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난분분亂紛紛 꽃잎 지는 봄날
집에서 죽쑤다 말고 강가를 서성거렸다
품속에서 꺼낸 해묵은 시집
북북 찢어 강물에 흘려보내자
내 봄날의 하루도 하염없이 뜯겨 나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던*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어드메?
하늘 신전처럼 떠받든 왕버들 까치집 아래
비스듬히 누워 바라보는
아, 다시 못 올 이승의 오롯한 한때여!
*가수 백설희 노래 「봄날은 간다」의 한 소절.
추우음秋雨吟
지난여름 폭우에 뒷산자락 씻기어 둥우리 덮쳤던가
저물녘 산비둘기 바지랑대 앉아 한참을 울고 갔다
마른 도랑에 큰물 지던 소리 귀에 쟁쟁하다
동편재 올라앉아 한시 미학 산책* 넘기다 말고
여인의 속눈썹 아래 가을비 긋던 옛 선비 떠올리는 사이
주르르륵, 뱃속에서 밥 달라 보채는 소리 들린다
*한시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탐구한 정민 교수의 명저.
만년필
만년필은 제 뚜껑 열어 꽁무니에 끼우는 순간
긴 부리와 금빛 날개깃 달린 펠리컨으로 태어나지
잉크빛 바다에서 부활한 펠리컨은
섬 기슭에 둥지 틀고 알을 낳기도 하다가
붉은 사막으로 날아가 긴 부리로 산란한 발자국 남기기도 하지
한때 나도 방바닥에 날개 펼치고 부리 내민 채
모래 경전 속에서 만년의 고독과 사랑 꿈꾸며
내 심장 쪼아 그 피로써 사막을 온통 붉게 물들인 적 있지
펠리컨이 날개깃 접고 서랍 속에 다시 깃들이는 순간
긴 부리도, 긴 부리가 남긴 발자국도 사라지고
사막은 저 혼자 어둑어둑 빈집으로 돌아가지
개밥바라기 추억
겨울 금호강에서 그에게 편지를 썼다
등에 업혀 새록새록 잠들다가
어두운 강물 속으로 사라져 간 개밥바라기
하얗게 얼어붙은 강어귀에서
모닥불 지펴 놓고 그를 기다렸다
한참 뒤, 폭설 내려와
강의 제단에 바쳐지는 눈발 부둥켜안고
모래톱 돌며 재齋를 올렸다
눈 그친 서녘 하늘에 걸린 초롱불 하나
첫사랑
천등산 끝자락에서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린다
박하 향기 아득한 시간의 터널 지나
푸른 기적 달고 숨가삐 달려 와서
내 생의 한복판 관통해 간
스무 살의 아름다운 기차여!
개망초꽃
자전거 타고 달리다가 철길 건널목에 멈추었습니다
차단기 내려지고 종소리 땡땡땡땡 울려와
꼬리에 꼬리를 문, 검은 물체가 휙 지나갔습니다
훈장처럼 어깨에 꽂혀 나부끼던 개망초꽃
바람에 날리어 검은 바퀴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스무 해를 개망초꽃으로 떠돌았지요
등 뒤로 덤프트럭 언제 덮칠 지도 모르는 길섶에서
나의 페달은 자꾸 헛돌았지요
차단기 굳게 내려진 가슴 속, 종소리 울려 퍼질 때마다
검은 물체에 대한 기억을 벼랑 끝으로 밀쳐냈습니다
실어증 앓던, 개망초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하루
밥숟가락 들었다 놓는 사이
하루가 지나갔다
하얗게 피어난 밥 한 공기
시래깃국 말아 후루룩 넘기는
아침상 물리자마자
쪽문으로 들어온 이웃집 멍멍이
개똥 차반 차려놓고 가는
따뜻한 저녁 맞는다
식탁 귀에 놓인 앉은뱅이달력
당기면 하루가 오고
밀치면 하루가 갔다
허공의 까치밥 쳐다보는 사이
한 생이 지나갔다
달의 수레바퀴 끌고 간 소
외양간 옆 감나무 가지에
달이 덩그러니 걸렸다
집 나간 송아지 찾아오라고
휘영청, 등불 밝혀 놓은 거다
한밤중 텅 빈 외양간에
달빛 주르르르 흘러들었다
이 집에서 늙은 저 달,
쇠잔등 타고 놀던 그때가 몸속에 사무쳤던 것
달은
코뚜레 꿰인 소의 그렁그렁한 눈망울 닮았다
그믐 지나 달그림자 보이지 않았다
어미 소가 달의 수레바퀴 끌고서
먼 길 떠나고 나서였다
소나무 명상
해넘이에 긴 그림자 끌고 바람 산책 나왔다
솔밭 구릉에서 내려다보는 동네 풍경은 경이롭다
저기 오랜 당산 느티나무가 거느린 길과 집들
나도 높은 가지에 둥지 틀고 밤낮 움츠렸던가
지난겨울 모진 삭풍에 마을길이 좀 더 휘었다
숲에 안기면 세상 모든 그림자 사라진다
솔방울 귀에 달고 고요히 명상하는 소나무들
집과 무덤의 거리는 까치걸음 몇 발자국이다
오늘도 동네 한 바퀴 돌아와 여기 퍼질러 앉으니
바깥소식이 손바닥 안에 환히 들이비친다
낙관
오늘 까치가 날아와 유리창에 입맞춤하고 갔다. 우리 집 거실창 안에 환히 들이비친 감나무 앉으려다 날개 부딪친, 저 하얀 비명!
얼마나 콩닥거렸을까? 엉겁결에 까치는 대문간 드리운 소나무 올라앉아 놀란 가슴 쓸어내리고 동구나무 쪽으로 날아갔다.
내 어찌 모를까? 저 눈먼 새가 제집 잘못 찾아온 게 아니라, 이 몹쓸 것이 숲속 옛 둥지 차지해 남쪽으로 창 하나 걸어두고 사는 것을. 한데 또 어쩌랴! 저 가여운 새가 유리창에 쿡! 몸도장 찍어, 공산에 깃들인 내 생의 진경산수화 완성하는 것을.
|장하빈 시인 약력|
본명 장지현, 1957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1997년《시와시학》신인상 등단
2012년 시와시학상 동인상,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시집 『비, 혹은 얼룩말』『까치 낙관』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좋은시... 한참 머물다 갑니다.
장하빈 선생님, 시 만큼이나 찬란한 오월 세째주 시인으로 선정 되심을 진심 축하 드립니다.
올 해는 유난히 까치 울어대는 소리를 듣습니다!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 축하 축하드립니다~♡
오월 햇살 좋은 날, 선생님의 시에 스르르 스며듭니다.
계절만큼이나 싱그럽고 맑은,
장하빈 선생님의 오월 세째 주 시인으로 선정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사람 사는 일이,
'밥숟가락 들었다 놓는 사이/ 하루가 지나'가고
'허공의 까치밥 쳐다보는 사이/ 한 생이 지나' 가는 것 같습니다.
이 아침에 잠시 다녀 갑니다.
선생님, 오월향기의 절정인 셋째주 시인이 되심에 심심한 축하를 드립니다^^ 선생님꼐서 완성하시는 아름다운 진경산수화가
문인지망생들의 가슴에 큰 울림으로 타종되리라 믿습니다^^
축하드립니다~
5월 셋째 주의 선정시인 장하빈 시인님의 주옥같은 시~ 잘 감상하고 갑니다~^^
"박하향기 아득한 시간의 터널지나 푸른 기적 달고 숨가삐 달려 와서 내 생의 한복판 관통해 간 스무 살의 아름다운 기차여!"
시심의 세계로 젖어들게 하는 따뜻한 감성의 시들 너무나 멋집니다~♡
장하빈 선생님 5월 셋째주의 시인으로 선정되심을 축하드립니다.아, 다시못올 이승의 오롯한 한 때여! 이 좋은 봄날도 갑니다.주옥같은 시 감상하는 상쾌한 아침입니다
장하빈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푸른 기적을 단 기차처럼 감동적인 시가 우리의 마음을 관통하며 지나갑니다~^^
장하빈 선생님 5월 셋째주의 시인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선생님의 시집을 몇번을 읽어봅니다 가슴으로 펴내신 시 사랑합니다 "폭우에 뒷산자락 둥우리 덮혀 저물녘 산비둘기 바지랑대에 앉아 우는" 모든 시가 가슴 울립니다
붉은 장미가 절정인 시절에
선정시인이 되심에
더욱 기뻐 축하드립니다^^
이제는 '눈부신 기억들'만이
천상에서 내려온 두레박줄 타고
팔랑팔랑 날개짓 하는 나날 되시길
소망 담아 축복합니다~♡
줄장미/장하빈
다락방 창문 위로 줄레줄레 오르는 저 몸짓
벌레 먹은 날들, 먼지 덮어쓴 채
열락을 꿈꾸던 그 어두운 골방 안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던
햇빛에 대한 공포 지우고
천상에서 내려온 두레박줄 타고
팔랑팔랑 날개짓하는
저 눈부신 상처의 기억들
선생님^^담장마다 꽃들이 넘쳐나는 5월 셋째 주, 이 주의 시인으로 선정되심을 축하드립니다
5월처럼 언제나 푸르고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장하빈 선생님, 이 주의 시인! 축하드립니다.
설익은 밥 먹듯이 하다가 이제사 시를 맛있게 읽을 수 있는 듯 합니다. 솔방울 귀에 달고 명상하는 소나무나, 어미소가 달을 끌고 갔다거나, 당기면 하루가 오고 밀치면 하루가 간다거나 사소한 일상도 시인의 눈은 다름을 알았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 드립니다.
장하빈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저도 숲에 안기고 싶어지게 만드는 시였습니다!
장하빈 선생님, 이주의 선정시인이 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시는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시입니다. 특히 일상과 자연의 연결이 아주 아름답네요.👍
장하빈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시 한편 한편을 읽을때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들이 저를 제가 가보지못했던 세상들로 여행시켜주었네요. 멋진 시들이였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따뜻하고도 여운이 깊습니다. 저도 선생님처럼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렇게 멋진 시들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로 행복하자] '이 주의 시인'에 곡진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고운님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작품을 올리느라 애쓰신 대구시인협회 홍보국에도 고마움을 살짝 드러냅니다.
축하합니다.
긴 댓글 읽는 재미도 알게합니다. 물론 시는 말할 것도 없구요^^
시가 참 좋네요
영재반에서 시나리오 수업 듣는 경화여고 김모양이 제게 그러더군요.
하빈 선생님께 사윤수 선샘 아시느냐고 물으니까 '웬수같은 사이'라고 말씀 하시더라고...
문학영재들은 반어적 표현을 알고도 남으리!ㅎㅎ
@장하빈 갱화여고 학생들은 순진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래, 하빈샘과 나는 지지리도 웬수야" 라고 했습니다.
에공ᆞ늦게 봤네욤ᆞ좋은 시 ᆞ멋진 벙거지모자 탐납니다 ᆞ축하드려욤ᆞ
어느날 퇴근길 공항을 등에지고
도동에서 부동으로 넘어오는 길섶으로
하얗게 흔들리는 꽃들
신기해서 차를 세우고
이름을 물었습니다.
바로 개망초였습니다.
내친김에 선생님의 시집도 주문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개밥바라기가 왜 추운날 금호강에 들어갔나요?
동녘하늘에서도 좀 놀면 좋을턴데,
왜 허구헌날 서녘에서만 놀까요?
시로 행복하신 선생님!
아름다운 시 많이 많이 보여주세요.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