애명이 즐비하게 있는데 선비들이 마음은 이 환선대 즉 방선문을 지나야 한라산신을 만날 수 있다하여 마애명도 들렁귀 내부 쪽으로만 새겨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정신적으로 들렁귀 문 외부는 상놈들이나 다니는 곳으로 생각을 했던것 같아요.
바로 이 돌몬이 들렁귀, 방선문, 환선대라고 하는 석문이랍니다.
방선문 글씨는 석문 입구 천정에 있는데 잘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불로초가 살고 있다는 삼신산 중 하나로 영주산으로 불렀으며 방장산 지리산,
봉래산 금강산을 일컬읍니다. 김석익 선생님의 심재집(心齋集)말쓰을 빌리자만
한내사이 좌우로 낭떨어지 마냥 걸쳐있는 곳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 엎어져 있음이 마치 무지개와 같은 형태의 문을 일컬어 訪仙이라고 한다. 이 제액은 언제 누구에 의하여 씌였는지는 모르고 제액옆에 尹得逵(윤득규) 목사일행의 기록 정조 10년 -1786년 4월 이 남겨진 것이 미루어 보면 당시에 새겨 놓았거나 그 이전에 작품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한라산은 신들이 사는 산이니 방선문은 결국 한라산 신령을 만나러 가는 첫째 관문인 샘입니다.
최익현의 암각
최익현 [ 崔益鉉 ]
본관 - 경주(慶州)
이명 자 - 찬겸(贊謙), 호 면암(勉菴)
출생과 사망 - 1833(순조 33) ~ 1906
직업 - 의병, 애국지사
가족 - 아버지 최대(崔岱)
관련인물 - 이항로
1. 정의 - 1833(순조 33)∼1906. 한말의 애국지사.
2. 가계 -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최대(崔
岱)의 아들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
3. 활동사항
이른 나이부터 학문에 재질을 나타내어 9세 되던 해 김기현(金琦鉉)으로부터 유학의 기초를 닦았다. 14세 때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 문하에 들어가 ≪격몽요결(擊蒙要訣)≫·≪대학장구(大學章句)≫·≪논어집주(論語集註)≫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성리학의 기본원리를 터득했다. 특히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으며 이항로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이준(李峻)·이박(李樸)·임규직(林圭直)·김평묵(金平默)·박경수(朴慶壽)·유중교(柳重敎) 등과 친분을 맺었다.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벼슬길에 오른 이후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사간원정언·신창현감(新昌縣監)·성균관직강·사헌부장령·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70년(고종 7)에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특히 1868년에 올린 상소는 경복궁(景福宮)재건을 위한 흥선대원군의 조치를 비판하고 시정을 건의한 것이다. 또 1873년에 올린 <계유상소(癸酉上疏)>는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많은 서원의 철폐를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상소다. 이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1873년부터 3년간의 유배생활을 계기로 왕도정치적 명분이 상실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뜻을 세우고자 위정척사의 길로 들어섰다. 1876년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는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를 올려 자신의 뜻을 내외에 알렸다. 이 상소로 흑산도에 유배되었으나 그 신념과 신조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는 임오군란·갑신정변·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 등 여러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 국내외 정세가 복잡하였던 때였다. 특히 척사운동을 앞에서 이끌던 그가 1881년에 신사척사운동이 일어날 당시 은인자중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다. 그러나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에 맞서 항일투쟁의 지도이념으로 자리잡은 것은 그만큼 보수적인 양상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항일구국이념은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과 단발령의 단행을 계기로 폭발하여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에 새롭게 나타난다. 당시 단발령을 강행한 유길준(兪吉濬)이 본보기 삼아 그를 잡아들여 머리털을 자르려 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을 자를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한 일은 유명하다. 이때 여러 해에 걸쳐 고종으로부터 호조판서·경기도관찰사 등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오로지 시폐의 시정과 일본을 배격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후 그가 올린 대표적인 상소로는 1896년에 <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宣諭大員命下後陳懷待罪疏)>, 1898년 <사의정부찬정소(辭議政府贊政疏)>·<사궁내부특진관소(辭宮內府特進官疏)>, 1904년 <사궁내부특진관소>·<수옥헌주차(漱玉軒奏箚)>·<궐외대명소(闕外待命疏)> 등이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곧바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서 조약의 위법성과 이에 참여한 오적의 처단을 당당히 밝혔다. 이러한 과정 끝에 그의 항일투쟁방법도 이제까지의 상소라는 언론수단만이 아닌 집단적·무력적인 투쟁방법으로 바뀌었고, 위정척사사상도 배외적인 국수주의로부터 민족의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한 자각된 민족주의로 심화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끊자 "죽는 것도 물론 좋지만 사람이 모두 죽으면 누가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겠는가"라고 탄식하며 1906년 6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궐기하고 한편으로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문을 돌렸다. 전국 각지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고 6월 11일 일본군을 대신하여 투입된 대한제국의 진위대에 의해 체포되자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라면서 의병을 해산하고 스스로 체포되었다. 이렇듯 의병을 일으켜 마지막까지 쓰러져가는 나라를 세우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가 단식 끝에 74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영구가 부산에 도착했을 당시, 그를 애도하는 인파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봉관·지방관·언관으로 재직 당시 각종 비리와 부정을 척결하여 강직성을 발휘하였고,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에 정통한 이항로의 계통을 이어받았으나 이기론(理氣論)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관심보다는 애국의 실천도덕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는 명분론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무엇보다 그의 우국애민의 정신과 위정척사사상은 당대의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의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발전, 계승될 수 있었다. 저서는 ≪면암집≫ 40권, 속집 4권, 부록 4권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그의 뜻과 공을 기린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남아 있으며, 제향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위치한 모덕사(慕德祠)를 비롯하여 포천·고창·곡성·무안·함평·구례 등 여러 곳에서 봉향된다.
이항로 [ 李恒老 ]
본관 - 벽진(碧珍)
이명 - 자 이술(而述), 호 화서(華西), 시호 문경(文敬)
출생과 사망 - 1792(정조 16) ~ 1868(고종 5)
시대 - 조선 후기
직업 - 학자, 성리학자, 위정척사파의 거두
가족 - 아버지 이회장(李晦章)
관련인물 - 제자 최익현
1. 정의 - 1792(정조 16)∼1868(고종 5).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위정척사
파의 거두.
2.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초명은 광로(光老)였으나 철종 사친(私親)의 이름을 피하여 개명하였다.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경기도 포천 출신. 이회장(李晦章)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의집(李義集)의 딸이다.
3. 활동사항
이른 나이에 ≪천자문≫과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독파하고, 6세에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을 정도로 뛰어난 문재를 보였으며, 12세 무렵에 신기령(辛耆寧)으로부터 ≪서전(書傳)≫을 배워 높은 학문경지에 이르렀다. 1808년(순조 8) 초시인 반시(泮試)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받자 이에 격분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 뒤 당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울의 임로(任魯)와 지평(현 양평군)의 이우신(李友信) 등을 찾아가 학연을 맺었다.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20대 중반 무렵부터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30대에 접어든 1820년대 들어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청년들이 주위에 속속 모여들었으나 세속을 피하여 쌍계사·고달사 등의 사찰을 옮겨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성리학 연구에 힘을 쏟았다. 그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져 1840년(헌종 6) 휘경원참봉에 제수되고, 후에도 지방수령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고사하고,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수정하여 실시하는 등 향리에서 강학과 학문연구에만 몰두하고 벼슬길을 멀리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이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에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64년(고종 1) 당시 권력자인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전라도사·지평·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모두 거절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흥선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하였으며, 그뒤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연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한 병인상소를 올리고 만동묘(萬東廟)의 재건을 상소하였다가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삭탈관직 당한 뒤 낙향하였다. 그는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침체되어 가는 주리철학을 재건한 조선조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주리철학은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을 반대하고, 이(理)와 기(氣)를 엄격히 구별하는 동시에 그것을 차등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즉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져 천하가 편안할 것이나, 만일 반대로 '기'가 주가 되고 '이'가 버금이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져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라 보았다. 또한 주리론에 기초를 둔 심전설(心專說), 즉 심즉리심즉기설(心卽理心卽氣說)을 반대하고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유중교는 그가 이존기비(理尊氣卑)를 고수하였기 때문에 이리단심(以理斷心)의 이론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의 심설은 심전설이 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심전주리론을 바탕으로,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와 더불어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처럼 한다는 애국사상과 자주의식으로 이어졌다. 궁극적으로 그의 사상은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나아가서 구한말 의병운동 등 민족운동의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화동역사합편강목(華東歷史合編綱目)≫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벽계아언(檗溪雅言)≫ 12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최익현(崔益鉉,)1833. 12. 5~1907. 1. 1) 선생은1906년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최후의 진충보국(盡忠報國)하였던 분으로서 구국의병항쟁의 불씨를 점화시켰을 뿐 아니라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 있으며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는 진리를 가르쳐 일제 강점기의 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1907년 1월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
위정척사 사상을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상으로 체계화
선생은 1833년 경기도 포천군 가범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庵)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때 단양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때에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 이항노의 문인이 되어, 우국애민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재임 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선생의 정치사상은 이항노 계열의 위정척사였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자 선생은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으며, 이로 인해 고종의 신임을 얻어 호조참판이 된 뒤, 누적된 적폐를 바로 잡으려다 오히려 기득권층의 반발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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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1904년에 선생에게 보낸 밀지(密紙)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으니,
조정에 올라와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