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로 세계
2. 구속(회복) 안에서 하나임(2)
대구교회 이현래 목사. 2012. 3. 4.
[창세기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지난번까지 ‘구속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예수 이외에 물론 훌륭한 분들이 많지만 구속자는 예수뿐이다. 여러분은 어디 가서 예수님이 제일 훌륭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자기들대로 훌륭한 분이 많기 때문이다. 절에 다니는 분들은 석가모니가 훌륭하고, 명륜당(明倫堂)에 다니는 분들은 공자님이 훌륭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예수님이 그분들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구속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구속(救贖)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아야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는지를 알게 된다. 예수님이 훌륭해서 믿는다면 굳이 예수를 안 믿어도 된다. 석가모니를 믿어도 되고, 공자님의 교훈을 받아도 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훌륭해지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왜 이 위치를 잃었으며 누가 이 위치를 회복할 것인가?
오늘은 ‘인간은 왜 위치를 이탈했고, 누가 이 위치를 회복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정해주신 자리는 하나다. 인간은 많고 입장과 의견이 달라도 정해진 인격은 하나다. 나무가 많지만 식물이라는 격은 하나인 것처럼 사람이 많아도 인간이라는 격은 하나인 것이다.
늘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정해주신 자리는 하나다. 이 사람 저 사람 따로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한자리다. 이것을 격(格)이라고 한다. 나무는 많지만 나무의 격은 하나다. 식물이라는 격은 똑같다. 어떤 나무든지 스스로 옮겨 다니는 나무는 없고, 뿌리가 박히면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격(格)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격으로 창조되었다. 이 격이 중요하다.
아담은 격이 정해진 인간으로 지음 받았다. 이 격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먹고 그의 배필로서 그와 동행하기에 꼭 맞는 격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어진 사람을 보시고 심히 좋다 하신 것이다.(창1:31)
인간은 저절로 흐물흐물하다가 생긴 것이 아니고 격이 딱 정해져 있다. 이 격이 정해진 인간을 보고 하나님은 ‘심히 좋다’고 하셨다. 훌륭해서 좋다고 한 것이 아니다. 훌륭해서 좋다고 하려면 그때 좋다고 못한다. 아직 훌륭해지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훌륭해지려면 세상에 나와서 많은 수양을 하고 덕을 쌓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놓았을 때 덕을 쌓았겠는가, 공부를 했겠는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시고 심히 좋다고 한 것은 이 격을 보고 좋다고 한 것이지 결코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 이 사람은 훌륭해서 좋다고 한 것이 아니다. 격이란 것은 그것이다.
심히 좋다는 것은 사람이 훌륭하다거나 다른 동물들보다 위대하다고 해서 좋다는 것이 아니라 그 격을 보고 좋다고 한 말이다. 하나님은 이 격만 필요하다.
만유는 각자의 격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정해졌다. 이것은 높거나 낮은 문제가 아니고, 각자에게 알맞는 분수다. 격에 맞는 것은 무엇이나 좋은 것이다.
하나님은 아주 독특하게 창조해놓았는데 모든 만물은 다 그 격에 맞춰서 살도록 만들어 놨다. 식물은 식물의 격에 맞게 살도록 해놓았다. 식물이 땅에만 박혀 있으면 가장 좋은 것이다. 좋은 땅에 박혀 있으면 굉장히 오래 살 수 있다. 어떤 나무는 3000년까지도 살고 있다고 하니까 그 나무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한다. 나무는 자기 격에 맞도록만 살면 그 나무는 아주 복된 나무다.
우리 인간도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 격에 맞춰서 살면 행복한 사람이다. 이것은 누가 낮고 누구는 높은 문제가 아니다. 격에 맞느냐 안 맞느냐? 이 문제다. 하찮은 옷이라도 그 사람 몸에 맞도록 입으면 멋있지만 돈을 엄청나게 주고 산 옷이라도 그 사람 몸에 안 맞으면 후질구레 하게 이상하게 된다. 제가 만약 천만원이나 일억짜리 옷을 입는다고 해서 그 옷이 내 몸에 잘 맞겠는가?
무엇이 아름답고 좋은 것인가? 격에 딱 맞는 것이 좋은 것이다. 우리 인생도 자기 격에 딱 맞도록 살면 그 사람은 남이 보기에 좋은 것이지만 자기 격에 안 맞게 살면 그것이 꼴보기 싫은 것이다. 벌거벗고 환도(環刀) 찬다는 속담처럼 격에 안 맞는 일을 하면 그것이 보기가 싫은 것이다. 격에 맞는 것은 무엇이나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미물(微物)에 속한 곤충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격에만 맞으면 참 좋은 것이지만 격을 빗나가면 나쁜 것이 된다.
그런데 아담은 능력의 천사에게 속아서 자신의 분수를 버리고 전능자가 되려고 지식을 취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왜 그 격을 이탈했을까? 타락(이탈)의 동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분명히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이니까 최후의 마지막 경고였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듣고도 그 말을 안 듣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었을까? 이것이 문제다.
지음 받은 인간은 천사와 비교하면 서로 다른 것이다. 부족함이 아니라 다른 점이 있다.
아담은 능력의 천사에게 속았다. 다른 것에 속은 것이 아니라 능력에 속았다. 왜 그런가? 인간은 생래적으로 다른 동물에 비해서 능력이 별로 없다. 만약 우리가 코끼리와 힘을 비교했을 때 이길 수 있겠으며 호랑이와 싸우면 우리가 이길 수 있겠는가? 인간은 다른 동물처럼 그렇게 살 수가 없다.
더군다나 육체적으로 그러한데 천사와 비교를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천사와 같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뭔가 항상 불완전하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격이 우리가 볼 때는 아주 빈약(貧弱)하다는 것이다. 얼마만큼 빈약한 것인가? 십자가에 달려서 꼼짝 못하고 있을 만큼 그렇게 빈약하다는 것이다. 보통 빈약했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아담은 십자가에 달리면 뛰어내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이구나!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것을 탈피하려고 한 것이다. 만약 내가 십자가에 달렸다면 뛰어내리려고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능력의 천사를 보니까 천사는 십자가에 달릴 필요가 없다. 천사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해서 박아지겠냐는 것이다. 혹시 못 박아놓는다 하더라도 천사와 같은 능력만 있다면 십자가에서 벗어나서 날아가 버리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천사가 얼마나 부럽겠는가! 이것은 오늘 남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문제다.
사람은 능력에 속아서 지식을 취했다. 네가 생기기는 그렇게 생겼지만 네가 이러이러한 지식을 가지게 되면 너는 나와 같이 이렇게 능력이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다. 사람이 능력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지식 밖에 없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다 똑같지만 위대해지고 비천해지고 강해지는 이런 모든 것은 전부 지식에 달렸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하려고 한다.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을 많이 쌓던지 아니면 덕을 많이 쌓던지 아니면 어떤 도를 깨닫던지 좌우지간 이것은 모두 지식의 세계다. 인간은 지식으로만 커질 수 있다. 사람은 생래적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아무리 몸을 단련하고 별짓을 다 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고 어쩔 수가 없다. 또 그렇다고 해서 안 죽을 수가 없고 결국 죽는다.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지식이다. 이 지식을 통해서 큰 부자가 될 수도 있다. 재리에 밝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 방면에 지식이 뚜렷하게 있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의 격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오직 지식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지식이다. 그래서 이 지식을 취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아무리 지식을 가지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대로 있지 내 격이 바꿔지는 것은 아니다. 내 소유가 바꿔진 것이고 내 소유가 불어난 것이지 내 격이 바꿔진 것이 아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지식을 통해서 천사처럼만 된다면 그렇다면 속을 만하다. 이런 것은 속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사람은 도로 사람일 뿐이다.
인간이 천사와 비교하면 너무 다르다. 그런데 이것이 나쁘거나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점이다. 물고기와 새는 서로 부족한 것도 아니고 나쁜 것이 아니다. 새는 좋고 물고기는 나쁜 것이 아니라 서로가 다르다는 것이다. 새가 아무리 하늘을 잘 난다고 해서 물속에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헤엄을 친다고 해서 공중을 날 수는 없다. 이것은 서로 다른 점이다. 그런데 자기가 격을 바꿀 수 있는 줄로 알고 능한 자가 되려고 지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내가 돈을 많이 가진다고 해서 내 격이 바꿔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것을 알면 인생을 상당히 많이 안 것이다. 나는 돈이 많이 있거나 아예 없어도 나의 격은 그대로이다. 내가 별을 네 개나 달았다고 하더라도 내 격은 사람이야! 이렇게 알면 그 사람은 위대한 장군이 될 수 있다. 지식을 통해서 자기가 우주를 날아다닌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날아다니는 기술이지 나의 격은 그대로라는 것을 알면 그는 위대한 우주인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위대해지려고 억지로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이 격만 확실하게 알면 사람은 누구나 다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을 바꾸려고 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격은 절대로 바꿀 수가 없다. 바꿀 수 없는 것이 격이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소유다. 내 옷은 오늘 이 옷을 입었다가 내일은 다른 옷으로 바꿔 입을 수 있고 밥을 보리밥 먹었다가 쌀밥을 먹을 수 있다. 이런 소유는 이렇게 내가 바꿀 수 있지만 격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격을 바꿀 수 있는 줄 알고 전능자가 되고 싶어 천사의 말을 들었다. 인간이 능한 자가 되려면 천사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천사숭배다.
능력을 가지고 격을 바꾸려고 하다가 천사의 말을 들었다. 능력을 찾아서 자기 인생을 바꾸려고 생각하면, 능력으로 자기 인생이 어떤 다른 자리로 가려고 하면, 지금도 우리는 천사의 말을 들어야 한다. 바로 이것을 보고 ‘천사숭배’라고 하는 것이다. 왜 천사를 숭배하는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이다.
그러나 피조물이 천사처럼 능한 자가 되려 하면 자신에게 정해진 정체성과 존엄성을 잃고 비천한 자가 된다. 까마귀가 비둘기가 되려고 하면 우스갯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까마귀들에게는 배척을 받고 비둘기들에게는 놀림감이 된다.
만약 피조물이 천사처럼 능한 자가 되려 한다면 자기의 정체성이 없어지게 된다. 사람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게 되어서 정체성이 없어지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된다. 사람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처럼 우스운 것이 없다. 뭔가 사람은 이렇게 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되는데 사람도 아니고 소도 아니면 이상하다. 존엄성도 없어지게 되고 비참한 자가 된다.
까마귀 비유가 있는데 까마귀가 하얀 비둘기가 부러워서 하얀 페인트를 사다가 자기 깃털에 잘 발랐다. 이제 나는 까마귀가 아니고 비둘기다. 이렇게 자부하고 비둘기 세계에 갔더니 너는 까마귀인데 왜 흰 페인트를 칠하고 왔느냐? 이렇게 말해서 할 수 없이 까마귀세계로 다시 돌아왔더니 까마귀세계는 너 같은 놈하고는 상대할 수 없다. 이렇게 하고는 도로 보내버렸다. 까마귀들에게는 배척을 받고 바둘기들에게는 놀림감이 되는 것이다. 자기 격을 버리고 능한 자가 되려고 하다보니까 사람이 그 꼴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전능자가 되려다가 이런 꼴이 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할 인간이 만물의 찌끼같이 심히 부패한 자가 되었으며, 천사들의 조롱거리가 된 것이다.(렘17:9,히1:6참)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러야 하는 인간이 성경에는 만물의 찌기 같이 되었고 심히 마음이 부패한 자가 되었다. 만물이 다 그대로 있는데 사람의 마음만 심히 부패했다고 한다. 왜 그렇게 심히 부패하게 되었는가? 사람들은 그 부패한 것을 고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부패한 원인이 있다. 벌레와 산소가 없는 진공 속에 놔두었으면 부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기가 있고 벌레가 있으니까 부패하게 된다. 그것을 놔두고 무슨 수로 고치겠는가? 심히 부패한 자가 되었고 천사들의 조롱거리가 된 것이다.
예수는 사람의 위치를 회복하러 오신 그리스도시다. 부족함을 채워서(결함을 극복하고) 더 능한 자가 되게 하려고 무엇을 더 가르치러 오신 분이 아니고, 단지 잃었던 위치를 회복시키려고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특별하지 않고 그의 사역은 단순하다.
예수는 사람의 위치를 회복하려고 오신 그리스도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였는가?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해서 민족의 영광을 회복할 그리스도였다. 다윗왕 시대와 같은 그런 영광을 회복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왕국의 영광을 회복해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우리 인격을 회복해주려고 오신 분이다. 인간의 위치를 회복해주려고 오신 분이다. 그래서 이것이 맞지 않게 되었다.
한쪽에서는 다윗왕과 같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회복해줄 왕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격을 회복하려고 오셨다고 하니까 이것이 맞지 않는다. 인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판에 더군다나 회복해봐야 현실은 그대로인 것을 가지고 그것을 회복하러 왔으니까 안 맞을 수밖에 없다.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서 돈 아닌 다른 것을 얘기하면 신경질 난다. 지금 돈이 필요해서 부도 직전인 사람에게 가서 어디 리조트가 어떻더라, 어디 골프장이 어떻더라고 하면 속 터지는 얘기고 속에 염장 지르는 얘기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왜 예수를 증오했는가? 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자기들은 지금 나라를 잃고 압박받는 비참한 민족이 되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도 없이 무슨 복음을 전하느냐는 것이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생각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부족함을 채워서 더 능한 자가 되게 하려고 무엇을 가르쳐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이 했던 일이다. 사람에게 이러이러한 점이 부족하니까 내가 이러이러한 점을 보충을 해주겠다는 것은 바로 사탄이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부족한 점을 보충해준 것이 아니다. 더 능한 자가 되게 해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요즘에 특별히 기독교가 더 그러한데 믿음의 종교로 믿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이다. 믿으면 이렇게 된다. 믿음이 있으면 우리 부족한 것을 채운다. 믿음이 있으면 내가 못할 것도 하게 된다. 믿음을 가지면 이것을 극복한다. 결국 현실을 극복한다는 것이니까 사람들이 솔깃하게 된다. 지금 자기 맘대로 안 되는 판에 믿음만 가지면 된다고 하니까 얼마나 구미가 당기겠는가.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그것을 채우려고 오신 것이 아닌데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민을 하시는지 아니면 아예 무관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부족을 채워서 능한 자가 되게 하려고 무엇을 더 가르쳐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단지 잃었던 위치를 회복하려고 오셨던 것뿐이어서 그의 가르침은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읽어보면 주로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은 복음서에 있는데, 그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추려놓으면 얼마 되지 않는다. 공자님이 하신 말씀이나 석가모니가 하신 말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이도 그렇고 연한도 그렇지만 내용도 비교가 안 되게 적어서 조금 밖에 안 된다. 왜 그런가? 단순히 잃은 위치를 회복시켜 주려고 온 것이니까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여러 말이 필요치도 않다.
지금 부도난 사람에게는 여러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수표 한 장만 주면 간단한 일이다. 암이 걸려 있는 사람에게 백신 주사를 한방 맞으면 된다. 문둥병 환자에게는 알약만 주면 된다. 그 환자에게 다른 약 줘도 소용없다. 아무리 비싼 약 써도 소용없고 딱 문둥병 치료하는 약이 있는데 그 약만 주면 된다. 그러니까 간단하다. 문둥병 치료하던 예수 병원이 문둥병 환자가 없으니까 지금은 피부과 병원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그 병원이 피부를 잘 본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문둥병도 고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다른 문제다. 문둥병 잘 고친다고 피부병도 잘 고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문둥병 덕택에 피부과로 소문이 났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단순하다. 유학을 한 분들이나 불가에서 깊이 도를 닦는 분들이 들으면 당연히 시시하게 생각된다. 별 말도 아니고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너무나 일이 단순하니까. 빌딩을 짓는 건축사가 와서 초가집을 짓는 건축자를 보면 장난감하는 것처럼 보이는 식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그는 아담 이후 유대인을 대표로 한 인간의 모든 기대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물 위로 걸어간 것도,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것도 다 지나갔고 십자가에 달렸고 죽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해결 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담 이후에 인간의 모든 기대, 이것은 유대인으로 대표되고 있다. 아담 이후의 인간은 뭘 기대하고 있는가?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아담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성경을 보는가? 이것은 유대인들의 역사다. 구약 성경을 이야기 한다면 단순히 말하면 유대 민족의 역사다. 왜 우리가 이것을 보는가? 이들이 우리 인간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다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잘 표현하고 있다. 나를 보려면 그 사람들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가 우리들의 역사보다 더욱 확실하게 이탈한 자리를 보여주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리를 보여주고 있고, 그것을 더욱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연극을 왜 보는가?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연극배우들이 더 깊이 표현하기 때문에 보는 것이다.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난다. 자기 마음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연기를 해 주는 배우를 만나면 눈물이 막 쏟아져 나온다. 요즘 젊은이들은 눈물 날 일이 별로 없겠지만, 특별히 우리 아주머니들, 며느리 설음, 아내 설음이 겹쳐있는 세대들은 옛날에 극장에 뭐 하러 가는가 하면 울러 간다. 거기 가서 실컷 운다. 구슬픈 가락에 다가 노래에 다가 홍도야 울지 마라, 이렇게 되면 자기 일처럼 눈물이 쏟아진다. 그래서 간 것이다. 애기 엎고. 연극배우들은 우리 인간 속에서 인간성을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극은 그이므로 극적으로 표현한 사람들이다. 나는 영화가 이렇게 많은데 왜 연극을 보는가 생각했다. 그런데 연극을 한 본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래서 연극을 보는구나. 영화하고 아주 다르다. 여러분이 봐보면 알겠지만, 영화 보는 것과 아주 다르다. 그들의 감정표현은 영화하고 아주 다르다.
유대인들은 연극배우와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어떤 경륜 안에서 우리 인간을 표현해 주고 있는 극적인 배우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의 기대! 그것이 바로 인간의 기대였다. 그런데 이런 모든 기대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
그리스도를 그들이 얼마나 기다렸는가! 수백 년 동안 기다렸다. 이사야 이후에 기다린 것 만해도 수백 년! 모세 때부터 알고 보면 내용상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인데, 절실하게 자기들이 나라를 잃고 나서 기다리던 그 시간만 해도 수백 년이다. 이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냥 십자가에 죽었다.
물 위를 걸어가는 것도 오백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것도 죽은 나사로를 살린 것도 어디로 다 날아가고 없고 단지 그냥 죽었다. 그 경력이 다 소용없게 되었다. 우리가 어디 회사에 들어가려면 경력이 필요하다. 이 사람은 이러 이러한 것을 한 사람이다. 그러면 사장님이 보고 이 사람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력서는 아무데도 소용없게 되었다. 십자가에 달릴 때는 그 경력이 아무 소용없었다. 그냥 달려 죽은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사람들이 말할 때, 아니 물 위로 걸어가던 사람이 저 모양이냐? 이렇게 될게 아니겠는가? 죽은 사람도 살려 놓고 자기는 왜 못 뛰어 내리는가? 차라리 그런 것을 안 했으면 인간이니까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인데 예수님이 죽을 때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분명히 내 눈으로 확인해 봤는데 물 위로 걸어가는 것도 봤고, 변화산에서 그 모습도 봤으며,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도 봤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난다고도 했다. 그런 사람도 살리는 것을 분명히 봤단 말이다. 그렇게 분명히 본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어떻게 보았겠는가? 죽을 것으로 봤겠는가, 살 것으로 봤겠는가? 절대로 저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봤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었다.
알고 보면 우리는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으니까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고, 물론 삼국지에도 그런 것이 나오지만 그것은 약간 좀 뻥이다. 동남풍이 불 때도 제갈량이 가서 제사를 드렸다는데 그것도 약간 뻥이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깜짝 놀랐다. 저가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고? 하고 놀랐던 것이다. 그랬는데 이 사람이 십자가에서 그냥 죽었다. 그랬으니까 생각이 어떻게 복잡해지지 않겠는가?
왜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었는가? 인생이니까, 전능자가 아닌 인생이니까 죽은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보여 주었는가?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사람의 격을 보여주신 것이다. 인간은 어떤 경우, 어떤 사람이라도 이 격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왜 뛰어 내리지 못하고 죽었는가? 왜 못 내려오고 죽었는가? 이래서 이유가 많았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게 하려고 그랬다느니, 구속하려고 그랬다느니,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려고 그랬다느니, 이런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
그런데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면 인생이니까 죽은 것이다. 인생이니까 죽었다. 그런 목적 이전에 인생이니까 죽었다. 목적이 없었다고 해도 죽을 것이고 있다고 해도 죽을 것이다. 전능자가 아니니까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죽었느니 저렇게 죽었느니 여러 가지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 안 죽을 것인데 죽었다고 변명할 필요가 없다. 누구라도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무엇을 보여 주었는가? 우리와 똑 같이 죽으면 그게 무슨 가치가 있는가? 무엇을 보여 주었는가? 이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여기서 보여 준 것은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사람의 격을 보여 주신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어떤 경우에도 이 격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같은 사람이 죽었으면 이런 효과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당연히 죽을 것이니까 그렇다. 그런데 이 사람의 죽음이 왜 우리에게 효과를 내는가? 이 사람은 아까 말한 대로 물위로도 걸어가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기도 하며, 썩어가는 송장을 살려내기도 했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능한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다. 그러니까 물위로 걸어갔으니까 하나님 같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니까 하나님 같다. 그러니까 하나님 같이 된 사람이 죽으니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가? 그래도 아무 효과가 없다. 구속의 효과가 전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왜 구속의 효과가 있다고 하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아담이 가졌던, 아담이 바랬던, 사탄이 그렇게 말했던 그것을 그대로 다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었으니까 속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죽었으니까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같은 사람이 죽었으면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뭔가가 부족하고 아직은 미달되고 노력도 부족하고 타고나기를 못 타고났고 이래서 그런 것이니까 이것은 미달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한 그대로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었다. 그래서 우리의 구속자가 된 것이다.
그냥 죽은 사람도 많은 데 왜 예수만 구속자인가? 그런 질문이 생길 것이다. 밖에 나가면 금방 그렇게 묻는다. 꼭 예수의 죽음만이 우리의 구속이 될 수 있는가? 예수가 아니면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가 없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구속자가 될 수는 없다. 절대적인 구속자가 될 수가 없다. 어떤 일부분에 있어서 그런 것을 보여 줄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구속자는 한 분 뿐이다. 이런 분은 아직 한 분 밖에는 없다.
여기서 인간은 어떤 경우나 어떤 사람이라도 이 격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 판정된 것이다. 물 위로 걸어갔어도, 가령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해도 격(格)은 못 넘어간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능한 자가 되려 한 모든 아담에게 사람의 격을 보여 주시기 위해 예수는 아담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다.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능한 자가 되려고 하는 모든 아담에게 사람의 격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는 아담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는 우리 죄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있다. 왜 그런가? 그분은 그렇게 죽을 필요가 없지만, 심판받을 필요가 없지만, 우리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그렇게 심판 받아야 된다. 그분이 아니면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을 분이 없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죽어도 심판을 대신해 줄 수 없고 여러분이 누구를 대신해서 죽어도 심판을 대신할 수 없다. 이런 분이라야 우리 심판을 대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사람에게도 내렸다니까 우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아담이 소원했던 모든 것을 가진 분이었다. 물 위로 걸었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했으며, 죽은 나사로를 살렸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 이 능력, 이 지혜가 아담의 소원이다. 이렇게 되려고 천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과연 이렇게 된다면 누가 선악과를 먹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할 자격을 확실하게 가지신 분이다. 아담이 소원했던 모든 것을 다 가진 분이다. 능력과 지혜를 다 가진 분이다. 아담은 예수님과 같은 그런 사람이 되려고 천명을 거역했던 것이다. 물위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오병이어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를 남게 하는 사람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천명을 거역할 만도 하지 않는가? 우리가 물위를 걸어갈 수도 있고 죽지 않을 수만 있다면 천명을 거역했을 것이다. 안 죽기만 한다면 천명이고 뭐고 거역하고 보자. 누구든지 다 이렇게 했을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능력과 지혜와 이 모든 것을 갖기 위해서 결국은 천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다. 우리도 이런 자리에 가면 천명을 거역할 수 있다. 우리가 보통 때는 별 일도 없는데 왜 거역하겠는가? 큰 손해 날일도 없는 데 왜 거역하겠는가? 내가 만일에 천사와 같은 그런 능력자가 될 수만 있다면 거역안하고 배기겠는가? 우리 조상 아담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특별히 나보다 잘못한 것이 아니다. 나 같으면 안할 텐데, 그 영감이 왜 잘못했나? 이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담이 잘못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다 그렇다는 것이다. 천명을 거역할 만한 미끼였다.
과연 이렇게 된다면 누가 선악과를 먹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여기서 원죄라는 말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데서 예외일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물고기가 미끼 앞에서 예외일수가 없다. 제주도에 가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제주 앞바다에 가보면 자리돔이라고 까만 물고기가 있는데 요것을 자리물회라고 해서 먹는다. 여름에 함덕 앞바다에 가보면 까맣게 떼를 지어온다. 거기에 낚시꾼이 와서 낚시를 던지면 서로 물려고 난리다. 그중 하나가 탁 승천을 하면 물속에서는 나는 왜 승천을 못하는가 한다. 탁 올리면 물통 속으로 들어가는데 물통으로 들어가는 줄 모르고 천당 가는 줄 알고 서로 물려고 대든다. 그 까만 것이 다 없어질 때까지, 하나도 없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걸려드는 것이 인간하고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이 있을지라도 인생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비로소 예수 안에서 심판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그와 함께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류는 원 위치로 돌아올 자리를 얻었다. 주님이 이 위치를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우리가 신과 같이 된다면 누군들 안하겠는가? 아담의 잘못이 아니고 우리가 그렇다. 이것이 원죄라는 것이다. 어떠한 능력이 있을지라도 인생은 인생이다. 아담은 비로소 예수 안에 와서 심판을 받는 것이다. 재판이 오래 걸린 것이다. 이 재판이 얼마나 길었는지 아담 때부터 시작한 재판이 예수님 때에 와서 비로소 판결 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왜 그런가? 인간의 변명이 끝없이 나오니까 이 변명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재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의 전범(戰犯)을 재판하기 위해 국제심판소를 만들었다. 국제 판사들이 와서 배석(陪席)하고 양쪽 변호사들이 나와서 변호를 한다. 전범자인 육군대장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재판하는데 그의 변호인이 얼마나 변호를 잘하는지 재판횟수가 약 육백 몇 십회를 진행했다. 얼마나 변호를 잘 했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상대편 변호사도 미국변호사고 국제재판소의 변호사인데 만만치 않지 않겠는가? 그런데 마지막 한마디에 딱 걸렸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든 변호를 해서 자신이 전범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 한마디에 걸려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말았다.
그러므로 아담은 그보다 훨씬 더하다. 아담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까지 계산하면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동안 재판을 해서 결국 예수 안에 와서 비로소 심판을 받게 되었다. 우리도 예수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고 아직도 변명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인데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변명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예수 한 사람이 재판해서 심판(정죄)을 받으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그대로 되어 버렸다.
몇 명의 사람들이 같이 심판을 받았는데 이 한 분이 걸리니까 다 한꺼번에 걸려버려서 재판이 종결된 것이다. 분명히 이 사람이 전범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재판이라는 것이 다 알고 추격을 해도 변호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변호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알쏭달쏭하고 어려운 것이다. 재판을 할 때 무조건 잘하는 사람이 이길 줄로 생각하면 안 된다. 교회에 판사님이 계시는데 안 됐지만 무조건 잘하는 사람이 이긴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변호를 잘해야 이긴다고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잘 했어도 변호를 잘못해 버리면 지는 것이다.
우리도 이 재판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변명을 해서 살아남으려고 발부둥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비로소 심판을 받아서 우리가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어 버렸다. 우리는 다 천사 같은 능력을 바랬던 사람들이었고, 우리가 그런 능력을 받으면 우리의 격이 바꿔질 줄 알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바꿔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게 됐다. 그래서 육신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육신이 죽은 후에 어떻게 해보자는 것이 지금 마지막 변명이다. 육신이 죽은 후에는 이미 인간도 아니다. 그것은 아담이 아니다. 하여간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아담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그와 함께 심판을 받은 것이다.
로마서를 여러분들이 자세히 읽어 보시면 바울이 이것을 이야기 해놓았다. 우리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와 함께 그와 연합해서 그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다. 그러므로 지금 죽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미 죽었다고 심판이 내려졌는데 지금 내가 죽으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그것은 고치는 것이다. 내 성질 나쁜 것을 고치는 것이고, 화 잘 내는 것을 화 잘 안내는 사람으로 고치는 것이고, 남 미워하는 사람이 남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고치는 문제지 죽는 문제 하고는 다른 문제다. 이런 행위들은 남이 안 하는 것을 나 혼자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에게 화를 잘 내는 사람이 화 안내는 사람을 보면 자기 혼자 화를 내고 있는 것이므로 고쳐야 하는 것이다. 매일 남을 미워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다른 사람을 보고 자신이 고쳐야 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들은 자신이 고쳐야 할 일이지 자신이 죽고 그럴 일이 아닌 것이다. 굉장한 것을 고친 줄로 생각하지만 굉장한 것을 고친 것이 아니고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고쳐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걸어가는데 자신만 옆으로 걸어간다면 고쳐서 앞으로 걸어간다면 고쳐야 한다. 손과 발을 같이 움직이며 걸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뭐라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려서 손발이 같이 움직이는 애를 봤는데 신병 훈련소에서 보면 그런 애가 가끔씩 나온단다. 그러면 그것은 균형이 안 맞으니까 고쳐야 한다. 우리가 고쳐야 할 부분은 그런 부분이다. 이것도 무시하면 안 된다. 남과 내가 편하게 살려면 어차피 나 혼자 엉뚱한 짓을 해 가지고는 편하게 못산다. 남이 싫어하는 일만 골라 하는 사람을 어떻게 같이 살겠는가. 고쳐야 될 문제이고 수선해야 될 문제이다. 정 안되면 훈련소에 가서라도 고쳐와야 된다.
우리가 심판 받는 것은 그 문제가 아니고 다른 문제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 근원적인 문제 때문에 심판받았다. 우리가 심판을 받아서 거기서 비로소 원 위치로 회복된 것이다. 그래야 이것이 인생이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 그것이 원위치다. 그 원위치로 돌아 올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어디가 위치인지 모르고 위치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이제는 위치 자체가 확실하게 불거져 나와서 우리가 돌아 갈 자리가 생겼다. 비참한 판결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원위치로 회복할 자리가 왔다. 이 원위치로 회복해야 우리가 편안해진다. 그 때서야 사람이 편안하게 되고 자기가 분요할 필요가 없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사도들은 이를 가리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구속자요 구속의 주님이라고 했으며 우리가 그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다.(엡1:7,행5:31,고전1:30)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는가? 이게 바로 구속하기 위한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심판을 받아야 했는가?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기 위해서, 우리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심판하기 위해서다.
성경은 이것을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내가 죄를 사해 주십시오 해서 죄사함 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심판을 받을 때 나는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 구속과 죄사함은 하나다. 구속받고 죄사함 받는 것이 아니고 보통 죄를 사함 받는다는 말은 자기들이 잘못한 것을 말한다. 며느리에게 욕했다거나 시어머니에게 욕했다거나 이런 것을 용서받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한 구속 곧 죄사함 받았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위치를 이탈한 것이 죄고, 위치를 회복한 것이 죄사함이다. 위치로 회복되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죄가 있는가? 사람에게 죄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제 내가 죄사함 받았으니 죄가 없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러면 너는 죄를 안 짓느냐고 묻는다. 죄를 안 지었느냐는 이 말은 너는 나쁜 일 안하느냐는 이 말이다. 거기에 대한 대답을 못해서 옹색한 변명들을 해왔다. 한번 용서 받으면 영원히 용서받는 것이라는 등으로 옹색한 변명을 해왔다. 용서 받는 것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는 그것을 말한다. 이것은 영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지 내가 또 용서 받고 용서 받고 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 안에 성취되어진 일이기 때문에 심판받았는데 또 심판받겠는가? 그것은 단 일회적이다.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 구속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 안에서 나타난 회복된 사람을 보고 믿으면 그와 함께 회복되고 만유는 인생과 함께 회복되는 것이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 구속을 위함이다. 그리고 만유는 우리 구속 안에서 회복된다. 인간이 제자리로 가면 만물은 사실은 제자리에 있다. 사람만 틀어졌지 만물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사람만 제자리로 바꿔지면 만유는 다 인생과 함께 하나님 목적대로 회복된다.
불가에서는 모든 것이 실상이 아닌데 모르고 있기 때문에 착각하고 속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모든 것은 여전하다. 다 있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대로 다 그대로 있다. 쓸모없고 헛된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있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것이 실상(實像)이 아니고 허상(虛像)인데 사람들이 지금 착각을 하고 있으니까 다 허상을 걷어 내자. 생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니 다 걷어 내자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다. 내가 생각할 때 속았다 이런 정도 가지고는 안 되고 아무 것도 바꿔진 것이 없다 다 그대로 있다. 있는 것이 있는 것이지 있는 것이 없겠는가? 나무가 있는데 나무가 없다하면 말이 되겠는가? 나무가 있으면 있는 것이다. 다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있고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대로 있고 다 있다. 없는 것이 없다. 물론 사람의 관념은 사람 자기 자신의 관념이기 때문에 있다 없다 할 수 있지만 사물은 그대로 있고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나무를 보고 저것은 허상이야, 내가 속은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속은 것이 아니라 내가 확실하게 본 것이고 확실하게 있는 것이다. 잘못 생각하면 자기 생각대로 된다. 저것은 소나무라고 생각하면 소나무고 밤나무라고 생각하면 밤나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냥 밤나무는 밤나무대로 있고,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있는 것이지 절대로 바꿔지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 문제가 생겼는가? 이런 것에 사람들이 끌려다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다 쓸모없고 헛된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들이 허상이고 쓸모없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가 속고 있는 헛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사람이 그 인격을 잃었으므로 모든 것이 허무해진 것뿐이다.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들이어서가 아니라 용도가 없고 목적이 없으므로 허무한 것이다. 쓰레기라도 용도와 목적이 있는 자를 만나면 귀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버릴 것이 아니라 살려야 한다. 합당한 용도와 목적 안으로 이끌어야 한다.(딤전 4:4참)
단지 만물의 주인 되는 사람이 그 인격을 잃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허무해진 것뿐이다. 사람 앞에서 허무한 것이지 소나무가 왜 허무하겠는가? 사람이 자기가 보기에 허무한 것이지 소나무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허무하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잠깐 있다가 다 없어질 것 아니냐, 소나무 한 없이 있겠는가, 몇백년 살다가 죽겠지. 이래서 허무한 것도 아니다.
무엇이든지 다 그리스도 안에 오면 실제가 된다. 용도와 목적이 없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지 용도와 목적만 있으면 다 실제다. 다른 사람들이 다 버려버린 쓰레기라고 할지라도 용도와 목적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쓰레기는 귀한 것이 된다. 고물상에 가보면 집에서 귀찮아서 다 버린 것들이지만 그것을 어떤 사람은 지금 필요로 한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것은 귀한 것이 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필요한 사람을 못 만나면 귀한 것이 아니다.
친구 목사가 시골에 있을 때 가보니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인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보통 아이들에게 돈을 준다. 용돈을 주니까 받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받아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슈퍼마켓은 커녕 구멍가게도 없는 아무 것도 없는 촌이니까 아이들이 돈을 쓸 줄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돈 쓰는 사람들은 자기가 돈을 제일 좋아하니까 이것을 제일 좋아하겠지 하고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지만 촌아이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 그 좋은 돈도 귀하게 볼 줄 모르는 아이들한테는 아무 것도 아닌 종이 조각 밖에 안 된다.
여기 있는 개구리 인형을 보라. 이것이 무엇인줄 아는가? 종이로 만들어 놓은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천원짜리 돈이다. 개구리를 누가 만들어서 꽃과 같이 강대상에 올려놨다. 천원짜리 돈도 개구리를 만들어 버리면 그냥 개구리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도 주인을 만나면 그 사람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귀하게 된다. 왜 만물이 다 허상인가? 인간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이다. 쓸 사람이 없고 용도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도 쓸모가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도 쓸모가 있겠는가?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야 나무도 쓸모가 있고 열매도 쓸모가 있는 것이지 내가 쓸모가 없는데 무엇인들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용도가 없고 목적이 없기 때문에 허무한 것이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왜 허무한가? 목적도 없고 용도도 없기 때문에 허무한 것이다. 그러나 목적과 용도가 있으면 왜 허무하겠는가. 하루가 중요하고 한 시간이 중요한데 왜 허무하겠는가. 용도와 목적이 있으면 허무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 할 일도 없고 목적도 없고 이런 사람은 매일 매일이 허무한 것이다. 시간이 허무하고 모든 것이 허무하고 밥 먹는 것도 허무하다. 왜 밥을 먹어야 하는가? 밥을 먹으면 뭐하겠는가? 이렇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일이 있는 사람은 밥을 빨리 먹어야지, 밥 먹고 힘내서 일을 해야지, 이렇게 하지 않겠는가? 용도가 없고 목적이 없으면 허무해진다. 아무 쓸 곳이 없는 쓰레기라 하더라도 목적과 용도가 있는 분을 만나게 되면 귀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말은 나 같은 인간이라 하더라도 용도와 목적이 있는 분을 내가 만났으니까 내가 그분 안에서 쓸모가 있다. 다른 데 쓸모가 없을지라도 나를 쓰실 분 안에 내가 용도가 있으니까 필요하다. 모든 것을 버릴 것이 아니다. 벗어 던지자, 벗어 없애자, 다 벗어버리자고 겨울에 덜덜 떨고 있지 말고 살려야 한다. 죽일 것이 아니고 다 살리면 된다. 합당한 목적과 용도 안으로 이끌어 들이면 된다.
디모데 전서 4장 4절을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아무 버릴 것이 없다. 내 인생 어떤 것도 내가 믿음으로 받으면 귀한 곳에 쓰여질 수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다.
허상이 있고 실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엇이나 다 실제가 된다. 그 안에서는 제단도 성소도 다 실제가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만물은 그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허상이 있고 실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오히려 사람을 복잡하게 만들어 가지고 뭐는 허상이고 뭐는 실상인지 이것만 골 아프게 평생 생각하고 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엇이나 다 실제가 된다.
그 안에서는 제단도 성소도 다 실제가 됐다. 이 말은 그 제단이나 성소는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무로 만들어가지고 구리로 싸가지고 만들어 놓은 것인데 맨날 양이나 잡아서 피나 흘리고 불이나 때던 것이지 물건으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놓아서 그런 것이지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오면 그 제단과 성소가 다 실제가 됐다. 인격이 됐다. 예수가 아니었으면 그것은 그냥 유대인들의 제사의식에 불과하고 우리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너희나 할 일이지 우리와 무슨 상관있느냐고 하면 끝나는 것이다. 그것은 너희끼리 할 일이라고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실제가 되었다. 그 죽은 양들이 다 실제가 됐다. 그리스도가 없었으면 다 헛되이 가치가 없이 죽었을 텐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건 다 가치 있는 것으로 부활하게 됐다. 그 얼마나 많은 양이 죽었겠는가? 그 많은 죽은 양들이 죽었겠는가? 그 양들이 다 다시 살아난 것이니까 얼마나 귀하게 살아났는가! 결국에 예수와 함께 부활한 것이다. 그가 오실 때 우리 천만성도가 다 다시 온다고 하는데 그가 부활하셨을 때 그 제단에서 죽은 모든 양떼들이 다 한꺼번에 부활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오면 실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만물은 바로 이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는 말은 바로 이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제단이 만일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면 매일 와서 양을 잡아가지고 불을 태우니 그 얼마나 괴롭겠는가. 속으로 어떻게 탄식하겠는가? 빨리 빨리 실제이신 그리스도가 와야 내가 이 비참한 운명을 극복하고 살 텐데, 왜 나는 맨날 이 짓만 하게 되나? 이렇게 탄식하지 않겠는가?
제사장도 맨날 양이나 소의 목 따서 잡는 백정(白丁)인 셈이다. 만일 그들이 종교적으로 훈련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왜 이런 짓을 해야 되는가? 만일 돈 주고 하라고 했으면 누가 하겠는가? 내가 빌어먹지 이런 짓을 하겠느냐고 했을 일이 알고 보면 제사장이 하던 일이다. 우리 앞집이 소 잡는 집이었는데 골목으로 소가 들어갈 때 자기도 아는지 울고 들어간다. 그 소 잡는 사람을 보면 늘 죽이다 보니까 얼굴 인상도 이상하게 생겼다. 망치하나 뒤에 딱 숨겨서 가서는 한방 때리면 소가 탁 넘어져버린다.
인생이면서도 인생임을 알지 못하고 천사의 힘을 빌려 전능자가 되려는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그런 모습으로 죽으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그 때를 만물이 기다리고 있다. 인생이면서도 인생인 줄 모르고 천사의 힘을 빌려 가지고 전능자가 되려고 했던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꼭 그런 모습으로 어쩔 수 없는 모습으로 죽었어야만 했다.
병으로 만약 죽었다면, 요즘 같았으면 안 죽었을 텐데. 그때는 너무나 문명이 미개해서 예수님이 죽었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더 나은 의술 더 나은 의사는 없을까? 더 나은 의사는 없을까?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암에 걸린 사람도 조금만 더 살면 고칠 방도가 다 생길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변명할 여지가 있다. 예수님이 그런 모습으로 죽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거기는 의사도 소용없고, 의술도 소용없고 다 소용없고 어떤 것으로도 살게 할 수 없다.
누가 참 사람인가? 모든 이름을 다 빼앗긴 채 아무 이름도 없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한 사람, 그가 바로 인간의 원형이고, 진실한 사람의 표본이며, 모든 인류가 회복되어야 할 인격인 것이다.
누가 ‘참사람’인가? 바로 이 사람이 ‘참사람’이다. 알고 보면 이 사람이 ‘참사람’이다. 모든 것을 다 빼앗겼다. 물 위로 걸어가는 명예도 빼앗겼지,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는 명예도 빼앗겼지 다 빼앗겼다. 명예가 다 박탈당한 셈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원형이다. 인간이 그런 것이지 다른 것이 인간이 아니다. 진실한 사람의 표본이다. 모든 인류가 회복되어야 할 인격이다.
그런데 거기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 그 자리를 떠났고 제자들까지도 다 버리고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진실을 가르쳐 주셨다.(요15:26)
거기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그것이 자기인 줄 모르고 제자들까지도 버리고 떠나버렸다. 자기인 줄 모르고 남인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진실을 가르쳐 주셨다고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이 모든 것을 가리켜 생각나게 할 것이다.
이가 참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 사람이며, 이 안에 인류에게 정해진 위치가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격이 있다는 것을 알려(계시) 주신 것이다.
그가 참 사람이고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이 안에 인류의 정해진 위치가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할 격이 있다. 이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유가나 불가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도 아니며 선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본성은 하늘이 준 것이나 사람들이 그 본성을 따르지 않아서 도가 희귀하다는 것이다(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그러므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유가나 불가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본성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 ‘천명지위성’이라 하여 하늘이 명해준 것을 성(性)이라 하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으므로 도를 가르치고 깨우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공자는 가르쳐야 한다. 석가는 깨우쳐야 한다고 한다.
천명이 있는데 왜 따르지 않는가? 위치와 격을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위치와 격이 바르게 회복되지 않는 한 모든 가르침은 헛되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명이 있는데 왜 따르지 않는가? 천명이라도 따르지 않을만한 미끼가 있었다. 이 위치, 격이 회복되지 않는 한 모든 가르침은 헛되다. 가르침이나 깨우침이나 아무리 해봐도 격이 맞지 않으면 정상적이 되겠는가? 오히려 그렇게 할수록 더 강팍해질 수도 있다.
예수는 별로 가르치지 않으셨다. 단지 인생의 위치와 그 격을 보여주셨을 뿐이다. 인격, 즉 사람의 격은 단순하고 명료하게 진실이 판명되고 만유 앞에 전시되었다.
예수님은 별로 가르치지 않았다. 단지 인생의 위치와 그 격을 보여줬을 뿐이다. 인격! 사람의 격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여줬다. 진실이 판명되고 만유 앞에 전시했다. 알고 보면 이것 밖에 없다.
궤도를 이탈한 열차는 달리려고 할수록 문제가 커진다. 이 열차는 엔진을 꺼야 하고 누군가가 다시 궤도에 올려줘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열차는 구속을 받은 후에 구원(다시 달림)이 있는 것이다. 인생은 구속을 받고서야 구원이 있다.
궤도를 이탈한 열차에 엔진을 돌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엔진을 꺼야 한다. 일단 자동차가 뒤짚어졌으면 엔진을 꺼야 한다. 누군가 와서 다시 뒤짚어줘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제 위치로 돌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고 이것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다. 다른 성현들이 많지만 뭐가 다른가? 이것이 다르다. 예수는 무얼 가르치거나 깨우치라는 분도 아니고 인생을 구속하려는 분이다.
예수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지도자들 중에 구속에 있어서 유일한 분이시다. 훌륭한 교사는 많았지만 구속자는 없었다. 그러므로 유일한 구속자는 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지도자들 중에 구속(救贖)에 있어서 유일한 분이다. 교훈에 있어서 위대한 분이 아니고 구속에 있어서 유일한 분이다. 깨우침에 있어서는 석가모니가 유일하다 할 수 있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공자님이 유일하다 할 수 있다. 유교의 결론은 가르침이고, 불교의 결론은 깨우침이지만 예수의 결론은 구속이다. 가르쳐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돌아오도록 자기 스스로 보여줬다.
구속에 있어서 유일한 분이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낸 유일한 하나님이었듯이 오늘 인류를 구속한 분으로 유일한 분이다. 훌륭한 교사는 많지만 구속자 이 사람은 없었다. 유일한 구속자는 오직 한 분이어서 그를 복음이라고 한다. 복음이라고 하는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만 복음이다. 유일한 구속자이니까. 예수님 자신이 복음이다. 세상에 어디에도 나는 이런 구속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위대한 선생이 있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이런 구속자가 있다는 말은 아직 못 들어봤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구속자이고, 또 여러분에게 있어서도 유일하게 구속자가 된다. 이것은 어디에 내놓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나가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이 말뿐이다. 다른 말은 해봤자 다들 몰라서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상대가 안 된다. 다른 성현들과 예수가 확실하게 다른 점은 있다. 그는 유일한 구속자다. 우리를 구속한 분은 유일하게 그분 한 분밖에 없다. 이것을 모르면 예수를 아무리 믿어도 오히려 욕만 많이 얻어먹는다. 예수 믿어서 욕먹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특별히 우리 사회에서 비난을 굉장히 많이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 좋은 가르침도 못 받고, 그 좋은 깨우침도 못 받고, 배운 것은 교리나 이런 것을 배워가지고 하다보니까 엉뚱한 일만 해가지고 사회 사람들에게 욕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모른다.
유일한 구속자는 예수 한 분이다. 나를 제 위치로 돌아오게 하신 분은 예수 한 분뿐이다.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한 분뿐이다. 그 자격이 있는 분으로써 죽으신 분이 한 분뿐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구속을 위해서 예수를 보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자리에서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시고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당신이 심판을 받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 안에서 우리가 구속과 죄 사함을 받도록 은총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를 새 피조물 안으로 이끌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쓸모없던 저희들을 쓸모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자리를 비통하게 여기는 인생을 우리가 자부심을 갖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