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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 조말선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오늘 껴입은 외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
한 번 이상 내가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벗어놓은 외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빠져나가자 그것은 공간이 되었다
후줄근한 중고품
더 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
출생1965. 경상남도 김해수상2001년 제7회 현대시 동인상
1998년 현대시학 신인상
199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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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년기
안현미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호르몬이 울고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호르몬이 미워하고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국수 가락처럼 긴
사생과 결단의 끝
당신,
내가 살자고 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내가 죽자고 하면 살아버릴 것 같은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크게 잘못 살고 있었다는 걸
크게 춥게 살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따뜻한 국수가 고팠다는 걸
1972년 강원도 태백 출생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문학동네 》로 등단
시집『곰곰 』『이별의 재구성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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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늘처럼
ㆍㆍㆍㆍㆍㆍㆍㆍ 법정스님(1932~2010)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 앉은
애호박을 보았을때
친구한테 먼저 따서 보내주고 싶은 생각이 들고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있는 들꽃과 마주쳤을때
그 아름다움의 설렘을 친구에게
먼저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메아리가 오고가는 친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수 있어
좋은 벗이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장점을 세워주고
쓴소리로 나를 키워주는 친구는
큰 재산이라 할수 있다
인생에서 좋은 친구가
가장 큰 보배다.
물이 맑으면 달이 와서 쉬고
나무를 심으면 새가 날아와
둥지를 튼다.
스스로 하늘냄새를 지닌 사람은
그런 친구를 만날 것이다.
그대가 마음에 살고 있어
날마다 높은 가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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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신춘문예 당선작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거미 / 권영하
하늘 끝 마천루 정수리에
밧줄을 꽁꽁 묶었다
동아줄 토해내며 낙하하는 몸으로
건물의 창을 닦으며 절벽으로 내려간다
빌딩들 눈부시게 플래시를 터트려도
허공길 유리블록 사뿐히 밟으면서
수족관 물고기처럼
살랑살랑 물호수를 흔들며 헤엄친다
뙤약볕 빨아먹은 유리성이 열을 뿜고
빌딩허리를 돌아온 왜바람이
목숨줄을 무섭게 흔들지만
구슬땀을 흘리며 내려간다
아이스링크에 정빙기같이
생채기를 지운다
유리벽에 갇힌 사람들에게
푸른 하늘도 열어주고
유리창에 비치는 현수막의 사연도
살포시 보듬어 닦는다
의지할 곳도 없는 허공에서
작업복 물에 젖어 파스내음 진동하고
피로가 줄끝에서 경적처럼 돋아나지만
또다시 하늘에 밧줄을 묶는다
땀흘린 줄 길이만큼 도시는 맑아지고
유리벽에 그려진 풍경화도
깨끗해지니까
* 심사평
유리벽 청소 노동자의 삶
형상화 뛰어나
투고한 작품들을 읽어보면서 느낀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적어본다.
첫째, 시를 오랫동안 익혔으면 좋겠다.
잠깐 보았던 사물이나 여행지의 인상을 그대로 쓴다고 '리얼'의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래 묵혀 충분한 발효를 거친 다음에야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이다.
둘째, 문장이나 문체의 완성도를 높였으면 한다.
셋째, 기괴한 이미지를 썼다고 해서 난해한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넷째, 의식 또는 사유(사회적, 정치적, 미학적)가 시의 토대를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다섯째, 노래가 없다. 운율 또는 리듬이 그것이다.
이런 아쉬움을 뛰어넘는 다섯 분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남았다.
'등'은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흐름이 산만하여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지가 불분명했고,
'뼈 무덤 하나 먹고 둘 먹고'는 서사를 밀고 가는 힘은 인정되나 중간부분이 풀어져서 압축하는 요령이 부족했다.
'죽방멸치'는 상투적 표현이 상식적이고 구체적이지 못했다.
'샤갈의 숲속 마을로, 나는'은 이미지가 출중하여 감각은 높이 사 줄만 했으나 주제의 가벼움이 일상성에 매몰되어 우리 삶에 대한 사유를 받쳐주지 못하였다.
반면 당선작인 '거미'는 현실감을 바탕으로 해 사회를 보듬어 안는 시선이 따뜻하고 정겹다.
유리벽을 청소하는 노동자의 삶이 잘 형상화 되어 있었다. 함께 투고된 작품 '통일론'에서도 통일을 불을 밝히는 전구에 비교하여 표현한 것은 높은 점수를 받을만 했다
* 심사위원 : 강은교 강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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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서 - 감성 모아모아 쓰다
그들이 땅에서 멀어지며
하늘과 가까워졌을 때
그들에게 새 세상이 열린다는 걸
이 시를 보고 알았다
이제 다시는 그들을
걱정스러움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것에 대해
경이로움으로 볼 것이다
그들은 충분히 위대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바라보는 것뿐
내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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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 고영서
섬, 너는
그 작은 몸뚱어리에
잉태하지 못하는 결핍의 세월 담아내며
때론 하늘빛으로
때론 물빛으로
소리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지
네게서
외로운 사랑 한 조각
건져 올려도 좋다고 생각했을 때는
축제같은 꿈들의 입맞춤
나를 떠난 후였을 거야
손질할 수 없는
고독의 흔적들
철지난 해무로 토해 내던 때였을 거야
그렇게 눈물 닿는 곳마다
한숨 꺾는 곳마다
쉼 없는 그리움으로
네게 손짓했어
외로웠다면 보였을 거야
물향 가득한
추억의 더듬이로
하염없이 뒤척이는 밤
애잔한 연가에 묻혀
나는 네게 눕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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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역에서/ 박창민
천안 가는 길
구포 국수는 월말만 되면 불어나는 길이다
기다리다 가려다 다 못 먹고 가는 길들이다
할매 잔치국수 곱빼기 주이소
낙동강 쪽으로 한꺼번에 넘치는 뭍의 대합실
철새 반 텃새 반으로 불어터지는 사람들
늦다고 생각할 때 급할수록 둥실 국물부터 마셔라
생각에 체하면 약도 없다
문득 그대에게 연락하고픈 마음
속에서 미어터질수록 속 시원하지 않은 길들
할매 맛은 있는데 바빠서 다 못 먹겠소
얼만교
곱빼기니까 사천원만 줘
곱빼기로 생각하면
그대 한번 더 볼수 있는 양일까
바빠서 남겼으나 남은 사랑은 없다는 구포 기찻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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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최해경
바다는 말이다
늘 그 시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노을 지는 저녁 잉태를 하고
여명이 떠오르는 시각
진통 속에 출산을 하느라
늘 핏빛으로 아픔을 드러낸다
그러다가도
어느새 아픔을 감추고
배를 갈라 지친 어부에게
양식을 내어주곤
전혀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무표정하다
그런 바다도
소리 없이 우는 날이 있다
태풍이 휘몰아 온몸을 찢으며
머리채를 낚아채듯
육지로 내 모는 날,
그럴 때 바다는
말없이 포말의 눈물을 흘린다
언제나 소리 치르는 것도
태풍이었을 뿐...
상처를 품고 견디는 바다에게서
나는 늘 주고도 미안해하는
애달픈 내 어미의 눈물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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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을 목에 건 음유시인
/이수용
눈 내리는 옥상에 앉아
수명이 다해 가는 골목을 내려다본다
작별 인사를 모르는 내 이웃들에게도
방울을 달아줄 걸 그랬나?
눈 덮인 어둠 속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추억들이
음울한 공명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기억의 한 켠
이따금 골목을 빠져나온 추억들은 밤 눈이 어두워
곧잘 길을 잃곤 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들리는
생선가게 아줌마의 욕지거리
돌을 집어던지던 어묵 공장 사장님
구정물 바가지를 들고 쫓아오던 반찬가게 아줌마
쫓고 쫓기는 추격신을 신나게 찍어대던,
아이스크림 광고처럼 골라 먹는 재미가 있던
떠난 것들이 버리고 간 추억이
부유물처럼 떠도는 골목
유기된 추억들이 제 주인을 찾을 수 있도록
각각의 방울을 달아주고 싶다
딸랑이는 방울을 처음 걸던 날
목에 걸린 추억 하나로 견고한 슬픔을 견딜 수 있었듯
생기 잃은 신월동 골목길에
당신들이 그립단 커다란 방울 하나 달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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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 국제신문신춘문예시당선작
스테이플러 씨 / 이규정
그는 서류들을 한 코에 제압하고 있다.
바람의 두께에 따라 뒤집어질 수도 있지만
이미 꿰인 코는 염기서열을 갖는다.
하얀 낱장에 뼈대를 두고 있는 얼굴들
묶인 것으로 질서가 된 몸이지만
위아래 각을 맞추는 것은 복종의 의미
자세를 낮추고 하나의 각도와 눈높이로 사열되어
제왕에 예의를 갖추듯 손발을 맞추고 있다.
어떤 묶음도 첫 장 머리에서 움직이고
펄럭이는 팔과 다리를 갖게 된다.
간혹 흩어질까 묶인 것들끼리 권卷이 된다.
날개를 갖고 있어도
그 손에 한 번 잡히면 그만이다
입이란 하나의 입구
무엇이 채워졌을 때
뜬구름이라도 소화하게 만든다.
솜사탕과 뜬 구름은 종이 한 장 차이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입에
꽉 물려서 봉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 있다.
흐트러진 낱장들을 함구시키며 제압하는
일침으로 조용히 봉할 줄 아는 그는
서류의 제왕이다.
따악, 그 소리
* 심사평
오랜 詩作 경험 엿보이는
상상력 돋보여
심사위원들은 시의 원형을 새롭게 제시하는, 혈기 넘치는 시를 기대하면서 작품을 읽었다. 탄력이 있고 개성이 넘치면서 새로운 안목을 펼쳐주는 시를 기대했다.
그래서 기시감이 있거나, 지나치게 안정적인 시편은 후한 점수를 주지 못했다. 당선작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한 작품들의 수준은 높았다.
‘바다 경매’ 외 2편, ‘가내수공업’ 외 4편, ‘계단의 전개’ 외 4편, ‘스테이플러 씨’ 외 3편을 놓고 토론을 이어갔다.
‘바다 경매’ 외 2편의 시편 가운데서는 ‘뿌리경전을 읽는 저녁’을 주목해서 읽었다. 꽃과 잎의 세월을 다 보낸 연의 뿌리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발견한 대목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다만, 함께 보내온 두 작품의 수준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가내수공업’ 외 4편은 생활의 감각이 돋보였다. 노동 등 육체를 움직여 일하는 사람의 애환이 담겨 있었다. “한 줌 삭힌 콩나물에는 한 사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와 같은 표현에서 보듯 감정이 흘러넘치는 점이 눈에 띄었다.
‘계단의 전개’ 외 4편 가운데서는 ‘매미의 시간’이 단연 두드러져 보였다. 매미의 허물을 대낮의 시간이 벗어던진 투명한 흔적이라고 쓴 점은 매우 신선했지만, 이 작품 이외엔 평범한 수준이었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스테이플러 씨’ 외 3편 가운데 ‘스테이플러 씨’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흔쾌히 합의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은 고른 수준이었다.
시행이 앞뒤로 결속되고 보완되거나, 시행이 상상력을 통해 훌쩍 넘어서면서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광경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시편들이었다. 그만큼 오랜 시작(詩作)의 경험이 엿보였다.
당선작 ‘스테이플러 씨’는 서류를 철하는 도구를 시적 대상으로 다루지만, 의미는 중층적으로 읽힌다. 철심이 박힌 서류 낱장에서 나약한 개인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자본사회의 냉담한 구조 안에 강압적으로 편입되고 규율되는 개인이 느낄 공포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로써 스테이플러는 사물 차원을 넘어서는 상징체로 거듭난다. 좋은 작품을 열정적으로 창작해 시단에 새롭고 산뜻한 바람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 심사위원
성선경·이정록·문태준 시인
* 고영서 - 감성 모아모아 쓰다
일을 한다는 건 행복하다
할 일이 있다는 것도 행복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 더 행복하다
스테이플러 씨는 어쩌면
내 모습을 닮았다
틀리지 않으려
벗어나지 않으려
외롭지 않으려 죽을 힘을 다한다
그러나 자주 틀려 다시 뽑히고
자주 벗어나 다시 돌아오려 애쓰고
그리고 늘 외롭다
나는 스테이플러 씨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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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박성우
요건 찔레고 요건 아카시아야
잘 봐, 꽃은 예쁘지만 가시가 있지?
아빠 근데, 찔레랑 아카시아는
이름에도 가시가 있는 것 같아
시를 잘 쓰려고 하지 말라. 조급해지면 시가 딱딱해지고 어지려워진다. 시적 대상에 사랑을 주는 일이 먼저다. 자기가 시를 쓴다는 생각보다는 이야기를 쓴다는 마음으로 힘을 빼야 한다.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말이다. 길게 써놓은 이야기에서 가지를 쳐내어도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되게 할 만큼만 남기면 시가 된다. 시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고 독자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위 예시는 아이의 말을 그냥 올려 놓은 듯 쉽다. 이 시의 말결에서 '가시'를 보는 아이의 자연스런 눈길을 낚아 올린 박성우 시인의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다. 거창한 대상에서 시를 찾지않고 내 주변의 보잘것 없는 대상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내용이나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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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반 병
장인수
할망구 둘이 소주를 마신다.
두부 부침 4천원
참이슬 3천원
소주 한 병을 2시간 동안 마신다.
돈도 읎는디, 술 사줘서 고맙지라, 고맙지라
했던 말 수십 번 반복하면서
오래 사셔잉, 그랴, 그럽시다잉.
주거니 받거니
2 시간을 마신다.
우정 변치 말자고
쭈그렁 손이 쭈그렁 손을 꼭 잡고
팔순끼리
두분 합 169년끼리
소주 반 병을 채 비우지 못한다.
충북 진천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2003년 《시인세계》 등단
시집 『유리창』 『온순한 뿔』 『교실―소리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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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는 동그라미
차주일
달력 곳곳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동그라미를 이리저리 연결하면
새로운 별자리 하나 생겨날 것도 같고
한 가문을 지켜 주는 부적도 그려지겠다.
동그라미마다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다.
그 둥근 선을 들여다보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등 굽혀 머릴 맞대고 앉았다.
모성 쪽으로 기운다는 동그라미를 바라보자니
할머니의 기일을 묻는 아버지가
어머니께 재가를 구하고 있다.
달력에서는 모성이 가장이다.
어머니에게 가부장권을 넘겨준 음력이
양력을 앞세우고 뒤따라가고 있다.
동그라미 속 날짜를 읽는
어머니의 눈까풀도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다.
내게는 그저 숫자로만 보이는 날짜인데, 어머니는
한쪽으로 닳는 인감도장 테두리 속 이름으로
정화수 그릇 속 얼굴로 읽는 것이다.
나도 어머니 흉내를 내며
새끼들 생일에 동그라미를 쳐둔 적 있지만
그저 사야 할 양초 개수만 보일 뿐이어서
촛불 밝기를 믿는 나는 양력으로 앞서 나가고
사연을 짐 진 어머니는 그믐처럼 뒤따라오고
있다.
음력으로만 기록되는 사연이 얼마나 무거운지
어머니 안짱다리가 점점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1961년 전북 무주 출생
2003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냄새의 소유권』
2014년 시산맥작품상, 2011년 윤동주상 젊은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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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
전욱
너는 온통 까맣게 치장하고 다녔다 얼굴에는 진한 화장을하고, 입술에는 담배를 꼬나물었다
너의 배트맨을 따라
너는 우리 동네에서 사라졌다
가끔 내 방에 불쑥 나타나
옷을 다 벗고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와 한 맺힌 듯 섹스를 하고는 사라졌다
너는 섹스 할 때 소리를 너무 낸다
그 소리 때문에 내 성기가 네 몸 안에서 쪼그라든 적도 있었다
-속삭임 본문 중에서
전기철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이상 문학상(시) 수상
저서로는 <도시락> <시로 읽는 금강경> <원효> <누이의 방> 등이 있다.
작가의 말
내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내 마음에 부딪치는 것들을 베낄 뿐이다.
-출판사 서평
포스트모던을 제시하는『속삭임』은 시일까 소설일까.
탈피를 추구하는 문장들, 장르를 넘나드는 이 시도는
시면서 시가 아니다. 산문이 아니면서 산문이다.
어지럼증에 걸린 작가의 의도는 기호의 세계를 떠돈다.
때로는 중력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때로는 거부하면서
4차원의 무중력으로 떠다니기도 한다.
금방이라도 귀에 머무를 듯하면서 우주로 날아오르는
이 속삭임은 새로운 언어의 표현법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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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사람과 시 14 차 경시 결선작품
1// 참나무 장송곡
말라죽은 나무 앞에 서면 세상에
길 아닌 게 있나 싶어요
땅속 깊이 쥐었을 악력의 세기는
정지된 높이와 비례하죠
위태위태한 순간마다 팔을 벌렸을 가지는
바람에 기대던 잎새들을 기억합니다
심하게 앓았을 날들도 옹이 속에 박혀 있네요
모두가 그늘을 만드느라 분주한데
앙상한 그림자, 시침처럼 떠돌아요
죽음에 둥지를 틀지 않는 것은
이쪽 세계의 불문율이죠
가지 사이 빈집 한 채 기울어진 저녁
흙은 뿌리를 놓치지 않고
바람은 얼렁뚱땅 비껴갑니다
저 높이에서 무엇을 보았건 추락한 나무는 길이 됩니다
짐승들의 이정표가 되기도 하고
별빛의 엉덩이를 허락하기도 하죠
죽어도 죽은 게 아니어서 아무도
장사 지내지 않습니다
말라붙은 참나무의 개명은 고사목
사자에게서 길을 찾는 숲의 변명이죠
보세요
병정개미 걸음인 줄 알았는데
패랭이 버섯 한 무리, 허리 감고 올라가요
------🌹
결선 우승작
2/// 멍게
바닷속에는 물이 다니는 길이 있어
해초 사이 물길에 숨어들던 태양을 좇다가
그림자로 우는 시간은 붉었다
넘실거리는 바다 빗질에 웅성거리며
고래의 배꼽 같은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던 날
부여잡은 바위에 주저앉아 보았던
바다의 모서리에 선 파도의 편린은 찬란하였다
물고개 너울을 타고 넘어 움켜쥔 석양
노을 즙 희석된 바다를 마시고 채워서
한껏 부풀린 바다의 젖가슴
발가벗겨진 속살 사이 고인 젖샘
절정으로 알맹이 터지는
오돌토돌 상기된 유두
어시장 파란 소쿠리에 바다가 낭자하다
-------🌹
3// 손톱을 깎다가
달팽이가 꿈속을 기어갔다
무척이나 낯설었던 너와의 만남
격정의 지난가을은 손톱 끝에서 졸고 있다
우리의 통속은 달팽이 눈만큼의 간격을 두고
너는 동쪽을 나는 서쪽을 보고 있다
사랑은 언제나 동일한 방향을 본다고 하지만
화성의 시간은 부끄러운 회오리 되어
우듬지를 잡고 있다
다시 바람 앞에 선다
잘려 나가는 것은 이별이란 관념어
나의 반 토막 문장에 너의 시를 더하고
동일한 부호를 찍던 지난날
굳은 엄지가 유난히 아리다
팔월의 염천은 날마다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성큼성큼 내려오는 구름에
오랜 시간 침전하던 부유물은 씻겨 가리라
지나간 것이 바람이라면 다가오는 것 역시 순간일 뿐
잘려 나가기를 거부하는
오늘이 잔인하다
바람아 더 모질게 불어라
대롱대롱 붙들고 있는 금성은 낙화를 두려워하지만
이미 꼭짓점을 떠난 지 오래
미끄러지는 종착역엔 날개가 없다
지치고 지친 기다림이지만
자르지 못할 것도 없는 통각점이 희미해진다
떨어질 꽃은 떨어져야 하리
하얗게 관조하던 꽃이
손톱 위에서 죽고 있다
별의 울음 속 달팽이가 여름을 기어갔다.
-------🌹
4// 목각인형
그대와 푸른 계절 붉게 공유했으므로
나무에 기대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다
음각의 기억 꺼내
그대에게 회귀하고 싶은 날
나무의 안색을 살핀다
책갈피에 꽂아놓고 잊어버린 나뭇잎
버석거리는 슬픔의 얼룩 읽는다
일찍 눈뜬 꽃잎이 품은 음색
두근거리던 시절
달빛 건너가며 내게로 오던 그대의 발자국
지금은 어디로 기울고 있는지, 절룩이는
내 발목 부어오른다
마음과 마음이 닿은
그 경계에 피는 몸
뜨거웠던 계절
녹아버린 안쪽이 부르는 이름
답하지 않아 옹이 진 상처
아물지 않고,
물관이 말라버린 모서리
사막을 다녀온 바람에게
끌을 들어 표정을 꺼내기까지
몇 번에 생이 나무 부스러기처럼
수북이 떨어졌다
한그루 나무에서 나온 사람
웃고 있다
그때처럼,
---------🌹
5// 장마 끝나던 날
전화 한 통 걸고 싶네
오랜만에 드러난 햇살
바람 끝에 떨어지는 물방울에 눈 마추다
참을 수 없이 몰려오는 이 울렁임을
눅눅하게 젖어오던 무거움에 대해
하얗게 쏟아지던 빗줄기에 흔들리던 나뭇가지의 뒤척임에 대해
막 땅을 비집고 나와 목울대의 간질거림에 천천히 나무 밑둥을 오르는
매미가 되기직전 투명해진 까만 눈망울에 대해
열을 지어 떠내려가던 잡동사니들
콸콸거리며 불랙홀처럼 빨아들이던 수챗구멍에 손바닥을 대면
순간 어깨까지 빨려들어가 내 팔뚝이 잘게 부서져버릴 것 같은,
안과 밖을 그어놓은 유리창에서
지난밤 빗방울이 튕겨지며 내던 소리들
머리 위로 확 껴얹은 파란물과 군데군데 유빙으로 떠 있는 뭉게구름과 초록이 반사되어 눈이 부신 아득한 아침
전화기를 들고 만지작 거리다 끝내 엉켜버린 손가락
해는 벌써 떠 버렀고
멀대처럼 커져버린 해바라기
저도 멋쩍다고 고개를 숙이네
2019.08월 사람과 시 14차 경시 작, 작품 평
-글/ 김부회 시인, 문학 평론가
잘된 시에 대하여는 많은 시인들, 평론가들이 문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그 분분한 의견을 지면에 소개할 수는 없기에 다만, 필자의 이분법만을 피력해 본다. 일반적으로 잘된 시는 평가라는 잣대를 두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른바 문학적 가치에 근간을 두고 그 진화과정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시의 구조론과 형상화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을 잘된 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쉽게 풀어서 이야기한다면 기존에 나와 있는 혹은 발표된 시들 중에 첨단의 기법을 사용한 작품. 연과 연이 다르면서도 결국 그 각 연마다의 낯섦을 하나의 당위성으로 묶는 다중구조의 시는 상당한 내공을 바탕으로 연마다의 새로운 키워드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묘미를 준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 방향, 시인이 의도라는 상상과 연상과 다른 세계와 또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 각각 다른 입구를 통해 들어오게 만든다. 이러한 시적 구조는 작품을 입체적으로 보게 한다. 마치 정물화나 풍경화가 아닌, 추상파 화가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하면 비유가 적절할 것 같다.
추상이라는 것은 개별의 사물이나 표상의 공통된 속성이나 관계 따위를 뽑아내는 것을 일컫는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가 아닌, 보이는 것은 내가 본 대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이는 대로’라는 말속엔 범용이라는 것이 의식에 작용한다. 범용은 여러 분야나 용도로 널리 쓰이는 것이라는 의미와 일이나 사물이 별다른 점 없이 평범하다는 의미가 있으며, 다른 말로 일반적이라는 말과 유사할 듯하다. 사물이나 개체를 볼 때 내가 본 것이 네가 본 것이 되고, 우리는 같은 모양이나 형태를 본 것이 되는 것을 범용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추상이라는 것은 그 기본적인 속성에 Ego라는 것이 작용한다.
내가 본 것이 된다. 당신이 본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에는 나의 심미적인 관점과 나의 상상력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많은 해석을 갖게 만든다. 다의적이며 중의적인 형상으로 재탄생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하면 시의 내적 충만이 ‘나’를 기초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면 적정할 듯싶다. 이런 이론을 기반으로 잘된 시와 좋은 시의 중간 지점을 채택하여 시를 빚는 것이 좀 더 시에 근접한 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달 경시 장원작품은 강준화 님의 [멍게]라는 작품이다. 멍게라는 작은 생물에서 바다의 시원을 보는 듯, 시의 외적 형상화가 도드라지게 읽히는 작품이다. 첫 연의 시작은 바다를 보는 시선이 매우 상쾌하다. 물이 다니는 길이 있어/로 시작하는 첫 연에서 독자의 눈길을 끄는 것에 성공했으며 다음 문장을 이어가는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는 느낌이 든다. 길이라는 것은 많은 상상력을 제공한다. 특히 바다 속의 물이 다니는 물길은 멍게의 삶을 어떻게 전개할지 에 대한 답을 풀어가기에 적절한 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고개 너울을 타고 넘어 움켜쥔 석양
노을 즙 희석된 바다를 마시고 채워서
한껏 부풀린 바다의 젖가슴
발가벗겨진 속살 사이 고인 젖샘
절정으로 알맹이 터지는
오돌토돌 상기된 유두/
멍게의 속성과 외연에 대한 시인의 상상과 표현은 기성 시인으로 착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생명 표기적 아름다움은 다음 연에서 ‘낭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 어떤 멍게의 삶에 대한 연민과 먹이로서의 잔혹함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어시장 파란 소쿠리에 바다가 낭자하다/
파란 소쿠리에 바다가 그득 담겼다. 넘실거린다. 등등의 표현이 아닌, ‘낭자’라는 단어를 선택함으로 인해 시가 단순묘사에서 사유 깊은 작품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낭자라는 단어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정제되지 않거나 혼란스러운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런저런 바다를 살아 온 멍게가 갈 곳은 결국 파란 소쿠리에 바다와 함께 낭자하게 담겨 있다는 것에서 독자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시를 쓰는 목적이라는 생각이다. 특별하게 단점을 지적하기에는 작품의 수준이나, 난이도, 풀어가는 방법이 무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 째 작품은 심영일 님의 [참나무 장송곡]이다. 참나무 한 그루를 보며 말라죽은 참나무에서 인생을 꺼냈다는 점이 돋보인다. 사물을 보면서 사물이 갖고 있는 풍경의 이면을 본다는 것은 또 다른 사물에서 배후를 읽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를 씀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점이다. 보이는 것에 국한 되지 않고 연계된 다른 현상을 이끌어내거나 중첩된 인식의 반향을 체득하는 것이 시의 기본적 모럴이라고 가정할 때, 올바른 성찰로 독자를 유도하는 것이 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심영일의 시는 붓끝이 가볍다. 하지만 획을 긋는 선마다 중심을 이루는 필법이 분명하게 존재하기에 글의 내면이 진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죽음에 둥지를 틀지 않는 것은
이쪽 세계의 불문율이죠/
저 높이에서 무엇을 보았건 추락한 나무는 길이 됩니다/
이런 표현들은 상당한 내공의 깊이를 보여준다. 추락과 나무와 길의 상관관계는 참나무에서 연상되는 우리네 삶의 연륜과 어슷하다. 그래서 더 공감이 가는 것이다. 또한 죽어도 죽은게 아니라는 시인의 말은 참나무와 시인의 인생, 그 두 가지 생소한 현상의 부분 집합의 결과물이라는 좋은 시의 시적 심어다.
죽어도 죽은 게 아니어서 아무도/
결구의 버섯 한 무리, 허리 감고 올라간다는 것에서 시적 충일화에 성공한 듯 읽힌다. 결국 시는 한 생을 마무리 짓거나 돌아보거나 할 때, 무엇으로 남는 가에 대한 문제를 나만의 시선으로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병정개미 걸음인 줄 알았는데
패랭이 버섯 한 무리, 허리 감고 올라가요/
결구는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좋은 작품이다. 다소 아쉬운 점은
땅속 깊이 쥐었을 악력의 세기는
정지된 높이와 비례하죠
위태위태한 순간마다 팔을 벌렸을 가지는
바람에 기대던 잎새들을 기억합니다
심하게 앓았을 날들도 옹이 속에 박혀 있네요/
첫 연의 사변이 길다는 점이다. 위태위태~~~박혀 있네요/를 좀 더 줄이면 더 담백하고 사유 깊은 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두 작품에 어눌한 서설이 길었다. 더위가 간다. 여러 문우님들에게 행복한 가을이 성큼 다가오길 진심으로 기원 드리며 작품평을 맺는다. 김부회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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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시감상
《8차 경시 장원작》
손 없는 날 / 한춘화
하필 그녀가 꽃 피려 할 때
나는 모로 누워요
아이는 사치지요
중국집 창문 없는 뒷방, 형광등 밑
시들시들한 밤
닻*을 내리지 못하고 표류하다
지하 태양 다방에 레지로 흘러든
그녀, 꽃집 차려 주겠다고 꼬셔
살림 차렸어요
중국집에서 기어오르는 불에 웍을 돌리지요
불 위에 삶은 얼마나 가파른지
안 데려면 공중으로 날아야 해요
손목에 파스 붙이고
벌어진 틈
아물 날 없이 받은 도마*에 칼집은 지었지만
그녀에게 약속한
꽃집 가는 길* 못 찾았어요
빚으로 차린 중국집은
번듯한 중국관이 서자
전화 울리지 않고 월세가 울어요
떠밀려 나가는 날 달랑 짐 하나
손 없는 날은 위로지요
어디 가서 이만큼 못 살겠냐 싶은 그 날
팔에 흑백 장미 문신도 꽃이라고
그녀에게 뿌리박은 나를 그녀가 꺾어요
꽃병*에 꽂지도 않고
문 닫은 중국집 문 앞에 던지고
그녀는 이사 가요
손 없는 날인데, 손 없는 날인데
나는 속절없이 시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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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가 쓴 감상문도 있네요
일부 copy~》
질곡한 삶의 얘기를 유려한 문체로 잘 그려낸 작품이다
서두가 처연한 절망으로 시작한다 리비도도 사치고 아이도 사치라는 궁핍함으로부터 이 시는 시작한다
화자인 나는 그녀를 꼬여 살림을 차려 꽃같이 살려고 했지만, 간난이란 삶의 장애물 앞에서 그녀는 떠나가고 나는 시든 꽃이 돼버렸다
어쩌면 진부할수 있는 스토리를 시적표현으로 공감을 끌어낸 작가의 역량을 높이 산다
흑백으로 찍힌 빛바랜 사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애달픔을 긁어내리는 것 같다
스토리가 아프지만 유니크한 시어들을 배치해 그렇게 우울하지만은 않다
태양 다방, 레지란 말도 향수처럼 떠오른다
읽는 재미를 주면서 편하게 읽히는 게 좋다
작자는 여류작가인데 시적 화자인 남자를 읽어가며 끌어가는 것도 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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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벙의 가을/ 유덕선
둠벙 위로 떨어지는 나뭇잎은
수면에 닿을 때마다 소리 없는 *파문이 인다
봄의 *문간에서 서성이던 날
꽃잎이 눈처럼 내려 겨울의 상흔을 메우던 날
둠벙 속에 담근 손가락 사이로 지난겨울의 안부를 묻는 소리가
꼼지락 거리고 있었지
가득했던 매미의 울음소리도 멎고
밤의 유랑 반딧불이도 갈대숲으로 집시되어 떠나버린지 오래
잎이 한 생을 마감해버린 가지에 서리꽃이 피면
나무는 어느 해 겨울눈의 무게를 못 이겨 부러졌던 자리에
움푹 파인 *옹이로 그 해 겨울을 추억하고 있고
둠벙은 *무심한 달빛만 찍어다가 밤새 물 위에 무늬를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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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평
김인선 시인
유덕선 시인의 시 시계가 잘 나타난 시입니다
유덕선 샘의 시는
늘 nostalgia 가 배어 있다.
끄집어 내는 단어 하나하나에 homesickness 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시선을 삶에 대비시켜 쓴 시들이 참 아련한 느낌으로 독자를 끌고 간다.
둠벙의 가을...
이 시는 화자 자신의 자화상이다.
둠벙이라는 작은 수면에 화자의 본 모습을 투영시켜 살아온 날을 반추하는 이미지
1연이 애틋하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수면에 닿을 때마다 그려지던 파문...
화자는 자신의 삶에서 겪은 경험, 굴곡, 애증, 등 모든 현상을 이 한 행에 집결시켜 묘사를 한듯하다.
세월에 담가진 나와 또 그 나를 바라보는 자아...
마지막 4연에 표현한
둠벙가에 선 나무에 박힌 옹이...
시선을 돌린다
화자는 주변의 인과관계, 타인의 삶까지 자신의 수면에 끌어 들이고 사색한다...
화자는 결론을 진술한다
그저 무심한 달빛만 찍어대는...것이라고
그런 공유지대에 향수
그 물의 무늬
그건 모든 생이 행하는 공통된 프랙털이라는 것으로...
소박하고 아름다운 시를 읽게해준 유덕선 샘께 감사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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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경시
푸른 이름 / 황미영
달팽이가 숨 가쁘게 기어 와서 하는 말이
여름 배추잎은 물이 많아서
탈도 많다며
우량한 점액을 남기려면
양배추와 사과 몇조각은 간식으로 먹었오면 좋겠다네
신선한 것들은 푸르게 보이는 오해
산토리니 바다의 푸른 파도를
내 이름으로 등기하고
계절이 한 바퀴 돌기전에
화성人이 세 들어 살겠다는 계약도
코앞에 있다
친절한 이웃에게
사람이어서 외롭다는 말은 예의가 아니어서
모두 합죽이가 되기로 약속을 하면
그대 이름은 뭐예요
저의 이름은 티파니에서 아침을 입니다
그래요 그럼
시간 좀 내어 주세요
창문 너머 보이는 푸름 빠진 이웃들
도무지
서로 알아 보지 못하는 우리 이름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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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시감상
원더우먼/ 임순화
25시 연중무휴 사우나
시늉으로 걸친 브라 한 장과 꽃 팬티가 전용 유니폼이다
여름에도 뼈가 시리는 응달 한 귀퉁이 이태리타올과 바디용품으로
전라로 눕는 피로를 지운다
노래방 도우미도 해장국집 사모도
그녀를 먹여 살리는 주인이기에
여자는 그들의 몸을 구석구석 다 외웠다
박수 한 번에 척 돌아눕는 단골들
꾹꾹 통점을 누르는 손길에
다시 그녀를 찾는다
이태리타올 하나면 세상의 모든 때를 다 지울 것 같은 여자
젖몸살 도지듯 식은 밥 같은 별이 돋는 밤
수증기를 껴입은 채 스물 네 마디 무쇠의 시간을 달구고 있다
가장 낮은 자리, 그러나
침대 몇 개 부리는 만만치 않은 사장님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습한 괄호안의 때를 밀고 힘차게
아침을 길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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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 13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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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시' 13차 장원은 《거짓말/ 임순화 님》입니다
준장원은《난곡을 기억하며/ 한춘화 님》입니다
경시의 여왕 두 여류 작가님이 장원, 준장원을 차지했습니다
축하합니다~💘
3위《몇 번이고 꺼내 읽는 편지/ 정성진 님》
지난 경시 겨울 밤의 화가에 이어 상종가를 치고 있네요
4위 《물의 흔적/ 김도한 님》
5위 《누구에게나 모래/ 김대정 님》
두 분다 사유 깊은 언어로 울림을 주는 작가님들입니다
🌻╮
ps// 다섯 분의 작가님께는 유덕선 님이 찬조한 베스킨 라빈스 케잌이 찾아갑니다
유덕선 님, 고맙습니다^^
《작품 출품하고 투표하고 같이 즐기신 샘들 모두 애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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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차 경시 장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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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 임순화
나는 왜 여기 전시됐을까
나를 공명케 하다
내 빛나는 혀를 잠근 너는 타인
문득 이목구비가 궁금해서
감정인지 감성인지 모를 글자를
성에 낀 창에 밀어 넣었다
믿기 싫지만
계산하지 않던 시간이
약속을 지우고
플랫폼을 빠져나가
곧 하행선 나들목을 통과할 것이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다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 내가 절정이란 다른 이름으로 태어나는 눈부신 행위
이별엔 동의했어도
눈물을 따돌려야 저 노랑의 경계를 넘어가는데
감정의 부피를 줄이는 일 또한 사랑만큼이나 고된 일
생각해보니 너만 변한 게 아니다
나도 너처럼 어중간히 바래서 이제 널 떠낸 자리 아프지도 않다
정말 후련하게 눈시울 뜨거울 뿐
나는 통증을 모르겠다
울컥 내 안을 살핀다
접질린 발목이 금세 경계를 넘는다
이제 나의 울음은 지나치게 고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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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의 무게
김승해
나무 한 그루, 베어지고 없다
감또개 떨어지면 떫은 풋그늘도 제법 만들던
남의 집 나무
창만 열면 보이던 감나무가
아침에 보니
없다
나무 없는 이 자리로
바람이 왔다가 멈칫거릴 순간
새들이 왔다가 길을 잃을 순간
그런 순간 같이
내 것 아닌 것이
내게로 걸어와 내 앞에서 멈칫거리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안 보이던 것들이
새삼 두렷두렷 만져지기도 했다.
까치가 물어온 가지들이 허공에서 쏟아진다.
저, 없는 자리를
허공의 무게라 하자
프로필
김승해 : 경북 대구, 계명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수료, 2005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감상
난 자리와 든 자리의 차이쯤일까? 늘 있던 것들이 없을 때 그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항상 곁에 있을 땐 모른다. 없을 때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존재라는 것,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역시 허상이 아니면 존재 역시 허상이 아닌 것이다. 곧 추석이다. 늘, 일상처럼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만, 인사라도 나누자.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거늘, 있을 때 잘하자. [글/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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