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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빛 되신 예수(요9장)
2020. 3. 13. 이현래 목사
오늘은 9장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요9:2)하고
예수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요즘도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기독교인들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에서 장로가 사업을 하다가 망하면 혹시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게 아닌가? 말은 그렇게 못해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옛날 우리 조상 때부터 하던 이야기다.
기독교 이전에 사실은 상선벌악이라는 사상이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하늘이 벌을 준다는 이런 생각이 상식화되어 있다. 그런데다 기독교가 들어왔다. 기독교는 늘 잘 믿으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복을 준다고 계속 설교를 해 왔다. 잘 믿으면 세상에서 잘된다는 것을 지금도 하고 있다. 잘 믿는 집사나 장로들이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을 잘 믿으니까 저렇게 하나님이 축복을 해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쉬운데, 만일 그 사람이 뭘 하다가 망했다면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 저러는가?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으로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처가도 그런 집안이었다. 장모님이 양장 기술이 좋은 분이라서 충주 시내에서 시온 의상실하면 유명했다. 집사람도 그 밑에서 7년 간 일을 했다. 유능한 의상실이 되어서 돈을 꽤 벌었는데 장인어른께서 그것을 가지고 중도라사라고 큰 라사점을 했다. 양복점이다. 그때 당시 라사점은 전부 할부제였다. 3개월이나 10개월을 할부해서 장사를 했다.
그 대상도 일반인들은 양복을 해 입는다는 생각을 못하고 전부 공무원들이었다. 제일 많은 것이 교육 공무원들이 주요 단골이었다. 그래서 관리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계속 월부를 해야 되기 때문에 많은 투자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사업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도매상으로부터 천을 외상으로 많이 가져와야 된다. 그래야 자본을 깔아도 회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복을 해 주면 틀림없이 돈을 회수해야 도니까 외판원을 두어야 했다. 직원을 많이 써야 되는 그런 사업이었다. 장인어른은 장로교 장로님으로 아주 기마이가 좋은 장로님이셨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신이 앞장서서 돈을 내는 분이지 뒤에서 말만하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평안도 사람으로 칭찬 받는 장로님이셨고, 지역에 있는 교역자들 중에 장인어른에게 양복을 얻어 입지 않은 분들이 없었다. 그때 양복 값은 굉장히 비쌌다. 그것을 다 교역자들에게 해 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했지만 속으로는 곪았던 것이다. 자금이 부족해서 사채를 쓰게 되었다. 사채 이자가 얼만가 하면 최소 월 3부가 아니면 5부다. 급할 때는 달라 돈이라고 해서 1할까지 썼다. 월 3부면 연 36%다. 지금 연 2%, 3%로도 사업이 되느니 안 되느니 하는 판에 36% 이자를 주고 사업이 되겠는가? 그것도 신용이 좋으니까 사채를 줄 사람이 굴려달라고 서로 갖다 맡기는 것이다. 그 시대에 나도 장사를 해 봤는데 사람들이 좀 굴려 달라고 돈을 맡긴다. 돈이 없는 판에 돈을 갖다 맡기는데 안 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은행에 돈을 빌린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이고 그런 것은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때였다.
그래서 망할 수밖에 없게끔 일을 했다. 그렇게 하고 망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아주 사업 수완이 능숙해야 그것을 매꿔 나가는 형편인데 쫄딱 망했다. 양장점 해서 죽도록 벌어 놓은 돈을 라사점을 해서 완전히 망해 먹고 말았다. 그 덕택에 내가 집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안 그랬으면 나 같은 사람과 결혼을 시킬 리가 없다.
완전히 망해서도 장인어른은 나와 결혼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집 사람의 믿음이 아니었으면 탈출이 불가능했다. 내 약점을 환히 아시고 집사람에게 홀어머니 아들이지 하고 물으시더라고 했다. 내가 23살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홀어머니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트집 잡았다. 두 번째는 결핵이 걸리지 않았느냐고 묻더라고 했다. 그것도 딱 맞는 이야기다. 오래 사셨으니까 이런 경험이 많은 것이다. 그렇게 물으시고 이런 사람과 결혼하려고 하느냐고 했는데, 집사람이 그때 성령이 충만해서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어디 사람의 생각에 달렸느냐고 한방 해버리니까 장인어른이 아무 말도 못하더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을 물어 본 줄 알았으면 나는 죽어도 결혼을 안 했다. 그런데 전혀 몰랐다.
집사람이 전혀 이야기를 안 했다. 대단히 지혜로웠다. 나는 처갓집을 가보지 않았으니까 결혼을 했지 만일 가봤고 그런 말을 들었으면 내가 장가를 안 가면 안 갔지 결혼을 하겠는가? 나도 아무 것도 없지만 뼈대는 있다. 그래서 장인어른이 교회를 못 나가셨다. 교회에 나가면 사람들이 채장로는 모르는 죄가 있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어떻게 가겠는가? 갈 수가 없다. 그래서 뒷방 골방 캄캄한 방에 들어앉아서 하루 종일 신문만 보고 있는 것이다.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그렇게 계셨다. 특별히 장로교에서 그런 일들이 많은데, 장로교에서 장로 하다가 망하면 그 교회에 못 나간다. 세상에 교회가 흩어져 있고 사람도 많다.
다른 교회 가면 될 텐데 장로교 장로들은 그렇지 않다. 어떻게 하다가 복구가 되어 다시 일어나면 도로 그 교회에 간다. 교육은 참 잘되어 있는 것이다. 장로의 영광, 가문의 영광을 어떻게 잘 주입을 시켜 놓았다. 간 사람이 도로 돌아온다. 여러분의 주변을 보시면 아실 것이다. 그런 분이 하는 이야기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요9:2) 나면서 소경이 된 사람은 누구의 죄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오늘날도 역시 그런 질문을 받게 된다. 여기에 이렇게 대답해도 안 되고, 저렇게 대답해도 안 된다. 이것은 아주 난처한 문제가 아닌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를 데리고 와서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5)하고 묻는 것보다 이것이 더 어렵다.
대답해야 하는 사람들이 나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해버리면 되겠는데, 목사가 되어서 모르겠다고 할 수가 있는가? 뭐라고 붙여놓으면 말이 안 된다. 어떻게 붙여놓든지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잘못한 사람은 다 그렇게 되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잘된 사람은 다 잘해서 잘되는가? 또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이것을 대답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에 대답을 못하신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고 대답했다. 이 대답 밖에는 확실한 대답이 없다.
그것은 나도 모른다는 이 말이다. 나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봐야 되지 않느냐? 이런 말이기 때문에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아주 쉽다. 아는 체하다가는 누구를 상하게 만든다. 잘못 말해 버리면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한다. 그러면 잘된 사람은 속으로 나는 잘한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잘되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감사가 제대로 안 된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해도 안 되고, 저렇게 대답해도 안 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이것은 아주 큰 틀에서 한 말이다. 우주적인 틀에서 한 말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우리가 모르는 틀에서 창조하셨다. 내가 모르는 분이 있다. 사람이 모르는 분이 있다는 자리에서 나오는 대답이다. 이것은 교리를 가지고서도 설명할 수가 없고, 신학으로도 대답할 수 없고, 뭐로도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피조물이다.’ 이 자리에서 밖에는 대답이 안 된다. ‘나는 피조물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행히 헤매다가 시작을 여기서 하였다.
내 위에 누가 있구나. 누군지 모르지만 나보다 먼저 있는 이가 있구나. 누군지 모르지만 시작을 누가 했구나. 나는 그것이 아니구나. 나는 그냥 피조물에 불과하구나. 여기서 내 인생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 문제에 답할 수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착하고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온 동네에서 칭찬을 받고 자랐다. 그런데 장사를 해 보니까 안 됐다. 망하고 말았다. 그러니 할 말이 없다. 사실 알고 보면 내가 교회를 잘 다닌다고 해서 믿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다닌 것인데,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까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보면 참 민망하게 생각했다. 뭘 잘못한 것이 특별히 있으면 이래서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아니다. 저런 사람은 뭐가 되어야 하는데 왜 저렇게 안 될까? 이렇게 생각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웃에서 같이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고 내 친구들이며 동네 사람들인데, 저 사람은 정말 안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과 계속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내가 변명을 하고 뭐라고 하겠는가?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깨달음인지 계시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피조물에 불과하구나. 내일 일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하나님을 알고 모르고 하겠는가? 그런 주제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다윗이 사울의 갑옷을 입고, 이것은 내 몸에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주제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도 똑 같다. 내 평생을 지배하고 있는 바탕이고 뿌리가 거기에 있다. 나는 내 것이 아니고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나는 모른다. 알고 보면 이것이 바탕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내일 일을 모른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마지막에 내일 일을 모르고 살고 있다. 코로나의 전파력이 무섭다고 하지만 젊은 사람은 안 죽는다. 걸려도 죽을 일이 없다. 폐렴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그냥 치료하면 낫는 것이다. 그런데 노약자는 위험하다고 한다. 노약자 중에서 나 같은 병은 일번 타켓이다. 왜냐하면 폐가 문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병은 폐에 물이 차서 죽는 병이다. 그러면 숨을 못 쉰다. 폐 세포인 폐포 자체에 물이 차는 것이다. 나는 폐에서 물을 많이 빼냈지만 폐포에는 물이 안 들어가서 산 것이다. 폐 바깥 늑막에 물이 찼던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는 늑막에 물이 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빼내면 된다. 폐 세포에 물이 차버려서 못 사는 것이다. 어제까지 살던 사람이 갑자기 호흡이 안 되어 죽어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내일 일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다. 내가 만일 사람들이 많이 사는 속에서 살았더라면, 신*지에 갔더라면 죽었을 사람이다. 거기에 안 가서 산 사람이다. 이번에 서울 콜센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서 확진자가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산 속에 있으니까 교회 형제들이 안 오면 아무도 올 사람이 없고, 모두 주의해 주니까 나 혼자 이러고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신학을 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전혀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른다. 내일도 모르는데 뭘 안다고 하겠는가? 아무 것도 모른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이 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봐야 되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봐서 안 되면 할 수 없는 것이고, 되면 감사하고 그런 것이 인생이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꼭 이렇게 해주셔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욥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러십니까?’라고 했다.
하나님이 그때 뭐라고 말씀하시겠는가? 너는 지금 모르는 것이 있다. 네가 지금 모르는 것이 있다. 욥기를 읽어 보면 내용이 그 이야기다. 너는 지금 다 알고 있고, 네가 한 것을 다 알고 있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 마귀가 한 일을 내가 알게 되는가? 모른다. 알면 누가 속겠는가? 모르니까 속는 것이다. 간단한 사건이 아니지만 이 사건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것이 복음이다. 여기서 우리가 쉼을 얻지 못하면 쉴 데가 없다. 내 인생의 어떤 문제를 놓고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는가?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기다려 봐야 되는 것이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일이지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율법주의나 근본주의가 어려운 것이 이런 자리에 오면 아주 어렵다. 해석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문자를 가지고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얼른 보면 믿음이 참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에 부딪치면 해석이 안 된다. 교조주의가 무서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얼른 보면 예수를 믿기 쉽다. 그렇게 하면 헛된 길로 갈 필요도 없고, 신*지를 갈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생기면 답이 안 나온다. 성경주의도 답답할 때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데, 이러면 답이 안 생긴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일 때 성경을 몰라서 죽인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성경 밖에는 모르는 사람들이다. 수학을 아는가? 과학을 아는가? 아무 것도 모르고, 오로지 성경 밖에는 모르는 사람들이다. 더군다나 서기관은 성경만 평생 붙들고 산 사람들이다.
우리가 아무리 안다고 한들 그 사람들보다 더 하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검토를 해도 예수는 사기꾼이라고 밖에는 안 나온다. 성경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없으면 계시를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주의가 되면 생사람을 잡는다. 자기도 죽지만 남도 죽게 만든다. 그러므로 성경주의라는 것이 아주 위험한 것이다. 중요한 말인데 위험한 것이다. Bible said~. 빌레그레함의 설교의 요점은 Bible said~이다. ‘성경이 말하기를~’ 이다. 그것은 미국에서는 통하지만 인도에 가서 그 말을 하면 통하겠는가? 인도에 가서 통하는 말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오늘날 여러분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는 것 밖에 안 통한다. 조*기 목사가 인도에 가서 목회를 하니까 사람들이 엄청나게 왔다고 한다. 수 만 명이 모였는데 설교 내용이 다른 것이 없다. 마지막에 가면 병 고치는 것이다. 병 고치는 것은 만민에게 공통이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박수쳤다고 한다. 교리니 신학이니 성경이니 이런 것을 가지고 사람을 고칠 수가 없다. 참고서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책이니까 우리가 그것을 보지 않으면 안 되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 그것이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현재적인 계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때그때 가서 그때 형편에 따라 말씀하시고, 그때 형편에 따라 일을 하신다. 안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언제 구름 기둥이 뜰지, 언제 가라앉을지 모른다. 그것을 알고 싶다. 며칠간 쉬었다가 며칠에 갈 것인지 이것을 알고 싶은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었다. 먹지 말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안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달을 쉬라고 하면 되는데, 한 달을 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일주일을 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가라고 해서 갔는데, 밤에 가라고 하면 또 가야 된다. 내 주권이 없다. 내가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이다. 이 훈련을 40년 동안 하게 된 것이다. 일생을 통해서 교회를 가고 예수를 믿고 사역을 하는데, 이것을 못 배우면 다 헛일이다. 이것을 알면 다 내려놓게 된다. 계산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 요즘 말세를 계산한다고 죽도록 해봤자 해프닝이 되고 만다. 한 번 해보면 그런 일을 안 해야 되는데 대안이 없으니까 하고 또 한다. 지금도 기독교 안에서 말세론은 시간을 정해서 실패한 것이 우리 한국만 그런가? 세계적으로 보면 그런 것이 엄청나게 많다. 그런데도 안 없어진다. 왜냐하면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체 하려면 안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쉽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니까 그냥 모른다 하면 될 일이고, 어려울 일이 없다.
옛날에는 그냥 어려웠다. 내가 뭔가를 대답해 주어야 될 것 같으니까 어려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아야 된다. 괜히 짊어지고 있어보았자 도움이 안 되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너 수고한다는 그런 말을 못 듣는다. 내가 짐을 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너 수고한다고 안 하신다. 왜 지고 있느냐? 언제 내가 너에게 짐을 주었느냐? 이렇게 하실 것이다.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하리라고 하실 것이다. ‘내가 이러고저러고 했습니다.’ 하니까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괜히 헛일을 하고 돌아다닌 것이다. 그분과 아무 관계없는 일을 하지 않았는가? 한 교회에서 8년을 설교 했다. 그리고 C.C.C.에 와서도 한 2년을 설교 했다. 딱 10년을 했다. 그런데 뭘 했는지 모르겠다. 뭘 말했는지 모르겠다. 뭘 가르친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가르칠 수도 없는 사람이 가르쳤다. 어떤 사람들은 왜 대구교회에서는 이런저런 일은 안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설교는 다 그렇게 하는데 왜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해야 되겠는가? 나는 아는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고 대답하려니까 너무 매몰차다. 내가 할 수 없는 말을 해 봤자 소용이 없다. 내가 누구를 가르치겠는가?
캐톨릭에서는 가끔 전부 빨간 캡을 쓰고 주교들만 모이는 무슨 세계 공인회라는 데서 세계의 문제를 다룬다. 오늘날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그 세계에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교회는 거기서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이런 문제를 결정한다. 거기서는 세계를 경영하고 있는 셈이다. 거기서 세계를 지휘하고 있는 셈이다. 영적인 지도자로서 뭘 하고 있다는 곳이다. 어제 밤에 TV에서 다큐멘터리로 보여주었다. 수년 전에는 세계에 선언을 하는 선언문 같은 것을 만들었다. 전 세계를 보고 가고 있으니까 미국 의회보다 더 크다. 그렇다고 캐톨릭에서 전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총칼을 든 사람들이 해결하지 종교가 해결하지 못한다. 종교가 정치에 끼어들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하다. 세상은 세상이 하는 것이지 종교가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것을 교회가 다 해야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다 하면 좋다. 그런데 다 하게 되면 엄청난 불행이 생긴다. 그것이 중세다. 그때는 교회가 다 했다.
모든 것을 다 했다. 모든 것을 다 했는데, 세상을 캄캄하게 만들고 말았다. 정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종교가 가는 길이 다르고, 정치가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의 길에 가서 내가 뭘 하겠는가? 하나님은 불러내신 하나님이시다. 너 애굽에서 바로를 굴복시키고 거기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라고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거기서 ‘나오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갈대아우르를 변화시키라고 하지 않으셨다. 너는 따로 나오라는 것이다. 내가 네게 지시할 곳으로 나오라고 하셨지, 갈대아우르를 변화시키라는 말이 없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독일의 기독교인은 인구의 85% 이상이었다. 그런데 히틀러 한 사람을 당하지 못했다. 오히려 거기에 휘말려서 나치 주장을 하면서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종교는 아예 정치와 무관한 곳이다. 종교가 정치를 하게 되면 그것은 아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목사들에게 총을 다 주면 좋을 것 같지만 엄청나게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총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은 안다고 해야 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하나님이 하신일은 안 하는 것 같지만 언제든지 하고 있다. 이번에도 사랑방에 누가 그런 글을 올렸다. 유대인 육백만을 학살할 때 그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르짖는 그 하나님은 어디 갔느냐고 했다. 뭐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성경을 보고 한 말이다. 예수님을 죽일 때, 저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돌려달라고 했다. 그랬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그 여호와 하나님은 참 무자비한 하나님이 된다. 뭐라고 대답해야 되겠는가? 나에게 물어보면 나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왜 아무 대답이 없었는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면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했는데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나님이 대답을 못하신 것이다. 지금 대답하지 못할 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대답하지 않았겠는가? 알고 보면 대답을 못하신 것이다. 하나님도 대답 못할 때가 있는데, 우리 인간이 어떻게 대답을 다 하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말이 좀 어폐가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이 대답 못한다고 하면 그런 소리가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하나님도 대답 못할 때가 있고, 할 때도 있지, 다 대답하겠는가? 아이들이 묻는 질문에 우리가 다 대답 못한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 여러분에게 질문하면 다 대답 못한다.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흙으로 지어 숨을 코에 불어넣으니 사람이 되었다고 동화처럼 이야기를 해주니까 나중에 물어보는 말이 아빠 지금도 그렇게 되느냐고 묻는데 참 대답하기 어려웠다. 아이들 질문에 대답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어른이라도 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라고 다 우리가 알아듣도록 대답할 수 없다. 그분에게는 대답이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그 대답이 올 수 없다.
하셔도 들을 수 없다. 무슨 대답을 하고 있겠지만 안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고 알아차릴 수 없다. 못 본 것은 말해도 소용이 없고, 못 본 것은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이것이 답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다. 그래도 예수님은 이렇게 하고 난 후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참 묘한 방법인데 침을 뱉어서 땅에 이겨서 눈에 발라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했더니 씻고 보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것도 아이들이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하나님은 뭐든지 다한다고 대답해놓으면 고등학교 가면 다 허물어져버린다.
아버지 거짓말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중에 가면 다 들통 날 일을 가지고 우리가 아는 체할 필요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은 모른다 하는 것이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을 보려면 빛이 있어야 본다. 그런데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이 있고, 안 보이는 것이 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면 내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그것이 여기 있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현미경이 있으니까 코로나 바이러스가 보인다. 이것도 보통 현미경으로 못 본다. 특수한 현미경으로 봐야 한다. 그런 현미경이 많이 보급이 되어서 대구에서도 확진율이나 검진율을 그런 현미경으로 보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아마 지금도 균을 바로 볼 수 있는 현미경은 많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일어난 어떤 반응을 볼 수 있는 현미경이지 직접 균을 볼 수 있는 현미경은 그렇게 많지 않고 비쌀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면 우리가 다른 세계가 보인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무슨 수로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을 알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어느 정도 알고 보면 이것은 이런 뜻이구나. 이렇게는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오시면 그 집에는 잔치가 벌어지는구나. 이렇게는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런지는 잘 모른다. 왜 그렇게 보이는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려면 믿으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왜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것도 우리 경험 속에 보면 어떤 것이 있기는 있는데, 왜 그렇게 되는지를 모른다. 여기도 마찬가지이다.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이다. 물론 눈을 뜨면 다 보인다. 못 보던 것이 보인다. 당연히 이 아이처럼 말하게 된다. 예수라는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런 것은 모릅니다. 그런데 내 눈을 뜨게 한 것은 확실하게 사실입니다. 이러면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는지를 모른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서 눈이 떠지고, 어떤 사람은 안 떠지는가? 이런 의문이 또 생긴다.
끈질기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 계속해서 ‘그렇습니까.’ 하고 갔다가 또 오면 또 다른 질문을 하고, 또 다른 질문을 한다. 이런 질문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런 질문이 온 것 같다. 그 중에 제일로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님도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분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린 분이고, 눈먼 자를 뜨게 하신 분이고, 어떻게 사람이 그런 일을 하겠는가? 죄인으로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는가? 이런 일도 하신 분이다. 그런데 이분을 정확하게 모르니까 그분이 하신일도 우리가 모른다. 이런 분이, 이렇게 할 수 있는 분이 못한 것이 하나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것이 못한 것이다. 다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죽은 사람도 살리는데 자기는 왜 못 살리느냐는 것이다. 다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못한 것이 있다. 우리 같은 사람이야 아예 못하는 것이 훨씬 많으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본 예수는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그것을 눈으로 봤다. 우리는 들었지만 그 사람들은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니까 못하는 것이 있었다. 여기서 제자들이 꽉 막혀버렸다. 깜깜해져 버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따라왔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다윗처럼 로마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겠는가? 모세처럼 바로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다 상상했다. 그 나라가 올 때, 그분의 나라가 임할 때,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왼쪽에 앉을 것인가? 오른쪽에 앉을 것인가? 이러고 따라다녔다. 그런데 못 뛰어내리니까 딱 여기에 와서 막혔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보라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데도 내려오지 못하고 그냥 죽었다. 앞이 꽉 막혔다. 가던 길이 철로가 끊어진 것처럼 막혀버렸고 끊어져버렸다. 이제는 철마를 타고 갈수는 없고, 자동차로 바꿔 탈 때가 되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이었다면 정말 막막했을 것이다. 절망이 이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나 따라다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기대가 크면 큰 만큼 절망도 역시 크다. 지금 신*지에서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총회장이 안 죽는다고 했다고 하는데 잘못 흘러들어온 말인지 사실인지 모르겠다. 만일 안 죽는다고 믿고 따라다녔다면 죽고 나면 다 없어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죽고 나도 안 없어진다.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이 얼마나 믿었으면 다 흩어졌겠는가? 얼마나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확실했으면 실망이 그만큼 컸겠는가?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하신일이 나타났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나타났다. 뭐가 나타났는가? 우리가 다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다 예수같이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사람이라는 제한을 벗어나서 천사같이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흙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것이 인생의 문제이다.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는 그것이다. 천사를 보니까 죽지도 않고 저렇게 잘 살고 있고 능력이 저렇게 많은데 인생은 무엇인가? 왜 살아도 답이 없고 마지막은 공인가? 이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한 것이지 그냥 뭐 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했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대답이 있다. 하나님 아들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것이 하나님아들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해도 하나님이 쓸 수가 있다는 이 말이다. 왜? 형상이기 때문이다. 형상은 아무것도 못해도 쓰실 분이 있으면 쓰시는 것이다. 흙이 자기는 아무것도 못한다. 그런데 농부가 오면 쓴다. 그러면 흙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뭔가가 되면 오히려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돌은 확실히 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위는 확실히 어디에 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흙은 어디다 쓰는지 모른다. 자기로서는 아무것도 없다. 농부를 만나지 않으면 흙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농부를 만나면 그때는 완전히 둔갑한다.
황금물결을 이룬다. 내가 생각할 때 흙처럼 신비로운 것이 없다. 이것이 정말 신비로운 것이다. 이것이 복음 아닌가! 누구나, 어떤 사람이나, 크냐 작냐, 높냐 낫냐, 이런 것이 소용이 없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면 하나님이 쓸 수 있다. 그런데 뭘 좀 알면 쓸 수 없다. 뭘 좀 알면 ‘왜 이럽니까. 저럽니까?’ 하는데 어떻게 쓰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면 쓸 수 있다. 참 아이러니하고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쓸려고 하면 머리도 좋고 판단력이 빠른 사람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것들이 방해가 되고, 하나님이 쓰실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바보 멍청이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자기로서 자기를 끌고 갈수 있는 것이 없다. 불교와 반대되는 것이 그것이다. 불교는 자기가 자기를 주인이 되어서 반야의 경지에 해탈의 경지에 간다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 하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불교이다. 나는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할 만한 자신이 없다. 석가모니도 거의 죽음직전까지 같다가 이것이 아니다하고 나왔다. 나는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그만큼 할 자신이 없다. 만일 내가 그것을 모르고 덤벙거렸더라면 일 년도 못살고 죽었을 것이다. 할 만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뭐가 됐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고 위대한 사람들이다.
놀라운 사람들이다. 세상에서는 길이길이 존경할만하고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유명한 스님이 해마다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몇 백 명씩 데리고 성지순례를 한다. 그 중 한군데가 석가모니가 뼈만 남았던 자리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서 목욕을 하고 음식을 먹었다는 그 자리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감탄을 하고 감복을 했다. 저것이 안 될 것인데 왜 감복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도 못할 것인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도 그렇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고 이렇게 했다고 하면 감탄을 한다. 그런데 자기가 되는가? 참여가 되는가? 그래서 종교가 되고 만다. 아주 특별한 반신반인인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이 다 원인무효 되고 말았다. 내려오지 못하니까 다 끝난 것이다. 우리 인간의 기대는 다 끝나버렸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나나 그분이나 똑같다. 그런데 하나님이 볼 때는 그것이 아니다. 부활했다는 말은 그것이다.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옛날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다시 살아났으니 새 사람이다.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다. 우리가 내가 얼마나 예수를 잘 믿으려고 노력했는가? 얼마나 예수를 내 안에 모시려고 노력했는가? 내가 그 안에 잠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다 불가능하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분을 내가 어떻게 내 속에 모시고 다니겠는가? 생각해보라. 또 그런 분속에 내가 어떻게 들어가겠는가? 내가 그분을 전달한다는 것은 아무리 잘 증거한다고 하더라도 금강산 보고 와서 이야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연합이 불가능한 그런 사람을 보았다. 우리와는 도저히 상종이 안 될 사람을 보았다. 그것이 놀라워서 우리는 따라 다녔다. 그런데 마지막에 와서 보니까 아무것도 없어졌다. 아무것도 없는데 거기에 내가 있다. 이것이 그분이 나를 포함했다는 의미이다. 그 안에 내가 있다. 내가 언제 들어간 일도 없는데, 그 안에 내가 있다. 우리가 아담 안에 포함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언제 아담 안에 있었는가? 내가 언제 아담을 본 일이 있는가? 그런데 나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를 본 일이 없다. 그런데 십자가에 있는 그 사람 때문에 내가 그 안에 포함된 사람이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단순하다. 사람은 두 사람 밖에 없다. 하나님 목전에는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것밖에 없다. 사람이 두 사람이니까 길이 둘이다.
아담 가는 길이 다르고, 그리스도가 가는 길이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도 가는 길에서 아담이 가는 길을 간섭할 수 없다.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이러니저러니 하다가 맞아죽는다. 아무것도 없다. 길이 다르다. 날아다니는 새가 물고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겠는가? 너도 좀 공중에 훨훨 날아다녀라. 공중에 와보니까 참 좋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물고기가 그 말을 알아듣겠는가? 모른다. 우리나라의 재미있는 동화가 용궁에 갔다 온 토끼이다. 용궁에 갔다 온 토끼가 용궁의 사정과 육지의 사정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말을 해도 못 알아듣고 속는다. 나는 원래 간을 평소에는 나무에 걸어놓고 다닌다고 하니까 용왕님이 그런 줄 알았다는 것이다.
용왕도 모르는데 어느 물고기가 알겠는가? 길이 다르다. 길이 전혀 다르다. 안과의사가 수술을 해서 눈을 열어서 보게 한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빛이 되신 것과는 아주 다르다. 안과의사도 남의 눈을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식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만일 나는 죽는다면 안구이식은 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해서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그 말은 하지 않고 물어봤더니 자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자기는 시신경이 없는 것인지 이식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것도 이식이 가능한 사람도 있고, 불가능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안구이식을 한다고 하니까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닌 것이다. 의사가 안과에서 치료해서 눈을 보게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길에서 한 일이 아니다. 길이 전혀 다르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길이 다른데서 이야기를 하니까 아무 소용이 없다.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어째서 그렇게 이끄는지 잘 모르지만 하여간 그렇게 이끌린 사람이 있다.
아브라함 보고만 그렇게 말했겠는가? 그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다 말했겠지만 그 말을 알아듣고 따라 온 사람은 아브라함이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바닷가에 온 사람들 중 베드로에게만 귓속말로 네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했겠는가? 모든 사람에게 그러기를 원하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그 중에서 베드로가 그 말을 그렇게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왜 그렇게 알아들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것도 역시 계산이 불가능하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그렇다고 우리가 아버지께서 내게 이끈 자를 누군지 다 알겠는가? 그러니까 무차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가서 되는 데도 있고, 안 되는데도 있고, 가서 욕 얻어먹을 데도 있고, 좋아할 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보기만 하고 대번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참 신기하다. 그런데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라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 같다. 나는 다 될 줄 알았다. 이렇게 쉬운 것을 다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러면 인생이 금방 편안해질 텐데 안식에 이를 텐데 이렇게 생각했는데 안 되는 사람은 또 안 된다. 씨를 뿌려도 길바닥에 뿌려진 것도 있고, 자갈밭에 뿌려진 것도 있다고 한다. 돌짝밭이 영원히 돌짝밭이 될 것인지, 길바닥이 영원히 길바닥이 될 것인지 모른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계속 뿌리다보면 길바닥에도 흙이 고일 때가 있고, 돌짝밭도 흙이 될 수도 있으니까 끝없이 뿌리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씨가 낭비되어서 결국 흙이 되었겠는가? 우리는 뿌려야 한다. 옥토가 될 때까지 뿌려야 한다. 하나님은 미리 다 알고 계실지 몰라도 우리는 모르니까 뿌려야 된다. 내가 대구에 오니까 학생들이 대부분 묻기를 그런다. 대학교에 가서 전도할 때, 예정론에 대해서 물었다. 대구가 예정론이 센 곳임을 실감했다. 젊은 학생들이 물어보기를 모두 예정론을 물어본다. 사람이 인생을 알기를 얼마나 알겠는가?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인데 이분을 만나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신 그분이 내려오지 못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눈이 달라진다. 우리 눈이 달라진다. 생각이 달라진다.
내 위치가 달라진다. 나도 굉장한 사람이구나. 하나님이 쓰시면 되는구나. 흙이 다 똑같은 흙이다. 농부가 쓰기만 하면 다 똑같은 것이지 달라질 것이 뭐가 있는가? 하나님 말씀은 아무것도 안될 것 같은데, 들어와 보면 안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세상 말은 다 될 것 같은데, 들어가 보면 갈수록 어렵고 안 된다. 갈수록 어렵고 더 안 된다. 이 사람들이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내 눈이 떠진 것만 사실이다. 나는 전에 못 보던 사람인데 보게 되었다. 그것도 안 되니까 그 부모를 찾아가서 이 아이가 진짜로 나면서 소경이 되었느냐 아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본인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어떤 원칙을 세워서 묻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른다. 그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세계로 가버렸으니까 기대하는 대답이 나올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이 기대하는 대답을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못한다. 할 수 없다. 너는 어째서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느냐고 물으면 어째서 그렇게 살고 있는지 대답할 수 없다. 왜 나는 하나님에게 이끌려 왔는지를 말할 수가 없다. 설명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나 같은 환경에 있으면 다 나같이 되어야 되는데, 또 그렇게 안 되니까 내가 말할 수 없다. 그분이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 왜 그렇게 하시는지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오늘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할 뿐이고, 이렇게 해주신 분에게 영광을 돌릴 뿐이지 다른 말이 할 말이 없다. 육백만 유대인이 죽을 때, 어디가 있었는지 모르는 그분이다. 그분이 어디가 있었는지 물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아무것도 모른다. 그분이 잠을 잤는지, 뭘 했는지 나는 모른다. 오늘 지금 내가 눈을 뜨고 본 것만 사실이다.
그것을 감사할 뿐이지 더 이상도 이하도 나는 설명할 수 없다. 지금 있는데, 하나님이 내가 해주신 그대로 그것만 감사해야 되지 남의 일을 생각하고 나는 이렇게 눈을 떴는데 다른 사람은 왜 눈이 안 떠지냐? 이렇게 하고 있을 자격이 없다. 왜 나는 사람으로 지었고, 어떤 놈은 침팬지로 지었는가? 이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내가 사람으로 지어져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이것이 감사할 뿐이지 침팬지가 왜 생겼는지 왜 필요한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대답 못할 일이 너무 많다. 독사는 왜 만들어 놓았는지, 여름날 파리는 왜 있는지, 모기는 왜 있는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단지 지금 내가 모르던 축복을 받고 있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것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는 이것밖에 할 말이 없다.
네가 뭔데 그러냐고 하면 할 수 없다. 준 것을 어떻게 받지 않겠는가? 내가 자격이 있으면 내가 이렇게 했으니까, 이렇게 수양을 했으니까, 이렇게 했으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그냥 할 말이 없다. 이번에 사랑방에 할 말이 없다고 썼다. 단지 내가 지금 있는 이것을 감사할 뿐이지 나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왜 육백만이 죽을 때 모른 체하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가? 왜 그렇게 처신을 하셨는가? 이것을 묻는 질문이 들어왔다. 그래서 나도 그 영화를 옛날에 봤는데 누가 그런 의문을 갖지 않겠는가? 그 영화를 보면 다 그런 의문을 갖게 되어 있다. 그런데 대답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모른다.
지금 내가 이렇게 누리고 있는 이것밖에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것이 대답이 되었으면 참 좋은 일인데, 대답을 들어봐야 그렇더라고 하면 허당이다. 허당이라도 어찌하겠는가? 할 수 없다. 알아들으면 복되고, 알아듣지 못하면 허당이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예수님에게 왜 안 뛰어내립니까? 왜 못 뛰어내립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우리는 그것밖에 모른다.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 나타난 것이 우리가 증인이다. 너희가 이 일의 증인이다.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일 뿐이지 설명이 불가능하다.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설명한다고 해 놓으면 논쟁거리밖에 안 된다.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잘 들어주어서 감사하다.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지금 대구 시내는 유령도시가 되어서 이렇게 오래가면 모든 것이 다 이상해질 것 같다. 사람이 다니지 않으니까 이상해질 것 같다. 나는 괜찮다. 나는 혼자 있어도 되는데 대구시내 사람들은 황당하게 생겼다. 다른 동네도 그렇겠지만 대구는 그런 상태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하나가 이 많은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한다. 그리스도 백신을 이마 다 맞으셨으니까 그 문제는 이상이 전혀 없을 것이다. 예수 백신을 맞았으니까 코로나 백신이 올지 모르지만 사탄 바이러스는 예수 백신 한방이면 된다. 아주 간단하다. 여러분에게 영원한 평화가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